법이산
최진근
법이산은 높이가 해발 334.3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많은 것을 품고 있다.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대부분 고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산이다. 법이산은 일명 조족산鳥足山이란 이름도 있는데 산세가 세의 발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산을 올라가는 길은 여러 곳이 있다. 내가 가는 길은 수성못 입구에서 시작한다. 약간 경사진 길을 몇 개단 올라가 왼쪽으로 난 숲길을 가면 작은 묘가 나온다. 일본인 미즈사카린타로 묘다. 미즈사카린타로는 일본 기후현에서 태어나서 1915년 개척농민으로 대구에 와서 수성들에서 화훼농장을 경영했다. 처음 농장을 할 때는 신천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했는데 신천이 상수도로 이용하자 농사지을 물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인 4명과 수리조합을 설립하고, 1924년 9월 27일 못을 착공해서 1927년 4월 24일 완공하였다. 그 당시는 농업용수를 위한 시설이었지만, 지금은 대구의 아름다운 경치 가운데 12경에 들어가 있다. 묘를 지나 오르면 국조단군성전이 나온다. 단군성전은 원래 달성공원 내에 있던 일본신사 자리에 단군신전을 모시고 국조전이라 부르다가 달성공원 보수공사를 할 때 이곳으로 이전하고 천진전이라 부르고 있다.
단군성전을 지나 정상으로 오른다. 산의 느낌이 새의 발을 연상케 한다.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아 일반인이 올라도 크게 무리가 가지 않을 것 같다. 땀을 닦으며 내려다본다. 수성못의 아름다운 풍광이 마음을 맑게 씻어 주는 듯하다. 지금은 초가을이지만 봄에 오면 산 곳곳에 핀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어 멋진 화원을 볼 수 있고, 아래를 보면 수성못을 감싸고 핀 벚꽃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봄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수성못 아래를 본다. 그곳은 민족시인 이상화가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발표한 저항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대상지란다. 지금은 도시화 되어 들판은 없어 졌지만, 50 여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논과 밭이어서 농작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때 저들이 민족시인 이상화시의 대상지라는 말을 듣고 가벼운 흥분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광복을 염원한 시인을 생각하며 다시 오르는데 산새들의 청아한 소리, 시원한 산바람, 맑은 공기가 온 몸을 스친다. 도심에서 살며 찌던 때가 산바람에 날아가는 듯하다.
앞을 보니 봉수대터와 전망대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반긴다. 먼저 전망대로 갔다. 오는 길에 언뜻언뜻 본 경치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시선을 고정하고 앞을 바라보니 대구시는 물론이고 팔공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눈을 돌리니 시지와 경산가는 범안로가 보인다. 시선을 앞으로 보자 수성못 남쪽으로 법이산과 동쪽의 동막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경치가 유혹하고, 직선으로 내려다보니 한 때 대통령이 대구에 오면 머물렀다는 호텔이 새 단장을 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본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가 수성못 반대쪽 파동을 본다. 산비탈에는 아파트가 줄지어 들어서 있고, 지금도 아파트를 신축하는 곳이 있다. 산 아래 둔덕을 정비해서 지은 아파트는 높낮이가 드러나고, 주택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도로가 그런대로 정비되어 있어서 외국여행 에서 보았던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 내가 사는 대구가 이렇게 넓고 크고 아름다운 곳인가! 감탄이 나왔다.
다시 봉수대터로 올라갔다. 고문헌에 의하면 법이산 봉수대는 조선 초기에 축조되어 고종32년(1895년) 까지 사용되었단다. 조선시대에 총5개의 봉수경로가 있었다는데, 법이산봉수대는 제2로로 간봉노선의 11번 째 해당하는 내지봉수였다. 내지봉수는 서울로 바로 가는 직선봉수가 아니고 직선봉수를 보좌해 주는 간접봉수 역할을 한 곳이다. 그래서 법이산봉수대는 청도군 팔조령에 있던 북산봉수의 신호를 받아 경산현 성산(지금의 수성구 성동) 봉수대로 전달했단다.
대구는 5개의 봉수 유적이 남아 있다는데, 그 가운데 법이산 봉수대를 2019년 발굴조사해서 2020년 9월 대구시정문화재기념 18호로 지정되었다. 발굴조사 자료를 보면 봉수대의 규모는 외부 둘레가 106.5미터라는 초대형규모의 방어벽이 배 모양의 주舟형태와 기우단이 발굴되었다. 이는 다른 지역 봉수대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고, 기우단을 가진 것이 특이하단다.
기우단을 보니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고향마을에 가뭄이 심해지면 마을총회를 열고 기우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그 당시 부모님이 기우제를 지낼 때 마다 여러 번 제주의 소임을 맡았다. 제주를 맡은 부모님은 마을주민들의 뜻을 받들기 위해 기우제를 지낼 때까지 밤 낯없이 정성을 드렸다. 자식들에게도 생물을 죽이지 말라, 욕을 하지 말라, 몹쓸 것을 보지 말라 외출을 하지 말라는 등 각별히 조심을 시켰다. 온 가족이 정성을 다하여 제물을 준비하고 제물을 지게에지고 높은 산 정상을 가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기우제를 지내고 다행히 비가 오면 제주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다는 덕담을 듣고, 비가 오지 않으면 주민 보기가 민망하다며 애를 태우던 모습이 선하게 다가온다.
70 여 년 전 빛바랜 추억을 소환해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부부등산객의 말이 들여왔다.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알았다“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모든 정보가 전달되는 최첨단시대지만, 그 당시 불빛과 연기로 군사정보를 알린 법이산봉수대의 역사를 잇는 불빛을 만들려고 대구에서 국가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참 잘하는 일이라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해 본다.
작고 아담한 법이산에서 조상의 숨결이 스린 유적을 보고 영국의 에른스트 슈마허가 말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