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을 통해 우리가 삶의 모든 순간에
더 큰 '깨어 있음'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명료하게 주시할수록 자유와 유연함은 점점 늘어나서
더 이상 습관적인 선입관과 혼란에 지배받지 않을 것입니다.
확고하고 생생하게 존재할 것이며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긍정적인 반응을 선택할 수 있게 될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득이 되고,
우리의 영적인 여정에 도움이 되는 최선을 택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시는 점점 지속적인 것이 되어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꿈도 온전히 주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주시할 수 있다면 꿈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또한 꿈을 꾸면서 여러 가지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키우면 깨어 있을 때나 꿈꾸고 있을 때나
편안하고 명료할 수 있으며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과 재탄생 사이의 중간 단계인
바르도에서 자유를 얻을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일상 생활의 질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삶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한,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명상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에 이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이 책은 수행의 지침서이고 뵌 - 불교 전통의 안내서입니다.
꿈꾸고 있는 일상 생활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꿈을 이용하고,
무지에서 깨어나기 위해 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로로 이 책을 사용하려면
여러분은 스승과 연결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을 붙들어 매기 위해 고요한 머무름의 수행,
즉 좌선을 합니다.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
준비 수행을 시작하고 한동안 그 수행을 계속해서,
여러분의 삶 속에 녹아 들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중심 수행을 시작합니다.
서두를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시작조차 하지 않고
윤회하는 삼사라의 환상을 헤매 다녔습니다.
명상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곧 그 가르침을 잊어버린다면
삶에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 수행을 따른다면 깨달음 그 자체인
우리의 근원적 본성을 일깨우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잠자는 동안 현존할 수 없다면
우리는 매일 밤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다가왔을 때
명료하게 깨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 꿈속에서 마음의 환영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끌려다니는 행동을 한다면,
죽음 이후의 단계에서 자유를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자신이 어떻게 할지를 알고 싶다면
꿈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보면 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깨어 있는지 알고 싶다면 잠의 경험을 보면 됩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듣고,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말로 머리로 이해한 다음,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실천에 옮겨 보면서 가르침을 배웁니다.
이러한 과정 전체가 배움입니다.
가르침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수행자는 풀로 범법이 된 벽과 같습니다.
날아가던 풀잎도 와서 붙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수행자는 말라붙은 벽과 같습니다.
아무리 정확하게 겨냥해서 던져도
그대로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
전수받은 가르침을 잊거나 허투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가슴에 담아 놓고 그 가르침에 대해 명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어떤 가르침도
마른 벽에 닿은 잡초처럼 곧 땅바닥에 떨어져 잊혀지고 맙니다.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어두운 방에 불을 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불을 켜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것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저절로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사를 내뱉게 됩니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그림이 맞춰지고 전체의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머리로만 이해했던 가르침이 눈앞에 환하게 보입니다.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이해한 것이 직접적인 경험으로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소금의 맛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소금에 관해 여러 정보를 모을 수 있고
그 화학적 성분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맛을 보아야 직접적인 경험이 됩니다.
이런 경험은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말로 전할 수 없습니다.
소금 맛을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맛을 본 사람은 아주 쉽게 이해합니다.
가르침도 그렇습니다.
이 과정 전체가 배움입니다.
우선 가르침을 듣습니다.
또는 책을 통해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그 다음엔 생각하고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마지막으로 직접 경험을 통해 의미를 깨닫습니다.
티베트에서는 가죽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햇볕에 쪼이고 버터로 문지릅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사람은
생가죽처럼 거칠고 딱딱합니다.
시야는 좁고 머리는 경직되어 있습니다.
말로 전하는 가르침은 버터의 역활을 합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거친 가죽을 버터로 문지르는 과정이고,
직접 경험하는 것은 수행자에게 햇볕의 역활을 합니다.
두 가지가 모두 있어야 유연하고 부드러운 완성품이 나옵니다.
티베트에서는 버터를 가죽으로 싸 놓고 때때로 꺼내서 문지릅니다.
그러나 몇 해동안 버터를 넣어 두기만 하면
가죽은 나무처럼 단단해집니다.
그렇게 단단해진 가죽에는
버터를 아무리 많이 발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수행은 하지 않고
머리로만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단단해진 가죽처럼 되어 버립니다.
가르침은 무지와 편견이라는
단단한 껍질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 속에 넣어 두기만 해서는 소용없습니다.
가르침으로 자신을 문지르고 햇볕을 쪼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식의 틀 속에서 더욱 단단하고 완고하게 변할 것입니다.
이제는 어떠한 새로운 가르침도
그 사람을 부드럽게 만들지 못합니다.
뚫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머리 속에 넣어 둔 가르침은
지혜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변화합니다.
가르침은 관념이 아니라
따라 걷는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