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새연은 병실 침대에 누워 눈을 말똥말똥 뜨고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지난밤의 공
포가 가시지 않아서 밤새 피곤했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나무 몽둥이로 맞기만
하고 있던 지민이 생각나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산을 어떻게 내려왔는지는 기억도 잘 나
지 않았다. 다만 너무나 무서웠던 기억밖에는 없었다. 다시금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노크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며 지민이
들어왔다.
새연은 찔끔 놀라 얼른 만화책을 집어들었다. 지민이 다가오자 더욱 열심히 만화를 보는
척했다. 그는 만화책을 보고 있는 새연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태연한 척하려고
애쓰며 만화책을 코앞에다 갖다 붙이자 지민이 만화책을 잡아 슬그머니 아래로 끌어내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지민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자 말아요... . 그러다가 길거리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담당의사인 내가 곤
란해집니다."
새연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지민이 다시 웃으며 물어왔다.
"... 어디까지 본 거예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솔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 처음부터 전부요."
지민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더니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비밀로 해 줄 수 있겠어요?"
지민의 말에 새연의 얼굴이 기쁨으로 밝아졌다. 야단이라도 맞을 것 같아서 긴장했는데
그와 둘만의 비밀을 가지게 되다니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머리룰 굴려 대뜸 물어 봤다.
"공짜루요?"
그가 무슨 말인가 싶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공짜로는 안 돼요. 저 사실은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저랑 밖에서 데이트
한 번 해 주시면 비밀로 할게요."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안 돼요."
그녀가 입술을 내밀더니 말했다.
"그럼 이따가 다 말할래요. 아저씨가 무당을 찾아가서... "
지민이 깜짝 놀라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그녀가 씨익 웃었고 그는 어이없다는 표
정을 지었다.
새연은 더욱 생글거리는 얼굴로 졸랐다.
"그러니까 해 줘요, 데이트!... 여지껏 한 번도 그런 것 해본 적 없단 말이에요."
그는 난감한 얼굴이 되어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가 화가 난 건 아닌가 해서 뜨
끔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오후 반나절만이야."
지민이 웃으며 나가자 새연을 뛰어오를 듯 기뻐했다. 그녀는 환호라도 할 표정으로 주먹
을 쥐어 앞으로 힘차게 당기며 외쳤다.
"예스!"
새연은 마음이 들떴다. 옷장을 열어 놓고 온갖 옷을 다 입어 보았다. 무엇을 입어도 마
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가장 차분해 보이는 회색 원피스에 자주색 카디건을 걸쳤다. 가발
도 좀더 머리카락이 긴 걸로 바꾸었다.
상자를 열어 여러 가지 액세서리 속에서 긴 머리칼에 어울릴 것 같은 노란 리본을 달아
보았다. 그러나 옷 색깔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아 빨간 핀으로 바꾸어 꽂았다.
대충 준비가 끝났다 싶자 노크소리가 들렸다.
새연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문이 열리고 지민이 들어오는데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열
력했다. 밖에 나가서도 환자라는 딱지를 달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지
민에게 앙탈을 부렸다.
"아저씨! 나 그냥 걸아갈 수 있어요! 그거 필요없단 말이에요... ."
지민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선택해! 여기에 앉아서 병원 밖으로 나갈 건지, 아니면 걸어서 병원 식당으로 갈 건지."
새연은 울상이 되고 말았다.
"아이 참... !"
지민이 밀어 주는 휠체어에 앉은 새연은 자기 모습이 못마땅해서 입술이 튀어나와 있었
다. 지민은 택시 승강장 쪽을 행해 가다가 모퉁이를 돌자 말했다.
"내려."
새연이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지민이 웃으면서 내리라고 턱짓을 하자 그녀가 내려섰다.
그는 휠체어를 밀고 주차장 수위실로 갔다. 수위에게 휠체어와 가운을 벗어서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빈손으로 새연에게 갔다. 그녀는 눈이 동그래진 채로 지민을 보았다.
지민도 간단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진한 청색 스웨터에 크림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어색한지 멋쩍어하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새연에게 물었다.
"어디 갈까, 우리?"
그녀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결정해도 돼요?"
"응."
"그럼 동물원에 가요."
"동물원?"
새연이 지민의 팔짱을 끼면서 잡아 끌었다.
"어서 가요."
택시를 탄 새연은 신기한 게 뭐 그리 많은지 한 가지도 놓치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좋아했다.
"어머나! 저것 좀 보세요!"
"어머, 저 강아지 좀 봐!"
"세상에, 저 사람은 머리에 저런 걸 달고 다녀요!"
활기에 넘치는 거리를 보며 새연은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도 하고 뛰기
도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병원생활을 끝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지민과
함께 있는 그 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그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어느새 택시는 동물원 앞에 서 있었다. 지민은 먼저 내려서 새연을 부축해 주었다. 그는
뛰어가서 입장권을 두 장 사왔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동물원 안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동물들의 울음소리나 새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유치원에서 단체로 구경을 왔는지 노란 복장을 한 아이들이 줄을 서서 끊임없이 재잘거리
며 선생님을 따라갔다. 새연은 그 아이들보다 더 신이 나는지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민은 기린이 있는 곳의 울타리 앞에 있는 철 구조물에 기대어 새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새연에게 물었다.
"수술... 겁나지 않아?"
새연이 멈칫했다가 이내 태연한 얼굴을 했다.
"겁내면 뭘 하겠어요? 어차피 해야 할 건 데... 왜요?"
그가 볼이 발그래해진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꼭 내일이라도 퇴원시켜야 할 것 같아서... ."
새연은 지민을 힐끗 보더니 기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겁나고 두려웠어요. 그래서 많이 울었구요. 지난번에 수술할 때 까진... ."
그녀는 다시 지민을 쳐다보았다.
"근데... 인제 겁 안 내기로 했어요. 어차피 죽을 건데 그 동안 만이라도 기분 좋게 살았
으면 해요."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설득하려는 투로 말했다.
"... 사람에게는 의지라는 게 있어. 설사 죽을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살아 보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가끔씩은 기적도 일어나."
그의 말을 듣고 함찬 동안 잠자코 있던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 그거 모르죠?"
지민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 사실은 굉장히 재수없는 아이라는 거... "
새연의 어머니는 불임 때문에 고민하다가 입양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의 의견을
물었더니 그는 아이가 없으면 어떠냐고 그녀를 위로했다. 그는 자상한 사람으로 그녀를 끔
찍이 위해 주어 애처가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집에 하루종일 혼자서만 지내는 그
녀로서는 입양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불임 클리닉에, 유명한 한의원은 다 가 보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시
어머니도 좋다는 약은 다 해서 갖다주었지만 십 년 전부터는 아예 포기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녀는 구역질을 심하게 해댔다. 소화가 안 되어서 그런가 하고 소화제를 먹어 봤지만
말짱 헛일이었다. 그녀는 내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진찰을 해보더니 산부인과를 찾아가라
고 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임신을 했다. 입덧이 어찌나 심했던지 3개월째에 병원에 입원했다.
산부인과 의사는 입덧이 아니라도 입원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너무 나이가 많이 든데
다가 전치태반에 임신중독증까지 걸린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퉁퉁부어 올랐고 나중에는
하혈 때문에 고생했다.
남편인 오정식은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시어머니도 서울에 올라와서 음식이며
집안일을 맡아서 해 주었다.
그동안 그녀는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을 만큼 풍족하게 살았다. 남편이 부
동산 재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 가는 때에 아기를 가지게 되니
기쁘면서도 불안하고 한편으로는 기가 막혔다. 그렇게 애타게 바라던 아이를 이제서야 갖
게 해 준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예감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은 살아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을... .
그렇지만 낳고 싶었다. 세상에 나오고 싶어하는 어린 생명을 죽일 수는 없었다.
정식이 그녀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 아기 낳지 말까?"
"왜 그래요, 당신?"
"아기를 낳으려면 당신이 너무 위험하잖아."
그녀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렸던 지상 최고의 선물인데 받지 않으려는 거예요?"
"나에게 당신보다 소중한 건 이 세상에 없어."
"그런 소리 말아요. 아기는 당신과 나의 분신이니 우리 두 사람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존
재예요. 그리고 내 느낌으로는 천사처럼 예쁜 딸이 나올 것 같아요."
그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넘겨 주었다.
"그래요. 우리 아기도, 당신도 건강하기만을 바랍시다."
그녀는 눈물을 겨우 참아 냈다.
아기가 태어나던 날 그는 의사에게 매달렸다. 아기보다는 산모를 꼭 살려 달라고... . 수
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그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는 태어난 아기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할머니가 아기를 찾아서 집으로 데려갔
다.
그녀를 떠나보내는 그의 가슴은 너무나 아팠다.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인생이
었다. 태어난 아기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장례식은 조촐하게 지내고 그녀는 화장을 해서
둘이서 자주 갔던, 그녀가 좋아하는 무안에 잇는 별장의 앞바다에 뿌려 주었다.
할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아기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며느리를 하늘나라로 보낸
손녀이지만 그렇게 사랑스럽고 예쁠 수가 없었다. 내심으로 아들을 바라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아들은 모든 일에서 의욕을 잃기 시작했다. 알콜 중독자가 될 만큼 술을 마시고 다녔다.
안경 공장이니, 신발 공장이니, 무역업이니 하는 사업도 뒷전이었다. 아이를 봐도 시큰둥했
다. 아기 이름도 2주일이 지나서야 지었다.
아기 이름은 오새연, 아기는 그리 건강하지 않아서 할머니의 애를 태웠다. 정식은 아기가
아프면 걱정보다도 짜증만 냈다.
새연이 세 살 정도 되면서 걷기도 하고 말도 곧잘 하자 정식은 조금씩 정을 붙여 가기 시
작했다. 새연은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예쁘게 자랐다. 게다가 착
하고 똑똑하기까지 했다.
새연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정식의 사업이 눈에 띄게 기울어 갔다. 그는 다시 술
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늦은 밤에 들어와 어린 새연에게 트집을 잡아 화를 버럭 내곤
했다.
새연은 아빠를 슬슬 피하며 무서워했다. 할머니의 품속만 파고들었다. 아빠와 함께 유원
지에 놀러 가거나 학예회 때 아빠가 올 것을 기대할 일이란 없었다.
그는 새연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집 몇 채와 통장 몇 개만을 만기고 모든 땅과 공장
들을 날리고 말았다. 그가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둘도 없는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기 때문
이었다. 그가 경찰을 동원해 찾으러 나섰을, 때는 친구가 이미 미국으로 종적을 감춘 뒤였
다.
그는 홧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병원에 입원했지만 시름시름 앓았다. 새연이 중학교 교복을 입은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새연을 불러 옆으로 오게 했다.
그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새연아, 아빠가 새연이한테 잘해 준거 하나도 없지?"
새연이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말했다.
"아니야, 아빠. 아프지만 않으면 돼요. 빨리 나아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요."
"아빠는 곧 일어날 거야. 새연아, 아빠가 그동안 새연이한테 제대로 못해 주기는 했지만
널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새연이 울먹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새연이가 아빠하고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새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한 가지만 말해 봐. 아빠 소원이야."
해연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빠랑 동물원에 가 보고 싶어요."
"동물원?"
"네, 초등학교때 친한 친구들이 엄마랑 아빠랑 동물원에 갔다 왔다고 하면 제일 부러웠어
요."
"그럼 아빠한테 말하지 그랬어?"
"그땐... ."
새연이 말끝을 흐리자 정식은 마음이 아파 눈을 감고 말았다.
"아빠가 어린 네 마음에 상처만 준 것 같구나."
새연이 외치듯 말했다.
"이젠 그런 거 부럽지 않아요, 아빠랑 같이 오래오래 살기만 하면 돼요."
"그래 고맙구나. 내일은 날씨가 화창할 거야. 우리 꼭 동물원에 가자, 알았지?"
해연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듣고만 있던 할머니가 눈물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새연은 그날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의식을 잃으면서 상태가 아
주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새연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눈을 감지 못하고 딸의
이름만 내내 부르다가 숨을 거두었다. 할머니가 통곡을 하다가 일어나 아들의 눈을 감겨
주었다.
새연은 눈앞에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마가 없어서 겪었던 슬픔과 아픔을 이젠 두
배로 감당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초만원이었다. 병원에는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잘들 알고 찾아왔다. 그리고 어찌나 애통해하는지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할
정도였다.
그들은 장례식이 끝난 이후로도 돌아가지 않고 새연의 집에 모였다. 할머니가 돌아가라
고 해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가 사업을 할 때 자신들이 무엇을 얼마나 도와 주었나를 일일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매섭게 쫓아내던 할머니가 차츰 누그러들었다.
혹 그들이 나중에 새연이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을까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집을 두 채만 남기고 나머지를 처분하여 나누어 주었다. 기가 막히게도 몇몇 몰염치한 사
람들은 부족하다고 더 내놓으라고 대들었다. 할머니는 그들에게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그래도 친척이니 남들보다 낫겠지 한 건 착각이었다. 할머니는 남은 집 두 채는 새연 이
외에는 아무도 손댈 수 없도록 변호사를 찾아가서 서류를 만들어 놓았다.
친척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올 때마다 선물을 한아름씩 안고 왔다.
그때 고모도 할머니를 찾아왔는데 고모부가 사업에 실패했으니 재기할 자금을 대 달라고
생떼를 썼다. 할머니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럼 아이들과 함께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으니
들어와서 살게라도 해 달라고 했다.
"엄마, 딸이 굶어죽게 생겼다는데 정말 이러기유!"
"그렇다고 정식이도 없는 이 마당에 여기 와서 이러면 어떻하냐."
"오빠가 동생이라고 해 준 게 뭐가 있는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한테 남겨 준 것도 없는
데 와서 사는 것도 못하게 하면 돼?"
할머니는 그것까지 거절하지 못했고 고모는 고모부와 아이들 셋을 데려와서 살기 시작했
다. 고모는 할머니와 새연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다. 청소와 빨래, 오리까지 도맡아 했기
때문에 파출부를 부를 필요도 없었다.
새연은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달이 지난 어느
날 고모가 통장과 도장을 훔쳐서 가족들과 함께 야반 도주를 하고 만 것이다.
할머니는 밤을 지새우며 울었다. 고모라는 사람이 그런 짓을 했으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새연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새연은 오히려 할머니가 내내 상심만 하고 있다가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아픈 사람은 새연이었다.
가끔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아스피린을 먹었었는데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새연을 끌고 종합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시켰다.
검사 결과는 뇌종양이었다.
할머니는 기가 막혀 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고 한탄을 했다. 할머니는 살던
집을 전세로 내 주고 조그만 비으로 옮기고 남은 돈으로 새연의 수술을 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친척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화환이며 과일을 사가지고 찾아왔다. 할머니는 기
력이 없어 이제는 그들을 막지도 않았다. 그들은 찾아와서 갖은 말로 위로를 하고 아부를
했다.
할머니는 새벽 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손녀를 위해서 기도했다. 새연은 할머니가 너무
힘들까봐 말렸지만 정성이 부족하면 안된다고 기어코 다녔다. 병실에서는 그녀에게 성경을
읽어 주었다. 그녀도 할머니가 성경을 일거 줄 때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렇지만 이후로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의사가 주의를 주었
다.
새연은 바로 퇴원하지 못하고 완쾌가 될 때까지 입원해 있었다. 머리는 빡빡 깎이고 거
기에 길다란 수술 자국까지 생겼다. 그녀는 할머니에게 부탁해서 모자를 사 달래서 쓰고
다녔다.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에서 사람도 많이 사귀었다. 그래 봤자 할아버지 할머니에 아저씨
들이라 재미가 없었다. 새연은 시간만 나면 창가에 서 있곤 했다. 같은 또래 친구들은 모
두 힘차게 뛰어놀거나 공부를 하고 있을 텐데 자기만 이런 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외
로운지 몰랐다.
퇴원하는 날은 할머니와 백화점에 가서 어울리는 가발을 두세개 샀다. 가발을 쓰니 감쪽
같았다. 할머니는 다시 재발할지도 모르니 충분히 쉬고 내년에 학교를 다시 다니라고 했다.
새연은 펄쩍 뛰었다. 친구들보다 한 학년 낮게 다닐 생각을 하니 암담했던 것이다. 동생
들하고 친구를 해야 하는 건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는 없었다.
할머니는 새연에게 집으로 친구들을 자주 부르라고 했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
다. 숙제를 같이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직은 마음대로 뛰놀기도 힘들었다.
새연이 삶의 희망을 잃고 모든 것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포기한 것은 다음 해에 할머
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였다.
이 세상은 불행한 사람만 계속 불행해진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손녀 하나 때문
에 고생만 하신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목이 메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
다.
잘하던 공부도 내팽개쳤다.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었다. 자기네 집으로 들어와서 살라
는 친척들도 많았다. 그러나 새연은 그들이 정말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
이 나올 때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집안이 이렇게 되고 보니 친척들이 그녀 몰래 속삭이곤 하는 소리가 있었다. 그녀가 태
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그녀는 종양이 재발했고 그때부터 병원에서만 지내다시피 했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살
까를 걱정하기보다는 하루라도 아프지 않고 편안히 죽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새연은 옛날 일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슬픔을 담은 눈으로 지민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런 생각부터 들어요. 혹시 이 사람도 나 때문에 재수없는 일을 당하
면 어떡하나? 그래서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요. 솔직히 말하면 아저씨한테도 무슨 일이 생
길까봐 걱정이 돼요."
지민이 한 마디로 단정지었다.
"틀린 생각이야."
새연이 생긋 웃었다.
"근데 아저씨는 딴사람들하고는 다르게 보여요. 뭐랄까, 내가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그게
안 통할 것 같아요. 헤헤헤."
지민이 그녀의 말에 뭐라고 해야 할까 암담해하고 있는데 그녀가 가게 쪽으로 뛰어갔다.
"아저씨, 나 떡볶이 사 줘요."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따라갔다.
지민은 가게로 들어가 떡볶이 2인분을 시켰다.
"또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새연이 메뉴판을 보더니 말했다.
"음, 오뎅."
지민이 주인 아주머니를 보고 말했다.
"아주머니, 여기 오뎅도 좀 주세요."
새연은 신이 나서 먼저 나온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하고
있는 그에게 떡볶이를 하나 포크로 찍어서 입에 넣어 주려 했다. 그가 피하느라 얼굴이 뒤
로 제꼈다.
"아이, 아저씨! 드셔 보세요."
지민이 마지못해 그녀가 내미는 떡볶이를 받아 먹었다.
새연이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맛있죠? 맛있죠?"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떡볶이에 오뎅까지 거의 혼자 먹다시피 했다.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와 호랑이를 보러 갔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자기의 갑갑함을 동물들 모두에게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커다랗게 포
효해 댔다. 호랑이를 보고 있던 지민이 갑자기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썼다. 미간을 찌푸
리며 호랑이를 쳐다보았다.
이공 철창과 계곡의 저편에서 으르렁거리던 호랑이가 슬금슬금 계곡 끝까지 나오더니 멈
춰 서서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도 호랑이가 애처로운 듯 자비로운 눈길을 보냈다. 호랑이가 지민에게서 뭔가 교감
이 느껴지는지 울어 젖히자 새연이 호랑이의 눈길을 따라 그를 쳐다보았다. 지민은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새연은 뭔가 이상해 보여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괜찮느냐고 물어보는 소리가 호랑이의 포효소리에 묻
히고 말았다.
지민의 귀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
무로 빽빽한 산과 계곡을 보았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나 케이블카의 원동기 소리, 심
지어는 자신을 향해 계속 뭐라고 하는 새연의 말소리까지도 사라지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
의 지저귐이나 나무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와 함께 아득한 원시 수풀림 속에서
나 들을 수 있는 동물들의 평화롭고 자연적인 소리만이 들려왔다.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며 소리만 남았다. 그리고... 그 소리들마저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그
는 자신의 얼굴 옆으로 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행복한 표정이 된 그는 나비를 잡으려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나비가 그의 손
에 닿으려는 순간 문득 모든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민의 손이 새연의 볼 아래에 가 있었다.
새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나지막히 그를 불렀다.
"아... 아저씨."
지민은 자기의 손이 새연의 볼에 닿아 있는 것을 알고서도 놀라거나 떼려고 들지 않았다.
새연은 부끄러운 듯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지민은 가냘픈 새연을 품에 꼬옥 안아 주었다.
지민이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우리 저 위에 올라가 볼까?"
그는 그녀를 데리고 리프트 승강장으로 갔다.
새연은 리프트가 높은 곳까지 올라가자 무서움이 와락 들어 지민의 팔을 붙들고 비명을
질렀다.
"까악! 무서워요!"
지민이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려 가볍게 안았다.
"괜찮아. 네가 아무리 소리 질러도 떨어질 일은 없을 거야."
그의 말에 그녀가 피식 웃고 말았다.
정상에 이르자 두 사람은 리프트에서 내려서 조금 더 올라갔다. 산 꼭대기에 이르니 바
람이 세졌다. 머리칼과 옷자락이 날리자 그는 새연이 입고 잇는 옷의 깃을 세워 주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녹음으로 우거진 숲에서는 자기 짝을 찾아 헤매는 새소리만이 들러올 뿐 조용하고 평화로
웠다.
새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원래 의사가 되고 싶으셨던 거예요?"
지민은 허공을 보았다.
"글쎄... ."
지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과거를 회상하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민에게는 어릴 때 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가 일곱 살 때 태어난 아기였다. 아기는 태
어날 때부터 뭐가 잘못 됐는지 항상 업어주고 놀아 주는 그와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
다. 눈동자가 처지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이를 업고 그는 마을로 들로 뛰어다녔다.
그곳은 산동네로 스무 가구고 채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는 놀다가 아이가 울면 집으로 데려가 무당인 어머니에게서 젖을 먹인 다음 또 돌아다
녔다.
굿판이 벌어지는 날은 한참 동안 젖을 먹이지 못했다. 그러면 아기는 우는 것도 힘이 들
어 소리도 잘 내지 못하다가 결국은 잠이 들고 말았다.
아기가 분명 어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 당시에, 그것도 산동네에 사는 지
민네의 형편에 병원에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저 좋다는 약초나 써 보는 게 고작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눈총도 한몫 차지했다. 무당인 어머니의 신기로 그 정도는 고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의 눈총에 얽매여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지민이 잠이 든 밤이면 아이를 안고 새끼를 잃은 짐승의 울음과도 같은 소리로
흐느끼곤 했다. 그럴 때면 지민은 잠든 척하고 있다가도 불안해져서 어머니를 몰래 힐끔거
렸다.
아기는 귀에서 고름이 터져나오면서 상태가 극도로 나빠졌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를 욕했다. 신기가 제대로 내린 무당이 아니어서 제 새끼인 아기가
그렇다고... . 그렇잖아도 곱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의 어머니에대한 시선이 한층 나빠졌다.
그들은 어느날 집에서 무리를 지어 들이닥치더니 거적에 둘둘 만 것을 마당에 털썩 내려
놓았다. 거적 안에는 지난번 어머니가 굿을 해 주었던 사람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유없이
시름시름 아파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기만 했는데 보다못한 그의 어머니가 굿을 해 달
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마당 한가운데 나앉더니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이고! 저 무당년이 내 아들 죽여 놨네! 아이고, 난 어떻게 살라고!"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를 앞에 놓고 삿대질을 하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기도 저주를 받
아서 그런 거라고들 했다.
무지한 마을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오해가 어머니에게도, 동생에게도 그리고 지민에게도
상처와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밤을 새워 운 다음날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몰려온 마을 사람들과 동생을 산 아래 마을의
병원에 데려간다고 하면서 나갔다. 그 이후로 동생은 집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지민의 눈동자가 약간 충혈이 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동생을 본 게 그때가 마지막이었어. 불쌍하게도 병원은 커녕 약 한 번 제대
로 써 보지 못한 거지."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런데... 내 동생을 마지막 본 날이 네가 태어난 날이야."
"그럼... 제 생일날 죽은 거예요?"
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그를 쳐다보는데 그의 눈에 조
그맣게 이슬이 맺힌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산 아래의 풍경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그녀는 차갑기는 하지만 맑은 공기를 마
음껏 들이마셨다.
그에게서 그런 애틋한 사연을 듣고 나니 혼자서만 불행하다고 항상 한탄했는데 이제는 그
러자 말아야겠따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자마자 고통스럽게 살다가 세상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떠나간 생명도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지민도 동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아직까지 힘들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가 생명을 구하고 지켜 주는 의사의 길로 들어선 것은 동생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민이 새연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 이제 그만 내려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태운 리프트가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그녀는 올라갈때만큼 무섭지 않았다.
리프트 아래 초원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그들은 동물원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 안에서 지민이 물었다.
"오늘 재미 없었지?"
새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너무 좋았어요."
그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아저씨한테서 동생 이야기랑 마음속에 잇는 이야기를 들은 게 제일 기뻤어요."
그가 얼굴을 굳히며 앞을 보았다.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
"그래도 저한테는 소중한 이야기예요."
택시는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강 건너편으로 각 층마다 군데군데 불을 켜 놓은 마
천루들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지껏 정말 많은 시간은 병원에서 살았어요. 솔직히 나... 의사 선생님들이 정말 싫었어
요. 내 사진을 보면서 죽는다, 산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할 거 다 하잖아요, 몇 달 동안 하
루에 두세 번 씩 잠깐 보고선 어느날 갑자기 머리를 깎고 수술을 하고... 나는 너무너무 아
픈데... ."
지민이 애처로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길고 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슬픔을 삼키는 듯 한동안 말이 없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더 싫은 건 저 자신이에요. 그렇게 미워하다가도 의사 선생님을 막상 보게
되면 저도 모르게 매달리게 돼요. 아주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 내가 너무 치사한 것
같아요. 헤헤헤."
그녀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그의 눈길을 피해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눈에 고인 눈물 때문에 바깥의 풍경이 흐려져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소매로
쓰윽 눈물을 닦고 눈을 깜박이며 여기 저기 높고 낮은 건물과 강, 유람선, 사람들을 유심히
보았다.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어쩌면 영원히 나오지 못할지도 모르기에 모든 것을 머
릿속에, 가슴속에 담아 두고 싶었다.
병원이 가까워 오자 그녀는 안도감이 느껴지면서도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생겨 나
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택시에서 내린 지민은 그녀를 기다리게 하고 휠체어와 가운을 찾아왔다.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눈치를 살피며 얌전히 휠체어에 앉았다.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낮처럼 분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갔다.
그는 복도 끝에 잇는 그녀의 병실을 향해 묵묵히 휠체어를 밀었다.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 스산한데다 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과 희미한 전등이 두 사람의 심정을 나
타내듯 어둡고 차가웠다. 병실 앞에 다다를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 하자 앉아 있던 새연이 일어났다. 그가 그녀를 쳐다보
았다. 그녀도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자기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슬며시
가발을 벗어 내렸다.
그는 다소 놀라면서도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는 오랜 투병 생활을 말
해 주리라도 하는 듯 듬성듬성 자란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깊은 수술자국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그녀가 부끄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 흉하죠?"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고백하는 투로 말했다.
"지난번에 나, 아저씨 목욕하는 거 봤어요... . 저는 이게 제일 부끄러운 모습이에요."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기를 쳐다보고 잇는 지민을 마주 보았다.
"어차피 수술하면 들킬 거 같아서... 그냥 미리 매 맞고 싶은 거... 뭐 그런 거... "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가 그녀의 목을 살짝 감쌌다. 그리고는 살짝 앞으로 당겨 수술
자국 투성이인 그녀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파르르 떨며 그의 품속을 파고들
었다. 그는 주위를 의식하느라 긴장하며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순간, 새연이 와락 지민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로 그의 입술을 덮어 버
렸다. 지민이 당황해서 그녀를 떼어 내려는데 눈물이 그의 볼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꼭 감으며 입술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포옹을 풀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는 눈으로
그에게 애원했다.
"저... 아저씨가 수술하시면 안 돼요?"
그가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잘못되어도 괜찮아요."
그녀를 묵묵히 쳐다보고만 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주저하는 듯 보이던 그가
승낙하자 그녀는 기쁨과 슬픔이 범벅이 된 표정으로 다시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는 체
념의 한숨을 목구멍 깊숙히 삼켜 버렸다.
돌아선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중대한 결심을 해야 하는 사람처럼 그의 얼굴에서는
비장함 마저 느껴졌다.
첫댓글 예스 !!!!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 늘 감사합니다 ♡♠♡
감사히 잘봤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