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그물/김필년⟫
김필년박사는 현대자동차사장을 지낸 우리 동기 故 김승년 친구의 친형으로
경기고를 나왔으며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독일에 유학한 석학으로
현재 안동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합니다.
이 책 가운데서 일부를 정리하여 소개합니다.
공자의 유학은 도덕관 윤리를 최고의 목표로 했다. 유교에서 인간과 하늘은 도덕과 윤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중국적 정신세계의 특징이다. 하늘의 뜻을 전하는 한 사람이 바로 천자였다. 이 세상은 천명을 받은 오직 한 사람의 천자를 통해 지배되어야 했다.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 이외의 어떤 나라도 안정되지 않았다. 18세기 청의 황금기 황제 건륭제에게 처음 영국의 사신이 인사들일 때 영국은 독립국이 아니었다고 한다. 천명사상, 이것이 공자의 첫 번째 그물이다. 한편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왕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인간일 뿐이다.
공자가 남긴 또 하나의 그물은 정치의 철저한 윤리화 도덕화였다. 천명사상의 연장으로 개인은 우주와 도덕성을 바탕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이상정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개인의 도덕적 완성은 우주의 섭리를 구현하는 일이다. 개인이 예를 실천하는 일이 바탕이 되어 가정, 사회, 국가 그리고 전 우주가 윤리화되는 게 이상이었다. 이 이상을 정치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한편 법가 사상가들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일을 정치로 여겼다. 도덕적 정치는 애민으로 이어져, 백성의 삶을 도외시하고 권력다툼을 한다면 결코 정치가 될 수 없었다. 도덕적으로 이룬 사람이 아니라며 정치는 타락하고 만다고 했다. 공자에게는 인격완성을 위한 개인의 도덕적 의지야말로 사회 전체와 전 우주의 이상을 보장하는 궁극적 근원이었다.
정치의 윤리화는 역사의 윤리화를 내포하였다. 공자는 역사를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나쁜 일은 비난하고 좋은 업적은 찬양하였다. 이런 가치평가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 맹자는 “공자께서 ⟪春秋⟫를 완성시켜 난신적자를 두렵게 하였다(孔子成春秋亂臣賊子懼).”라 했다.
공 자는 춘추시대에 일어나는 전쟁, 권력투쟁, 하극상 및 패륜(悖倫)을 객관적 필연적 사태발전으로 인식하지 않고 도덕의 힘으로 바로잡으려고 했다.
국가 간의 경쟁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세계적 흐름을 중국은, 자본주의의 탐욕으로 판단하고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있다. 도덕 정치는 사회 모든 영역처럼 경제활동도 윤리적이어야 하며, 개인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부자가 생기면 가난한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므로 탐리호재(貪利好財)와 진정한 자애심은 양립할 수 없다고도 한다. 仁을 천하에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경제인의 과도한 활동은 제지되어야 하기에 자본주의 발전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윤리화된 정치에는 오직 유교적 군자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군자는 재화와 이익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오직 마음을 갈고 닦아서 정치에 하늘의 도를 실현하고 국태민안에 힘쓸 일이다. 군자가 비천한 물욕충족에 애쓰는 경제인들을 천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서구와 달리 중국 역사에서 경제인들이 유교적 관료에 비길만한 권위를 가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재산을 축적한 이는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관직을 사던지 자제들에게 과거공부를 시켰다. 이러니 야심찬 유능한 인재가 경제인이 되기보다는 청치를 꿈꿨다. 관료의 권력이 엄청나니 과거야말로 목숨 걸고라도 해볼 만한 일이었다. 중국에서는 정치가 전 분야를 관장하는 중심이니 관리가 되면 명예뿐만 아니라 물질적 풍요도 보장 받았다. 중국에서 경제가 번성한 적이 많았지만 자본주의와는 관계가 멀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권력구조에서 경제인이 차지하는 권력의 문제다. 중구에서 경제인이 관리의 세력을 능가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정치의 윤리화는 정치권력을 신성화했다. 정치는 윤리적이기에 다른 세속 권력욕과같을 수 없었다. 윤리 인의 근원은 하늘이고, 정치는 仁義를 천하에 실현하는 위대한 사업이었다. 천명사상에서 최고 정치 지도자는 하늘이 선택했다. 전통 중국에서 황제는 곧 하늘이었고, 절대적 권위였다. 이런 사회에서 경제, 예술, 학문 등의 영역이 정치에 독립할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중세의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통 중국에서 정치는 민얼굴을 들어내지 않고 종요적 권위와 윤리적 정당성으로 짙은 화장을 했다. 유교적 도덕이라는 것도 본질에 있어서는 정신적 권력으로 도덕을 통해 사람을 지배했다.
아무리 유교사상이 위대하다 해도, 정치적 활동과 명예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역시 권력욕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 중국인들은 유교적 윤리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욕의 특별한 모습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도가 철학은 유가들의 의지가 겉으로는 권력욕에서 자유로운 경지를 가르치지만 결코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웃었지만 국가의 모든 교육수단을 관장하는 유가들에게 묻혀 버렸다. 공자의 그물은 이렇게 끈질겨서 외부 충격이 없다면 자체 힘으로 헤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 해서 현실이 유교의 이상을 제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교육의 평등, 비판정신, 개방적인 관료제라는 장점을 갖춘 공자사상과 법가가 결합하여 통치를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했다. 그러나 황제의 자의(恣意)적 통치, 관료부패, 환관이나 외척의 발호로 어지러운 때가 더 많았다. 유학자들은 이를 비판하고 공자의 사상에 따라 개혁하고자 했지만 현실은 타락을 반복했다. 그러나 공자의 그물 자체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기준과 이상으로 존숭되었다.
공자의 마지막 그물은 좀 길고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공자의 일생을 통한 인격발전에 대한 말년의 회고는 잘 알려져 있다(吾十有五而志於學 三十易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공자는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주나라의 정치, 경제, 예제, 규범, 역사, 문화, 음악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학문자체에 깊은 만족을 느꼈고 예술적으로도 깊은 경지에 들어갔다. 공자는 현실정치에 뜻을 얻지 못했을 때 학문과 예술에서 찾는 생활에 심취하였다. 후대의 유학자들도 이를 따라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공자에 있어서 하늘은 商·周새대의 하늘이나 서양의 기독교처럼 인격신이 아니었다. 우주와 인간 세계가 仁義에 바탕을 두고 바르게 진행하는 방향이고 자연의 섭리였다. 그러나 하늘은 인간행동과 사건의 진행에 곧장 반응하여 바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는다. 공자는 사회가 혼란을 거듭하고 자신도 어려운 시절을 보내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40에 周의 문물에 바탕을 자신의 결심에 확신을 얻었다(不惑). 쉰에 이르러 그것이 정당성이 있으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란 것을 알았다(知天命). 육십에 이르러서는 현실에 좌절하여도 멀리 보고 완숙한 경지로 승화하였다(耳順). 인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해도 당장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며, 효험을 기대하지도 않게 되었다. 자신이 가르친 군자들이 마침내 지상에 天道를 열 미래를 기대하였다. 조급함이 없었기에 젊은 시절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從心所慾不踰矩)). 먼 미래를 바라보는 이런 완벽한 자신감에서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不慍 不亦君子乎라 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들은 성공보다는 참담한 실패가 더 많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관리이든지 재야인사이든지 자기 수양에 매진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군주에 간언하고 항의하며 간사한 무리들과 싸우는 것은 유학자라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을까?
영혼불멸을 확신하지도 않았던 그들은 후대에 그들의 희생을 기리고 사모할 거라는 기대감, 즉 미래에 충족될 명예욕 외에는 뚜렷한 보상이 없었다. 현실과 타협했으면 얻었을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안락에다 정치권력을 마다하고 현세와 후세에 깨끗한 이름을 남기겠다는 욕망이었다. 후세에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는데 기여하겠다는 자부심은 세속에 물든 정치나 경제 권력과는 매우 다른 고귀한 형태의 권력이다. 이런 형태의 권력욕과 명예욕도 쉽게 교만과 직결되는데, 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윤리적 욕망 역시 죄악에 해당한다. 불교나 기독교에서는 일체의 교만을 치명적 죄악이라 가르친다.
그러나 초월자에 의한 구원을 원하지 않는, 세속적 권력이 아닌 고귀한 정신적 권력을 엄청남 매력적 목적으로 보고 자신을 희생하여 얻으려 했다. 이성적 인간성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순교에 따른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희열을 느꼈을 성싶다. 현실에 타협한 속유(俗儒)와는 달리 소수의 진정한 유학자들은 전통을 형성하고 이어왔다.
이런 심정을 범중엄(范仲淹)은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 라 했고.
좌종당(左宗棠)은 身無半畝무 心憂天下 라 했다.
이런 공자의 그물들은 언제나 백성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에 매우 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