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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5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에스 4,17(12).17(14)-17(16).17(23)-17(25)
복 음 : 마태 7,7-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광물로 알려진 ‘다이아몬드’.
이 다이아몬드의 원소 기호는 따로 없습니다.
탄소와 탄소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 다이아몬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한다면 주기율표상 6번, 원자기호 C인 탄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다이아몬드와 마찬가지로 원자기호 C인 탄소로 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숯입니다.
탄소에 엄청난 온도와 압력을 오랫동안 가하게 되면 다이아몬드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숯이 된다고 합니다.
이 다이아몬드와 숯을 보면서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랜 시간을 고통과 시련으로 다져진 사람은
다이아몬드처럼 튼튼하고 그 삶 자체가 아름다워집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제대로 승화하지 못해서 절망과 좌절에 빠지는 사람은
그저 단순한 숯의 모습에서 멈출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이도 고통과 시련이 자신에게 찾아오길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이 하나도 없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고통과 시련 없이는 숯에서 멈춰지고 맙니다.
다이아몬드가 되고자 한다면 고통과 시련이 찾아왔을 때,
열정을 가지고 정면에서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이나 시련 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피할 것이 아니라 이겨낼 방향을 찾는 삶이 필요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청하지 않고 찾지도 않으며 또 두드리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문이
저절로 열리기만 바라는 요행만을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의 노력이 담긴 열정은 전혀 없이,
원하는 것만 얻으려는 욕심을 통해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더 많이 주고 싶어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청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문도 두드리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좋은 것들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성장을 위해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고통과 시련을 주셨다고 불평불만만 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의 선물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청하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냥 무턱대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외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열정이 담긴 노력, 특히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열정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를 더욱더 단련시킬 것이며
이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만날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숯이 아닌 다이아몬드처럼 귀하고 아름답게 변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주님께서는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청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수도승의 다른 이름이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하십니다.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께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께서 이처럼,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하오니,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희망하는 바를 희망하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소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7)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연한 기회에 ‘체질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토양체질’이라고 합니다.
설명을 들으니 제가 하는 행동, 저의 성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비슷한 것으로는 ‘애니어그램과 MBTI'가 있습니다.
‘애니어그램과 MBTI’가 주로 성격을 분석한다면,
체질검사는 성격과 건강을 함께 분석하였습니다.
체질에 맞는 음식과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이 있다고 합니다.
가솔린차와 경유차는 각기 맞는 기름을 넣어야 하듯이,
체질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성격과 몸을 이해하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체질에 대한 분석입니다.
“성격이 급한 편입니다. 부지런하며, 센스가 좋습니다.
일을 벌려놓지만 뒤처리를 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는 것을 먼저 말하고, 생각을 나중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자리에 오래 있는 것을 싫어하고, 움직이며 활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는 성격입니다.
토양체질의 건강법이라면 항상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한국에 있을 때입니다.
제주도에서 중견사제 연수를 하면서 주말에는 서울에 올라와서 강의를 하곤 하였습니다.
하루에 3번 강의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길음동 수녀원, 해방촌 성당, 아론의 집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곳 뉴욕에서도 신문사의 일을 하지만 다른 일도 마다하지 않는 편입니다.
6개월 넘게 부르클린 한인 성당 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지난주부터는 롱아일랜드 한인 성당도 도와주고 있습니다.
퀸즈 한인 성당에서는 사순특강을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일을 좋아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통해서 힘을 얻는 체질이라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갈 수 없는 상황이라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선 할 수 있는 일은 개선하고, 개선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지만
개선할 수 있는 것과 개선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의 체질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주님께 의탁하면서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도록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연기하지만 뒤에는 많은 분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대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장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품을 홍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는 관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감독이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박수를 받으면서 늘 함께하는 이들에게 박수의 영광을 돌리곤 합니다.
부족한 저를 도구로 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백신이 나왔고 많은 분들이 백신을 맞고 있습니다.
치료제도 나온다고 합니다. 예전의 일상이 시작될 것입니다.
부르클린 성당에도 새로 신부님이 오실 것입니다.
롱아일랜드 신부님도 휴가를 다녀올 것입니다.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이고, 화사한 꽃들이 추운 겨울과 인사하며
반갑게 자리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겨울도 봄에게 인사를 하며 떠날 것입니다.
저도 본연의 업무인 신문홍보로 이곳저곳을 다닐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매순간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에
기도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웃고 우는 우리들과
함께 공감하신다.
기도는 공감이다.
간절하고도 절박한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주신다.
기도는
뜨거운 생명이다.
일말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을 알게 되고
기도로
삶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들의 삶을
우리들의 일상을
봉헌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기도는
우리 삶에서
잃어버린 하느님을
다시 만나는 은총이다.
은총은
우리 일상에서
잃어버린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은총을
간절히 바라기에
우리는
하느님 자녀이다.
기도는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겸손 되이 깨닫게 한다.
사람과 기도
간절함과 하느님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이시기에
매순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는
사랑이시다.
눈물이
미소가 되고
기쁨이 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막힌 기도, 뚫린 기도, 흐르는 기도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 중,
청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황금률이 따릅니다.
황금률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입니다.
청하라고 하면서 주라고 하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나
이는 청하는 것이 막히지 않고 흐르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흐르지 않으면 막힌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은총이 흐르기를 원하시지 고여서 쓸모없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부산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새벽이 되면 성당 문을 수녀님이 열어야 했는데
일주일 전부터 한 남자가 문 앞에서 서성였습니다.
그날도 조심스레 문을 여는데 그 남자가 다가왔고
수녀님은 조금 두려웠지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성모상 앞에서 기도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10남매를 둔 가장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채소와 전기밥솥 등 돈 될 것은 다 가져다 파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뇌종양으로 6개월밖에 못 산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신자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기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매일같이 그렇게 기도하는 형제에게 수녀님은 미사에도 한 번 참석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 형제는 그래도 되느냐며 미사에 참례하고 미사가 끝나자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내와 10남매 모두 예비자 교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6개월을 받아야 했지만, 사정상 3개월 만에 세례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날부터 형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저녁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매일 와서 바쳤습니다.
세례 예식을 앞두고 미사 예물에 대해 말할 때
그 형제는 아내와 함께 가게에서 그날 하루 버는 돈을 다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비싼 전기밥솥이 팔려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쌀과 연탄 등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아내는 수녀님이 조금만 바치라고 하셨으니까 1/3만 바치자고 제안했고
형제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아내가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아내가 꿈에서 보따리를 들고 가는데 어떤 여자가 자꾸 그 보따리 내놓으라고 쫓아왔고
안 주려고 도망치다 낭떠러지 앞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아내는 아무래도 그 돈이 자신들의 것이 아닌 것 같다며 다 봉헌하자고 했습니다.
가정 사정을 잘 아는데 너무 큰돈을 가져온 수녀님은
그중 1/10만 떼서 받고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그들은 받지 않으려 했고 본당 신부님이 막아섰습니다.
신부님은 돈으로 되돌려주면 안 받으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주라고 했고,
그들은 생필품과 중학생이 되는 아이의 등록금까지 본인들이 낸 것보다
두 배 이상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세례 당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형제가 양형 성체를 할 때 그 입속으로 환한 빛이 들어가는 것이 사진에 찍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뇌종양이 치유되었고 모든 아이를 다 키울 때까지 이후 2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사진은 아직 신앙이 오래되지 않은 형제에게 교만함을 줄까 봐
신부님과 수녀님만 가지고 예비자 교리 때마다 성체 신심을 가지도록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기도는 3단계로 나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단계는 위 형제가 신자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막힌 기도’의 단계입니다.
어머니라고 고백할 수 없으며 어머니께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뚫린 기도’의 단계입니다.
세례를 받아 죄를 용서받고 올바른 관계로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이 오는 단계는 ‘흐르는 기도’의 단계입니다.
나에게 오는 은총을 나만을 위함이 아니라 흘려보낼 줄 아는 단계입니다.
위 형제는 하느님께 자신의 것을 봉헌함으로써 자신의 은총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누가 나의 소중한 것이 한 사람에게 막혀 썩어버리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마치 층계로 된 논에 물을 대는 지주와 같이
그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기를 원하는 하인의 논으로 물줄기를 내는 것처럼
주님도 더 많은 당신 백성에게 은총이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받고 싶으면 내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먼저 내어놓을 수 없다면 누구에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은 은총을 주시기 전에 먼저 봉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선악과나무, 즉 십일조를 바치는 중요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흐르게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청합시다.
그러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주실 리 없고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주실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우리도 남에게 해 줍시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대로
내가 먼저 주님께 그렇게 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흐르는 기도가 되고 모든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