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전쟁 중에 첫사랑
서동욱
지구인이 할 일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는 이렇게 써놓고 자살했다 아버지는 지구
최후의 비밀외교관이었나? 나는 원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무리해서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2학년 중반에 그 유명한 헌령고교 집단임신
사건으로 뛰쳐나왔다 헌령고교는 남녀 공학을 포기
했고 중절한 여학생들은 소식이 두절됐다 아버지는
그 뒤에도 수년간 계속 안보외교를 책임지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어느 성탄절의 금요일 밤 나는, 후배이자
천재 웨이터인 그 바닥 세칭 주윤발이 덕분에 동석한
탤런트 이모양이 집에 가는 것을 온갖 감언이설로
막아내는 홈런을 쳤던 것이다 춤도 좋지만 잠시
대화 좀 하자고 강남역 근처 포장마차까지 꼬셔
왔는데, 아니 이런, 내가 준비한 뻐꾸기는 듣지 않고
눈이 똥그래져 안주 접시를 바라보는 이양이다.
안주 밝힘증인줄 알고 나무라려는 순간, 결국 나도
목도하고 말았으니 삶은 오징어 다리들이 드디어
모선(母船)의 명령을 수신하고 접시 위에서 하나 둘
일어서 우리에게 광선총을 쏘는 것이었다
지구 생물끼리는 다 친구 아니었던가! 이모양이 먼저
갑오징어의 푸른 광선에 재가 되고 다음으로 포장마차
아줌마가 멍게에게 희생되었으니, 지구인이 할 일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 말이 생각나 급히
핸펀을 때렸다 동욱아 원하는 춤이나 맘껏 춰라피웅,
뭐라고요 삼촌? 아버지가 삼촌이라 부르라던 육군 장성도
막 광선에 맞아 전사한 게 분명했다 피웅 피웅 안주거리
오징어들은 분주히 저희 부대 행렬을 찾아 떠나고,
그리하여 고아가 된 나는 조용히 마지막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이다 태양계 최후의 별처럼 포장마차는
은은한 빛으로 밤을 밝히고, 그런데 포장마차 장막을
걷으며 꿈만 같이 고교 시절의 그녀가 들어서는 것이다
겨우 공격을 피한 듯 이마에 작은 멍 자국을 가진 채.
그녀는 아직 살아 있는 지구 짐승의 신호처럼 하얀
수증기를 뱉으며 말한다 나도 한잔 줄래?
힘없이 주저앉는, 이제는 희귀종이 된 지구인에게 나는
말없이 따라 주었다 남편은 도망치지 못했어, 그러곤
운다 헌령고교에서 쫓겨나던 마지막 날처럼. 지구상의
최후 한 잔이 비워졌을 때 그녀는 졸음을 못 이기고
어깨에 기대온다 나는 지구인의 마지막 단잠을 지키며,
지구방위대를 박살내고 하늘을 가르는 오색 광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름답구나. 가지 않을 거지? 잠결에도
그녀는 팔을 붙잡는다 겨드랑이가 너무 따뜻했고, 나는
가지 않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