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책을 처음으로 펼쳐볼 때 '쩍'하고 들려오는 소리를 사랑하시는 분들,
책꽂이 앞에 꽂힌 책에는 별 관심이 없고 어떻게든 저 구석 모퉁이, 선반 꼭대기에 매달려있는
책을 기어코 꺼내 살펴보고야 마는 분들,
책방 문을 밀고 들어가면 모든 코너를 한번쯤은 다 돌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
쌓여있는 헌 책들에서 풍겨오는 쿰쿰한 곰팡내, 적당히 쩔어있는 그 냄새가 느껴져야
아, 이것이 진정한 지식의 향기...라고 만족감을 느끼시는 분들.
이런 분들이라면 다음에 소개하는 곳들을 찾아가 보시라고 강력히 권해드립니다.
편하디 편한 교통수단으로는 절대 찾아갈 수 없어서 기차를 갈아타고,
하루에 몇 번밖에 다니지 않는 버스를 갈아타고,
그러고도 마을에 접근되지 않을 때는 택시타기를 불사해야 하는 시골 산간 오지마을.
그러나 일단 도착하고 나면
마을 전체가 한 집 걸러 책방이고, 책방 옆에는 예술가들의 공방이 있고,
봄, 여름과 가을에는 책을 좋아하는 전세계인이 모두 모여 책축제를 즐기고
농가집 부엌에도 책, 현관에도 책, 집집마다 담장 옆에 책바구니.....
그야말로 책의 향취에 흠뻑 취할 수 밖에 없는 살아있는 책들의 마을.
그런 곳이 바로 유럽의 책마을이랍니다.
(영국 헤이온웨이 책마을 중심 거리. 영국의 모든 도시들에는 영국의 상징인 빅벤 닮은 시계탑들이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네요.
양쪽 건물들이 모두 책방입니다)
'책마을'
영어로는 book town 이라고도 하고 book village 라고도 하는 이 독특한 마을의 기원은
바로 영국 hay-on-wye입니다.
영국의 괴짜 책벌레 리차드 부스가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후 1962년,
'책 읽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웨일즈 지역 헤이마을에 처음 책방을 연 것이 시초이지요.
1971년에는 13세기 초에 지어져 지금은 허물어져 가는 고성 '헤이 캐슬'을 사들여
성 전체를 책방으로 꾸미고 1977년에는 헤이온웨이를 독립 왕국으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서적왕' 리처드 부스가 되어 즉위식을 하지요.
부모님의 한숨, 그리고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비웃던 책마을 사업.
그러나 이곳은 지금 1,500여명의 주민이 40여 개의 책방을 운영하고
마을 전체가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민박집, 아니면 식당, 아니면 갤러리와 공방으로 변신한
세계 최초의 책마을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책마을이 되었습니다.
(영국 헤이온웨이 책마을. 헤이 캐슬 안에서 바라본 마을 모습인데 담벼락에 세워진 야외 책장은
'honesty bookshop'이라고 해서 상자속에 자율적으로 돈을 넣게 되어있는데 어떤 책을 골라도
한 권에 1파운드 정도? 물론 쓸만한 책은 별로...)
헤이온웨이의 성공에 힘입어 유럽 전역에서는 '책마을 만들기'가 퍼져나갔습니다.
그 결과 지금 유럽 전체에 22개 책마을이 조성되어 운영 중입니다.
(이건 책마을 리플렛에 홍보되어있는 지역이고요, 이 목록에 없는 책마을도 몇 곳 있는 거 같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닐 거라는 얘기죠. 특히 리처드부스가 주도하는 세계 책마을 네트워크는
가입비도 내고, 회비도 내기 때문에 그에 반발하거나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책마을 중에는
네트워크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곳들도 있습니다)
유럽에서도 점점 쇠락해가는 시골마을은 나라의 고민거리였고
따라서 어떤 곳은 진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저 모여 책마을을 만든 곳도 있고,
어떤 곳은 인구가 줄어들고, 경제가 흔들리는 산간 오지마을 살리기의 성공 프로젝트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서 정책적으로 책마을을 조성한 곳도 있습니다.
어떤 곳은 수 십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는 불과 4년 전에
만들어진 곳도 있고요.
어떤 곳은 명성을 떨치며 관광객을 불러 모으지만 어떤 곳은 쇠락하거나,
또 어떤 곳은 이름만 남은 곳도 있습니다.
그가운데 저는 4곳을 방문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몬테레지오 책마을>.
마을 입구에는 교회 종탑 옆에 마을을 상징하는 부조물이 서 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약 220km 떨어진 뮬라쪼 지역, 산간 마을이 몬테레지오 책마을입니다.
우리나라 강원도 오지만큼이나 심심산골, 그 옛날 엄청 가난했던 마을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요...이 마을 사람들은 먹고 살려고 책바구니에 책을 싣고 이 마을, 저 마을로 팔러 다녔습니다.
물론 책이 아주 귀하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전해주던 한 권의 책이 한 마을에 그만큼의 지식의 등불을 밝혀주었겠지요.
세월이 흘러 몬테레지오 책상인들의 후손들이 도시로 나가 대부분 서점을 열고 출판사를 열었다고
하니 이들이 바로 오늘날 서점과 출판업자의 원조입니다.
마을에는 골목마다 이 마을 출신으로 도시에 나가 성공한 서점 주인과 출판업자의 이름이
기념으로 붙여져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피렌체가 유럽 최고 지성의 도시요, 학문의 도시였음을 생각할 때
피렌체를 거점으로 하는 토스카나 지방의 몬테레지오 산간 마을이 책의 고향이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는 아를르와 아비뇽이 가까이 있는 남프랑스 <몽톨리외 책마을>입니다.
책마을이 조성된지는 20년인데 유럽에서 4번째로 역사가 오랜 곳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미셀 브라방이라는 사람이 창업자인데요.
이웃마을에서 제본소를 운영하던 그는 책과 관련된 모든 직업군을 한데 모아서
사람들이 책을 만드는 전 과정을 직접 보고 배우고 체험까지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처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바람에 몽톨리외 마을 이장이 적극 호응하고 지원한 결과 오늘날 이곳에는
20여 곳의 책방이 있고 인쇄 출판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
작가와 예술가들의 공방이 모여 들었습니다.
책마을이라는 곳은 대개 옛 것을 지키길 원하고, 부수고 새로 짓는 걸 싫어하는 유럽인들의 특성상
마을의 오래된 골목길과 옛 집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마을 생긴대로 책마을을 조성했기에 유럽 시골마을의 아름다움과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역시 프랑스 남쪽 지방에 있는 앙비엘레 책마을.
이곳은 조성한지 이제 4년 밖에 안된, 후발주자입니다.
그래서 책방도 아직 4곳 밖에 없고 마을은 아직 조용합니다.
앙비엘레는 인근에 로안느(Roanne)라는 대도시를 끼고 있는데요,
이곳은 '불꽃의 여자' 시몬느 베이유가 노동자로 일하던 공업지대이자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프랑스 대표 좌파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문학과 노동운동의 역사가 깊은 곳이고 파리 지성인들이 은퇴 후 제 2의 삶을 찾아
많이 내려오는 지역이기에 아마도 로안느에서 30분 거리인 앙비엘레에 책마을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앙비엘레 책마을협의회 대표이자 '지혜의 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책방 주인
장 마크 디디용씨 역시 파리에서 일하다 은퇴 후 이곳으로 내려왔는데요.
갈수록 책방과 책방을 하려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프랑스 국가적인 망신이라고
말씀하시네요.
그분 말씀에 의하면 슈퍼에서 책을 파는 건 몹시 부끄러운 일이며
홍당무와 양파와 감자 사이에 책을 끼워넣어 사가는 요즘의 책판매 행태는 아주
지성적이지 못한 행위입니다.
무릇 진짜 책방 주인이란 책에 대해 조언할 수 있어야 하고,
책방을 찾는 사람들의 취향을 알아 그에 맞는 책을 골라줄 수 있어야 하며
정말로 책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런 책방 주인이 점점 사라져가는 요즘의 현실을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책을 사랑하고, 책에 매혹된 이들이 살아있는 책들의 도시를 만들고
책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유럽의 책마을들....참 아름답지 않나요?
참고로 www.booktown.net에 가시면 헤이온웨이와 네트워크 되어있는
유럽 책마을 리스트와 홈피가 링크되어 있습니다.
첫댓글 중년의 나이에 배낭으로 가는 여행...쉽지 않은 일이었고 카페 회원 분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걱정하면서 사전에 열심히 준비한 덕택인지 여행은 목표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성과를 얻어 돌아왔지요. 제 여행 이야기는 http://blog.naver.com/supsokiz 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도움 받았던 카페 가족들과도 이야기 함께 나누려고 올려봅니다. 유럽에서 한번쯤은 책마을에 방문해보시길 권해드려요.
이곳에도 쭉 올려주실거져... 기대하겟습니다. 책마을이 있군요.. 전 처음 들어보는데...ㅎㅎㅎ 감사합니다.
책마을 몹시 끌리는데요.^^ 근데 저 책들의 언어는 거의 그들의 언어이겠죠?
대부분..ㅎㅎ...그림책을 모으는 저는 그나마 언어의 한계가 덜해서 제가 원하는 많은 책들을 사왔습니다. 재밌는 건 프랑스에서 발간한 한국의 옛이야기책을 발견했는데 전래동화의 절반이상이 우리나라 게 아닐 뿐더러 그림이 완전 중국사람이어서..허걱..했습니다.아시아 코너마다 일본과 중국, 인도는 가득한데...이게 우리나라 문화 현실이로구나 했지요. 삼성은 있어도 셰익스피어는 없는 나라, 반도체는 있어도 책방은 없는 나라...
그림책들 보고싶어지는데요.^^ 저도 우화 동화 이런거 좋아하거든요. 우리나라가 그런데 관심이 없는듯해요. 안타까워요.
우와, 정말 꼭 가고 싶은 곳이에요~
책방에 가면 언제나 흐뭇하고 기분이 좋아지죠.... 책마을이 있는줄 알았더라면 찾아 가 봤을텐데.... 책마을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
요렇게 예쁘고 정서적인 곳이 있다니. 가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