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겨울, 삶이 칠흑같이 어둡고 쓸쓸했을 때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아니 책에 의지했고, 그 때 가슴 속에 큰 파문을 던진 책 중의 한 권이 황동규 시인의 <삼남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집이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즐거운 편지.> <기항지>와 연작시 <비가>들도 좋았지만, <얼음의 비밀> 중 <얼음 위에서> 는 그 당시 내 마음의 풍경화 같은 시였다.
”네 웃으며 집을 나간 후에 지친 듯이 눈이 멎고 저녁은 사라지고, 내 혼자 바라보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너의 모습, 친구여, 어둠 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배 밑에 깊숙이 얼어 있는 맥을 짚어보는, 쓸쓸히 기다리는, 그러나 아무런 대답 없는, 우리의 모든 사랑이 일시一時에 배반당하는 것 같은, 그래, 머리를 언 땅 위에 부딪고 마는 친구여, 그때마다 나는 이른 잠에서 불현 듯 깨어 불을 켜고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외롭지 않다. 너는 머리를 흔들어라. 기다린 건 언제나 오지 않았다. 친구여, 엎드린 얼굴을 들고 이제 흥미없이 일생을 살아버리는 자의 웃음을 보여다오, 그 웃음이 끝날 때에는 내 조용히 새로운 웃음을 만들어 주마.“
‘기다린 건 언제나 오지 않았다.’그럴지도 모른다는 그 절망감에 몸부림치던 시절들,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들어와서 가끔씩 나를 그날의 추억으로 인도하는 시, 한편의 좋은 시는 사람의 마음을 머나먼 추억속으로 떠나게 하는 추억열차와 같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