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포츠가 지속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매우 많다. 우선
경기장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하며 구단,협회,미디어에서의 꾸준한 노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스포츠 경기자체가 흥미롭지 않으면 팬들의 눈은 다른
곳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스포츠가 일시적인 인기몰이가 아니라 팬들에게 지속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선 ‘라이벌’이 많아져야 한다. 라이벌 관계인 두 팀이 경기하는 것 만으로 풍성한 얘깃거리와 경제적 수입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똑같이 서울을 프랜차이즈로 갖고 있는 국내프로야구의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라이벌 관계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하나의 전통이 된다면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금방 뜨거워졌다 식어버리는 ‘냄비형
스포츠 팬’이 아닌 ‘뚝배기형 스포츠 팬’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국내 스포츠 라이벌 전의 시초는 경·평 축구
국내 스포츠 역사에서 라이벌 전 다운 라이벌 전은 1929년 시작된 경·평
축구대회가 아닐까 싶다. 조선일보 주최로 시작된 이 대회는 조선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로 각광을 받았지만 남북 분단과 함께 1946년 서울대회를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경성 팀의 최고 스타는 ‘한국축구의 대부’ 격인 김용식 선수였다.
경신중-보성전문을 거친 김용식 선수는 훗날 최정민, 함흥철, 이회택, 김호 등의 스타를 키워낸 사람이었다. 한편 평양 팀에는 숭실중을 나온 김영근 선수가 좋은 활약을 펼쳤다.
남·북 라이벌 시대에 뒤를 이은 건 영·호남 라이벌 전의 시작이었다. 당시 한국 최고의 투수로 각광받았던 김양중(광주서중)과 장태영(경남중)선수가 보여 준 라이벌 대결은 1949년 청룡기야구대회에서 절정에 올랐다.
1947,48년 청룡기와 황금사자기를 석권한 경남중은 ‘강속구 투수’ 장태영을 앞세워 1949년 청룡기 우승을 노렸다. 하지만 경남중은 9회말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두고 뼈아픈 에러와 동점타를 허용했고 이후 경기 분위기를 빼앗겨 광주서중에게 패권을 내줘야 했다.
이 대회를 통해 ‘떠오르는 샛별’로 부상한 김양중 선수는 장태영과 같은
왼손투수로서 호남야구가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학의 명문 연세대와 고려대의 체육정기전도 국내 라이벌 전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1945년 연·보 OB축구전으로 문을 연 두 대학간의 스포츠 맞대결은 축구,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럭비의 5종목으로 확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대와 고대의 경기는 로얄블루(연세대)와 크림슨(고려대)컬러가 멋진 대비를 이루며 펼쳐지는 응원전으로 그 열기를 더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한 재계의 농구 라이벌전
스포츠 라이벌 전이 전국적인 화제를 일으키면서 일반 팬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것은 남자실업농구팀인 삼성과 현대의 경기에서 부터이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녀농구에서 동반 금메달을 획득한 여세를 몰아 이듬해 점보시리즈가 출범하면서 재계 라이벌인 삼성과 현대의 경기는 늘 초미의 관심사였다.
두 팀의 경기를 떠올릴 때 맨 먼저 기억이 나는 건 ‘슛쟁이’ 이충희(현대)와 ‘전자슈터’ 김현준(삼성)의 맞대결이었다. 이충희 선수가 거의 림도 건드리지 않는 깨끗한 ‘클린 슛’을 터뜨렸던 반면 김현준 선수는 백보드를 맞춰 골을 넣는 ‘뱅크 슛’을 주로 구사해 큰 대조를 이뤘다.
삼성과 현대의 기라성 같은 선수들 가운데, 감독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선수는 이문규(현대)와 신동찬(삼성) 선수이지 않았을까 한다. 이문규 선수는 화려한 공격력은 없었지만 적극적인 리바운드 가담과 허슬 플레이로 신선우, 박종천 이후 센터 포지션이 취약했던 현대에게 없어선 안 될 선수였다.
또한 포인트 가드로서 장신(190 cm)이었던 신동찬 선수는 신장의 우위를
발판으로 현대의 주포 이충희 선수를 전담 마크했다. 실제로 신동찬 선수의 찰거머리 수비는 84~85시즌 점보시리즈에서 삼성의 우승을 견인했다.
삼성과 현대는 1978년 같은 해에 창단해 숱한 명승부를 연출했다. 현대는
83~84시즌 점보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84~85시즌 점보시리즈에선
삼성이 설욕전을 펼쳤다. 두 팀간의 농구 라이벌 전은 85~86시즌 ‘쌍돛대’ 한기범, 김유택과 허재를 앞세운 ‘고공농구’의 중앙대가 출현하면서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스포츠 라이벌 어떻게 만들어지나?
단체스포츠에서 라이벌은 다양한 이유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대부분 라이벌의 출현은 지역성과 팬들의 성향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스페인 축구의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아르헨티나 축구의 리베르 플라테와 보카 후니어스, 스코틀랜드 축구의 글래스고 레인저스와 글래스고 셀틱
등의 라이벌 게임은 모두 지역적인 특성과 팬들의 대조적인 성향에 뿌리를
두고 탄생했다.
바르셀로나는 프랑코 정권시절 중앙정부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아 축구만큼은 프랑코의 비호를 받았던 레알 마드리드를 이겨야 한다는 카탈루냐인의 희망이 숨쉬는 팀. 이 때문에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라이벌대결은 세계적 화제가 되어왔다. 리베르 플라테와 보카 후니어스는 각각 본거지가 부유한 곳과 빈민촌으로 나뉘어져 출발한 것이 계기가 됐다. 글래스고 레인저스와 셀틱의 경우에는 종교 때문에 라이벌이 된 케이스이다.
레인저스는 신교도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셀틱은 구교도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 최고의 라이벌 팀은 도쿄의 요미우리 자이언츠(巨人)와 오사카의 한신 타이거스(阪神)를 들 수 있다. 도쿄와 오사카는 역사×문화적으로 서로 앙숙인 간토(關東)와 간사이(關西)의 대표도시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요미우리와 한신의 경기는 교신전(巨神戰)이라는 별칭이
붙어있기도 하다.
한편 역사적 사건 때문에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 예도 있다. 메이저리그의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즈가 그런 경우이다. 1903~1918년까지 다섯
번 우승을 차지한 명문팀 보스턴은 1919년 훗날 홈런왕이 되는 베이브 루스를 양키즈에 판 이후 월드시리즈 우승을 획득하지 못했다. 이후 보스턴이 월드시리즈 우승 문턱에서 고배를 마실 때마다 미국 언론은 “밤비노(베이브 루스의 별명)의 저주”라는 표현으로 보스턴의 액운을 기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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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ESPN을 통해 숙명의 라이벌이 된 래리 버드(좌측)와 매직
존슨(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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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스포츠라이벌 문화 정착엔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다”
프로 스포츠 팀은 프랜차이즈를 기반으로 창단하게 된다. 이 때문에 특정지역의 성향은 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자칫 잘못하면 스포츠가 지역간의 지나친 경쟁구도를 부추겨 부정적인 방향으로도 흐를 수 있다.
한 예로 바르셀로나 팀에서 ‘철천지 원수’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던
루이스 피구는 지난해 누 캄프(바르셀로나 홈구장)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하다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술병과 음식물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피구가 코너킥을 차기 전 벌어진 이 사건으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는 13분 가량 중단되었고 바르셀로나 팬들의 극성맞은 행동은 언론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이런 문제 때문에 ‘스포츠 라이벌 만들기’는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해묵은 지역간의 대립이 스포츠를 통해 폭력이나 사고가
아닌 건전한 방법으로 해소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국내 스포츠 라이벌이 생겨나기 위해선 미디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뉴욕 팀간의 월드시리즈를 표현한 ‘지하철 시리즈’, 플라멩고·플루미넨세간의 축구경기를 의미하는 ‘플루-플라 더비’, 조지아대학과 플로리다대학의 미식축구 경기에 붙은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 칵테일 파티’라는 별칭은 모두 기자들의 펜끝에서 나온 것이다.
1979년 미국의 스포츠전문 채널 ESPN(Entertainment Sports
Programming Network)은 대학농구의 스타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에게
포커스를 맞춰. 이후 NBA 팀 LA 레이커스와 보스턴 셀틱스에 입단한 존슨과 버드의 라이벌 시대개막에 도화선 역할을 했다.
물론 스포츠에서 라이벌이 인위적 요소만으로 만들어 질 수는 없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언론매체들의 다각적인 노력은 스포츠 라이벌
문화에 생명력을 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정착된 스포츠 라이벌 문화는 국내리그 활성화에 촉매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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