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의 도가 이미 사라지자
양(楊)ㆍ묵(墨)과 노(老)ㆍ불(佛)이 제멋대로 날뛰어 천하 사람들을 모두 그들의 권내(圈內)로 끌어들여 돌이킬 줄을 몰랐다.
이에 맹자(孟子)가 나와서 그들을 물리쳤으나 그 싹은 남아 있다가 얼마후 양자(楊子)의 무리는 노자(老子)의 무리와 합하고, 묵자(墨子)의 무리는 불가(佛家)와 합하였다.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소위 오도(吾道 유교(儒敎)를 말한다)는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세상에서 유교(儒敎)ㆍ도교(道敎)ㆍ불교(佛敎)의 3교를 정족(鼎足)에 비유하는데, 이것은 망령된 생각이다.
송대(宋代)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성인의 도를 옹호하고 사교(邪敎)를 물리치는 사명을 띠고 일어나, 사문(斯文)이 다행히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되고 해내(海內)의 사람들이 금수의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되었다.
그후 명(明) 나라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1573~1619) 연간에 이르러 외도(外道)인 사교가 까닭없이 불쑥 뛰어들어오자, 나라 안팎이 한결같이 떠받들어 죽어도 변하지 않았으므로 천자의 명령으로도 금절(禁絶)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요즘에 이르러서는 그 폐해가 노(老)ㆍ불(佛)과 양(楊)ㆍ묵(墨)보다도 심하니, 스스로 강절선생(康節先生 강절은 소옹(邵雍)의 시호)의 '어지러운 날은 항상 많고 다스려진 날은 항상 적다.' 한 탄식을 금할 길이 없다.
그 교(敎)는 즉 사학(邪學)이다. 먼저 그 전말을 밝히겠다.
야소교(耶蘇敎 예수교를 이른다)라는 것은 바로 속칭 천주사학(天主邪學)이다. 이 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대서양 구라파주에 있는
의대리아국(意大理亞國)의
야소회사(耶蘇會士)이마두(利瑪竇)자(字)는 서태(西泰) 가 중국에 입국하면서부터이다. 이마두가 중국에 온 것은 명(明) 나라 만력(萬曆) 9년(1581) 신사년
조선 선조(宣祖) 14년이다.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 이르기를 "야소(耶蘇)라는 말은 번역하면 세상을 구제하는 왕이라는 뜻이니, 두사(陡斯 천주(天主))가 강생(降生)한 뒤의 이름이다. 두사는 아무런 형체가 없을 때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였다. 사람의 시조인
아당(亞當)이
아말(阿襪)의 말을 따라서 두사를 받들지 않음으로 해서, 두사가 세상에 내려와 모든 사람의 죄를 구하고자 하여 한(漢) 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 2년 경신
신라 시조 57년. 백제 시조 18년. 고구려 유리왕 19년 에
여덕아국(如德亞國)이마두의 말에 의하면, 옛날의 대진국(大秦國)이라 한다. 의 동정녀(童貞女)인
마리아(瑪利亞)의 몸에서 태어났다. 야소로 불려진 33년 동안에 사방을 돌아다니며 정도(正道)를 알렸는데, 악당 반작비랄다(般雀比剌多)라는 사람이 무고(誣告)하여 국법에 따라 재판한 결과 극형(極刑)을 받고 죽었다.
죽은 후 3일 만에 부활하여 40일 간을 더 살아 있으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마쳤다. 살아난 지 3일 만에 몸을 돌려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한다. 죽은 것은 사람임을 밝힌 것이고,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간 것은 하늘의 뜻임을 밝힌 것이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의 《건정필담(乾淨筆談)》에 "전당(錢塘)사람 반어사(潘御史)의 자는 난공(蘭公)이다. 그가 말하기를 '천주교(天主敎)가 중국에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금수의 교로서 사대부들은 모두 이 교를 옳지 않게 여긴다. 소위 십자가(十字架)라는 것이 있다. 교인(敎人)들은 반드시 이에 예배하는데, 이는 천주(天主)가 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형벌을 받았다고 해서이다. 천주교 중에도 경전(經典)이 있다. 내가 언젠가 그것을 보니, 그 가운데에는 천주의 참사(慘死)를 많이 말하고 「천주는 교(敎)를 창설했다고 해서 죄에 걸렸다.」 하였다. 천주교를 믿는 자들은 이를 보면 항상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 해서 잠시도 잊지 않으니, 그 미혹됨이 심하다.' 하였다." 하였으니 가소롭다.그 교(敎)에서는 야소(耶蘇)를
글리사독(契利斯督)이라 하고 법왕(法王)을 비사파(俾斯玻)라 하며, 전도사를 살책이탁덕(撒責而鐸德)
이마두와 같은 사람 이라 하고 교를 신봉(信奉)하는 사람들은
글리사당(契利斯當)구양후(丘良厚) 등과 같은 사람 이라 한다. 칠일마다 두사(陡斯)를 제사하는 것을
미사(米撒)라 하고, 야소의 탄생이나 승천(昇天)한 날 등에 제사하는 것을 대미사(大米撒)라 한다. 판본으로 된
《천학실의(天學實義)》 등의 서적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이마두(利瑪竇)가 죽은 뒤에 그의 친구
방적아(龐廸我)자(字)는 순양(順陽), 의서파니아(依西巴尼亞)사람이다. 만력(萬曆) 27년(1599)에 도착하여 이마두와 함께 입조(入朝)하였다. 저서에 《칠극(七克)》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인생의 모든 일은 소(消)와 적(積)의 양단(兩端)을 벗어나지 않는다. 성현의 가르침은 모두 악(惡)을 없애고[消] 덕(德)을 쌓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무릇 악한 일은 욕심을 타고 일어나는데, 욕심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을 간직하여 영신(靈神)을 보호하는 것이거늘, 사람이 오직 이 욕심에 빠져 사사로이 행동함으로써 죄와 허물이 비로소 생기고 모든 악한 것의 뿌리가 된다. 이 뿌리가 마음속에 박혀 있으니 부자가 되고자 하고, 귀(貴)하게 되고자 하고, 편히 살고자 한다. 이 세 가지 큰 악의 뿌리가 겉으로 피어나고 뿌리가 다시 가지를 낳아서,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탐(貪)내는 마음을, 귀(貴)히 되고자 하는 마음이 오만한 마음을, 편안하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내고 음란하고 게으른 마음을 일어나게 한다. 또 부(富)ㆍ귀(貴)ㆍ일락(逸樂)함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것들을 자기에게서 빼앗아가면 분노(忿怒)하는 마음이 생기니, 이상이 7지(枝)이다. 탐내는 마음은 꽉 움켜쥠과 같은 것이니 은혜로써 풀고, 오만한 마음은 사자(獅子)의 사나움과 같은 것이니 겸양(謙讓)으로써 굴복케 하고, 욕심내는 마음은 깊은 골짜기와 같은 것이니 절도(節度)로써 메우고, 음란한 마음은 넘쳐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니 정조(貞操)로써 막고, 게으른 마음은 피곤한 말과 같은 것이니 채찍으로 매질하고, 질투하는 마음은 성난 물결과 같은 것이니 용서로써 가라앉히고, 분노하는 마음은 무서운 불길과 같은 것이니 인내(忍耐)로써 삭여야 한다." 하였다. 7지(枝)중에 다시 많은 절목(節目)을 두었는데 질서가 있고 적절한 비유를 들었으니, 즉 극기(克己)를 말한 책이다. 와
용화민(龍華民)자는 정화(精華). 서제리아(西濟里亞) 사람으로 만력 25년에 와서 순치(順治) 11년(1655)에 죽었다. 전적으로 포교(布敎)에만 힘썼다. 이 대신 그 교를 주관하였다. 교법(敎法)은 신도(信徒) 사이에 교우(敎友)라 하고 스승으로 섬기지는 않았으며 야소를 스승으로 섬긴다.
중국에도 이 교를 배우는 자가 있어서 그 액격늑서악칠식(阨格勒西惡七式)을 받든다.
야소(耶蘇)의 상(像)을 봉안했는데, 그린 것인데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흙으로 빚은 것 같다. 모습이 30세 쯤 되어보이는데, 왼쪽 손에는 혼천도(渾天圖)를 안고 있고 오른쪽 손은 손짓을 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수염과 눈썹이 곤두선 것은 노한 듯하고 드날리는 것은 기뻐하는 듯하다. 귓바퀴는 커다랗고 콧날은 우뚝하며 눈은 한 곳을 주시하고 있는 듯하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성모(聖母)의 모습은 소녀 같은데 손에 한 어린 아이를 안고 있으니, 바로 야소이다. 옷은 꿰매어 만든 것이 아니고 머리에서부터 통채로 뒤집어 쓴 것이다. 이는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 보인다.
《북유일록(北游日錄)》에 말하기를 "악라사(鄂羅斯)에서도 천주교를 믿는다. 그들이 천주상(天主像)이라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 하나 걸려 있다. 머리에는 가마솥만한 크기의 금관(金冠)을 썼고 사지를 쭉 펴고서 사지의 장심(掌心)에 쇠못을 박아 피가 흘러 질펀하게 젖었는데, 얼굴은 죽었으면서도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다. 이는 가까이서 살펴보면 그림이다.
천주를 제사할 때의 관복(冠服)은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입는 것은 흰 비단에 노란 무늬를 수놓았는데, 그 제법(製法)은 앞뒤로 정폭(正幅)이 있고 중간에 구멍을 뚫고 한 쪽을 꿰매어서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쓰게 만든 것이다. 소매는 매우 좁은데 끈으로 동여맨다.
두 팔에 차는 것은 마치 활쏘는 사람의 팔찌[拾]와 같이 생겼는데, 담황색(淡黃色) 비단에 순금으로 선을 두르고 푸른 실로 아(亞)자 무늬를 수놓았다.
또 누른 비단으로 크고 작은 두 폭을 만들어서 큰 폭은 오른쪽 어깨에 걸어서 왼쪽 겨드랑이로 늘어뜨리고, 작은 폭은 왼쪽 어깨에 걸어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늘어뜨린다. 누른 띠를 매는데 띠는 모두 누른 비단에 십(十)자 무늬를 놓은 것으로 만든다.
가장 뒤에 입는 것은 네모난 모양이 작은 이불같이 생겼는데, 3분의 2는 뒤로 넘기고 1은 앞으로 오게 하여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쓰는 것으로 마치 흰 비단으로 만든 옷처럼 보인다.
관(冠)은 박처럼 둥근 것으로 붉은 비단으로 바탕을 삼고 누른 비단으로 위를 덮었으며 육면(六面)에 사람을 그리고 유리를 달았는데, 그 값이 1만 냥이나 된다. 이 관의 이름은 밀특랍(密特拉)이고 옷의 이름은 이사(利撒)이다.
그들의 경전(經典)은 금으로 꾸몄는데, 두께는 대여섯 치쯤 되고 누런 보자기에 싸서 둔다. 그들의 관은 금관(金冠) 같으나 금사(金絲)로 짜서 만든 것이고 옷은 빙견(氷絹)으로 만든다. 또 제사 때에 연주하는 악기가 있다 한다……" 하였다.
기해사옥(己亥邪獄) 때에 형조(刑曹)에서 이상하게 생긴 의관을 찾아냈다. 옷은 은사금(銀絲錦)으로 짠 것으로 안감은 붉은 비단을 썼으며, 단폭(單幅)에 옷깃은 없고 다만 구멍을 뚫어서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쓰게 되어 있었다. 그 옷을 서로 꿰맨 부분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하고 그 위에는 야소(耶蘇)가 형(刑)을 받는 모습을 아로새겼는데, 만듦새가 매우 정묘(精妙)하였다. 그리고 띠도 있었다.
관(冠)은 쟁기 모습을 한 것은 남자의 관이고 모습이 네모진 관은 여자의 관이라 한다. 천주를 제사할 때에 입는 옷은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쓰는데, 이것이 그들의 법복(法服)이다.《청삼통(淸三通)》에 말하기를 "의달리아(意達里亞)의 라마성(羅瑪城)
둘레가 1백 50리이다. 에서는 야소(耶蘇)가 죽은 뒤에 그의 제자
백다록(伯多祿)이라는 자가 이 성에서 교(敎)를 폈다. 그 뒤를 이어서 교왕(敎王)이 항상 그곳에 사는데, 모든 나라가 다 경의를 표한다.
그 풍속이 전적으로 천주를 신봉하여 서울에서 시골의 거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주당이 있다. 이곳에는 교무(敎務)를 맡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전적으로 교회의 일을 주관하는데, 이를 일컬어 신부(神父)라 한다.
천주당에서 쓰는 일체의 물품은 국왕(國王)ㆍ대신(大臣)ㆍ백성들이 가져와서 항상 끊이지 않는다.
7일마다 첨례(瞻禮)가 한번씩 있는데, 이를 미사(米撒)라 부른다. 이 날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일을 쉬고 온 나라 사람들이 천주당에 가서 신부가 경전(經典)을 강송(講誦)하며 선을 권하고 악을 경계하는 말을 듣는데, 여자들은 따로 앉아서 듣는다.
박이도□이아(博爾都□爾雅)는 구라파의 극서(極西) 쪽에 있다. 이 나라에는 두 개의 학교가 있다. 즉 액물랄(阨物辣)과 가응발(哥應拔)인데, 구라파의 고사(高士)가 대부분 이 두 학교에서 배출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야소회사(耶蘇會士) 소씨(蘇氏)라는 자가 지은 《두사록일아(陡斯祿日亞)》라는 책이 가장 정밀하다.청(淸) 나라 때 사람인 옥전(沃田) 심대성(沈大成)
자는 학자(學子), 호는 옥전(沃田), 소화인(蘇華人)ㆍ세공생(歲貢生)이다. 의 《학복재잡저(學福齋雜著)》에는 지금의 야소(耶蘇)를 현(祅)
호연(呼煙)의 반절 이라 하며, 《설문(說文)》에 '관중(關中) 사람들은 하늘을 현(祅)이라 한다.' 한 말을 인용하였으니, 옛날에도 이 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옥전잡저(沃田雜著)》에 "내가 두씨(杜氏) 《통전(通典)》의 직관(職官)조를 읽고서 서학(西學)이 크게 망령된 것임을 알았다. 그 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당 고조(唐高祖) 때에 이미 들어온 것이고 명(明) 나라 말기에 처음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서광계(徐光啓)의 무리는 글을 읽지 않아서 이를 모르고 듣지 못하던 새로운 것이라 하여 높이 받드니, 그 미혹됨이 심하다.
이제 관직(官職)의 시유내(視流內)를 상고해 보니, 시정오품(視正五品)에 음보(蔭寶)라는 관명(官名)이 있고 시종칠품(視從七品)에 음보부현정(蔭寶符祅正)이라는 관명이 있는데, 두씨(杜氏)의 주에 현(祅)은 호연절(呼煙切)이며, 현이라는 것은 서역국(西域國)의 천신(天神)으로 불경에서 말하는 마혜수라(摩醯首羅)이다.
무덕(武德 당 고조(唐高祖)의 연호) 4년(621)에 현사(祅祠)와 관리를 두어 항상 번인(番人)을 시켜 제사를 받들게 하자 불을 밝혀놓고 빌었다. 정관(貞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 2년(628)에는 파사사(波斯寺)를 세웠는데 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4년(745) 7월에 이르러 칙명을 내려서 파사사를 대진사(大秦寺)로 고치고 천하의 주군(州郡)에 있는 모든 절들을 이에 준하여 고쳤다.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20년(732) 7월에 칙명을 내려서, '미마니법(未摩尼法)은 본래 사견(邪見)이다. 망령되이 불교(佛敎)라 칭하여 백성들을 미혹시키니 엄히 금지시키라.' 하였는데, 이는 서쪽 오랑캐들이 자기 나라의 법만을 옳게 여겨 그에 따라 행동하고 중국의 법에 의한 죄는 받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심대성(沈大成)이 말하기를 "불법(佛法)에서 말하는 마혜(摩醯)라는 것은 중국 말로 하면 대자재(大自在)라는 뜻인데, 눈이 세 개이고 팔이 여덟 개에다 흰 소를 타고 손에는 흰 총채를 잡고 있으며 큰 위력이 있어서 능히 대천세계(大千世界)의 빗방울 수까지 아는 신(神)의 이름이니, 즉 야소교에서 말하는 천주(天主)이다.
현사(祅祠)라는 것은 《설문해자(說文解子)》에 "관중(關中) 사람들은 하늘은 현(祅)이라 한다." 하였으니 지금의 천주당이고, 미마니(未摩尼)라는 것은 천주교(天主敎)를 이르는 말이다. 음보(蔭寶)는 교(敎)의 우두머리를 말하고 현정(祅正)은 천주당을 지키는 자를 말하며 서번(西番)은 서양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처음에 부도(浮屠)에 의탁하여 중국에 들어왔으므로 그들이 거주하는 곳을 불교를 따라서 파사사(波斯寺)라고 한 것이다.
앞에서 '불을 피워놓고 빈다.' 한 것은 대개 그들의 직책이 무사(巫士)가 점치고 축원하는 등의 유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품은 비록 시유내(視流內)에 속하나 직책이 미천하고 난잡하므로 배신(陪臣) 중에는 천한 자들이다.
그들은 당(唐) 나라 때에 벌써 사람을 유인하여 입교(入敎)시킨 일이 있으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지시키고 다만 외국에서 귀화한 자들이 스스로 익히는 것만을 허락하였는데, 본조(本朝)에서 멀리 있는 사람을 회유(懷柔)시키는 법률도 또한 이와 같다.
이제 그들의 말에 '야소가 형벌을 받고 죽어서 하늘의 주인이 되었다.'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마두(利瑪竇)가 사사로이 이름을 세워서 신기하게 만드니, 이것이 바로 그 선대를 속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서광계(徐光啓) 등은 덩달아 그를 높이 받드니 그 미혹됨이 심하다.
대체로 천제(天帝)의 칭호는 예경(禮經)에 보인다. 즉《주례(周禮)》의 대종백(大宗伯)의 직책에 '인사(禋祀)로 호천상제(昊天上帝)께 제사한다.' 하였는데, 정강성(鄭康成)은 '동지(冬至)에 원구(圜丘)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천황대제(天皇大帝)를 제사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지금《청회전(淸會典)》에 실려있는 '원구단(圜丘壇)은 황천상제를 제사하는 곳이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상제는 형체도 없고 기운도 없고 다만 이름만 있을 뿐이다. 불가의 말은 황당하고 망령되며 이마두 등은 또 야소(耶蘇)를 위로해서 떠받드니, 그 성경(聖經)에 위반되고 옛 것을 업신여기며 신(神)을 더럽히고 하늘을 속이는 죄를 이루 다 책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통전(通典)》을 읽고서 특별히 그 교의 시말(始末)을 기록하여 천하 후세의 미혹을 제거하고, 또 서광계(徐光啓) 등이 어리석게도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여 사대부들의 수치가 된 것을 비웃노라." 하였다.
고정림 염무(顧亭林炎武)의 《일지록(日知錄)》에 《책부원귀(冊府元龜)》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7년(719)에 토화라국(吐火羅國)의 왕이 표문(表文)을 올리고 아울러 천문(天文)에 밝은 대모도(大慕闍)라는 사람을 바쳤다. 그는 아는 것이 매우 많아서 무엇을 물어봐도 다 대답했다.
그는 한 법당(法堂)을 짓고 본수(本數)대로 공양(供養)하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지금의 이마두(利瑪竇)가 지은 천주당(天主堂)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건의가 실행되지는 않았으니, 어찌 당시의 조정에 학식있는 자들이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명(明) 나라 왕징(王徵)의 자는 양보(良甫), 호는 규심(葵心)이다. 벼슬은 첨사(僉事)에 이르렀다. 관서(關西) 사람으로 갑신(甲申)에 순절(殉節)하였다.
그가 지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의 서문에 "내가 성(省) 안의 땅속에서 비석 하나를 파냈는데, 비의 이마에 '경교유행중국비송(景敎流行中國碑頌)'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는 바로 당(唐) 나라 곽자의(郭子儀)가 새긴 것으로 1천 년이 지났으면서도 어제 만든 것처럼 새로웠다.
이 비의 내용이 지금 전하는 천주(天主)를 공경하는 교와 하나하나 모두 같아서 부절(符節)을 맞춘 듯하다.
여기 실려 있는 것이 당 태종(唐太宗) 이후의 여섯 임금인데 서로 이어받아 높이고 공경한 것이 매우 독실하였으니, 지금 뿐이 아니라 옛날에도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하였다.
매문정(梅文鼎)의 자는 정구(定九)이고 선성(宣城) 사람으로 청(淸) 나라 강희(康熙 청 성조(淸成祖)의 연호) 연간의 공생(貢生)이다.
그가 지은 《역학의문보(曆學疑問補)》에 말하기를 "서양 사람도 처음에는 회회교(回回敎)처럼 불교를 섬겼다. 당(唐) 나라 때 파사국(波斯國) 사람이 이곳에 살면서 대진사(大秦寺)를 세웠으므로 지금 전해오는 경교비(景敎碑)라는 것에 그 사람 스스로 '중[僧]'이라고 쓴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본래 산법(算法)에 정밀한데다 다시 회력(回曆)을 따라서 더욱 정밀해졌으므로 다시 야소교(耶蘇敎)를 세워서 회회교와 구분한 것이다.
이제 천주교에서 7일에 한번씩 재계하는 등의 일을 보면 모두 회교(回敎)와 비슷하다. 그들의 역법 가운데 소륜심(小輪心) 등의 산법도 회력(回曆)에서 나온 것이다. 대개 회국(回國)에서는 역법으로 불설(佛說)의 그릇됨을 증험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주재하는 자가 있으나 형체는 없다고 하면서 지상에 강생한 사람을 천주(天主)라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으니, 그말이 옳을 듯싶다. 다만 옛 성인의 말과 다른 것은 그들이 선 채로 인사하는 것이다.
그후에 구라파 사람들이 회력을 더욱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또 스스로 교전(敎典)을 만들고 야소를 받들어 천주로 삼아서 회회교와 구별하였다. 그러나 일체(一體)에 삼신(三身)이 강생하였다는 등 영괴(靈怪)한 말들은 불교에 가까우면서도 큰 소리로 불교를 배척하여 걸핏하면 '중국 사람이 잘못 안 것이다.'고 말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서양의 역법은 태양이 항성(恒星)과 만나는 것을 1세(歲)로 한다. 항성이라 하는 것은 항성년(恒星年)이니 즉 그들이 반포한 재일(齋日)이다.
그들의 역법은 태양이 옮겨 가서 두성(斗星)에서 4도(度) 거리에 있는 때를 정월 초하루로 한다. 그러므로 '태양이 항성과 만나는 것으로 세(歲)를 삼는다.' 한 것이다. 두성에서 4도 되는 거리는 바로 그들이 정한 마갈궁(磨羯宮)의 초도(初度)이다.
이는 지금의 동지 후 12일에 해당한다. 이날부터 옮겨 가서 30도가 되면 두번째 달이 되어 보병궁(寶甁宮)과 만난다. 나머지도 다 이와 같다. 태양이 옮겨 가서 만 30도가 되어 또 한 궁(宮)과 만나면 또 한 달이 되는데, 절기(節氣)는 따지지 않고 오직 재일(齋日)만을 매년 교도(敎徒)들에게 전해주고 글로 쓰지는 않는다." 하였다.
《기기도설(奇器圖說)》. 서양 사람 등옥함(鄧玉函)이 저술한 것이다. 열이마니아(熱而瑪尼亞) 사람으로 만력(萬曆) 연간에 중국에 도착하여 《기기도설》을 지었다.
이 책에 이르기를 "인류의 시조는 아당(亞當)이다. 조물주(造物主)가 천지를 만들고는 즉시 최초의 인류를 만들어 아당이란 이름을 붙이고 액말(厄襪)이라 이름한 그의 아내와 함께 땅위의 살기 좋은 곳에 두었다.
그 초기에 사람은 질병도 없고 늙거나 죽는 일도 없었다. 사람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오곡과 과목(果木)들이 모두 땅위에 저절로 나고 자랐으며 그 가운데 일체의 새와 짐승들도 사람의 부림을 받았고 해독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아당(亞堂)과 액말(厄襪)이 천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계율을 어겨 죄를 얻은 이후로 오곡은 잘 나지 않고 새와 짐승들도 독이 있게 되었다. 굶주림과 추위가 있고 병과 죽음이 있게 되었으며 남자는 농사 짓는 고통을 받게 되고, 여자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고통을 벌로 받게 되었다.
이에 아당은 처음으로 농구(農具) 등의 기구를 만들어 스스로 의식을 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구의 이용은 모두 인류의 시조인 아당이 만든 것으로서 대개 아당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법도를 세웠는데, 반은 사람의 힘으로 반은 하늘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것들이다." 하였다.또 한 가지 증거가 있으니 왕충(王充)이 논한 사천현(四天祅)이다.
서쪽 오랑캐의 우언(寓言)이다. 천현(天祅)을 천신(天神)이라 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다른 일을 빌려서 증거를 대면 다음과 같다.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할 때 사용한 금인(金人)을 세상에서는 불상(佛像)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에는 불교가 전해지지 않은 때이므로 '하늘에 제사한다.' 한 것은 즉 천신을 말한 것이니 천주(天主)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 보면 곽거병(霍去病)이 농서(隴西)로 출정하였을 때 언기산(焉耆山)을 지나 천여 리 되는 지점에서 흉노가 하늘에 제사할 때 사용한 금인을 얻었다. 이에 대한 안사고(顔師古)의 주에 '금(金)으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놓고 천신의 주를 삼아 제사한 것으로 불상은 이의 유법(遺法)이다.' 하였다.
무제(武帝)가 감천(甘泉)에 사당을 세운 것은 그 금인을 휴도왕(休屠王)의 분지(分地) 내에서 얻었다고 해서 휴도왕과 연결을 지은 것이며, 한지(漢志)에 '풍익(馮翊)의 운양현(雲陽縣)에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할 때 쓴 금인이 있다.' 한 것이 이것이다. 운양현은 감천궁(甘泉宮)이 있는 곳이다.
조위(曹魏) 때에 맹강(孟康)이 한지(漢志)를 주석하면서 처음으로 "흉노(匈奴)가 하늘에 제사하던 곳은 운양현 감천산(甘泉山) 아래에 있었는데, 진(秦) 나라가 그 땅을 빼앗은 뒤에 그 상(像)이 휴도(休屠)의 우지(右地)로 옮겨졌다가 또 다시 곽거병이 얻게 된 것이다." 하였다.
휴도왕은 항복하였다가 혼야왕(渾邪王)에게 피살되었는데 무제(武帝)는 그가 한(漢)을 따른 것을 가상히 여긴 나머지 아울러 금상(金像)을 주고 사당을 세워 준 것이다.
일제(日磾)라는 사람은 휴도왕의 태자로서 금씨(金氏)로 사성(賜姓)되었으니, 이 또한 금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한서(漢書)》 곽거병전(霍去病傳)의 찬(贊)에 "금일제(金日磾)는 본래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서 천주(天主)를 제사하였으므로 이를 따라서 금씨라는 성(姓)을 내린 것이다." 하였으니, 천주라는 명칭은 한(漢) 나라 때부터 이미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또
손오(孫吳) 때에 땅을 파다가 십자철(十字鐵)을 얻었으니, 이 또한 한(漢) 나라 때부터 천주교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오(吳) 나라 대제(大帝) 손권(孫權) 적오(赤烏) 10년(247) 무오에 땅을 파다가 쇠로 만든 십자비(十字碑)를 얻었다.서양 사람이 경교(景敎)에 대해 지은 글 중에서도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다.
양마락(陽瑪諾)의 자는 연서(演西)로 로대니아(路大尼亞) 사람이다. 만력(萬曆) 38년(1610)에 중국에 도착하여 경교비전(景敎碑詮)을 지었다. 의대리아(意大里亞) 사람 애유략(艾儒略)의 자는 사급(思及)으로 만력 41년(1613)에 중국에 왔는데, 경교비송(景敎碑頌)을 지었다.남회인(南懷仁)이 지은 《서방요기(西方要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남회인의 자는 돈백(敦伯)으로 불람제아(拂覽第亞) 사람이다. 청(淸) 나라 순치(順治) 16년(1659)에 중국에 와서 벼슬이 통정사(通政使)에 이르렀다."서양의 모든 나라들은, 오직 천주교(天主敎) 하나만 있고 다른 종교는 없다고 믿고 있다. 천주는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한 만물의 대주재자(大主宰者)이며 온 백성의 큰 부모이다. 하늘과 땅에 주인이 있는 것은 곧 국가에 임금이 있는 것과 같다.
그 교의 대요는 일을 밝히는 것으로 종지를 삼고 수신(修身)으로 요점을 삼으며,
이마두(利瑪竇)의 《기하원본(幾何原本)》의 서문에도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충효(忠孝)와 자애(慈愛)로 일을 삼고 천선개과로 입문(入門)을 삼으며, 생사(生死)의 대사(大事)와 유비무환(有備無患)으로 궁극의 목표를 삼는다. 서방 여러 나라들이 이 교를 신봉한 후로 1천 6백 년간에 모든 일이 편안하게 잘 다스려지고 인심과 풍속이 화평하여 서로 편안하게 여기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서로 싸우지 않고 각기 본업(本業)을 즐긴다."
또 말하기를 "모든 수사(修士)들은 반드시 어려서 이 회(會)에 들어가 결혼하지 않고 벼슬하지 않겠다는 것을 맹서한다. 경서(經書) 시험을 거쳐 선발된 자는 먼저 문과(文科)에 들어가 이를 마치고, 다시 격물궁리과(格物窮理科)를 마쳐야 비로소 천주학의 도과(道科)에 들어갈 수 있다.
이들은 모든 과(科)의 시험에서 성적이 모두 우수해야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선교(宣敎)하는 일이 허락된다. 선교를 나간 사람은 영원히 본국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태어나기는 비록 서양에서 태어났지만 죽는 곳은 선교하던 곳이 된다.
그러나 중국에 들어온 자는 사람마다 출생국이 다르고 들어온 시기도 각기 선후가 있다. 이를테면 1백 20년 전에는 대성덕(大聖德) 사방제(沙方濟)라는 사람이 동월(東越)에 이르러 내지(內地)에 들어가 죽었고, 만력 9년(1581) 신사에는 이마두(利瑪竇)가 두세 명의 회우(會友)와 함께 다시 중국에 이르러 처음으로 조정에 나와서 천주성상(天主聖像)과 서양의 자명종(自鳴鐘)을 바쳤다. 그는 살아서는 녹봉을 받았고 죽어서는 장지(葬地)를 하사받았다.
그후로 회우들이 계속하여 들어와 사람마다 각기 한 곳을 맡아 선(善)을 전하며 교리를 행하였다. 신(臣) 이류사(利類思)와 안지사(安之思) 같은 사람은 명(明) 나라 말기에 중국에 들어와 지금까지 30년이 되어간다.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천주국(天主國)은 불국(佛國)의 서쪽에 있다. 이마두라는 사람이 그 나라로부터 불국을 거쳐서 동쪽으로 오기 4년 만에야 광동(廣東) 접경에 이르렀다. 그 교는 천주를 높이 받든다. 그의 저서에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것이 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저 불교(佛敎)는 우리 천주교의 교리를 가져다가 거기에 윤회(輪回)와 보응(報應)의 이론을 보태어 세상을 미혹시킨다. 우리 교는 하나도 달리 일삼는 것이 없고, 단지 사람들이 선(善)을 행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그리하여 선을 행하면 천당(天堂)에 올라가고 악을 행하면 지옥(地獄)에 떨어져서 영원히 참도(懺度)도 없고 영원히 윤회(輪回)도 없으며 또한 벽을 맞대고 고행(苦行)하거나 인간 사회를 떠나고 집을 나가지 않아도 되므로 매일 행하는 바가 선을 닦는 것 아닌 게 없다.' 했다."
《명사(明史)》의 외국열전(外國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불림(拂菻)은 즉 한(漢) 나라 때의 대진국(大秦國)으로서 환제(桓帝) 때에 처음으로 중국과 내왕(來往)하였다. 진(晉) 나라 때와 위(魏) 나라 때에도 모두 대진(大秦)이라 불렀는데, 이때에 입공(入貢)하였다. 당(唐) 나라에서도 불림이라 하였고, 송(宋) 나라 때에도 이를 따라 불림이라 하였다. 이때 역시 여러번 입공하였는데, 《송사(宋史)》에는 '역대로 조공(朝貢)한 적이 없다.' 하였으니, 대진(大秦)이 아닌 듯싶다."
또 말하기를 "원(元) 나라 말기에 그 나라 사람 날고륜(捏古倫)이 중국에 들어와 장사하다가 원 나라가 망하자 귀국하지 못하였다. 태조(太祖)가 이 말을 듣고 홍무(洪武) 4년(1371) 8월에 그를 불러 보고 명하여 조서(詔書)을 가지고 돌아가 그 국왕을 초유(招諭)하게 하였다.
얼마 후 다시 사신 보랄(普剌) 등에게 명하여 칙서와 채폐(綵幣)를 가지고 초유(招諭)하게 하므로 그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입공하였으나 그후로는 다시 오지 않았다.……" 하였다.
《당서(唐書)》에 보면 "니파라국(泥婆羅國)은 역술(曆術)에 능통하고 천축국(天竺國)은 천문과 역산(曆算)에 능하고 계빈국(罽賓國)은 사신을 보내어 《천문경(天文經)》을 바쳤다.
불림국(拂菻國)은 그 나라 왕성(王城)의 문루에 하나의 커다란 금으로 만든 저울을 달아놓았는데, 그 저울대 끝에는 금환(金丸) 12개가 달려 있어서 이것이 12시를 알려준다. 또 금으로 만든 한 사람이 그 곁에 서 있다가 한 시간이 될 때마다 그 금환이 하나씩 떨어져 소리를 내면 이를 따라 소리를 쳐서 시간을 알려준다." 하였으니, 대개 이러한 나라들이 지금 서양 여러 나라가 아니겠는가.만력(萬曆) 연간에 대서양(大西洋) 사람이 경사(京師)에 와서 말하기를 "천주(天主)인 야소(耶蘇)는 여덕아국(如德亞國)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가 바로 옛날의 대진국(大秦國)이다." 하였다.
그 나라는 개벽(開闢) 이후로 6천 년의 역사가 사서(史書)에 실려 있는데, 역대 왕이 서로 선위한 사실과 만사(萬事)와 만물의 원시(原始)가 모두 자세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에 의하면 이 나라는 천주를 위하여 인류를 처음으로 낸 나라라고 한다.
대체로 구라파의 여러 나라는 다 천주인 야소의 교를 신봉한다. 야소는 여덕아(如德亞; 유대〈Judea〉)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아시아주의 중간에 있으니, 서쪽으로 구라파에 교를 전한 것이다.
야소가 처음 태어난 것은 한(漢) 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 2년 경신년이다. 그후 1천 5백 81년이 지난 만력(萬曆) 9년에 이르러 이마두(利瑪竇)가 비로소 배를 타고 9만 리를 지나 광주(廣州)의 향산오(香山澳)에 도착함으로 해서 야소교가 드디어 중국 땅에 전래되었다.
그는 만력 29년에 이르러 경사(京師)에 들어왔다. 중관(中官)인 마당(馬堂)이 그 나라의 방물(方物)을 조정에 바쳤으니, 그가 중국에 기거(寄居)하기 20년 만에 바야흐로 진공(進貢)을 행한 것이다. 그가 바친 것으로는 천주도(天主圖)와 천주모도(天主母圖)였고, 그외에 또 신선(神仙)의 뼈 등의 물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신선이라면 스스로 능히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을 것인데 어찌 뼈가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이마두(利瑪竇)는 만력 38년(1610) 4월에 경사(京師)에서 죽었는데 조정에서 성(城)의 서편 교외에 땅을 주어 장사하게 하였다.
이마두가 중국에 들어온 뒤로 그의 동료들이 더욱 많이 들어왔다. 그 가운데 왕풍숙(王豐肅)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남경(南京)에 살면서 전적으로 천주교를 가지고 대중을 미혹시켜서 사대부와 그곳의 백성들이 간혹 꾀임에 넘어갔다.
이에 예부낭중(禮部郞中) 서여가(徐如珂)가 그를 미워하여 의논을 벌여 그를 배척하였다. 이리하여 만력 44년에 시랑(侍郞) 심각(沈傕)ㆍ급사중(給事中) 안문휘(晏文輝) 등과 합소(合疏)하여, 그가 사설(邪說)로 백성을 미혹시키니 급히 국내에서 쫓아낼 것을 청하였다.
또한 예과 급사중(禮科給事中) 여무자(余懋孶)가 말하기를 "이마두가 오면서 중국에 다시 천주교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남경에 왕풍숙과 양마락(陽瑪諾) 등을 머물러 있게 하여 군중을 선동하고 미혹시킨 바가 1만 명은 됩니다. 그들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예배를 보는데, 걸핏하면 몇 천 명을 헤아립니다.
통번(通番)과 좌도(左道)에 아울러 금령(禁令)이 내려졌는데, 이제 공공연히 밤에 모였다 새벽에 흩어지는 것이 한결같이 백련교(白蓮敎)나 무위교(無爲敎) 등의 종교와 같고 또 호경(濠境)과 오중(澳中)의 제번(諸番)과 왕래하며 비밀히 연통하여 공모하는데도 담당 관청에서 이들을 조사하여 척출하지 않으니 나라의 금령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자, 황제가 이 말을 받아들여 10월에 왕풍숙과 방적아(龐廸我) 등의 무리를 모두 광동(廣東)으로 보내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내렸어도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았고 담당 관청에서도 떠날 것을 독촉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만력 46년(1618) 4월에 방적아 등이 상주(上奏)하기를 "신(臣)이 선신(先臣) 이마두 등 10여 인과 9만 리 바다를 건너 상국(上國)에 관광하여 외람되이 대관(大官)의 녹봉을 받은 지 17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이곳저곳에서 신들을 탄핵하여 중국에서 몰아낼 것을 의논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신 등이 향을 피우고 몸을 닦아 도(道)를 배우며 천주를 존봉(尊奉)하는 것이 어찌 사특한 음모를 꾸며 감히 악업(惡業)에 떨어지려 하는 일이겠습니까.
황제께서는 신 등을 어여삐 여기셔서 바람 좋은 날을 기다려 고국에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신 등이 만일 섬에 기거하게 되면 더욱 더 시기와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니, 청컨대 남도(南都) 여러 곳에 있는 배신(陪臣)들과 아울러 일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하였으나, 회답이 없으므로 못마땅히 여기며 떠났다.
그러나, 그중 왕풍숙(王豐肅)은 얼마 후 이름을 바꾸고 다시 남경(南京)에 잠입하여 예전과 같이 선교하였으나, 조정의 관리 중에 누구도 그를 찾아낼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 나라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온 사람은 대개가 총명하고 재주가 특별히 뛰어난 자들로서 전적으로 선교(宣敎)에만 마을을 두고 녹리(祿利)는 구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저서에는 중국 사람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한 것이 많았으므로 일대(一代)의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다 그들을 숭상하였다. 거기다 사대부 중에 서광계(徐光啓)ㆍ이지조(李之藻)의 무리가 앞장서서 그들의 말을 좋아하였고 또 그들의 문장을 윤색(潤色)해 주었으므로 그 교가 갑자기 흥성하였다 한다. 이상은 《명사(明史)》의 외국 열전에서 대충 추려 모은 것이다.
《해국도지(海國圖志)》에 보면 "영길리국(英吉利國)에서는 남자는 야소(耶蘇)를 받들고 여자는 방씨(㕫氏)와 대씨(
氏)를 받든다." 하였으니, 어떤 사람들이기에 남자와 여자가 신봉하는 것이 각기 다른지 모르겠다.명(明) 나라 사람 위희(魏禧)의 《일록(日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위희의 자는 빙숙(氷叔)으로 영도(寧都) 사람이며 숙자(叔子)라 일컬어졌다. 명(明) 나라 말기의 유민(遺民)으로 취미봉(翠微峯)에 은거하며 역당(易堂)에서 강학(講學)하였다.
강희(康熙) 17년(1678)에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에 합격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서 죽었는데, 고문(古文)으로 이름을 떨쳤고 문집 20권이 있다. 후방역(候方域)ㆍ왕완(汪琬)과 명성이 대등하였고 《삼가문□(三家文□)》이 있다."태서(泰西)의 책에 말한 그 이치를 이씨(二氏 불교와 도교)와 비교해 보면 우리 유교(儒敎)와 가장 부합된다.
그중 《칠극(七克)》 등과 같은 유는 모두 자신에게 절실한 학문이다.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마(亞尼瑪)라고 하는데 이는 즉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명덕(明德)이라는 것이고, 지미호(至美好)라는 것은 즉 《대학》에서 말하는 지선(至善)이다. 다만 세밀히 나누고 중간중간에 신기하고 마술같은 말들을 섞어 놓았을 뿐이다.
그들이 높이 받드는 천주(天主)를 자세히 따져보면 바로 옛 성인이 말한 상제(上帝)이고 선유(先儒)들이 말한 하늘의 주재(主宰)이므로 전혀 기이할 것이 없는데, 고의로 야소(耶蘇) 등의 말을 꾸며 허황되고 비루하게 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일찍이 그 책을 읽어보니, 이치를 설명할 때마다 까닭없이 천주라는 말을 끌어 넣어서 억지로 군더더기를 만들어 놓았다. 내가 이제 천주라는 말을 따져보니 이는 서양에 예부터 있었던 것인데, 후세에 망령된 사람이 있어서 기이한 의논을 꾸며내어 마침내 자신의 사실인 것처럼 만든 것을 그의 무리들이 돌아가며 서로 보태고 떠받들어서 마침내 지금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였다.
명(明) 나라 도사(都司)인 장도(長燾)가 최유해(崔有海)에게 보낸 게첩(揭帖)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는 대용(大容), 호는 점수(點守)이다. 해주(海州) 사람으로서 양포(揚浦) 최전(崔澱)의 아들이다. 그는 숭정(崇禎) 기사년(1629) 10월에 뇌자 겸 문안사(賚咨兼問安使)의 일원으로 국서(國書)를 받들고 원숭환(袁崇煥)의 군대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등주(登州)에 표박하였다가 경오년(1630) 4월에야 비로소 돌아왔다. 《동사록(東槎錄)》 3권을 지었는데, 이 《동사록》 가운데 이 게문(揭文)이 실려 있다."천당과 지옥은 명칭이 불교에 가까우나 실제에 있어서는 같지 않다. 불교에서는 윤회(輪回)를 말하는 데 비해 저들은 윤회를 말하지 않는다. 무릇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평생에 착한 일을 한 자는 천당으로 올라가고 악한 일을 한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그들의 학문도 윤리(倫理)를 숭상하여 우리 유교(儒敎)의 학문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단지 천당과 지옥을 말한 점이 더 많을 뿐이다."
이지봉(李芝峯)
수광(睟光) 의 《유설(類說)》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구라파국(歐羅巴國)은 태서국(太西國)이라고도 부른다. 이마두(利瑪竇)라는 사람이 있어 바다로 8년 동안에 8만 리의 풍도(風濤)를 넘어 10여 년 간 을 동월(東越 광동(廣東)을 이른다)에 살았다.
그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는 2권인데, 그 책의 첫머리에 천주(天主)가 처음으로 천지를 창조하여 안양(安養)의 도(道)를 주재(主宰)함을 말하고, 다음으로 사람의 혼(魂)은 불멸하는 것이어서 금수(禽獸)와는 크게 다름을 말하고, 다음으로 윤회육도(輪回六道)의 그릇됨과 천당ㆍ지옥ㆍ선악의 응보(應報)를 변론하고, 끝으로 사람의 성(性)은 본래 착하므로 천주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풍속은 임금을 교화황(敎化皇)이라 부르는데, 혼인을 하지 않기 때문에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어진 이를 택하여 옹립한다. 그 풍속은 우의(友誼)를 중히 여기며 사사로이 저축하지 않는다. 그는 또 《중우론(重友論)》을 지었다. 초횡(焦竑)이 말하기를 '서역의 이군(利君 이마두를 이른다)이 「친우(親友)는 제 2의 나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기이하다.' 하였다. 《속이담(續耳譚)》에 자세히 보인다."
이상이 중국 서적에서 상고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이택당(李澤堂)
식(植) 의 《택당집(澤堂集)》을 상고해 보면 허균(許筠)에서 비롯하였다.
《택당집》에 이런 말이 있다. "허균이 비로소 천주교(天主敎)의 책을 얻어 학습하며 말하되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명한 것이고 윤기(倫紀)의 구분을 정한 것은 성인(聖人)이다. 하늘은 또 성인보다 한 등(等)이 높으니 나는 하늘을 따르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않겠다.……' 하였으니, 그 조짐이 이미 드러난 것이다."정묘(正廟) 무신년(1788)의
춘당대도기시(春塘臺到記試)에서 지은 진사 홍낙안(洪樂安)의 대책(對策)은 매우 심하게 사학(邪學)을 배척하였다.
홍낙안의 대책은 대략 다음과 같다. "금일의 가장 염려스러운 일은 서양(西洋)의 일종 사설(邪說)이 점차 맹렬히 번져가고 있는 데에 있습니다. 심지어 을사년(1785) 봄과 작년(1787) 여름에는 호우(湖右) 일대가 거의 집집마다 성경을 외고 전하며 한문으로 된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베껴써서 아래로 부인네와 아이들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스스로 공씨(孔氏 공자를 이른다)를 높이던 사람들이 경서를 이끌어 성인을 속이며 끝에 가서는 정(程)ㆍ주(朱)를 헐뜯습니다. 백성은 미혹하기는 쉬워도 깨치기는 어려운 법인데, 이제 삶을 괴로워하고 죽음을 좋아하는 말을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서 물로 씻고 죄를 자송(自頌)하며 갖가지 괴이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 이는 부수(符水)와 백련교(白蓮敎)의 유(類)입니다."
그후 좌상(左相 채제공(蔡濟恭)이다)에게 올린 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요즘 진산(珍山)에서 일어난 양적(兩賊)의 사건은 그 무슨 변고입니까? 전에는 파리 대가리처럼 작은 글씨로 써서 깊이 꽁꽁 숨겨두었던 책들이 이제는 버젓이 간행되어 경향(京鄕)에 반포되고, 그중 교주(敎主)에게는 선물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명령만 하면 그대로 따라서 한번 통고하기만 하면 역마(驛馬)보다도 빠릅니다.
또 속히 천당에 가는 것을 지극한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형벌을 받아 죽는 것을 지극한 영예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윤지충(尹持忠)은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神主)를 땅에 묻었고, 어버이가 돌아갔을 때에 조문(弔問)간 사람에게 마땅히 축하할 일이라 하며 혼백(魂帛)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권철신(權哲身)은 신주(神主)를 땅에 묻었고, 이윤하(李潤夏)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등, 마을 부자의 자식들이 이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없고 생각이 미치는 대로 행동하여 주저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러하고도 10년 내에 장각(張角)ㆍ복통(福通)의 변란이 없다면 내가 망령되이 말한 죄를 받겠습니다."
또 진산 군수(珍山郡守) 신사원(申史源)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가 윤지충을 체포하는 데 늑장을 부린 것을 꾸짖었고 또 당시에 국가를 해치려는 뜻이 있어서 네 번이나 문초해도 어물어물하기를 마지 않았다고 하였다.정조(正祖)가 지은 《홍재전서(弘齋全書)》 가운데에는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교서(敎書)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주고 벌주는 것은 국가에서 사람을 권장하고 징계하는 단서이다. 그런데 상만 주고 벌이 없다면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되 부정한 사람을 축출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사리(事理)를 가지고 우상(右相 채제공(蔡濟恭)이다)이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아뢴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 행정상에 은근히 반영하고 있는 바이다.
현재의 시끄러운 문제를 가지고 말한건대, 서양(西洋)의 서적(書籍)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벌써 수백 년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고(史庫)나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의 옛 장서에도 모두 이들의 책이 있는데 권수가 많아 수십권 뿐이 아니다. 연전에 특명으로 이 책들을 꺼내다 별치(別置)한 적이 있는 바, 이것으로도 구입해 온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상(故相)
충문공(忠文公)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서양 사람
소림대(蘇霖戴)와 왕복하면서 그들의 교법(敎法)에 대한 서적을 구해보고는 말하기를 '천주학은 하느님을 대하느니, 본성(本性)을 회복하느니 하여 애당초 우리 유학(儒學)과 크게 다르지 아니하므로 청정(淸淨)을 주장하는 황로학(黃老學 도교(道敎)를 이른다)이나 적멸(寂滅)을 주장하는 불교와는 같이 말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이 석가모니의 탄생과 비슷한데다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논리를 취하고 있으니, 온 천하가 이 교(敎)를 믿게 된다면 곤란하다.……' 하였으니, 고상(故相)의 말은 참으로 그 교(敎)의 이면(裏面)까지 자세히 알았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서학(西學)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자도 있었으니, 고(故) 찰방(察訪) 이숙(李淑)이 시를 지어,
오랑캐들이 괴이한 학문을 전하니/夷人傳異學
도덕의 적(賊)이 될까 두렵네/恐爲道德寇
하기까지 하였다.
대저 근일(近日) 이전에 박식(博識)한 선비들 치고 글을 지어 논평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혹은 온건하기도 하고 혹은 과격하기도 하였으나 그 당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아무튼 지금은 정학(正學 유학(儒學)을 가리킨다)이 밝지 못하므로 그 폐해가 사설(邪說)이나 맹수보다도 심하다.
오늘날 이 폐단을 바로잡는 길은 더욱 정학을 밝히는 길밖에 없다. 이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특별히 선(善)을 표창하고 악(惡)을 징계하는 정사를 시행한 다음에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바로잡음에 있어 형륙(刑戮)을 쓰는 것도 지엽에 해당하는데 더구나 그 학문이겠는가. 어제 이미 최헌중(崔獻重)
충주(忠州) 사람이다. 을 뽑아 등용하였는데, 이는 정학을 배양하고 사학을 배척하려고 해서이다.
몇 년 전에 서학의 서적을 구입해 온
이승훈(李承薰)은 어떤 속셈이 있어서였든 아니든 간에 그 죄가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는 없다. 그런데 제 집에서 버젓이 살게 한다면 이는 크게 형정(刑政)에 관계되는 일이다.
이승훈의 아비가 서적을 불살라버린 증거가 있으며 그 후에 승훈 자신이 글을 지어 죄를 자책한 내용이 또한 관가의 문적(文蹟)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나 개전(改悛)은 개전이고 죄는 어디까지나 죄인 것이다.
이름이 이미 공거(公車)에 올라 있는데 즉시 조처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의(義)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전 현감 이승훈은 예산현(禮山縣)으로 귀양보내고 이외 시골의 천한 백성들에게도 간혹 상줄 만한 자도 있고, 벌줄 만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소관한 관사(官司)가 있으니, 묘당(廟堂 의정부를 이른다)에서는 소관한 관사를 철저히 감독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진실로 성심(誠心)으로 권면하고 징계하여 과격하지도 않고 해이하지도 않으며 배척하는 마음을 잊지도 말고 또한 그들을 조장(助長)하지도 않는다면 머지않아 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처럼 교시(敎示)한 뒤에도 다시 서학으로 문제가 생긴다면 어찌 정부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상은 정조(正祖)가 사학을 배척하는 교서(敎書)이니, 훌륭하다 왕의 말씀이여.
경신년(1800)에 정조가 승하하자 사학(邪學)을 하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체포되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 사형되거나 귀양갔는데, 사대부 중에도 형(刑)을 받은 사람이 많았으며,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연경(燕京 청(淸) 나라의 수도(首都))에 보고하였다.
정조가 경신년 6월에 승하하자 서학(西學)을 하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적발되었는데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모두 체포하여 처벌한 다음 신유년(1801)에 청(淸) 나라에 보고하였다.
판서인 극옹(屐翁) 이만수(李晩秀)가 문형(文衡)으로서 주문(奏文)을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일종의 사교(邪交)인 야소교도(耶蘇敎徒)가 임금과 아비를 원수처럼 여기며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神主)를 파괴시킵니다. 또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말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영세(領洗)라는 방법으로 흉악한 무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몰래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는 글은 부참(符讖)의 방술(方術)과 같은 것입니다.
널리 여자들을 모아 금독(禽犢)같은 행동을 하며, 혹은 신부(神父)라 하고 혹은 교우(敎友)라 일컬으며, 성과 이름을 바꾸어 각기 표호(標號 세례명을 이른다)를 세우고는 마치 황건적(黃巾賊)이나 백련교(白蓮敎)와 같이 몰래 서로 물색하며 공공연하게 버젓이 선동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부터 양호(兩湖 충청ㆍ전라도)에 이르기까지 그 무리들이 점점 많았졌습니다.
처음에 이벽(李蘗)은 양학(洋學)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승훈(李承薰)을 변장시켜 그의 아버지 동욱(東郁)이 공사(貢使)로 가는 길에 딸려 보냈는데, 그는 중국에 들어가 서양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가서 서양 서적을 가지고 돌아와서 이벽ㆍ정약종(丁若鍾)ㆍ정약용(丁若鏞)ㆍ이가환(李家煥) 등과 함께 강독(講讀)하며 스승으로 삼아 본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승훈이 사가지고 온 사서(邪書)들을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널리 퍼뜨렸는데, 이 일은 가환(家煥)이 주동이 되었습니다.
여자로서 이 교에 깊이 빠진 자는 홍필주(洪弼周)의 어미 강완숙(姜完淑)이 그 괴수가 되었으며, 사당(邪黨)에서 이른바 신부 주문모(周文謨)라는 자는 완숙의 집에 숨어 있었습니다.
간악한 무리의 한 사람인 황사영(黃嗣永)의 공초(供招)에 의하면 이승훈이 연경에 가서 양학을 받아온 이후에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김유산(金有山)ㆍ황심(黃沁)ㆍ옥천희(玉千禧) 등을 불러 모아서 공사(貢使)를 따라 연경에 들어가 서양 사람에게 편지를 전하고 몰래 사술(邪術)과 방략을 받았고, 을묘년(1795) 봄에 변장하고 입국한 주문모(周文謨)를 간악한 무리의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문모는 실은 강남성(江南省) 소주부(蘇州府) 사람이라 합니다.
사영(嗣永)의 몸을 수색하였더니 한 통의 백서(帛書)가 나왔는데, 이는 황심과 천희가 옷 갈피에 넣고 꿰매어 가지고 비밀히 양인(洋人)에게 전하기로 약속했던 것으로서 글을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다묵(多黙)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탕약망(湯若望)의 전정도상설(進呈圖像說)을 상고해 보면 '두사(陡斯)가 하늘로 올라간 뒤로 그 제자의 한 사람인 다묵이라는 자가 중토(中土)에 도착하였는데, 이로부터 대대로 중토에 가는 자가 있게 되었다.……' 하였으니, 다묵은 즉 황심의 표호(標號)입니다.
이 백서(帛書) 중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는데 그 하나는 서양 여러 나라에 알려서 배 수백 척에 정예한 군사 5~6만 명과 화포(火砲)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곧바로 해변으로 와서 이 나라를 쳐부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인(敎人) 중의 한 사람을 변장시켜서 책문(柵門) 안으로 이사가서 가게를 차려 놓아 저들의 교통과 서신 왕래 및 지시하고 모의하는 발판을 삼자는 것이었습니다. 또 옥천희(玉千禧) 등의 공초도 이와 같았습니다.
사악한 무리인 유항검(柳恒儉)ㆍ윤지헌(尹持憲) 등의 공초에도 역시 서양 배를 청해다가 이 나라를 한바탕 무찌를 계획으로 이가환(李家煥) 등이 은화(銀貨)를 내어 몰래 모반을 꾀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청(淸) 나라 황제는 우리나라에서 직접 주문모(周文謨)를 처형케 하였다.
신유년(1801) 사옥 때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교중(敎中)에 한번 가담하면 처자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여 네 것 내 것의 구분이 없으며, 식사할 때와 잠 잘 때면 항상 손가락으로 가슴에 열십자[十]를 긋는다고 한다.
청 나라 사람 우동(尤侗)의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의 주(注)에는 "천주인 야소(耶蘇)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하였고, 남회인(南懷仁)의 《곤여외기(坤輿外記)》에는 "2백 년 전에 서양 갈란달(喝蘭達) 지방의 바다에서 한 여자가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음식을 주면 먹고 또 남을 위하는 일을 즐겨 하였다. 그렇게 여러 해를 살았는데 십자가를 보면 땅에 엎드리곤 했다. 그의 몸에는 살가죽이 아래로 늘어져 땅에까지 닿아서 마치 도포를 입은 것 같았다." 하였다.
사악한 무리를 잡아서 신문할 때 다시는 사교를 믿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만 한다면 반드시 벌을 주지 않겠다고 해도 죽음을 무릅쓰고 맹세하지 않고는, 차라리 칼을 받고 죽어서 속히 천주당(天主堂)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한다.
또 사학(邪學) 괴수의 교법(敎法)에 의하면 여자들을 벌거벗게 하고 함께 큰 물통에 들어가서 이내 간음하는데 이것이 소위 영세(領洗)로서 친속(親屬)도 가리지 않고 아울러 성교를 한다고 한다.신유년(1801)에 옥사를 다스린 뒤에도 다 제거되지 않고 잔재가 남아 있다가 호ㆍ영(湖嶺 충청ㆍ경상도의 병칭)과 경기 지방에서 남녀가 체포되어 사형을 받기도 하고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후 기해년(1839) 봄에 사옥(邪獄)이 다시 일어나 처형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옥사(獄事)가 끝난 뒤에 특별히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무술년(1838) 12월 경에 먼저 서울에서부터 보은(報恩) 단동(緞洞)까지 신분의 귀천과 남녀ㆍ노소를 막론하고 사교(邪敎)에 전염된 사람이 날로 늘어나 전국에 널려 있어서 신유년보다도 더 심하였다.
그리하여 기해년 8월 초순에 좌ㆍ우포도청(左右捕盜廳)으로부터 옥사(獄事)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서양 사람 나백다록(羅伯多祿) 36세, 정아각백(鄭牙各伯) 36세, 범세형(范世亨) 44세, 사학죄인(邪學罪人) 역관(譯官) 유진언(劉進言)ㆍ정하상(丁夏祥), 마두(馬頭) 조덕철(趙德喆), 용인현(龍仁縣) 천곡(泉谷)에 사는 김제준(金濟俊)과 그의 아들 재복(再福), 과천현(果川縣) 현내 사람인 최영환(崔永煥), 홍주목(洪州牧) 사람인 최한지(崔漢之)와 그의 아우, 신유년에 사학으로 처형된 정약종(丁若鍾)의 아들 해상(海相), 여자로는 권용좌(權用佐)의 딸이었다.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신문하였는데 그들의 공초(供招)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백다록(羅伯多祿)의 공초 : 을미년(1835) 겨울에 포교를 위해 입국하여 서울에 있는 정하상(丁夏祥)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경향(京鄕)을 왕래하였다. 야소교는 남을 속이지 않는 것으로 주(主)를 삼기 때문에 사람에게 이로운 점은 있어도 해가 되는 일은 없다. 또 천주당에서 유(劉) 역관에게 은자(銀子)를 보내주어 생활비로 쓰고, 또 교우(敎友)들의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정아각백(鄭牙各伯)의 공초 : 경교(景敎)를 널리 전파하고자 병신년(1836) 11월에 입국하여 정하상의 집에 머물면서 경향을 왕래하였으며, 서양에서 수로(水路)로 중국에 입국하였는데 교리 중에 십계(十誡)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정(丁)씨 집에 머무른 지 몇 달 뒤에 기호(畿湖) 지방을 왕래하였다.……
범세형(笵世亨)의 공초 : 나(羅) 신부ㆍ정(鄭) 신부와 나는 정(丁)씨 집에서 머물기도 하고 서로 만나기도 하였으며, 또 나는 주교(主敎)로서 견진(堅陣)과 영세(領洗)를 많은 사람에게 주었다. 이 나라에 입국한 것은 유(劉) 역관이 책문(柵門)에서 안내하여 들어왔으며, 조(趙)ㆍ정(丁) 등은 천주당에 있을 때에 조선에 경교(景敎)를 전하기 위하여 자원(自願)에 따라 내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나(羅)ㆍ정(鄭) 두 신부가 자진해서 함께 떠났는데 노비 등 일체 경비 등을 천주당에서 주관하였고, 내보낼 때는 중국 사람과 동행하여 책문에 이르러 조ㆍ정 두 사람을 만나 함께 나왔다.
나 신부와 정 신부의 공초에도 천주당 주교의 지휘에 영향을 받아 자진해서 나왔으며 유진길(劉進吉)은 세 차례에 걸쳐 서양 사람을 안내해서 입국시켰다고 하였다.
조덕철(趙德喆)의 공초 : 서양 사람 세 명을 안내해 와서 정하상의 집에서 서양 사람과 만나게 하였는데, 정 신부는 그 집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고, 나 신부와 정 신부는 기호(畿湖) 지방을 왕래하며 출입이 무상하였다.
김제준(金濟俊)의 공초 : 삼촌 김종현(金宗賢)이 사학(邪學)을 가르쳐 주었으나 농사일에 바빠서 깊이 배우지는 못하였는데, 서양인 주교(主敎)가 정하상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나 신부를 만나서 영세를 받았다.
그후 나 신부가 남쪽 지방으로 내려갈 때, 제준(濟俊)의 집을 찾아갔다가 그의 아들 재복(再福)을 보고는 제자로 삼고 싶으니 데려가겠다고 하므로 허락했으며, 병신년(1836)에 김제준이 다시 정씨 집을 찾아가니 중국에서 또 유(劉) 신부라는 사람이 와 있었는데, 이때 이미 3년이 되어 막 중국으로 돌아가려던 참이라고 하였다.
나 신부와 정하상이 제준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들을 서양에 보내기로 내약이 되어 있다. 서양에 가서 득도(得道)하게 되면 10년 뒤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그때에는 주교가 되어 나 신부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하기에 허락했더니 데리고 갔는데 그후로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금년 즉 기해년(1839) 3월에 과천(果川)에 사는 최영환(崔永煥)이 찾아와서 그의 아들의 편지를 전하였다. 이 말은 조덕철(趙德喆)에게 들은 것이다.
그런데 북경(北京)에서 가져 온 편지는 보낸 지 이미 2년이나 지난 것이었다. 듣자니 최씨의 아들과 그의 아들이 함께 서양으로 갔다 한다.
유진길(劉進吉)의 공초 : 중국 사람인 유(劉)가 스스로 우리나라에 오기를 원하므로 천주당(天主堂)에서 약속하고 계사년(1833) 겨울에 데리고 입국하여 정(丁)씨 집에 머물러 있다가 나 신부가 입국한 뒤인 병신년(1836) 겨울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정하상(丁夏祥)의 공초 : 유(劉)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때에 우리나라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과연 3명으로 그 가운데 하나가 용인(龍仁) 사는 김제준(金濟俊)의 아들 방제(方濟)이다.…… 사학죄인(邪學罪人) 정해상(丁海相)은 신유년(1801)에 사학을 믿은 것으로 처형된 약종(若鍾)의 아들이다. 그는 진정서(陳情書)에서 경서를 인용하고 정도(正道)에 의거하여 사학의 뜻을 밝혔는데 거의 1천여 자에 달한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손권(孫權)이 세운 오(吳) 나라의 적오(赤烏 238~248) 연간에 쇠로 만든 십자가(十字架)를 얻은 일이 있었고, 당(唐) 나라 정관(貞觀) 9년(635)에는 경교(景敎)가 크게 유행되어 조정의 저명한 인사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숭배하여 대진사(大秦寺)를 창건하고 경교비(景敎碑)를 세웠으며, 위징(魏徵)ㆍ방현령(房玄齡)과 같은 대현(大賢)들도 이를 깊이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명(明) 나라 만력(萬歷) 연간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와서 많은 저서를 내었습니다.
상제(上帝 천주(天主)를 이른다)께서 잠잠한 가운데 일러주신 십계(十誡)는, 첫째 천주(天主)를 만유(萬有) 위에 흠숭함이요, 둘째 천주의 거룩한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지 않음이요, 셋째 첨례일(瞻禮日)을 지킴이요, 넷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함이요, 다섯째 살인하지 않는 것이요, 여섯째 사음(邪淫)을 행하지 않는 것이요, 일곱째 도둑질을 않는 것이요, 여덟째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요, 아홉째 남의 아내를 탐내지 않는 것이요, 열째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십계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으니, 천주를 만유(萬有)의 위에 사랑함과 남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上) 3계는 일을 밝히는 절목(節目)이고, 하(下) 7계는 수성(修省)하는 공부로 안씨(顔氏)의 사물(四勿)과 《대기(戴記)》에 말한 구사(九思)는 이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대개 혼(魂)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생혼(生魂)이고, 둘째는 각혼(覺魂)이고, 셋째는 영혼(靈魂)입니다. 생혼은 초목의 혼으로서 생장은 하나 지각이 없고, 각혼은 금수의 혼으로서 생장하고 지각할 수는 있으나 도리(道理)와 시비를 모르고, 영혼은 사람의 혼으로서 생장하고 지각하고 시비를 분별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고 발악하였지만 서양 사람과 우리나라 사학(邪學) 죄인은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옥사를 다스릴 때, 사교인(邪敎人) 가운데 여자인 권용좌(權用佐)의 딸은 용모와 재주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시문(詩文)과 그림에도 능했는데 나(羅) 신부에게 점유(占有)되었고, 포도청에 체포된 지 하룻밤 만에 달아났으며, 해상(海相)의 어미는 나이가 70이 다 되었는데 범(范) 주교와 간통하고 이내 부부가 되었다. 여자로서 이 교에 빠진 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심지어 다섯살 짜리 계집아이까지 신문에 맞서서 불복(不服)하였다. 그리하여 신유년에 죄를 받은 양반의 후손들이 모두 그 교에 들어갔다가 하나도 남김없이 처형되었다.
사학의 적발이 무술년(1838) 겨울에 시작하여 경자년(1840) 봄까지 걸린 것은 이에 연루된 자들을 모두 뿌리뽑기 위해서 그렇게 길어진 것이다. 또 요사한 말이 떠돌아 경향이 시끄러웠고, 충주(忠州)의 문관으로 집의(執議)가 된 김정원(金鼎元)이 신국(訊鞫)에 항소하였다가 끝내 절도(絶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옥사를 다스릴 때 사학의 책이 많이 나왔는데 그 내용에는 없는 것이 없었으며, 의술(醫術)이나 농업에 관한 것도 있었다 한다.
이 교에 성수(聖水)라는 것이 있는데 유리병에 담겨 있으며 형상은 마치 기름과 같다. 이것을 영세(領洗)할 때 눈에 한번 바르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어 일자 무식인 자라도 갑자기 영특한 지혜가 생겨서 사학의 책을 다 알게 된다. 또 사람을 미혹시켜, 죽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게 하며 형을 받아 피가 흐르고 살이 터져도 아픈 줄을 모르게 하는 것은 성수(聖水)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 한다.
형을 받고 죽은 사람의 피를 솜으로 닦아서 이 피묻은 솜을 신변에 두고 성혈(聖血)이라 하여 소중히 여긴다. 장형(杖刑)을 받을 때는 반드시 취소마니(取蘇摩尼)만을 부를 뿐, 조금도 소리내어 우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포도청(捕盜廳)의 초기(草記)에 이르기를 "서양의 사교(邪敎)를 믿는 자들은 엄하게 신문해도 전혀 두려워함이 없고 죽는 것을 즐거운 곳에 가는 것처럼 여기며 매에 견디기를 목석(木石)과 같이 해서 그 독하기가 양(羊)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하였다.중국 천주당(天主堂)의 시말(始末)은 다음과 같다.
숭정(崇禎) 초기에 역법(曆法)이 정밀하지 못하므로 예부 상서(禮部尙書) 서광계(徐光啓)가 서양의 새로운 역법을 참고하여 바로잡기를 청하여 관서를 개설하여 새로 역법을 찬수(纂修)하였다.
청(淸) 나라에서도 이를 따라서 서양 사람으로 흠천감(欽天監)의 관리를 삼고 천주당을 창건하였다.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 "천주당은 북경의 선무문(宣武門) 안 동성(東城) 모퉁이에 있다. 대서양의 야소교를 받드는 이마두(利瑪竇)라는 사람이 구라파국(歐羅巴國)에서 뱃길로 9만 리를 지나 중국에 들어왔는데, 명(明) 나라 신종(神宗)이 녹봉과 저택을 내려주었는데 이 저택의 왼편에 천주당을 세웠다.
천주당의 형태는 좁고 긴데 위에는 마치 장막을 덮어놓은 것 같다. 방은 창문에 고운 비단을 바르고 이상한 무늬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 나라의 그림이다. 그리고 그 위에 야소를 봉안하였는데 이는 화상(畫像)이다." 하였다.
강희(康熙) 8년(1669) 12월에 윤달을 두자 남회인(南懷仁)이 말하기를 "우수(雨水)는 정월의 중기(中氣)인데 강희 9년의 정월 29일이 우수이니, 즉 강희 9년 정월에 윤달을 두어서는 안 되고, 마땅히 명년(강희 9년) 2월에 윤달을 두어야 합니다." 하므로, 상이 예부(禮部)에 명하여 흠천감(欽天監) 관리들에게 자세히 물어보니 대부분 남회인의 말이 옳다 하므로, 고쳐서 2월에 윤달을 두고, 아울러 그 자신이 그 교를 행하는 것만을 허락하고, 나머지 각 성(省)에서 당을 짓고 교(敎)를 베푸는 자는 금하였다.
강희 56년(1717)에 광동(廣東)의 갈석진 총병(碣石鎭總兵) 진앙(陳昂)이 상소하기를 "천주교가 각 성(省)에서 천주당을 열어 사람을 모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광주성(廣州城) 안팎에 있는 자들이 더욱 많습니다. 더구나 이곳은 서양 선박이 모이는 곳이므로 떼를 지어 일을 일으킬까 염려되오니 강희 8년의 예를 따라 다시 엄히 금지하는 명을 내려 더 확산되지 못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강희 57년에 양광총독(兩廣總督) 양림(楊淋)이 상소하기를 "서양 사람이 천주당을 열어 교를 베푸는 것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강희 56년의 예를 따라 다시 금지하는 명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옹정(雍正) 원년(1723)에는 절민총독(浙閩總督) 각라 만보(覺羅滿保)가 상소하기를
"서양 사람이 내지(內地)에서 야소교를 선교하면서부터 듣고 보는 것이 점점 혼란해지니 청하옵건대 경사(京師)에서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오문(澳門)에 안치하고 천주당은 개조하여 관청을 만드소서." 하니, 상소가 들어가자 비지(批旨)가 내리기를 "서양의 오량캐들이 각 성(省)에 나가 산 지 오래되었으니 이제 그들을 옮겨가게 한다 하더라도 반년만 지나면 다시 뭉칠 수 있으니, 아울러 관에서 세밀히 살펴서 그들이 지방민을 어지럽히거나 연도(沿道) 주민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옹정(雍正) 2년 12월에 양광총독(兩廣總督) 공육손(孔毓孫)의 상소에 "광동(廣東)에 와 있는 서양 사람들을 만약 모두 오문(澳門)으로 보내어 바닷가에 안치한다면 땅이 좁아 이들을 다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고, 또 배를 태워 귀국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잠시 광주성(廣州城) 천주당 안에 살게 하고, 젊은이 중 귀국하기를 원하는 자는 배를 주어 귀국하게 하고 늙고 병들어 귀국할 수 없는 자는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을 허락하되,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선교(宣敎)하는 것만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외 다른 지방의 천주당은 모두 철거하여 관청 건물로 삼고, 중국 사람으로 그 교에 들어간 자는 추방하십시오." 하였다.
연경(燕京) 천주당은 순성문(順城門) 동쪽에 있다. 모두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나무는 하나도 쓰지 않았으며 높고 앞이 탁 트여서 서까래와 용마루가 있고 처마가 있는 중국식 건물과는 모양이 다르다.
흠천감(欽天監)의 관원으로는 서양인 2명이 숙직한다. 원명원(圓明園)에는 발을 걸었는데 규문(圭門)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깊은 동굴과 같아 사람의 말소리가 메아리친다. 천정을 올려다 보면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고 주위에는 사람을 그렸는데 살펴보니 한 어린아이가 눈을 치뜨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있는데 한 부인은 그 곁에서 어린아이를 쓰다듬으며 근심하고, 한 노인은 두려워서 두 손을 모으고 그 아이가 죽지 않기를 빌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방에서는 구름이 일어 그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 구름 사이로 수많은 사람의 머리가 보이게 그려져 있다.
건물은 대체로 기둥이 셋인데, 첫 번째 기둥의 북쪽 벽에는 나무를 새겨서 가리개를 만들었는데 마치 불당(佛幢)과 같다. 또 부인이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 위에는 한 마리의 백조(白鳥)가 날개를 펴고 입으로는 흰 연기를 뿜어 곧바로 부인의 이마에 닿는 모습을 그렸다.
좌우의 양쪽 벽에도 각각 세 개의 나무로 만든 가리개가 있는데, 이에는 두 개의 날개가 달린 여자가 손에 창을 들고 사람을 찌르는 것이 그려진 것도 있고, 또 겹겹이 포개진 십자가에 매달린 어린 아이가 떨어지려 하는데 한 노인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마치 떨어지려는 아이를 받치려는 듯한 그림을 그려 놓은 것도 있어 황홀하고도 기괴해서 사람의 기분을 좋지 않게 한다. 대개 병든 어린 아이는 소위 천주인 야소(耶蘇)이고, 근심에 잠겨있는 부인은 야소의 어미이다.
서양 사람들은 성격이 매우 조촐해서 당(堂) 안의 벽 위에 홍목(紅木)으로 만든 기구를 진열해 놓고 나무를 쌓아 사람의 턱을 받치게 한다.
옥상에 또 누(樓)가 있고, 밖으로 다섯 개의 창이 있는데 이를 납(蠟)으로 밝게 만들어서 마치 유리처럼 빛난다. 이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니 풍로에 바람을 불어 넣는 것처럼 여러 가지 음악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데, 이는 바로 원(元) 나라 때 성행한 생황[笙]이다.
대체로 이 천주당 건물은 모두 벽돌로 지었고 당(堂)의 오른 편에 작은 문이 있고 문 안에는 작은 길이 있다. 작은 문에서 멀리 앞을 바라보면 북쪽 담장에 목에 쇠줄을 건 큰 개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얼핏 보면 그 개가 물려고 하는 것 같아 겁이 난다. 또 살아있는 개 두어 마리가 음지에 누워있어서 그림의 개는 혼동되어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서쪽 담장 밖에는 의기(儀器)를 두는 각(閣)이 있다.오문(澳門)의 원류(源流)는 다음과 같다.
오진방(吳震方)의 《영남잡기(嶺南雜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오문(澳門)은 향산(香山)에서 1백 리 되는 거리의 국경 밖에 있다. 그 산은 바닷가에서부터 솟아서 바다 가운데에 성채를 이루어 이곳에는 귀자(鬼子)가 사는데 관문을 설치해서 인구를 헤아린다.
성내를 출입하는 것에 서양인 관리가 있는데 이는 시랑(侍郞)과 같다. 오문 내의 문서나 사건이 있을 때나 왕래에는 모두 통사(通事 통역관)를 쓴다.
무릇 내지(內地 중국 본토)에서 소용되는 서각(犀角)ㆍ상아ㆍ향(香)ㆍ호박(琥珀)ㆍ다라리(哆囉哩)ㆍ지우단(吱羽緞)ㆍ우사(羽紗)ㆍ소목(蘇木)ㆍ초단(椒檀)ㆍ파려(玻瓈 유리) 등 갖가지 서양 물건들을 모두 이곳에서 사고 판다."
왕 사정(王士禎)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는 이런 말이 있다.
"향산오(香山澳)의 오문(澳門)은 향산현(香山縣)의 바다 가운데 있다. 바다 가운데 돌이 솟아 높이가 10여 길 되는 제방을 이루고 있는데 길이는 6리 쯤 되며 앞뒤가 끊이지 않고 연이어 마치 연(蓮)의 줄기와 같다. 이의 중간에는 옹성(甕城)이 오문까지 닿아 있어 마치 연꽃의 열매처럼 보인다.
번인(番人)들이 산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가 4~5리로 삼면은 모두 바다에 잇닿았고 북쪽만이 한 줄기 지맥(地脈)이 통했을 뿐이다. 전면의 10리 되는 지점에는 십자문(十字門)을 세워서 두 눈썹이 횡으로 벌여 있고 그 중간이 빈것같이 보인다.
또 남쪽으로 십리 되는 지점에는 대횡금(大橫琴)이 입구를 막았고 또 남쪽으로 조금 가서 서쪽으로 돌아서면 소횡금(小橫琴)이 되니, 안산(案山)이 포개진 셈이다.
번인(番人)들이 배를 댈 때는 반드시 만(灣)이 있는 곳에 대는데, 이러한 곳을 곧 오(澳)라고 한다. 향산이 그러함으로 해서 오(澳)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곳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데, 지금의 오문은 옛 이름이 호경(濠鏡)인데 여기는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만(灣)이 있다.
명(明) 나라 만력 연간에 대서양 사람이 이곳에 이르러서 이곳을 좋아하여 마침내 호경에 오(澳)를 만들기를 청하여 두 개의 만(灣)에 배를 대더니, 오래되자 더욱 자기 나라에서 많은 사람을 보내어 모여 살며, 1년에 세금으로 5백 금(金)씩을 바쳤는데, 본조(本朝 청(淸) 나라)에서 이를 면제하였다.
이들의 거처는 대개 산을 의지해서 3층 누(樓)를 짓는데 모양은 네모진 것, 둥근 것, 3각ㆍ6각ㆍ8각형 등이 있는데 모두 나선형(螺旋形)이다.
그 교(敎)는 천주(天主)를 믿고, 그 사원(寺院)을 삼파(三吧)라 하는데 높이가 10여 길이나 되며 돌에 무늬를 새겼는데 누렇고 푸른 빛이 번쩍인다. 사원의 승려를 법왕(法王)이라 하고, 받드는 대상을 천모(天母)라 하는데 이름은 마리아(瑪利亞)이며 한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데 이가 천주로서 야소라 한다.
그들이 입은 옷은 진기한데 유리로 가려 놓았다. 머리털은 생동감이 있고 그 사람의 코는 우뚝하고 머리털은 곱슬머리에 눈알은 깊이 박혀 있으며 깜박이지 않는다.
여자를 귀히 여기고 남자를 천하게 여기며, 낮에는 누워 자고 밤이면 기상한다. 남자에는 백인과 흑인 두 종류가 있는데 백인은 귀하고 흑인은 노예이다.
옷은 다라니(多羅尼)와 벽지(辟支)를 입고 굽이 높은 신을 신으며, 검은 색 모전(毛氈)으로 만든 모자를 쓰는데 사람을 만나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한다. 또 허리에는 긴 칼을 차는데, 칼이 길어 1자쯤은 땅에 닿으며, 칼 손잡이가 적등(赤藤)으로 된 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여자들은 화만(華鬘)을 하고 웃는 얼굴만을 내놓고는 비단으로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쓰게 만들고 맨발인 채로 버선은 신지 않는다.
집안 일은 여자가 주관하고 아버지가 죽으면 딸이 그 가업을 이어받는다. 남자는 여자 집으로 출가하여 두 여자를 가까이 할 수 없고 이를 범하면 여자가 법왕(法王)에게 호소하는데 이렇게 되면 즉시 처형된다. 속죄를 허락할 경우에는 쇠갈고리로 손발을 뚫어서 피가 흘러 몸을 덮은 뒤에야 죽음을 면해 준다."
옹정(雍正) 2년(1724) 2월에 양광총독(兩廣總督) 공육순(孔毓珣)의 상소에 "광동(廣東)의 향산오(香山澳)에 서양 사람이 와서 산 지 2백여 년이 되는 동안, 호구가 날로 번성하여 이제 정년(丁年)이 3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근년에 와서는 항상 외양(外洋)에서 배를 만들어 가지고 향산오에 돌아와 벌써 배가 25척이나 되었으니, 청하옵건대, 일정한 수를 정하여 배를 더 배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1년 기간으로 교대하는 그 곳 두목만 체류를 허락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배를 타고 귀국하게 하십시오. 오문이 서양 사람의 소굴이 되어 연경(燕京)의 천주당과 서로 표리가 되어 뱀이나 지렁이처럼 서리고 엉겨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였다.천주당과 각 성(省)이 오문(澳門)과 내외로 연결되어 전적으로 사교(邪敎)를 선교하였다. 중국에서 사교를 다스리는 데 죽이는 법은 없고, 단지 무거운 죄로 다스리라 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청회전(淸會典)》에 보면 건륭(乾隆) 원년(1736)에 "기인(旗人)으로서 천주교를 익히는 자는 잡아서 무거운 죄로 다스리라."고 한 것이 있고, 《청삼통(淸三通)》에는 "건륭 50년(1785) 10월에 유지(諭旨)를 받들어 전에 서양 사람 파야리앙(吧吔哩咉) 등이 사사로이 내지(內地)에 들어와 전교(傳敎)하며 호주(湖州)와 광주성(廣州省)을 거쳐 나갔으므로 이것을 조사 체포하여 산동(山東)ㆍ산서(山西)ㆍ섬서(陝西)ㆍ사천(四川) 등의 성(省)에 내보내어 예속시켰다.
그리고 아울러 사사로이 전교한 파진연(把蓁緣)이라는 자가 있으므로 이를 각기 해당 성(省)의 국경 지대에서 풀어주었다. 본래 이들을 형부(刑部)에 보내 조사해서 영원히 감금하려 하였으나 이들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니 본뜻이 교를 전파하려는 데 있음에 불과하고 달리 불법(不法)을 저지르려는 뜻이 없었으므로 이와 같이 처분한 것이다.
명(明) 나라 때는 지방 관리가 일을 처리하여 중앙에 보낸 것은 원래 무죄에 속하는 것들 뿐이고 진실로 범죄에 해당하는 것은 모두 보고하지 않았다. 또 명 나라 지방 관리는 사사로이 각 처에 숨어 있으면서 몰래 서로 물여우나 도깨비처럼 전(傳)하고 이끌어서 반드시 선동하고 미혹시켜 일을 불리니 부득이 엄히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비록 마땅히 벌을 받을 죄를 짓더라도 '짐(朕)은 그대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을 가엾이 여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감금하려고도 하였지만 이제 범한 죄를 생각해 보니 외국 사람은 국법에 해당되지 않고, 아울러 영원히 감금하기에는 정상이 자못 가련하므로 죄를 진 파야리앙(吧吔哩咉) 등 12명에게 모두 은혜를 베풀어 석방한다.'
만일 경성(京城)에 머물기를 원하는 자는 즉시 천주당에 가서 편안히 살고, 본인의 마음에 서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관리의 압송하에 오문(澳門)으로 돌아가라,' 하니, 먼 곳에서 온 사람을 길이 긍휼히 여기고 법외(法外)에 은혜를 베푸는 지극한 뜻이다." 하였다. 사교를 다스리는 것이 위와 같아서 매번 용서하는 방향으로 처리하였다.《청삼통(淸三通)》을 편찬한 신하들의 총평에 "천주교는 그들의 풍속에서 생겨난 것이니 다만 이를 유전(流轉)시켜 견문을 흐리게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면서, 그 덕을 임금께 돌리는 것은 신하된 자의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 뿌리를 뽑아버리려면 먼저 천주당을 헐어버리고 오문(澳門)에 있는 서양 사람들을 다 쫓아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지 각 성(省)에서 천주당을 짓고 교를 행하는 것만을 금하여 유전하지 못하게 하려 하니 이는 속담에 이른바 즉 '게를 잡으려면서 막아놓은 물을 터놓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니 무슨 징계됨이 있겠는가." 하였다.
《청삼통(淸三通)》을 찬집(纂輯)한 신하들의 안어(案語)는 대략 이러하다.
"서양 사람들은 천주를 높여서 두사(陡斯)라고 부른다. 그들의 말에 천주가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이를 주재하는데 그 사이에서 존주(尊主)의 주선이 없다면 태양과 달이 어떻게 순차대로 운행하겠으며 만물이 어떻게 생명을 의탁하겠는가. 소위 천주라는 것은 대개 그러한 이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야소를 세상을 구원할 가르침을 세운 사람이라 하는데 그 주장이 더욱 견고하다.
이제 그들이 힘쓰는 일을 살펴보면, 대략 성령(性靈)을 보전하는 학문 즉 아니마(亞尼瑪)의 학문이다. 아니마는 번역하면 성령(性靈)이라는 뜻이다.
이의 내용은 사심(私心)을 악(惡)의 뿌리라 하고, 부자가 되려고 하며 귀히 되려고 하며 편안히 살고자 하는 것이 사심의 줄기라 하고, 교만ㆍ질투ㆍ탐욕ㆍ분쟁(忿爭)ㆍ도철(饕餮)ㆍ음욕(淫慾)ㆍ게으름을 욕심의 가지라 한다. 그리하여 오만한 마음을 꺾고, 질투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탐하는 마음을 풀고, 분한 마음을 삭이며, 욕심스런 마음을 없애고, 음란함을 막고 게으름을 채찍질하는 7극(克)으로 자수(自守)하는 것이다.
그들의 아니마의 학문은 그 뜻이 성현(聖賢)이 말한 극기(克己)와 흡사하다. 즉 성(性)을 바로 알고자 하면 마땅히 자기와 남을 똑같이 보아야 하고, 길 가는 사람 보기를 친척을 대할 때의 마음으로 미루어 보며, 죽음과 삶을 대등하게 하나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평온해져서 다시는 일체의 괴로움과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이 스스로 일설(一說)을 이루어 노불(老佛)과 뜻이 같다.
오직 천주(天主)에 대한 일설은 단지 스스로 그 풍속을 따른 것이니, 전파되어 견문만 어지럽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누차 황제의 명을 받들어 금지하였으니, 그 뜻이 지극히 심원하다 하겠다.
이는 진실로 우리 조정에서 사람을 인(仁)으로 기르고 의(義)로 바로잡으려는 의도에서, 그 사람들을 받아들여서 반드시 그 쓰임을 극진히 하고 그들이 풍속을 편안하게 여기게 하되 그 교는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위와 같이 보기는 밝게 보았으나 그 말은 미온적이다.왜인(倭人)은 비록 섬 나라 오랑캐이나 또한 천주교가 옳지 못한 교라는 것을 알아서 일체 금지하여 이를 위반한 자를 찢어죽이거나 목베어 죽였으며 아울러 남쪽 오랑캐들이 바다를 건너 본국에 정박하는 것을 금지시키니, 능히 사교(邪敎)를 다스리고 백성을 인도하는 법을 안다 할 수 있으니 가상한 일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근래에 제액리아(諸厄利亞)ㆍ이서파이아(以西巴爾亞) 및 아마항(阿瑪港)ㆍ여송(呂宋) 등 남쪽 오랑캐들은 야소(耶蘇)를 따르는데 우리 일본 백성들도 이를 본받는다. 그러므로 이들이 죽음을 걸고 이 교를 일본에 전하여 일본 서쪽 사람들이 이에 빠져 높이 받드는 자가 많다.
그러나, 이는 불교와 같은 높은 말씀이 아니고 간사한 법이므로 엄격히 금하여 그 괴수를 찢어죽이고 그 무리는 목베었으며 앞서의 잘못을 뉘우치고 불교로 돌아오는 자는 용서해 주었다.
지금에 와서도 그 자손들은 인류는 야소에게 속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관영(寬永) 15년(1638) 이후로는 남쪽 오랑캐의 배가 일본에 정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또 일본 사람이 다른 나라에 건너가는 것도 금지한다.……"
임진왜란 때의 일본 장수인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야소교(耶蘇敎)를 믿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야소를 숭상하고 천제(天帝)의 법을 받든다." 하였다.
임장주(林藏主)라는 중이 있었는데 죄수로 잡혀 하소연다가 죽었다. 상고해 보니 그는 길리시단(吉利是端)이었는데, 우리나라의 효종(孝宗) 4년(1653)에 표류되어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이른 자이었다.
인조(仁祖) 16년(1638) 무인에 동래부사(東萊府使) 정양필(鄭良弼)의 장계에 "일본에 가강(家康)이 관백(關伯)이었을 때에 남쪽 오랑캐인 길리시단이 와서 머물렀다. 그는 다만 하늘에 비는 것만을 일삼고, 인사(人事)는 모두 끊었으며 사는 것을 싫어하고 죽는 것을 좋아하여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들을 속이니, 가강이 잡아서 목베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원지(原地)에서 두세 사람이 다시 그 교를 정하여 마을 사람을 유도해서 난을 일으켜 비후수(肥後守)를 죽였으므로 집정관(執政官)이 그들을 모두 무찔러 죽였다 한다.
신청천(申靑泉)의 《해유록(海游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대마도(對馬島)의 서기인 우삼동(雨森東)이 말하기를 '서양 사람의 배 한 척이 와서 일본의 남쪽 바다에 정박하였다. 그들은 자칭 서양국의 교주(敎主)로서 자기 나라 임금의 명령으로 만국(萬國)을 교도하러 다닌다.' 하였다.
그들이 말한 교(敎)는 이마두(利瑪竇)를 성인이라 하는 등 말의 대부분이 차서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교를 금지하고 서로 왕래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화가 나서 돌아갔다.……" 이로 보아 일본은 비록 섬 나라 오랑캐이나 천주교가 사학(邪學)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상한 일이다.내가 중국 사람들이 사교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보니 대부분이 "오도(吾道 유학(儒學)을 이른다)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하였는데, 이제 직접 사당(邪黨)들이 교를 행하는 것을 들어보면 짐승과 다름이 없으니, 중국 사람들은 어찌하여 짐승 같은 행동을 하는 사학을 감히 오도(吾道)에 비기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른바 사교 가운데도 또 여러 가지로 갈라져서 지금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과 같은 사학이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해서 이렇게도 판연히 다르단 말인가.
생각건대, 지금 사당들이 행하는 바는 바로 백련교(白蓮敎)나 부수(符水)ㆍ끽채사마(喫菜事魔)ㆍ방술(房術)ㆍ교문(敎門) 등의 사술(邪術)을 뭉쳐 하나로 만들어 야소의 이름을 빌고 서양 사람들에게 붙어서 재색(財色)과 속임수를 이뤄 보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더욱 가소로운 것은 그 책의 논리가 우리 유학을 하는 선비들이 이치를 말한 것과 서로 흡사해서 선비 중 총명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이 이에 빠진다. 만일 우리 선비의 논리와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미혹되는 것이라면 어찌해서 참된 선비의 말에는 미혹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 소위 이치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크게 도(道)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처사(處士) 신함광(申涵光)이 말하기를 "나는 항상 세상 사람들이 《금병매(金甁梅)》가 사람의 마음을 잘 묘사하여 《사기(史記)》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극찬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참으로 그렇다면 어찌해서 참 《사기(史記)》를 읽지 않는가." 하였는데, 이 또한 위와 같은 경우를 비유한 말이다.
백련교(白蓮敎).《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백련(白蓮)ㆍ무위(無爲)ㆍ분향(焚香)ㆍ문향(聞香)ㆍ혼원(混元)ㆍ용원(龍元)ㆍ홍양(洪陽)ㆍ원통(圓通)ㆍ대승(大乘) 등의 사교가 무려 수십 종이 실려 있다.
《인암쇄어(蚓菴鎖語)》에 "지금 민간에서 말하는 교문(敎門)이라는 사교는 게송(偈頌)을 외고 남녀가 어울려 간음하므로 역대 조정에서 온갖 방책을 다 썼으나 이러한 풍조는 더욱 성행하였다.
대개 이 교는 그 도사의 요술을 통하여 전교한다. 즉 신도들과 함께 물 한 그릇을 놓고 사람들에게 이 물에 갖가지 의관을 비춰 보게 하고, 또 기이한 향(香)을 가져다 냄새를 맡아 보게 하면 모두들 이 교에 귀부(歸附)하기를 원한다.
또, 좌향운기존상염결(坐香雲氣存想捻訣)이라는 것이 있다. 이를 행하면 며칠 되지 않는 사이에 공중에 하나의 영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상서로운 구름과 놀이 지고 하늘에는 음악 소리가 가득하여 금전(金殿)과 요산(瑤山)에 선동(仙童)과 옥녀(玉女) 등 가지가지 기이한 형상들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보고 득도(得道)한 것으로 믿고 결사적으로 귀부한다.
고소(姑蘇) 유창(劉昌)이 오중(吳中)의 고어(故語)들을 조사하였는데 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본 고을의 양순길(楊循吉)이 이르기를 '허 도사(許道士)는 윤산(尹山)에 사는 백성으로 방중술(房中術)에 능하였는데, 백련교(白蓮敎)로 백성들을 미혹시켜서 부인네를 불러다 난행을 저질렀다.
그 교를 전도하는 무리가 몇 명 있는데 그를 섬기기를 신처럼 섬겨서 마침내 그 지방 일대를 뒤흔들었다.
방 한 가운데 그 사람이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바라볼 수 없다. 그는 5월 5일에 지네ㆍ뱀ㆍ전갈ㆍ도마뱀 등 다섯 가지 독물(毒物)을 잡아서 한 항아리에 집어 넣고 단단히 봉하여 이들이 서로 잡아 먹게 한다.
이렇게 해서 최후까지 살아남은 것은 독이 가장 심하게 되는데, 이것을 칼로 찔러서 피를 뽑아 약을 타 가지고 있다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오는 부인에게 반드시 먼저 이 물로 눈을 씻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청정(淸淨)하지 않아서 부처를 볼 수 없다 한다.
이렇게 눈을 씻은 뒤에 방에 들어가면 금빛이 눈을 부시게 하는데 이것을 망령되이 귀신이 보이는 것이라 하며,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길이 믿게 하여 성불(成佛)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때, 도사가 큰 대바구니 속에 부인과 옷을 벗고 앉아서 끌어안고 전도(傳道)하게 되는데 부인이 이를 따르지 않으면 어린아이에게 자기의 성기(性器)를 쓰다듬게 하여 마치 타고난 고자(鼓子)인 것처럼 속여 그 부인으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게 해서 대바구니 속에 들어오게 한다. 여자와 직접 몸이 닿게 되면 대들어서 일을 저지르는데, 처음에 더러는 응하고 더러는 응하지 않으나 끝내는 욕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밖에 나와서는 누구도 감히 남에게 이를 말하지 못하므로 그 뒤를 잇는 자가 끊이지 않는다. 심삼랑(沈三郞)이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와 통하고 나서 더욱 가까워져서 매번 마을의 부녀들을 불러가지고 와서 그에게 넘기면 모두 더럽혀진다. 이에 넘어간 자가 매우 많아서 항상 수백 명이 모였는데, 왕문경(王文竟)이 잡아 죽였다.' 한다." 하였다.
방작(方勺)이 지은 《청계구궤(靑溪寇軌)》에는 이런 말이 있다.
"끽채사마(喫菜事魔)는 후한(後漢) 사람 장각(張角)과 장연(張燕)이 천사(天師)에 의탁하고 도릉(道陵)을 원조(遠祖)로 삼는 교(敎)이다.
좨주(祭酒)를 두고 병을 고치는데 다섯 말의 쌀을 내면 병이 마침내 완치되었으므로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도 한다. 그들의 비행이 점점 성행하면서부터는 고을을 협박 약탈하였다.
그들이 지금에 와서는 채소만 먹고 마왕(魔王)을 섬기는데[喫菜事魔], 밤이면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무릇 마왕에게 절을 할 때는 반드시 북쪽을 향해서 하는데, 이는 장각(張角)이 처음에 북쪽 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절하는 것을 보면 족히 그들이 높이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들이 평시에 행하는 것을 살펴 보면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야윈 것을 좋아하며 조용한 것을 즐긴다. 선(善)을 행하는 데 뜻을 둔 사람은 남녀 구별 없이 농사나 길쌈을 하지 않는다. 섣달이 되면 이들이 난(亂)을 꾸미기 때문에 국가의 법금(法禁)이 매우 엄하여, 이를 범한 자의 가족도 정상을 알고 있었다면 먼 곳에 유배시키고 관(官)에서 재산을 몰수한다.
근래에 이를 믿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는데 처음에는 복건(福建)에서 시작하여 온주(溫州)까지 이르더니 마침내 이절(二浙 절동(浙東)ㆍ절서(浙西)를 이른다)까지 이르렀다.
그들의 교법(敎法)은 훈채(葷菜)와 술을 끊고 귀신이나 부처 및 조상을 섬기지 않으며 손님을 맞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발가벗겨서 장사지내는데 염습할 때는 의관을 극진히 꾸미고 그들의 무리 두 사람을 시체 곁에 앉힌다. 그중 한 사람이 묻기를 '올 때에 관(冠)을 썼었느냐?' 하면 다른 한 사람이 '쓰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곧 그의 관을 벗기고, 다음에는 옷과 신을 물어서 하나하나 벗기게 되면 '세상에 올 때 무엇을 가졌는가.' 하고 물으면 '옷에 싸여 있었습니다.' 하면 베로 만든 주머니에 시체를 담는다고 한다.
마왕(魔王)을 섬긴 뒤에 부자가 된 소인(小人)이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술ㆍ고기ㆍ연회ㆍ제사ㆍ후장(厚葬)을 끊으면 스스로 능히 재물을 모을 수 있으며, 또 처음 그 당(黨)에 가입해서 매우 가난한 자가 있으면 여러 사람이 재물을 모아 도와 주어서 조금씩 쌓아 소강(小康) 상태에 이르게 된다. 무릇 외출할 때에는 지나는 곳마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당인(黨人)이면 모두 재워주고 먹여주며 모든 물건은 네것 내것의 구분없이 같이 사용하며 한 집안으로 여기기 때문에 막히는 것이 없다.'는 등의 내용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들의 괴수를 마왕이라 하고 여자를 마모(魔母)라고 한다. 각기 유도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49전을 내고 마왕이 있는 곳에 향을 피운다. 마모는 얻은 돈을 모아서 때때로 마왕에게 바치는데, 일년에 수많은 양의 재산을 모은다."
송(宋) 나라 사람 정소남 사초(鄭所南思肖)가 지은 《심사(心史)》에는 대략 이러한 내용이 있다. "부처의 소상(塑像) 보기를 좋아하며, 부처와 요망한 여자가 맨몸으로 합하고 있는 등 갖가지 음탕한 모양을 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서번(西番)의 외도(外道)인 사법(邪法)의 요승(妖僧)이 만든 것이다.
그는 주수(呪水)를 본받아서 스스로 물밑의 5색의 강한 광선을 보면서 잉부(孕婦)의 혼백에게 저주를 하면서 '그 기이하고 특이한 일을 보았는가?' 하고 물어서 '보았다.' 하면 잉부를 묶어놓고 쇠칼로 두 유방을 찌르고 노주(虜主) 이하 여러 사람이 그 피를 빨아서 잉부의 피가 마르면 명하여 배를 잘라 가르고 아이를 꺼내어 잘게 썰어서 나누어 먹는다.
요승(妖僧)이 저주한 요수(妖水)를 가지고 달주(韃主)와 여러 추장에게 눈을 씻고 자세히 보게 하면 잉부 모자(母子)는 오색 구름을 타고 날아간다 한다.……"
이상의 여러 조문(條文)을 가지고, 지금 사교를 믿는 자들의 행위와 대조해 보면 사교에서 행하는 것이 이상의 여러 조문과 방불하다.
생각건대, 서양 사람들이 중국에 들어와 다시 중국에서 사술(邪術)을 배우고, 사당(邪黨)이 다시 본술(本術)을 끼고 종합해 새로운 하나의 사술을 만들어 야소(耶蘇)의 이름을 빌려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인 듯하다.
그러므로 지루한 것을 불구하고 여러 서적을 인용 변증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고치는 바가 있게 한다.이와 같은 여러 사실을 보고 나면 내 말이 아마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금상(今上 조선조 헌종(憲宗)을 이른다) 12년(1846) 즉 병오년
청(淸) 나라 도광(道光) 26년 7월 초순에 호서(湖西)의 홍주목(洪州牧) 외연도(外煙島)에 거대한 선박 1척이 와서 정박하였다.
사정을 알아보니, 대불랑서국(大佛
西國) 사람이라 하였다. 그들이 궤짝 하나를 내놓으며 "문서는 궤짝 속에 있으니 조정에 올리시오." 하기에 목사가 처음에는 받지 않고 누차 따져 물으니 배를 띄워 달아났다.
목사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그 궤짝을 주사(籌司 비변사(備邊司)의 별칭)에 올리니, 자세히 사정을 물어보지 못하고 달아나게 하였다고 해서 모두 그 직에서 파면되었다. 그 궤짝에 들어있던 문서가 세상에 돌아다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불랑서국(大佛
西國) 수사(水師) 제독으로 인도(印度)
인도는 상고하건대, 지구도(地球圖)의 전도(前圖)의 오른편에 있다. 남인도(南印度)와 과십답(戈什嗒)은 대서(大西) 각국의 곁에 있다. 와 중국해(中國海)에 있는 군함을 맡고 있는 원수(元帥)인
슬서이(瑟西爾)는, 우리나라 백성이 죄없이 살해된 것을 밝혀 묻고자 합니다. 듣건대 기해년(1839) 8월 14일에 일찍이 불랑서 사람인
안수이(安愁爾)ㆍ사사당(沙斯當) ㆍ모랑(慕郞 낭(郞)은 방(邦)의 오식인 듯하다) 세 사람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덕망이 높은 선비였는데 뜻밖에도 귀 고려(高麗)에서 살해되었다 하니, 이 동방의 원수(元帥)는 우리나라 사람을 보호할 책임이 있으므로 우선 와서 묻습니다.
그 세 사람이 어떠한 죄를 저질렀기에 이같이 참혹한 죽음을 받았는가요. 혹은 말하기를 귀 고려의 국법이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는데 저들 3명이 국경을 넘어 들어왔기 때문에 살해되었다 합니다.
그러나 본관(本官)이 살펴보건대, 한인(漢人)ㆍ만주인ㆍ일본인은 함부로 귀 고려의 국경에 들어오는 일이 있더라도 보호되어 국경 밖으로 내보내는 데 불과하고 괴롭히거나 죽이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묻고자 하는 것은 어찌하여 저들 3명을 한인ㆍ만주인ㆍ일본인과 같이 대우해 주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생각하건대 귀 고려의 중책을 맡고 있는 당신은 아직 불랑서 황제의 어지신 덕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백성으로 비록 고국을 떠나 몇 만리 되는 곳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황제는 결코 그를 버려두지 않고 은덕을 한 가지로 받게 하고 있사오니, 모름지기 우리 황제가 큰 은혜를 널리 펴서 그 국민을 천하 만국에서 보호하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 국민이 다른 나라에서 죄를 저질러 살인ㆍ방화(放火) 등의 폐해가 있다 하면, 그 사실을 조사하여 벌을 주어도 따질 것이 없사오나, 그들이 죄도 없이 학살된다면 이는 곧 우리 불랑서 황제를 크게 욕을 보여 원한을 가져오게 하는 것임에 틀림 없는 것입니다.
대개 본관이 묻고자 하는 바는, 우리나라의 어진 선비 세 사람이 귀 고려국에서 살해된 사정입니다. 생각하건대
대감께서 이에 즉시 대답하지 못할 것 같으므로, 이러한 뜻을 우선 알려드리고, 내년에 우리 군함이 특히 이 일로 다시 올 것이니, 귀국은 그 때에 회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본관은 대감께 우리나라의 황제가 그 국민을 보호하는 어진 덕이 있음을 직고(直告)하여 이에 분명히 귀국에 통보하오니, 이후로 다시 우리 국민을 학살하는 일이 있사오면 귀 고려국은 반드시 큰 재해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재해가 올 때에는, 위로는 귀국의 국왕에서부터 아래로는 대신 백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을 원망할 수 없을 것이며 다만 스스로의 불인(不仁)ㆍ불의(不義)와 무례(無禮)함을 원망하게 될 뿐일 것입니다. 오로지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구세주(救世主) 탄생 1천 8백 46년 5월 초8일.
장정부(莊廷敷)의 지구도(地球圖)를 상고해보면 "남극(南極) 아랫 부분에 새로 남묵리가소지(南墨利加少地) 등을 그리고 모두 제 5대주(五大州)라고 하였다.
일찍이 불랑서(佛
西) 해군이 대랑산(大浪山)에서 멀리 바라보니 육지가 보이므로 찾아가 보니 오직 아득히 펼쳐진 벌판 뿐이었다. 밤이 되자 하늘에는 성화(星火)가 가득하였고 대낮에는 사람이라고는 없고 단지 한 곳에 앵무새만 보이므로 이곳을 앵무지(鸚鵡地)라 이름 붙였다 한다." 하였다.
이로 보아도 불랑서라는 나라가 과연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러나 낭(郞)자의 왼쪽 곁에 특별히 날일[日]자를 붙인 것이 이상하다. 날일자를 붙인 것은 아마도 입 구[口]자의 착오가 아닌가 모르겠다. 이것은 영길국(
咭國)을 영길(英吉) 두 자의 곁에 입 구[口]자를 붙여서 영길(
咭)로 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낭서(啷西)라 쓸 것을 착오로 낭서(
西)라고 썼거나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옮겨 쓰면서 잘못된 것이리라.
이제 그 문서를 살펴보니 한자(漢字)로 썼고 또 문장도 익숙한 솜씨여서 중국에서 널리 쓰이는 공문(公文)과 유사한 점이 있으니, 저들 중에 반드시 한문과 한자를 익힌 자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저들의 말대로 과연 기해년(1839) 8월 초순에 서양인 나백다록(羅伯多祿)ㆍ정아각백(鄭牙各伯)ㆍ범세형(范世亨) 등 세 사람을 엄중히 조사하여 사형시킨 일이 있다. 그런데, 이제 저들의 문서에 쓰인 날짜가 모두 맞으니 어떻게 9만여 리나 떨어져 있는 외국의 일을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일까.
반드시 중국 연경(燕京)의 천주당(天主堂)과 오문(澳門)을 통해서 알았을 것이다.
기해년에서 병오년까지는 8년의 간격이 있는데, 이렇게 뒤늦게 알고 찾아와 따지는 것은 그 나라가 뱃길로 몇 년이 걸려야 비로소 중국에 도달하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문서의 뜻을 살펴보건대, 무한한 복선(伏線)이 깔려 있어서, 평범하게 표류된 자들의 행위가 아니니 뒷날의 문제가 없을지 어찌 알겠는가. 임진년의 왜란과 병자년 청란(淸亂)이 미리 그 내침의 조짐이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덮어두고 살피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표류선(漂流船)을 보통 황당선(荒唐船)이라 하여 족히 염려할 게 없다 하지만 이미 그러한 사건이 있었고 또 그에 대한 실제의 항의 문서가 있으니 어찌 마음에 경계함이 없을 수 있겠으며, 기(杞) 나라 사람의 염려와 칠실(漆室)의 근심이 없겠는가.
또 《청일통지(淸一統志)》와 《청삼통(淸三通)》ㆍ《명사(明史)》 등의 서적을 상고해 보아도 대불랑서국(大佛
西國)은 없으니, 이 나라가 어느 지방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나라가 대서양(大西洋)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청일통지》와《명사》에는 불랑기(佛狼機)라는 나라가 있는데 혹시 이 나라가 국호를 바꾼 것일지도 모른다.
《곤여외기(坤輿外記)》에 "불랑찰(佛郞察)은 구라파주 이서파니아(以西把尼亞)의 동북에 있다." 하고, 또 불람제아(拂覽第亞)라는 나라도 실려 있다. 곤여도(坤輿圖)에는 불란기(佛蘭機)라는 나라가 있으니, 요컨대 대서양과 구라파 중의 한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후일 다시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용인(龍仁) 김재준(金在俊)의 아들 재복(再福)이 중국에서 온 신부 유방제(劉方濟)를 따라 갔다가 금년 즉 병오년에 돌아왔는데 이름을 고쳐 대건(大建)이라 하였다. 그는 경강(京江)의 용산(龍山)에 살면서 장사치를 시켜 이익이 두 배로 남을 물건만 바꾸고 팔게 하여 일일이 효험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서 포도청에 체포되어 형(刑)을 받았다 하였다.
정미년(1847) 7월에 대불랑서의 큰 배 2척과 중간 배 15척이 호남(湖南) 만경현(萬頃縣) 해포(海浦)에 와서 정박하고는, 수군 제독의 배라고 하면서 지난 해에 와서 안수이(安愁爾)ㆍ사사당(沙斯當)ㆍ모랑(慕郞) 세 사람이 처형된 이유를 물은 데 대한 답서를 받으러 왔다고 하였다.
만경 현감(萬頃縣監)ㆍ고부 군수(古阜郡守)ㆍ군산 첨사(群山僉使)가 사정을 물어보기 위해 배에 오르니, 단지 15인만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고 나머지는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배 위에는 관원이라고 일컫는 자 수십 명이 늘어 앉았는데, 많은 사람이 무기를 들고 호위하여 매우 엄숙하였다.
그들의 말이,
"우리들은 우리 원수(元帥)의 명을 받들고 작년에 우리가 보낸 문서의 회답을 받으러 왔다. 서둘러 회답을 가져오지 않으면 응당 우리 원수에게 보고하여 며칠 안으로 내도(來到)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우리측과 문답한 내용은 이러하다.
"원수(元帥)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광동(廣東)에 있다."
"광동은 여기서 몇 리나 되는가?"
"수로(水路)로 3천 리이다."
"당신네 나라는 이곳에서 몇 리나 되는가?"
"이곳에서 수로로 2만 리이다."
그 배에 실은 것은 모두 대포와 화약ㆍ연환(鉛丸)이었고, 기타 비단과 잡화가 가득하였으나 배 밑에 깊이 감춰두고 보지 못하게 하였다.
"배 안에는 몇 명이 있는가?"
"7백 명이 있다."
하였는데, 그 기세가 매우 사나웠으며, 사람들은 푸른 눈동자에 머리는 노란 색이었고 의관은 이상하고 야릇하였다.
또,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 식량이 떨어져 기사(飢死) 직전에 있으니, 양곡과 물고기ㆍ채소 등을 많이 가져다 주어야 살 수 있다." 하기에,
"식량과 반찬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상관의 지휘에 달려 있으니 내가 어찌 마음대로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고 대답하자, 저들이 말하기를,
"상관은 같은 동료이라 의리상 형제와 같으니 하급 관리가 어찌 품고(稟告)한 후에야 하는가. 만일 즉시 식량과 반찬을 보내주지 않으면 죽음이 박두했으므로 우리들은 귀국의 민가를 약탈해서 먹을 것이다."
하였다. 말이 매우 거칠고 사나우므로 문정관(問情官)이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며칠 동안 장계를 올려서 일곱여덟 차례나 시끄럽게 오갔으니 그 위급하게 된 형세를 알 수 있다. 그 후 들으니 조정에서 그들에게 식량을 줄 것을 허락하였다 한다.
저들이 또 말하기를,
"우리들의 큰 배가 육지에 정박할 때 파괴되어 못쓰게 되었으니, 귀국의 큰 배 2척을 빌려주면 배값은 우리가 광동(廣東)에 가서 갚아주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육지에 내려서 해변에 막사(幕舍)를 짓는데 막사의 높이는 8길 남짓했으며 비단 장막으로 막았고, 막사의 수는 10여 개인데 한 막사에 수십 명이 들어갔다. 장막 밖에는 무기를 든 군사를 많이 풀어서 자위(自衛)하고 한편에는 대장간을 지어 놓고 무기를 만들고 한편에서는 화약을 만들고 포통(砲筒) 아래에는 다시 창 칼을 꽂아서 한 무기를 두 가지로 사용하였다.
그 큰 배는 길이가 46장(丈)에 높이가 4~5장이고 구리판으로 배를 둘렀으며, 뱃전에는 화살을 막는 장벽을 만들어 놓았으며, 이의 입구는 마치 성가퀴 같은데 여기에 포구(砲口)가 주발 만한 대포를 배치해 놓았다.
그들의 행동이 극히 수상해서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모르겠으나, 이 배가 와서 정박한 뒤에 전하는 말로는 하늘에서 갑자기 격렬한 천둥과 벼락을 쳐서 삽시간에 배에 타고 있던 오랑캐들을 죽였다고 하는데 이 말은 잘못 전해진 말이다. 대체로 호남(湖南)의 바닷가 사람들이 이 일로 놀라고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어수선하여 안정되지 못한 데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는 비록 전해 들은 것을 대략 기록한 것이기는 하지만, 호남 감사의 장계를 보고 온 자가 전해준 것이다. 우선 소식이 있기를 기다려서 차례대로 계속해서 기록하고 싶으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에 있으니 무슨 길로 소식을 듣겠는가. 다만 스스로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사건의 실마리를 살펴보면, 지난해에 받지 않겠다는 문서를 억지로 던져두며 내년에 다시 회답을 받으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간 것은 장차 난을 일으킬 조짐이었고, 이제 많은 배에 무기를 싣고 와서 육지에 내려 막사를 치고 무기를 만들며 화약을 만드는 것은, 자기들의 힘이 세다는 것과 오래 머무르겠다는 뜻을 보이려는 것이다.
저들도 사람이니 어찌 지난 번에 이미 우리가 문서를 받지 않으려 한 것은 생각지 않고 이제 우리가 즐겨 회답하리라고 생각하겠는가. 더구나, 만리 길을 와서 전한 문서를 그때에 즉시 회답을 받지 않고 해가 지난 뒤에 회답을 받는 것은,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양식을 청하고 배를 빌려달라는 것과 이치에 맞지 않는 허다한 말은 그 뜻이 양식과 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를 한번 시험해보려는 것이니, 만일 그들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위협하고 해독을 끼치기 위한 핑계를 만들려는 간사한 꾀이다.
전초적인 행동이 이미 지난해 문서를 던지고 갔을 때에 나타났는데, 조정에서는 장차 어떻게 조치할지 자못 근심스럽다. 내가 그 뒤에 전하는 말을 들으니 조정에서 한참 뒤에 그들이 청하는 양식을 주었더니 물리치고 받지 않으면서 "어찌 너희 나라에서 주기를 기다려서 먹겠는가." 하고는 한 통의 봉서(封書)를 꺼내어 만경 현감(萬頃縣監)에게 주며 조정에 올리라고 하였다. 현감이 처음에 거부하고 받지 않다가 협박하므로 부득이 받아서 감영에 올렸다. 감사가 함부로 문서를 받았다고 하여 파면하고 그 글을 돌려보내기를 청하니, 조정에서는 일이 이미 날짜가 지났다고 해서 대죄거행(帶罪擧行)하게 하였다.
그 오랑캐들이 또 부안 현감(扶安縣監)을 시켜 봉서를 올려 회답을 받게 하니, 부안 현감이,
"이 일로 앞서 만경 현감이 파직되었는데 내가 어찌 감히 따르겠는가."
하고 굳게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자, 그쪽 장군이 호통을 치며 죽이겠다고 위협하므로 부안 원이 두려워서 글을 받아 사유를 갖춰 적어서 감영으로 보냈고 감사도 또한 이러한 뜻과 아울러 봉서(封書)를 조정에 올렸다. 봉서 중에 화상(畫像) 3건이 있었는데 숨기고 내놓지 않았고 글의 내용도 숨겼다 한다.
조정에서 정원(政院)에 명하여 회답을 보내니 저들이 답서를 받고는 큰 배 2척을 남겨서 병기와 잡물을 실어 문정관(問情官)에게 맡기고, 나머지 배는 일시에 떠나면서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그 배를 남겨둔 것이 다시 오겠다는 뜻이나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이 해변에 있을 때에 자주 광동(廣東)을 왕복하였는데, 왕복에는 14일이 걸리니 7일이면 광동에 도착할 수 있다 한다. 또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에게 들으니 여자를 많이 약탈해 갔다 한다.
지난해에 중국에서 광동성(廣東省) 전체를 낭서인(朗西人)에게 주어 지금은 저들의 관할이 되었다 한다.
남겨 둔 배 가운데 하나는 섬에 교착시켜서 움직이지 않게 해놓았는데 이는 일을 중요한 시점에 일으켜 이를 타고 넘어오기 위해서 그런 것이고, 하나는 바닷가에 놓아 두었는데 이는 병기(兵器)가 소실되면 이를 가지고 트집잡으려는 계책이다. 우선 내년을 기다려서 다시 기록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