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山李氏(덕산 이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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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由 來 |
| 始 祖(시 조) : 李存述(이 전술) 始祖(시조) 李存述(이 전술)은 高麗(고려) 明宗(명종) 때 德豊(덕풍)(現 忠淸南道 禮山郡 德山面) 戶長(호장)을 지내서 後孫(후손)들이 德山(덕산)을 本貫(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의 아들 李彦厚(이 언 후)는 野人征伐(야인 정벌)에 功(공)을 세워 檢校大將軍(검교 대장군)의 벼슬에 올 랐고, 孫子(손자) 李克甫(이 극본)도 代(대)를 이어 檢校大將軍(검교 대장군),曾孫(증손) 李赫(이혁)은 檢校軍器監(검교 군기감) 等(등) 3代(3대) 將帥(장수)를 내며 家門(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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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人 物 |
| 高麗勳臣家門(고려 훈신 가문)의 義理(의리)와 忠節(충절)을 지켜 草野(초야)에 돌아간 李愉(이유)는 朝鮮時代(조선시대)에 朝鮮開國功臣(조선 개국공신)의 한 사람인 하륜(河崙)의 懇請(간청)에 못 이겨 大護軍(대호 군)으로 벼슬길에 나가 東北面(동북 면) 女眞族反亂鎭壓(여진족 반란 진압)에 功(공)을 세웠다. 李愉(이유)는 이를 契機(계기)로 太宗(태종) 때에 判尙州牧使(판상 주목사), 刑曺參判(형조참판)을 거쳐 咸吉道觀察使(함길도 관찰사)로 在職中(재직 중) 돌아가자, 임금이 祭官(제관)을 보내 厚(후) 히 葬事(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40餘名(여명)이 文科及第(문과급제),陰私等(음사 등)으로 벼슬에 올랐고 忠孝義烈(충효의 열)의 家風(가풍)을 굳건히 지켜 朝廷(조정)에 널리 알려진 孝子(효자), 孝婦(효부), 烈女(열여)만도 10餘名(여명)을 헤아린다. 特(특) 히 中始祖(중시조) 李愉(이유)의 4兄弟(형제)와 그 아들 李師孟(이 사망)의 5兄弟(형제)가 모두 朝鮮初期(조선 초기)부터 벼슬을 하며 忠誠(충성)을 하여 世宗大王(세종대왕)이 이 家門(가문)을 嘉尙(가상) 히 여겨 "높은 집안의 많은 子孫(자손)들이 班列(반열)에 參與(참여) 하여 政事(정사)가 밝게 펼쳐진다. (高門詵柱列朝端近日宣麻轉可觀)"라는 詩(시) 한 首(수)를 下賜(하사) 해 德山李氏(덕산 이 씨)의 큰 자랑이 되어있다. 近世(근세)엔 舊韓末(구한말) 中樞院(중추원) 醫官(의관) 李尙萬(이상만)의 아들 李宗源(이종원)이 英國(영국) 케임브리지大學에 留學中(유학 중) 乙巳保護條約(을사보호조약)이 締結(체결) 되자 하와이로 亡命(망명) 하여 安昌浩(안창호) 李承晩(이승만)과 獨立運動(독립운동)에 投身(투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05年 亡國(망국)의 恨(한)을 안고 自決(자결) 했다. 그의 무덤과 墓碑(묘비)가 아직도 하와이 나루로 公園(공원)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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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科擧及第者(朝鮮時代) |
| 李震吉(이 지나 길) (1561 辛酉生) : 文科 宣祖 19年(1586) 別試 乙科 李德全(이 더 그전) (1664 甲辰生) : 文科 肅宗 13年(1687) 式年試 丙科 李蕃(이번) (1664 甲辰生) : 文科 燕山君 10年(1504) 式年試 丙科 李師季(이 시계) (1664 甲辰生) : 文科 世宗 14年(1432) 式年試 同進士 李義臣(이 위신) (1664 甲辰生) : 文科 明宗 4年(1549) 式年試 丙科 李師孟(이 사망) (1664 甲辰生) : 文科 太宗 14年(1414) 式年試 乙科 李曾門(이증문) (1664 甲辰生) : 文科 世祖 5年(1459) 式年試 丙科 李師曾(이사증) (1664 甲辰生) : 文科 世宗 1年(1419) 式年試 同進士 李景文(이경민) (1558 戊午生) : 武科 宣祖 34年(1601) 式年試 丙科 李光翼(유광익) (1636 丙子生) : 武科 顯宗 13年(1672) 別試 丙科 等 모두 16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文科 8名, 武科 3名, 司馬試 5名) |
▣ 世居地 |
| 慶北(경북) 漆谷郡(칠곡군) 東明面(동명면) 鳳岩洞(봉암동)은 德山李氏(덕산 이 씨) 가 5百餘年(백여 년) 터 잡아 사는 옛 마을이다. 벼슬을 멀리하고 숨은 선비로 餘生(여생)을 마친 入鄕祖(입향조) 李云顯(이 운현)은 自身(자신)이 터잡았던 台峯山(태봉산)에 묻혔다. 後孫(후손)들이 繁盛(번성) 하면서 그의 뜻을 기려 台峯齊(태봉 잼)를 세우고 享祀(향사)를 받들며 祖上(조상)을 섬기는 傳統(전통)을 잇고 있다. 天惠(천혜)의 要塞(요새)인 台峯山城(태봉산성)이 北方(북방)을 가로막고 있는 이곳은 入鄕祖(입향조) 李云顯(이 운현) 때부터 德(덕)을 崇尙(숭상) 하는 家風(가풍)이 이어져 後孫(후손)들이 利害關係(이해관계)에 얽히거나 是是非非(시시비비)를 가려본 일이 없는 것이 家門(가문)의 傳統(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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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貫 沿革 |
| 本貫所在地 : 忠淸南道 禮山 德山(덕산)은 忠淸南道(충청남도) 禮山郡(예산군)에 屬(속) 한 地名(지명)으로 本來(본래)는 德豊(덕풍)·伊山(이산) 等(등) 두 개 縣(현)을 合(합) 한 名稱(명칭)이다. 伊山縣(이산현)은 百濟(백제) 때는 馬尸山郡(마니산군)이라 불리다가 757年(新羅景德王 16)에 伊山郡(이산 군)으로 바뀌어 熊州(웅주:公州)가 管轄(관할) 하였고, 今武縣(금무현)과 目牛縣(목이 현)이 伊山郡(이산 군)의 領縣(영현)이 되었다. 1018年(顯宗 9)에는 洪州(홍주:忠淸南道 洪城郡)의 貫轄(관할)에 있다가 後(후)에 監務(감무)를 둠으로써 獨立(독립)하였다.德豊縣(덕풍현)은 百濟(백제)의 今物縣(금물형)을 新羅(신라) 景德王(경덕왕) 때 今武縣(금무현)으로 改稱(개칭) 하였고, 940年(高麗 太祖 23)에 德豊縣(덕풍형)으로 바꾸어 伊山縣(이산현)과 함께 洪州(홍주)의 屬縣(속현)이 되었다가 1175年(明宗 2)에 監務(감무)를 두면서 獨立(독립) 하였다. 1405年(太宗 5)에는 두 개縣(현)을 倂合(병합) 하여 德山縣(덕산현)을 만들었고, 1828年(純祖 28)에 德山郡(덕산군)으로 昇格(승격) 하였다. 1895年(高宗 32) 地方制度(지방제도) 改正(개정)으로 洪州府(홈 주부)에 所屬(소속) 되었고, 1896年에 忠淸南道(충청남도)에 所屬(소속) 되었다. 1914年 郡面廢合(군면 폐합)으로 德山面(덕산면)으로 縮少(축소),廢止(폐지) 되어 只今(지금)은 禮山郡(예산군)에 屬(속) 한 德山面(덕산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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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人口數 |
|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 하면 德山李氏(덕산 이 씨)는 1985年에는 摠 1,732家口 7,355名, 2000年에는 摠 2,215家口 7,198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 [출처] 德山李氏(덕산 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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