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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Letter
진화(라는 神)는 앞을 내다볼 줄 모르지만,
자연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존재를 서서히 만들었다
---------------▶ 대니얼 데닛 / 마음탐구자, 철학자
(깨우지 마세요. 뇌를 정리하는 중입니다. 화가 : 앙리 루소)
우리는 눈이 아니라 뇌로 봅니다.
하지만 막상 뇌를 열어 보니 '영혼'이나 '자유의지' 대신 유전자, 호르몬, 시냅스 따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눈이 아니라 뇌로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뇌가 편집한 영상을 본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눈을 감고서도 무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는 물론 '무언가를 본다'고 하지 않고, '떠올린다'고 합니다.
잠깐 눈을 감고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지 않고서도 이런 식으로 어떤 영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실재 눈으로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다름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경도 된 작품, 피카소의 '꿈'은 세 번째 애인을 만난 후 그린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꿈'은 어떨까요?
우리는 꿈을 꿀 때 눈을 전혀 사용하지도 않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꿈을 꾸면서 눈을 움직이는 걸 보면, 그때는 반대로 뇌가 눈으로 시각정보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뇌가 틀어준 영상을 눈이 보고 있는 셈이죠.
꿈과 마음의 기원을 알려면 '영혼이라는 가설' 대신 신경다윈주의에 의거하여 다음 두 가지 가정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꿈과 마음, 자아와 의식, 정신과 영혼 등은 모두가 뇌의 작용이다.'이고,
두 번째는 '뇌는 진화과정(진화라는 신의 창조과정)에서 만들어졌다.'입니다.
위 두 가지 아주 간단한(?) 가정을 수용하면, 우리는 잠정적 결론을 하나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이나 꿈을 통해 어떤 심상을 떠올리듯, 장구한 진화의 역사 어딘가에서 마음이라는 심상이 서서히 떠올랐다! 마음은 진화가 꾸는 꿈이다!"
진화심리학자 전중한 교수는 이를 좀 더 과학적으로 표현합니다.
"마음이란 먼 과거의 환경에서 조상들이 직면했던 다양한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도록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심리적 장치들의 모음이다."
마음이 생겨나면서 우주는 최초로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기원이 궁금한 우리는 진화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신경과학자 폴 맥린이라는 신경학자는 뇌의 진화와 관련해서 소위 '삼위일체설'을 주장했습니다.
뇌는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그리고 인간의 뇌로 진화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도식적인 표현이긴 하나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인간의 뇌 구조를 아주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의 뇌는 크게 세 부분,
즉, 뇌간(뇌줄기)과 소뇌, 그리고 대뇌로 구분됩니다.
마치 커다란 브로콜리 같은 모양인데 줄기에 해당하는 뇌간, 나머지 부분이 대뇌,
뒷부분 아래쪽에 호두 정도 크기로 달라붙어 있는 부위가 소뇌입니다.
이 중 대뇌는 전체 뇌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이는 다시 안쪽의 변연계와 바깥쪽의 대뇌피질(신피질)로 구분됩니다. 여기서 뇌간과 소뇌는 주로 인간의 '생존'이나 '운동'과 직결된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활동을 담당합니다.
대뇌 중 변연계에는 해마와 편도체 등이 있는데 해마는 '기억'을 담당하고, 편도체는 주로 '감정'을 담당합니다.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는 중추가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초의 페미니스트인 아담의 첫 번째 애인, 섹스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던 릴리트(와 뱀)는 아담과 불화 끝에 헤어졌고 이브는 두 번째 여인, 영쿡화가 존 콜리어 작품)
이를테면,
뱀에 물린 기억이 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결정합니다.
뱀에 대한 기억이 공포라는 감정과 결합하면 그것은 이후의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겁니다.
감정이란 미래에 사용하기 위해 각각의 기억에 붙인 일종의 꼬리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변연계가 감정과 기억의 뇌라면, 대뇌피질은 '사고'의 뇌입니다.
대뇌피질은 인간에게서 가장 발달한 뇌 부위입니다.
이는 변연계의 정보를 토대로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합니다.
폴 맥린의 삼위일체설'은 '뇌간과 소뇌'를 파충류의 뇌,
변연계를 포유류의 뇌,
대뇌피질을 인간의 뇌로 구분하고, 뇌의 복잡성이 대체로 이 순서로 진화해 왔다고 말합니다.
사실 아기의 뇌도 그 발달과정에서 대충 이와 같은 순서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여기서 양념을 살짝치면,
대뇌피질(신피질 즉, 진화의 역사에서 새로 생긴 뇌)의 완성도는 남,녀에 따라 약간(?) 다르다고 합니다.
물론 남.녀 차이가 없다는 신경학자들도 있지만,
여자는 대뇌피질의 완성이 20세쯤인 반면, 남자는 생후 25년이 지나서야 대뇌피질이 숙성된다고 합니다.
하여,
남자가 여자보다 5년 정도 늦게 철이드는 셈이지요.
(하여, 남자는 10대 때 퐝제철소로 견학 보내야 됩니다. ㅎㅎ)
고로,
저는 결단코 인정하기 싫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우리 시대의 페미니즘적 담론은 진리일 수도 있습니다.
좌우간,
파충류의 뇌가 현재의 생존 및 운동과 관계되어 있다면, 포유류의 뇌인 변연계는 과거의 정보를 처리하고,
인간의 뇌인 대뇌피질은 그 모든 정보를 토대로 미래 전략을 수립합니다.
(※ 대니얼 데닛 : 자연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존재를 서서히 만들었다)
인간은 뇌의 진화를 통해 현재의 생존을 과거와 미래로 확장 시킨 셈입니다.
그리고 생존의 전략을 확장하면서 마침내 '의식'과 '자아', 즉 '마음'이 탄생한 겁니다.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현대 스페인의 3대화가인 호앙 미로는 '꿈과 사랑'을 화폭에 현현 시켰습니다.)
위와 같이 생각하면,
우리가 현실과 문학작품에서 아무리 우려먹어도 지겹지 않는 '사랑'도 뇌처럼 3단계로 진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뱀이나 악어 같은 파충류를 생각하면 왠지 감정이 없고 차가워 보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새끼를 돌보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섹스와 번식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포유류에 들어오면서 뭔가 '감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새끼를 알뜰살뜰 돌보며, 동료들과도 찐한 유대관계를 나누는 동물들이 많습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의 경우는 인간과도 깊은 감정을 교류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미흡합니다. 고도의 사고 능력에서 비롯되는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약속이나 계획 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뇌에서 비로소 이 세 단계가 통일이 됩니다.
말 그대로 삼위일체인 섹스, 애착, 사랑 이 세 가지 층위가 공존하고 협응해서 비로소 복잡한 '인간적인 사랑'으로 진화합니다.
이게 맞는다면 우리는 뇌간과 소뇌, 변연계, 대뇌피질 이렇게 뇌 진화의 모든 역사를 다 바쳐 사랑에 올인한 셈입니다.
하여,
뇌과학을 공부한 시인이라면 아래의 같은 멋들어진 명문장이 탄생할 겁니다.
"내 뇌 진화의 모든 역사를 다 바쳐 사랑한다!. 사 랑 해 !!"
이렇게 해서 마음의 끝판왕, 사랑이 탄생했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두뇌야말로 마음의 신비가 아로새겨진 '로제타석'이기 때문입니다.
(꿈에서 사랑을 구원한다는 주제, 1999년 상영된 영화, '메트릭스'는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 '드러남과 베일의 철학'의 뒤집기입니다)
"깜깜한 동굴 속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 그들은 손발이 묶여 있을 뿐 아니라 목도 고정되어 있어 바로 앞의 벽만을 바라볼 수 있다. 동굴의 입구로부터 햇빛이 스며든다. 그들과 빛 사이에 어떤 물체가 있다면 사람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것이 실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본 것은 실재의 허망한 그림자에 불구하다. 우리는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만 사물의 본 모습, 즉 이데아(실재)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데아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화'입니다.
이 우화가 말하는 요점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허상이며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놀랍게도 플라톤은 2,400년 전에도 이미 인간의 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이라면 위 이데아론에서 동굴은 해골로 표현되고 원본에서 모닥불 대신 해골의 두 눈이 빛이 들어오는 창으로 설정된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시각 등의 감각신호야말로 마음의 원천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눈이 괜히 마음의 창이겠습니까?
플라톤의 동굴처럼 우리의 뇌도 두개골이라는 어두운 동굴에 갇힌채로 긴 감각촉수를 뻗쳐 외계를 지각합니다.
마치 플라톤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고 뇌의 착각일 뿐, 곧이곧대로는 절대 믿지마라'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철학화한 장 보드리아르의 저작,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메트릭스'영화 초반에 살짝 보여 줍니다. 마르크스가 해겔철학을 꺼꾸로 세웠다면, 보드리야르는 플라톤사상을 되치기합니다.
플라톤이 설파한 영혼이라는 가상은 천상에서 유유자적하는 존재라면,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우리들이 만든 가상은 오히려 현실보다 더 리얼하다 못해 가상이 현실을 대체해 버린 세계에서 살고 있다며 원본이 없기 때문에 시뮬라시옹은 '흉내 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 즉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미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시뮬라시옹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의 실재'를 '하이퍼리얼리티'라고 칭했습니다.)
(추상표현주의 화풍이 쇠퇴하고 하이퍼 리얼리즘의 세계, 시뮬라시옹, 가상의 미술작품이 오히려 더 현실같은...)
이처럼 뇌는 현실을 기만합니다.
그리고 뇌가 현실을 기만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오히려 우리의 생존에 유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는 역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왜 뇌는 스스로 두개골에 갇혔을까?
왜 깜깜한 동굴의 어둠 속에 갇혔을까? 왜 깜깜한 어둠 속에 갇혀있는 걸까?
그거야 '뇌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냐?'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분이 많겠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답일 뿐입니다.
뇌는 감각신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변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현실과 직접 대면해서 모든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생존에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뭔가를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 같은 착각,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되어 마치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것 같은 환상이 생겨납니다.
바로 강력한 리더 '자아'의 출현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뇌 활동의 제 1원칙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진짜라고 믿도록 하라' 남을 속일려면 먼저 자신을 속여야 하고, 자신을 속이려면 그런 자신을 의식해서는 안됩니다.
뇌는 온 몸의 통증을 느끼지만, 정작 자신의 아픔은 느끼지 못합니다.
뇌는 '자아'라는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뇌 자신의 '자아'를 버린 셈입니다.
자아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습니다.
자아는 상징적 존재로서 중요합니다. 뇌가 생존을 위해 활동할 때 '나'라는 명확한 목표가 생긴거죠.
그래서 역으로 과거의 많은 철학과 종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아를 버리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가상의 존재라는 걸 깨달은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스토리는 가설일 뿐 우리는 아직 이를 확인할 과학적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꿈과 마음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다음과 같은 정도의 이야기 뿐입니다.
'시지각의 정보 처리 방향을 거꾸로 뒤집으면 그게 바로 꿈이다. 평소에 우리는 보고나서 생각하지만 꿈 속에서 우리는 생각하기 때문에 보게 된다.
1.4키로그램의 머리속 덩어리는 재빨리 마법의 베틀이 되고 번쩍이는 베틀 속을 오가는 수백만 개의 북들이 흩어져 사라져 갈 패턴을 엮어낸다.
그 패턴이 기억이고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는 생각한다고 믿고 있지만 기실 앞서 간 전배(前輩)들의 발자국을 기억하고, 융합하여 비튼 것을 자신의 생각인 줄 압니다.
의. 식. 주. 욕망 등 원초적인 것을 빼면 우리의 생각은 없습니다.
어제 서양 문명의 대문자 '아케다'를 얘기 드렸지만 제 생각은 없었습니다. 융합된 이야기일 뿐...
묶기, 비틀기, 뒤집기 등이 종종 멋진 사상이 되기도 합니다.
익히 아시겠지만,
19세기, 20세기 뿐 아니라 아직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헤겔 철학의 멋진 뒤집기입니다.
오늘 저의 미흡한 폿팅은 뒤섞기입니다. ㅎ
참고문헌
뇌과학, 주인과 심부름꾼.
철학 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