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곡부 공씨(공자 공씨)"의 시조라는
공 구에 관하여
그 출생 적 얘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공 구는
여러 님들께서
다들 잘 아시다시피
"유교"의 창시자로 잘 알고 계시리라 믿으며
그 출생의 숨겨진..
그렇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그냥 쫌 숨겨져 있던..
가려져 있던 부분을 파 헤쳐볼까 합니다.
공 구는
지금으로 부터 2,574년 전에 태어나시어
약 72년 여를 사시다가
지금으로 부터 2.502년 전에
지병(기저질환)이 있었다기 보다는
거의 아픔도 고통도 없이
아주 성스럽게
몇 마디 마지막 얘기도
하시면서 사망에 이르셨습니다.
자?
그럼
공 구의 아버지와 어머니 얘기를 할까 합니다.
아~참!!
(제가 쫌 모자라다가 보니 한자 변용을 잘 하지 못합니다)
공 구의 공자는 구멍 공자이며,
공 구의 구자는 언덕 구자를 씁니다.
고로
"언덕에 난 구멍"
or
"구멍 난 언덕" 쯤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자!
그럼
공 구의 아버지와 어머니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버지
숙량흘 64살 직업은 곡부 관아의 하급 공무원 쫌
그 직급이 이방보다는 낮고 포졸보다는 높은
지금으로 치자면 한 10급 정도의 말단 공무원?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 안징재 18살 직업은 동네 무당..
이 때가 춘추(bc.770~403)전국(bc.403~221)시대
(중국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까지의 고대시대)라
성씨를 가졌던 집 안도 있고
그냥
부르면 이름이고 성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공 구를 곡부 공씨의 공자 공씨의 시조라고 합니다.
공씨의 성은
"구멍 공"자가 거의 99%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 1%정도는 "공변될 공"자로 보시면 됩니다.
숙량흘의 첫 번째 부인에게서
장애를 가졌던 아들 하나와
비장애의 딸 둘이 있었다지요.
그런데
그만 첫 번째 부인이 병으러 사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홀애비로 지내기도 적적하기도 해서
후 처(재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땅한 처자가 없자
한 동네 무당 18살 안징재에게 흑심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보쌈입니다.
그렇게
해서 조용하고 깊은 어둔 밤을 틈타 보쌈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굶주린 성욕을 채운다는 것이
그만 덜컥 임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재혼이 아닌 재혼 부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0개월 뒤 낳게 되는 그 아들이 공자이자 공 구가 됩니다.
그렇게
공 구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숙량흘이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스무 다섯 살의 안징재가
전 처의 자녀들까지 맡아서 공자를 키우게 됩니다.
그러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 때는 신정일치제다 보니
무당이라는 직업이 성역같이 성 스럽기도 하지만
천민 중에도 최 하층 천민었습니다.)
새 날만 새면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사주팔자 봐 주는 것이 일이다 보니
우리 공 구가
제례의식이니 주역에
그 관심이
그 누구보다도 깊었던 것이었습니다.
☆후 편은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