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양목 머풀러
한기옥
양파껍질 말려 삶아 치댄 물이에요
횡성 정례 시인 가게 갔더니
옥양목 머풀러 한 장 새색시 적 얼굴을 하고 내미는데
연둣빛 도는 나뭇잎에 귤빛 노을 은은히 비쳐들 때 어리는 색이라 말해야 하나
쪽빛 바다에 옥빛 하늘 반쯤 들어와 누운 낯빛 같다고 해야 하나
어느 날 홀연히 세상 떠난 뒤에
남게 될 내 껍질 한 자락
저렇듯 은근한 빛으로 당신 맘 사로잡을 수 있을까
가루로
남겨질 내 허물 한 접시
양파껍질 삶듯 우려낸 뒤
흰 옥양목 천에 물들인다면
어떤 빛으로 그대 눈가 적셔줄 수 있을까
내 빛깔이며 향기에 걸려
정신 못차릴 이 있기는 할까요?
행여
부끄러운 속내 열꽃처럼 돋아나기라도 할까봐
나는 옥양목 머풀러로 연신
얼굴과 목을 가리며
딴청을 부려보곤 했던 것이다
시집 『세상도처의 당신 』 북인 2023년
어머니經
한기옥
친정어머닌
경찰이던 아버지가 산동네에 나타나
조사할 게 있다고 해 불려나가
취조당하듯
아버지를 만났단다
아버진 뉘집 처자 참하단 소문 듣고
벌인 일이니
그 길로 매파를 보내
혼인날을 잡았단다
오십사 년 세월
건강이 나빠 직장을 그만둔 뒤에도
아버진 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고
엄마는 큰 숨 한번 낼 줄 모르셨다
바닥까지 낮추고 무너지기 위해 세상에 오신 거야요?
난 엄마가 맘에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사남매 결혼해 객지에 흩어져 살다
모이는 날이면
아버지 밥상 가득 넉넉한 웃음을 펴보이며
너희를 이만큼 공부시키고 출가해 잘사는 게 다 네 엄마 덕이다
그리고는 일어나
평생 엄마에게 시키던 커피 물을 손수
가스불에 올리시는 거다
누군가에게 마음 다치고 찾아간 저녁
엄마에게 했던 말
바람결에 자주 들려오는 날들이다
속상해하지 마
질수록
이기는 거다
시집 『세상도처의 당신 』 북인 2023년
한기옥 시인
홍천에서 출생하여 춘천교대와 방통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3년 『문학세계』로 등단해 제12회 원주문학상을, 2009년 첫 시집 『안개 소나타』 로 제7회 강원작가상을 받았다. 2019년에 시집 『세상사람 다 부르는 아무개 말고』 와 『안골』 2024년 『좋아해서 미안해』를 냈다. 현재 강원문인협회와 수향시 표현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