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의 시작은 지하철에서부터 시작된다. 삼호선에선 그렇게 비좁진 않았으나 2
호선에선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예쁜 아가씨라도 지하철 내 사람들 틈에 끼이
면 보잘것 없는 존재로 변해 버린다. 내 주위에도 그런 여자분들이 많이 보였
다. 저렇게 꾸밀려면 바쁜 아침에 시간을 제법 투자했을 터인데, 여지없이 뭉개
지고 있다.
엉? 참 우연이다. 창에 손을 짚었다가 저쪽 끝 문 앞에 상을 찌푸리고 있는 낯
익은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도 창을 짚고 사람들이 밀릴 때마다 표정이 안스럽
게 변한다. 나 도서관 자리 잡아 주겠다더니, 이제서야 학교를 가나 보다. 누나
하고 같은 전철을 타게 되다니 기분이 괜찮다. 누나 등 뒷 쪽에 서 있는 남자들
때문에 누나가 불안해 보였다. 으쒸, 아침 밥 먹은 힘을 사람들 파 헤치고 지나
가는 데 모두 소비했다. 한 구역이 지나치는 시간 동안 나는 한 오미터 정도를
전진해 누나 있는 곳 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누나 뒤에 섰다. 어제 먹은 밥
심으로 뒤에 붙어 있던 사람들을 밀치고 조금 여유로운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누나의 머리결 냄새가 좋다. 머리는 감고 다니다 보다. 꽃 냄새 샴푸 향기가 좋
다. 누나가 주위의 공간이 갑자기 편히 서 있을 정도가 되자 이상한 듯 뒤를 돌
아 보았다. 나는 아주 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죽을 상이겠지? 밀리지 않을려고
졸라 힘 쓰고 있다.
"어? 너."
"헤, 우쒸 밀지 좀 말아요? 누나 안녕."
"교대서 탄거야?"
"예."
"우연이네?"
"그렇네요."
나 지금 말할 힘 없다. 침묵했다. 같은 전철을 탄 것은 우연이지만 내가 누나
에게로 온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우연을 인연으로 만드는 내 노
력이 가상하지 않나요? 누나가 미소 짓는다. 그렇지만 날 보고 짓는 미소는 아닌
것 같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래 누나를 보호하려는 그 정신 고맙게 생각하마.
이왕 힘 쓰는 거 자리 생길 때까지 계속 힘을 써. 지하철이 비좁을 것 같으면 항
상 널 데리고 다녀야겠다. 조그만한게 제법 힘이 있나 봐?"
나 평균 키보다 크다. 결코 조그만 놈이 아니다. 지금 힘을 빼면 누나에게 밀착
이 될 것이고 날 믿고 무사태평으로 힘 들이지 않고 서 있는 누나는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로 픽 꼬꾸라 지겠지? 함 해볼까? 말자.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모
진 힘을 쓰고 있는 내 엉덩이에 여러 가지 물건들의 감촉이 지나갔다. 각진 핸드
백, 아프다. 이건 여자 손? 고개를 돌려 보니 이상한 변태 같은 자식이 웃고 있
다. 이건 남자 엉덩이야 새꺄, 험한 인상으로 답례해 주었다. 엉덩이를 흔들어
보았다. 이건 뭘까? 둥글고 따뜻하다. 또 고개를 돌려 눈으로 확인해 보았다. 어
느 여고생 손에 들려 진 보온 도시락이 내 엉덩이에 밀착이 되어 있었다. 벌써부
터 보온 도시락이 등장했나? 밥 맛 좋게 방귀나 한 방 뀌어 줘야 겠다. 약간 인
상을 찌푸리는 내 주위의 사람들. 내는 모른다.
진짜 너무한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자기가 서 있을 공간을 확보해 주었음 뭔
가 답례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누나는 자리가 생기자 마자 자기만 홀로 가 앉
아 버렸다.
"편해요?"
"응. 넌 계속 서 있어."
사당을 지나니까 서 있기가 한 결 수월해 졌다. 그리고 내리려는 사람들 틈으
로 자리가 하나 생겼다. 사람들 타기 전에 거기로 가면 앉을 수 있다. 빈 자리
로 갈 수 없었다. 누나가 내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놔요."
"그냥 여기 서 있어. 나 심심하단 말이야."
자기 때문에 힘 다 빼 버린 나는 심심풀이 땅콩이 되어 자리가 생겨도 그 사람
옆이 아니어서 앉을 수 없었다.
"누나는 어디서 탔어요?"
"삼성역. 너 가방 이리 줘."
"괜찮아요. 책 한 권 들었는데요 뭐."
"기분 풀렸어?"
"내가 언제 기분 나빴었나요?"
"흠. 오늘은 도서관 올거지?"
"그럴게요."
신도림에서 열차를 갈아 탔다. 재수 좋게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달려 가 앉으
려는 순간 누나의 새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우쒸, 내가 앉을 자리란 말이여. 결국 나는 학교까지 서서 갈 수 밖에 없었다.
누나는 학교로 바로 갔고, 나는 수업에 필요한 책을 챙기러 자취방을 들렀다. 심
심한데 문이나 한 번 차고 가야겠다.
"쾅!"
듣기 좋다. 종종 누나 방을 지나칠 때마다 현관문에 발길질을 해 보자.
수업이 끝나고 누나가 숫자로 남겨 준 도서관 열람실을 찾아 갔다. 지도 자면
서 나만 맨날 잔다고 구박했단 말이지?
모질지 못한 삶 속에서 잊겠다 말하는 것은 차마 잊을 자신이 없어 하는 말입니 다.
별 시덥지 않은 소리 써 놓고 있네.
누나의 연습장 한 쪽에는 몇 자 글이 적혀 있었다. 저건 내가 잘하는 짓인
데... 옆 자리 누나의 가방을 치우고 앉았다. 시험 기간도 아니고, 공부할 것도
뭔지 모르겠다. 오늘 강의 노트한 것들을 꺼내 훑어 보다가 누나가 하도 일어 나
지 않기에 누나 연습장을 빼어 왔다.
답을 달았다. 멋있다.
모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억되는 사람을 받아 들이는 순간부터 사람은
모질지 못합니다.
근데 누굴 못 잊겠단 거야? 승주씨하고 다시 만날려고 이러나? 누나의 엎드린
모습을 곁눈질 해 보았다. 승주 그 새끼는 안돼, 내가 그 새끼는 방해 할거야.
밤에 누나하고 자취방으로 돌아 오는 길에 팔짱을 끼고 왔다. 누나가 쌩긋 웃고 있다.
"누나."
"왜?"
"승주형하고 만났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그걸 왜 묻는데?"
"말해 봐요."
"질투하니?"
"진지하게 묻는 겁니다."
"그냥 처음엔 무덤덤했다가 헤어지고 나니까 생각이 또 나더라?"
잊기 힘들겠군. 내가 그 느낌 좀 알지. 내가 정희 누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이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까 무덤덤했었다. 그렇지
만 누나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 와 만난 반가움과 참아왔던 그리움으로 밤새 누
나 생각만 했던 적이 있다. 또 기분 나쁘다 씨.
"아까 연습장에 써 놓았던 거 승주 형 생각하고 쓴 거야?"
"엉? 그거 봤니? 나도 너 따라 해 봤어. 대상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꼭 승주
를 생각하고 쓴 건 아니야. 너 지금 질투하는 거 맞지?"
"저 진지하게 말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장난같아 임마."
"누나도 자기가 별로 모질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응. 그런 거 같애."
"그럼 모진 척 하지마요. 모질지 못한 사람이 모진 척 하면 안스러워요. 더 초
라해 보이구요."
"후훗, 그런 말을 왜 하는데?"
"진지한 척 하려고."
"참 내. 사람이 아무리 장난스러워도 그 내면엔 모두 심각한 고민들과 진지함
이 있는 거 알아. 진지한 척 안해도 돼."
"알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누나 한번 데리고 오래요. 우리 아버지 새벽에 잠에
서 깨는 것 무지 싫어 하신다고 했죠? 다 일러 줬어요."
"엉? 뭐야?"
"장난이야 장난."
"너 말하지마? 참, 그리고 다음주 화요일이 내 생일인거 알지?"
"그래요?"
"너 작년에 나 잠옷 사주었잖아. 겨울에 입기는 좀 가벼워. 겨울에 입을 만한
걸로 예쁜 거 하나 사와."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이지."
"그건 평민들이나 하는거구."
"진짜 자기가 공주라고 생각해요?"
"응."
"다음에 성공해서 돈 벌면 성하나 지어 줄게요. 거기서 천년 만년 잠이나 자
요. 도서관에서 자지 말고."
"야, 도서관에서 잠시라도 졸지 않는 사람이 어딨냐?"
"일곱 난장이 소개시켜 줄까요?"
"가게에 가서 사과나 사가지고 가자."
"아줌마 독이 든 사과는 없어요?"
"야?"
"공주라며?"
누나 방에서 과일 깎아 먹고 자취방 생활을 시작했다. 겨울 잠옷은 얼마나 할려
나? 가을 잠옷 보다는 비싸겠지? 근데 잠옷도 계절따라 입나? 나는 추리닝 하나
면 사계절 다 해결되는데...
후후, 철수와 다시 도서관을 다니게 되었어요. 홀로 도서관 열람석에 앉아 있다
가 하얀 연습장에 쓴 메모는 아마 시인들이 즐겨 썼던 말일거에요.
내가 승주에게 했던 말 때문에 썼지만 꼭 승주를 생각하고 쓴 건 아닙니다. 내
가 만났던 사람들을 난 잊혀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채 잊어 버렸습니다. 그렇지
만 막상 생각 나는 사람들은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았어요. 나는 제법 모질
다 생각했는데, 가만히 되짚어 보니 그렇지도 못한 거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지
하철에서 철수가 보여준 고마움에 미소가 맺힙니다. 녀석을 잊어야 된다고 생각
하는 시간이 오면 나는 울 것 같습니다. 지금 까지 그와 보낸 시간만으로도 철수
는 남 같지 않습니다. 친동생이었다면? 친동생 하기는 싫어요.
순백의 연습장 위에 한 줄로 써 놓은 그 글 밑으로 꿈을 꾸어 봅니다. 하얀 웨
딩 드레스... 철수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내가 모르는 여인. 철수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여인은 나보다 훨씬 예쁠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그
냥 미소 한번 짓고 연습장에 검은 볼펜 자국들을 휘갈겨 메꿔 갑니다.
철수야 놀자. 공식들로 휘갈기던 연습장에 갑자기 이상한 말을 썼지요. 그래 철
수에겐 이말이 어울립니다. 위에 쓴 말은 승주에게 내가 했던 말이 웃겨서 써
본 말인거 같습니다.
또 한 동안 철수와는 이처럼 지내겠지요?
내 방에 들어 온 철수가 빨간 사과를 들고 나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습니다.
"이거 한 입 베고 쓰러져 봐요."
"니가 깎을래?"
"공주 아니네. 공주면 공주가 했던 일은 다 한다 말이야."
"백설 공주 안해. 착한 거 빼고 별 볼일 없는 그런 공주는 하기 싫어.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백설공주, 또 뭐 있니?"
"인어 공주."
"그래 걔들이 예쁘고 착한 거 믿고 남자 잘 만나서 공주 된거지. 걔들이 잘난
거 뭐 있어?"
"그럼?"
"차라리 명성황후 할래."
"칼 조봐요."
"왜?"
"내가 일본 사무라이 할테니까. 누나는 의연한 자세로"
"나는 한 나라의 황후다. 니깐 이름없는 칼잡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이 아니다. 이렇게 말이지?"
"진짜 강적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 해."
사과가 맛있네요. 독은 안 들었나 봐요. 철수가 칼을 들고 있는 바람에 빨간 사
과를 그냥 한 입 베어 먹었습니다. 철수가 나를 빤히 쳐다 보네요. 나 예쁘지?
녀석과 나는 이런 식으로 또 몇 일을 보내겠지요.
철수와 나를 그린 그림은 내 방 어딘가에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어딘지는 비밀이지요.
철수가 다음 날 잠시 자기방으로 와 보라고 해서 갔더니 컴퓨터를 떡 켜 주더군
요. 신기했습니다.
"야, 내가 어떻게 저기 있니?"
"스켄했어요. 멋있지?"
"스캔이라니? 그림을 컴퓨터에다 입력 시킨거야?"
"그런게 있어요. 스켄해 놓으니까 제법 볼 만하지요?"
"신기하다. 나 유명인인가봐. 컴퓨터에도 뜰 줄이야."
철수가 약간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 봅니다. 알아, 스캔. 그 복사하는
것하고 비슷한거지?
후후, 녀석이 날 좋아하는 것은 맞는데, 어떤 마음을 품고 좋아하는지 아직은
헛갈립니다.
내 생일 때 한 번 확인을 해 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