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명의 敵과 交戰
敵(적)이다! 흰 위장복을 입고 침투해 온 敵이라고 나는 직감하고 그 연락원 청년에게 춘천 내평리에 위치한 본부로 빨리 가라고 지시, 그 집 돌담에 총을 걸치고 조준을 해서 M1 여덟 발을 쏘았더니 한 명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굴러 떨어졌다. 그후 나를 향한 집중 사격이 가해졌다. 나는 집 돌담과 산골 개울 등을 이용해서 총탄을 피하며 달아나 나의 숙소에 들러 수류탄을 주머니에 넣고 나와 내평리 쪽으로 가기 위해 언덕을 올라가는데 불과 15m 거리의 밤나무에 숨어있던 두 명의 敵이 나를 쏘았다.
나는 왼발에 총을 맞고 앞으로 엎드린 자세로 쓰러졌는데 내 총구가 나를 쏜 적을 향하고 있기에 쏘고 한 명은 도망치기에 연속사격을 퍼부었다. 단발소총을 갖고 나를 죽이려고 매복했던 적에게 나의 半(반)자동 M1 소총이 압도적 위력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일어서 걸으려고 했더니 왼발이 허공을 짚는 것처럼 되어 쓰러졌다. 골절이니 걸을 수가 없어서 눈 위를 엎드려 기는 수밖에 없었다. 산 쪽의 敵이 나에게 집중 사격을 가해왔다. 거리가 꽤 있었던 탓으로 맞지는 않았는데 내가 기어가던 밭에 바위가 있어 나도 應射(응사)를 하려고 총을 들었다.
그런데 M1 소총 약실에 눈이 꽉 박혀있어 쏠 수가 없었다. 나는 敵을 속이기 위해 외투를 벗어 그 바위에 걸쳐놓고 잠바를 입은 등을 썰매 삼아 미끄러져 골짜기로 내려가 총을 눈 속에 묻어버리고 기어서 마을 입구의 외딴집 돼지 우리 속에 들어갔다.
아래 위 어금니가 딱딱거리며 온몸이 떨리기 시작해서 출혈이 심했음을 깨닫고 허리띠와 함께 갖고 있던 비상용 끈을 꺼내서 허벅지를 묶고 나뭇가지를 비틀어 지혈을 했다. 왼손으로는 나뭇가지를 잡고 지혈을 위해 비틀어 쥐고, 오른손으로는 수류탄을 쥐고 안전핀이 뽑히기 쉽게 해놓고 있었다. 돼지 우리 속에서 최후를 각오하고 있을 때 마을 청년 한 명이 다가와 빨리 나와서 자기 등에 업히라고 했다. 그는 나를 업고 내평리 쪽으로 달렸다. 나는 그의 등에 업혀가면서 뒷간에서 도망친 간첩 생각을 되씹고 있었다.
제대 준비하다가 맞은 6·25 날벼락
내평리 수색대 본부에 도착한 나는 곧 춘천도립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다. 도립병원에서는 38선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 한 쪽에 단층 건물인 별관병동이 있었는데 치료 수준은 아주 낮은 편이었다.
나의 경우는 엑스레이로 골절부분을 잘 보면서 하퇴부의 가는 뼈와 굵은 뼈 모두 골절부위가 바르게 붙도록 하고 움직이지 않게 깁스를 해야 할 터인데, 엑스레이에 비추어 보지도 않고 손으로 주물러 뼈를 맞추며 副木(부목)을 대고는 붕대를 감았다. 총알이 빠진 상처 구멍을 소독 하고는 다이아친(해열제의 일종) 가루를 뿌리는 게 치료의 전부였다. 38선에서의 빈번한 敵의 침투로 갑자기 생기는 군인 부상병 치료가, 도립병원과 같은 공익병원에서는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병원에서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는 동안 총알구멍은 아물고 부러진 뼈는 부목에 동여맨 채 좌우로 움직거리게 되더니 1950년 3월 초 봄이 되자 붕대를 풀어 부목을 떼어내고 목발로 병원 안을 돌아다닐 수가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연대 정보참모 김동명 소령의 도움으로 온양에 있는 육군 온천 요양소로 가게 되었다. 온천요양소에서는 골절된 뼈가 바르게 붙지 못해서 발생하는 발목의 부자유스러운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뜨거운 온천물에 들어가 왼발로 까치걸음을 하는 운동을 계속 했다.
1950년 5월이 되자 내 왼발에도 힘이 생기게 되고 지팡이 없이 걸을 때 약간 절고 불편은 하나 통증은 사라져 요양생활을 끝내고 원대 복귀를 하게 되었다. 내 소속이던 7연대 정보과로 갔더니 나는 이미 가평에 주둔하고 있는 11중대로 전보 발령이 난 지 1개월이 넘었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동안 복잡한 일들이 많아 정보과의 職制(직제)개편이 있었는데, 나의 경우는 어차피 제대를 할 몸이니 서울 왕래가 쉬운 가평 부대로 가게 했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가평의 11중대로 가서 전입신고를 했는데 중대장은 평안남도에서 월남한 인성훈 대위였고 중대 선임상사는 나와 제주도에서 같은 중대에 있던 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편하게 가평에서 서울을 왕래하며 제대 준비를 할 수가 있었다. 학기 초가 9월로 옮겨가고 있을 때여서 나는 7월 초에 제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7월이 오기 전에 6·25 날벼락이 떨어졌다.
6·25 새벽의 對南 스피커 방송
“국방군 동무들-. 동무들은 100m에 한 사람 200m에 두 사람 꼴로 보초나 서고 있는 형편인데 우리 백만 인민군의 공격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는가? 아까운 청춘의 생명을 헛되게 버리지 말고 인민의 품으로 내려오라.”
1950년 6월25일 새벽 3시부터 가평부대의 38선 지암리 高地(고지) 전방에서는 우리 국군을 향해 투항을 강요하는 對南(대남) 스피커 방송이 시끄럽게 반복되었다. 지금까지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 공격을 예고하는 방송인데 새벽 4시를 목표로 ‘30분이 남았다…’, ‘20분이 남았다…’ 등 카운트다운까지 하면서 투항을 재촉하다가 4시 정각에 砲(포)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는 발을 약간 절며 불편은 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 있어 가평 시내로 나가 숯을 운반하기 위해 들어온 트럭들을 징발, 부대로 끌어와 무기와 탄약과 취사도구와 식량 등을 싣는 등 부대 이동 준비를 했다. 가평 부대에는 당시 ‘스리쿼터’로 불리던 소형 트럭 한 대가 있었을 뿐이니 부대 전체가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열 대 이상의 트럭이 필요했다.
38선 일대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민간트럭을 징발하는 일은 무리 없이 진행되어 26일부터는 부대 이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가평 거리를 발 밑으로 내려다보게 되는 보납산을 점령한 인민군이 만세를 부르고 있을 때, 우리 가평 부대원들은 모두 차에 올라 철수를 시작했다. 이때 우리 육군본부의 L19 연락機(기)가 나타나 ‘가평 부대는 서울로 가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가평의 2개 중대는 서울을 향해 달리고 있었는데 마석에서 우리 대대장인 인성관 소령을 만나게 되었다. 인성관 대대장은 서울에서 교육을 받던 중 6·25가 터져 원대로 복귀 중이었다.
인성관 대대장은 가평 중대에 대해 “지금 서울에 들어가면 모닥불에 날아든 부나방 꼴이 된다”며 “내가 육군본부에 가서 말할 테니 원대(7연대)를 찾아가라”고 지시했다. 대대장의 지시로 가평부대는 원주의 6사단 본부를 거쳐 횡성에서 홍천으로 넘어가는 사마치고개에서 원대인 7연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로 간 대대장은 돌아오지 못했다.
開戰 후 최고의 戰果 거둔 음성 무극리 전투
우리 연대의 主力은 단양을 거쳐 충주로 후퇴하고 우리 가평부대는 원주 쪽으로 해서 충주로 가서 연대 주력과 함께 음성 방향으로 이동했다. 음성 쪽으로 이동한 우리 연대는 음성 무극리에서 충주 주덕 부근까지 이어진 산줄기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부 병력이 장호원 쪽에 있는 적을 자극 유인하여 충주를 향해 大병력이 나오도록 해서 일제히 기습 공격을 했다.
적은 野砲(야포)와 각종 차량을 학교 마당이나 도로에 세워 놓은 채 점심식사를 하려던 기회에 우리가 기습공격을 한 것이다. 敵은 수많은 시체와 함께 야포 3문과 포탄차, 각종 보급품을 실은 트럭 등 수십 대 그리고 장갑차와 기관단총을 장착한 사이드카 등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날이 7월8일 ‘음성 무극리 전투’이다. 승리감에 도취된 적이 장호원에서 충주 쪽으로 기세 좋게 나오는 것을 우리 연대가 매복공격을 해 6·25 開戰(개전) 이래 최대의 戰果(전과)를 올린 전투였다.
이날의 음성전투에는 강원도에서 우리 7연대를 따라 후퇴해 온 경찰도 매복공격에 참가했고 노획한 각종 자동차와 사이드카를 끌어내는데도 한 몫을 했다. 나는 적이 버리고 도망친 각종 차량에 서울에서 약탈한 옷감과 각종 상품이 가득 실려 있는 것을 보며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긴다’고 확신했다. 보급품을 실은 차량은 말할 것도 없고 야포탄을 실은 트럭에도 약탈한 저고리감, 치마감, 양복감 등 각종 옷감과 생필품을 빈틈없이 싣고 있는 꼴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군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6·25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거둔 우리 부대를 치하하고, 연대장 이하 全 장병의 1계급 특진을 명령했다. 그래서 우리 연대는 괴산 쪽으로 후퇴하다가 도안초등학교 마당에서 모든 사병이 갈매기(v)나 작대기(-)를 하나 더 철모에 그려 넣었다. 나도 갈매기 하나를 더 부여받아 연대 최고참 일등병을 면하고 하사가 되었다.
우리 부대는 따라오는 적과 싸우며 괴산을 지나 문경 새재를 넘어 경상북도로 가는 길을 따라 후퇴를 했다. 우리를 지원해 온 6사단 포병 16대대는 음성서 노획한 북한의 인민군 야포로 인민군을 향해 쏘면서 싱글벙글해 했던 기억이 난다.
“국방군 동무, 부산이 몇 里 남았소”
우리는 전쟁이 시작된 지 40일 만인 8월3일 예천의 용궁 부근에서 낙동강을 건넜다. 이때 美 공군 제트기가 인민군 탱크와 보급차량을 로켓포로 때려 부수고, 보병에 기총소사를 퍼붓는 공중공격이 본격화되는 시점이라 인민군의 진격속도가 많이 둔화되고 있었다. 낙동강을 건넌 우리 중대는 의성군 부근에서 보충병을 받고 中隊(중대) 再편성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2등 중사로 승진하여 중대 서무를 맡았다.
중대 서무는 병력 보충과 전사자와 부상자, 실종자 등 병력 피해를 파악·처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1등 중사 이상인 하사관들은 모두 소대로 나가 전투지휘를 하도록 재배치가 되었다. 우리 중대의 장교는 중대장을 포함해서 단 두 명뿐이었다.
인민군도 낙동강을 건너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우리 부대는 의성과 군위 지역의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 지류와 거기에 따른 고지를 이용해서 따라오는 인민군과 온종일 血鬪(혈투)를 하다가 밤이면 다음 산줄기로 후퇴하여 김칫독 하나 들어갈 정도의 개인호를 파야만 했다. 인민군의 야포공격은 여전히 강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돌격선까지 육박해 오곤 했다.
효령 부근 고지에서 밤새도록 개인호를 파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날이 밝아오자 산 밑에서 “국방군 동무-. 부산이 몇 里 남았소?”라고 고함을 치기에 우리는, “네 놈들에겐 부산보다 지옥이 가깝다, 빨리 올라오라-”고 소리치며 총을 쏘았다. 이날 전투는 꽤 치열했다.
나는 중대 兵器(병기) 담당 중사에게 60밀리 박격포탄을 많이 高地(고지)에 올려 보내자고 했다.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아 던지면 땅에 떨어져 몇 초가 굴러가다가 터져서 돌격선에 들어온 적을 잡기가 어려우니 떨어지는 즉시 터지는 60밀리 박격포탄이 필요했다.
이날 전투에서 우리 중대는 60밀리 박격포탄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적을 향해 산 위에서 60밀리 박격포탄을 던지는 일은 쉽고도 적중률이 높았다. 그러나 우리 중대 우측의 대대 OP고지에서는 수냉식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대대장이 뛰어나가 그 기관총을 쏘다가 부상을 당하는 전투상황이 벌어졌다. 대대장 이남호 중령은 얼굴의 아래턱에 총상을 당해 말을 할 수가 없어 손짓으로 12중대장 유승원 소령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후송되었다.
최후 방어선 ‘워커 라인’
이날 전투는 오후 3시쯤에야 끝나게 되어 조용해졌는데 우리 중대의 고지 밑에서 사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려가 보았더니 수류탄 2개를 두 손에 쥔 인민군 병사가 울고 있었다. 까닭은 서울에서 인민군에 징발되어 전선에 투입된 대학생인데 인민군 지휘관이 자기에게 수류탄을 쥐게 하고 안전핀을 뽑고는 국군 陣地(진지)로 올라가 던지라고 하고는 후퇴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할 수 없어서 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여기서 인민군도 병력 손실이 많아서 점령지인 서울에서 젊은이들을 마구 잡아들여 戰線(전선)에 투입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 부대는 낙동강을 건너온 지 20여 일 동안 의성군과 군위군의 산봉우리마다 피로 물들이며 후퇴를 거듭한 끝에 영천 신령 부근 최후 방어선에 도달했다. ‘워커 라인’이라고 불렸던 이 최후 방어선이 무너지면 전쟁은 끝장나니 절대로 물러설 수가 없는 일종의 ‘결사 항쟁선’이었다.
우리 중대가 배치된 곳은 신령에서 의성으로 통하는 고갯길 우측 능선으로 팔공산 정상이 바로 남쪽에 보이는 최후 방어선의 최북단이었다. 여기서 근 한 달 동안 하나의 고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敵과 我軍(아군)이 뺏고 뺏기는 혈투가 거듭되는 숨 막히는 상황이 연속되었다. 산 능선의 나무들은 포탄과 폭격에 부러지고 부서지고 불타기를 반복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풀뿌리 하나 성한 것 없는 모래산처럼 되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탄 파편을 막기 위해 벙커 지붕을 만들었다. 인민군 長銃(장총) 위에 비옷이나 개인천막을 씌우고 그 위에 인민군 시체들을 놓고 흙을 덮는 방식이었다.
전쟁이 낳은 기막힌 사연들
우리 중대에서는 사흘만 살아남으면 고참병이 되었고, 1주일을 견디면 新兵(신병) 2~3명을 거느리는 조장 역할을 해야 했다. 중대 서무인 나는 총 한번 잡아보지 못한 벼락치기 신병들을 매일같이 보충을 받아 M1 소총사격을 시켜 보고는 고지로 올라가 각 소대로 배치하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파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벼락치기 신병에는 까까머리 중학생(5~6학년)과 농촌 같은 마을의 아저씨와 조카들이 집단으로 지원해 왔는가 하면 피난길에 징발되어 온 아버지와 아들도 있었다. 중학생이나 아저씨와 조카의 경우는 서로 아는 사이니까 첫 전투에서 부상자나 전사자가 발생해도 파악하기 쉬웠지만 피난길에 징발되어 온 新兵들의 경우는 서로 姓(성)도 이름도 모르는 형편이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어느 날 36명의 신병을 인수하고 M1 사격을 시켜본 후 高地의 3개 소총소대에 고루 배치하기 위해 1, 2, 3 번호를 붙이고 줄을 갈랐는데 한 줄에 12명씩 돼야 할 줄이 제각각이 되기에 다시 번호를 붙이고 줄을 가르며 살폈더니 한 사람이 다른 줄로 날쌔게 옮기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 사람을 불러냈다. 다른 신병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보였는데 까닭을 물었다. 이 늙은 신병은 눈물을 머금고 자기가 섰던 줄의 한 신병을 가리키며 “저, 저놈이 내 아들입니다. 죽어도 같이 있다가 죽고 싶으니 꼭 좀 같이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들과 피난을 하다가 아들이 軍에 징발이 되니 아버지도 따라온 것이 분명했다. 나이를 물었더니 43세. 나는 그를 열외로 빼고 대대 취사반에 인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늙은 신병을 뺀 35명의 등에 페인트로 군번 끝자리 3字를 쓰게 하고는 고지로 올라갔다.
우리 중대의 고지에서는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는지 적의 포탄이 집중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포격을 당하는 고지를 보면서 능선을 잡아 올라가는데 우리 중대의 우측이 적의 돌격을 받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상황은 몹시 급박해 35명의 신병들에게 사격을 지시하고 이들을 무너진 방향으로 공격해 올라갔다. 첫 탄환을 장전한 여덟 발을 다 쏜 신병들 가운데서는 여기저기서 “총알이 안 들어갑니다. 이 총 좀 봐 주이소” 등등 비명 어린 소리들이 들려왔다. “총알을 개머리판에 쳐라”고 소리치며 돌격해 올라갔더니 인민군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敵도 벼락치기 신병들을 마구 투입할 때이니 우왕좌왕하는 건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전투가 끝나 신병들의 인원 점검을 했을 때에는 오후 4시가 넘어서였다. 35명의 신병 가운데 벌써 1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부상자들을 후송하고 전사자의 屍身(시신)들을 골짜기로 끌어 내리고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등 뒤의 군번을 보았다. 흰 페인트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전투를 했으니 모두 뭉개져서 글자를 알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사자의 시신들은 매장하는 수밖에 없어서 골짜기에 구덩이를 파고 있을 때 주먹밥을 담은 탄약통을 지고 올라오던 취사반의 늙은 신병이 나를 보았다. 나는 무심코 “여보오, 이 전사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보오” 라고 하며 손짓을 했다. 한데 차마 볼 수가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늙은 新兵의 아들이 전사자의 시체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핏기가 빠진 아들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이 놈이 5代 독자였소”라고 한숨 쉬듯 나에게 말했다.
9월 중순 전투가 약간 소강상태일 때 부상으로 후송됐던 우리 중대원이 치료가 끝나 원대 복귀를 해 왔다. 이름을 물었더니 ‘鄭(정)○○’ 나는 깜짝 놀랐다. 전사자가 돌아온 것이다. 그는 아저씨와 조카들이 집단 입대를 한 칠곡군 약목의 鄭 씨 마을 출신인데 나의 실수로 전사자와 부상자의 이름이 바뀌어 전사자로 보고된 자가 살아서 온 것이다. 姓과 돌림자는 같고 나머지 한 글자가 뒤바뀐 사고인데 나는 난감했다. 전사자가 귀대했다는 보고는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돌아온 鄭 씨에게 진짜로 전사한 사람과의 관계를 물었더니 사촌 종형이 된다고 했다. 나는 한참 궁리 끝에 “당신은 부상자로부터 원대 복귀한 종형의 이름으로 살아야 하겠네… 전쟁이 끝나면 이름을 바로 잡을 수가 있지 않겠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