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번성했던 강경에서 이중환을 만나다.
조선시대의 대구, 평양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상권이 컸었던 강경은 금강하구에 발달한 하항도시로 내륙교통이 불편하였던 때에는 물자가 유통되는 요충지였다. 또한 이중환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사이에 위치하여서 금강남쪽 가운데에 하나의 큰 도회로 되었다”고 강경을 평하면서 “바닷가 사람과 산골사람이 모두 여기에서 물건을 내어 교역 한다. 매양 봄여름 동안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는 때에는 비린내가 마을에 넘치고 작은 배들이 밤낮으로 두 갈래진 항구에 담처럼 벌여있다. 한 달에 여섯 번씩 열리는 큰 장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화물이 모여 쌓인다.”고 기록하였다. 가깝게는 금강 상류의 공주, 부여, 연기, 청양지방과 멀리는 청주, 전주지방까지 포함되는 넓은 배후지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편리한 수운에 힘입어 큰 교역의 장소로 발달하였던 강경포는 크고 작은 어선과 상선의 출입이 많았다고 한다.
그 때의 이름은 강경포였고 “은진(논산)은 강경 덕에 산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던 곳이다. 그 무렵의 강경은 충청도는 물론이고 전라도, 경기도 일부까지 강경포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강경이 나라 안의 중요상권으로 입지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부터였다. 이 시기에 신흥 상업세력이 크게 성장하였고, 상품유통의 구조가 전국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대규모 유통시장이 형성된 곳은 대도시 지역과 강을 끼고 있는 포구와 바닷가의 해안 포구였다. 강경은 시장 깊숙이 들어온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한 시장의 발전으로 서해 수산물 최대 시장으로 성장하여 1평양, 2강경, 3대구라 부르는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으며 성어기成魚期인 3-6월의 4개월 동안은 하루 1백 여척의 배들이 드나들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성한 포구가 있었던 곳으로 서해의 각종 해산물이 이곳으로 들어와 전국 각지로 공급되었다.
조선 말기까지 금강연안일대의 가장 큰 포구였고 원산, 마산과 함께 대표적인 어물 집산지였으며 충청도와 전라북도 그리고 경기도 남부까지 큰 상권을 형성하였던 강경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급속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강경의 남쪽에는 죽림서원이라는 서원이 있다. 인조 4년에 사계 김장생 선생이 이곳에 임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서원을 짓고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을 향사하고 황산서원이라고 하였으며 그후 현종 6년에 사계 김장생을 추배하는 동시에 죽림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 뒤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였지만 고종 8년 서원 철폐 시 헐렸다가 8.15 해방 후에 복구하여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또한 이 곳 서원 위쪽에는 김장생이 세운 임리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임리정은 사서 삼경의 하나인 시경 중에서 여림심연(如臨심淵) 여리박빙(如履薄氷)이란 구절에서 유래한 말로 “깊은 못가에 서있는 것과 같이 또한 얕은 얼음장을 밟고 있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신중을 기하라”는 뜻이고, 건너편 산에는 팔괘정이 서있다.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생애의 마지막을 이곳 강경에서 보냈는데, 그 당시의 상황이 <택리지>의 발문
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내가 황산강黃山江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일이 없었다. 팔괘정八卦亭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한 바가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산천. 인물. 풍속. 정치 교화의 연혁. 치란득실治亂得失의 잘하고 나쁜 것을 가지고, 차례로 엮어 기록한 것이다.”
이 내용을 보면 이중환이 이곳에서 3십여 년의 방랑 생활 마치고 <택리지>를 완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송시열이 짓고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팔괘정의 안내판 그 어느 곳에도 이중환이 택리지를 지은 곳이라는 것은 찾을 수 없으니, 이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그처럼 번성했던 강경포구는 그 시절의 영광을 뒤로, 하고 현재 강경 젓갈시장으로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니, 영원한 것은 없는 것이 맞는 말인가?
2025년 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