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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다니!
“사실 <모모>의 서평 등에서 호평을 받아도 너무 외면적이고 표면적인 이해밖에 거론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칭찬하는 걸 보면 제가 <모모>를 쓴 이유가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바빠서 ‘시간’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환기하기 위해서거나,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분주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경고하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로서는 그보다 좀 더 앞선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엔데가 제대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얼까? 그건 바로 <모모>를 통한 화폐시스템에 대한 성찰인데, 이 책 <엔데의 유언>을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다. 엔데는 이자가 붙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돈의 모습을 시간이 시간을 낳는 환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으며, 이자를 통해 손쉽게 살아가는 이자생활자를 회색신사로 묘사했다. 회색신사들이 이자를 이용해 사람들의 시간을 훔치고 있지만, 더 이상 시간을 훔칠 수 없게 된다면 그들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엔데는 <모모> 이외에도 <거울 속의 거울>에서도 돈이 돈을 낳는 현재 화폐의 문제점, 오페라 <하멜른의 죽음의 춤>에서 부를 얻기 위해 자연과 후손을 위협하는 사람들의 모습, 죽기 직전까지 구상했던 <병 속의 악마>에서 점점 가치가 감소하는 돈 등을 그려내며 꾸준히 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왔다. 엔데는 이처럼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돈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는 현대 사회가 돈이라는 질병에 걸렸다고 진단하면서 자연 파괴, 전쟁, 빈곤, 실업 등의 문제도 ‘화폐의 기괴한 자기증식’과 ‘상품으로 매매되는 돈’에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현대 인류가 겪는 문제의 근원에 대한 지식과 혜안을 갖춘 문명 비평가이자 사상가로서의 엔데를 만나게 된다.
불멸의 화폐, 우리 시대의 ‘맘몬’ “우리가 항상 듣는 제안은 시스템 자체는 바꾸지 않고 그것을 좀 현명하게 응용하거나 시스템이 초래할 결과를 조금 늦추거나 하는 것들뿐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한계는 옵니다. 따라서 시스템 자체가 파멸을 초래하리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질병의 핵심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합니다. 그때마다 도달하는 곳은 바로 이 금융시스템입니다.” 돈의 자기증식과 불멸성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문제를 불러왔을까? 물건은 시간이 지나면 낡거나 없어지는 데 반해 돈만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자가 붙으며 가치가 증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 돈을 선호하게 되는데, 엔데는 이러한 돈에 대한 열망을 일종의 종교적 현상으로 본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의 중심에 교회와 신전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 자리를 은행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 만연한 배금주의는 인간의 필요로 만들어진 돈이, 인간이 섬기는 신이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세계에서 거래되는 돈의 흐름을 살펴보면, 여러 통계에서 차이가 있지만 98퍼센트 가량의 돈이 헤지펀드, 금융파생상품 등과 같은 투기에 사용된다고 한다. 물건과 서비스를 거래하는 데 사용하는 돈은 전체 돈 유통량에서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이런 돈의 흐름은 실물경제를 왜곡하고 경제위기를 불러오곤 했다. 1929년 대공황, 최근 2008년 금융위기가 대표적 예다. 막대한 돈은 유령처럼 떠돌다가 정상적인 한 사회를 확 덮치기도 한다.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1997년 IMF 사태가 그렇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망하기만 기다릴 것인가? “은행업은 부정하다는 비판과 죄를 업고 태어났다. 이 세상은 은행가의 것이다. 그들이 소유한 것을 모조리 빼앗더라도 그들에게 신용을 창조할 힘을 남겨둔다면, 그들은 펜으로 가볍게 긁적여서 빼앗긴 전부를 되찾기에 충분한 화폐를 만들어내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서 이러한 힘을 빼앗는다면 그 어떤 고귀한 재산도 사라지고 그들 자신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인간이 살기에 더 행복하고 더 좋은 곳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은행가의 노예이기를 원하고, 당신 자신이 노예제도의 비용을 부담하고 싶다면 은행가에게 화폐와 신용을 통제하게 하라.”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 총재였던 조사이어 스탬프) 엔데는 돈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파국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깊은 영감을 준 두 명의 사상가가 루돌프 슈타이너와 실비오 게젤이다. 그들은 각각 ‘노화하는 화폐’와 ‘감가하는 화폐’를 주장했는데, 그들이 제시한 화폐는 가치가 변하지 않거나 증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떨어진다. 이 책에서는 특히 게젤의 이론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데, 케인스는 게젤의 이론을 극찬하며 후세대의 사람들이 “마르크스보다 게젤에게서 한층 더 배울 것”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게젤의 ‘감가하는 화폐’ 이론은 대공황기에 오스트리아 뵈르글의 ‘노동증명서’와 독일 슈바넨키르헨의 ‘베라’로 실험되었다. 이러한 보완통화는 우리가 갖는 화폐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감소하기 때문에 화폐를 축적수단으로 쓰게 되면 당연히 손해를 본다. 따라서 화폐는 맹렬한 속도로 회전했으며 그만큼 거래를 성사시켜 세수가 증대하였고 실업자는 해소되었다. 물건은 풍요로운데 화폐는 유통되지 않고 그걸 소비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했던 대공황의 파국을 생각한다면 실로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뵈르글의 노동증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주옥같은 말이 쓰여 있다. “제군! 축적되어 순환하지 않는 화폐는 세계를 크나큰 위기에 그리고 인류를 빈곤에 빠트린다. 무시무시한 세계경제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지금이야말로 분명한 인식과 과감한 행동으로 경제기구의 쇠락을 피해야 할 때다. 그러면 전쟁과 경제의 황폐에서 벗어나 인류는 구제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노동을 교환하여 생활하고 있다. 완만하게만 순환하는 돈이 그 노동의 교환을 대부분 방해하고, 몇 백만에 이르는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경제생활 공간을 빼앗아가고 있다. 노동의 교환을 강화하여 거기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불러들여야 한다. 뵈르글의 노동증명서는 이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곤궁을 치유하고 노동과 빵을 주자!” 전세계가 파국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성공을 거둔 보완통화는 화폐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한 국가에 의해 금지 당했다. 경제 상황은 다시금 수렁에 빠져들었으며 감가하는 화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한동안 잊히고 말았다.
대공황과 최근의 금융위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가 위기상황에 봉착하면 늘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우파들로부터 사회주의적이라는 공격을 받기까지 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도 엔데가 보기에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엔 위기를 돌파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화폐시스템이 지속된다면 인류는 파국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자유방임의 파국과 대비해서 ‘국가의 역할’은 어떻게 보면 ‘비빌 언덕’처럼 인식된다. 일부 케인스주의자들이 진보적으로 인식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하지만 엔데와 그에게 영감을 준 게젤과 슈타이너에게 국가의 역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보기에 자본주의나 현실 사회주의는 문제가 많은 화폐시스템 위에 태어난 쌍둥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생각은 근본적이고 아나키즘적 색채를 갖기도 한다. 분명 엔데가 꿈꾼 새로운 화폐의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미약하다. 그럼에도 게젤의 화폐이론은 돈에 대한 또 다른 상상과 가능성을 제시해주었고,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 화폐의 본연의 역할을 일깨우려는 노력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미국의 이타카아워, 독일의 교환링, 스위스의 협동조합은행, LETS 등 지역통화운동은 게젤을 비롯한 여러 선각자들이 뿌려놓았던 희망의 종자가 다시 싹터 오르는 징후들이다. 지역통화는 근본적으로 이자가 없는 통화이기 때문에 축적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돈이 갖는 본연의 기능인 적극적인 교환의 도구가 된다. 또한 사람들은 지역통화를 사용함으로써 서로 유대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을 수 있다. 단지 시장 거래하는 관계만이 아닌 서로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돈과 화폐시스템을 비판하지만 돈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환과 가치척도 같은 돈이 가졌던 본연의 기능은 긍정한다. 인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재의 돈이 어떻게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어떠한 돈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돈인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돈이 갖는 본연의 기능은 온전히 회복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돈이 갖는 신성과 불멸성―돈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속성―을 회수하자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엔데의 유언은 하나의 심각한 경고이면서 동시에 복음이다. 김지환 (파블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