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들은 비록 이복형제지간이긴 했으니 우애가 깊었다. 특히 형이 아우를 극진히 아꼈다. 물론 아우도 형을 따랐다. 엄효진! 나이는 서른다섯! 전형적인 귀공자풍의 허우대가 멀끔한 사내. 유별나 게 정갈한 마스크에 유난히 세련된 사치스러움을 나타 내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섬세하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헤프지도 않았다. 겉모습과는 달리 무섭도록 옹골차고 야멸찬 구석이 있었다. 속 깊이 간직한 그의 욕망의 심지도 굵고 강인했다. 언젠가는 그것을 불태울 듯이 보였으나 지금은 여간해서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유머러스하고 스마트한 일면이었다. 늠름한 체구의 그의 모습은 그 의 형과는 남다른 건강미를 드러내 보였다. 효진은 그 의 비운(悲運)의 형이 그의 형수에 의해 독살된 주말 의 겨울 밤을 도고(道高)의 빅토리아 호텔의 카지노에 서 보내고 있었다. 그는 최고의 스릴을 맛볼 수 있다 는 바카라에 매달려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바카라를 '백가락'으로 표현하는데, 말하자면 백 가지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아무튼 효진은 초저녁부터 녹색 테이 블의 한정된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인생드라마에 승부 를 걸고 있었다. "어디, 오늘 밤의 나의 운세를 한번 시험해 봐?" 그날 밤의 운세도 언제나처럼 그의 편이었다. 도박은 그 기량보다는 지칠줄 모르는 그날의 운세에 좌우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인생에 있어서의 무릇 승부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전한 것도 라코스트라는 이름의 농부가 고개를 한번 옆으로 잘못 흔든 탓이라 고 하지 않았던가. 바로 그때가 황제를 평생 따르던 행운의 여신이 등 을 돌리던 순간이었으리라. 그런데 비스듬히 피워 문 담배 연기 저편의 효진의 얼굴 모습이 별로 밝지가 않다. 주말의 밤을 화려한 무대에서 홀로 배회하고 있어서 일까. 현란한 샹들리에, 검은 색조의 반짝이는 유리 벽면, 와인레드의 카페트, 그리고 소리없이 움직이는 성장 (盛裝)한 군상(群像)들! 찰나적인 승부의 판가름에 따라 숨죽인 고요를 허무 는 선망의 속삭임과 실의의 흐느낌! 그리고 그의 옆을 무심하게 스쳐지나가는 깊이 파인 터키 블루의 이브닝드레스의 아름다운 여인의 소리없 는 움직임! 그리고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미스 디오르'의 향수 냄새! 이 모든 것이 효진에겐 알지 못할 기대에 찬 스릴과 물리칠 수 없는 흥분을 안겨주었다. 새로운 여자의 아 파트의 문이라도 밀고 들어설 때처럼, "소아(小娥)!" 효진의 입에서 그도 모르게 간절한 호소의 가락이 담긴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효진은 벌써부터 그곳에서 그의 숙명의 여인을 기다 리고 있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믿음을 달래면서...... 제 1그룹의 젊은 총수, 젊다고는 하나 이미 40대 후반으 로 접어든 장준영(張俊榮)회장의 연인인지도 모를 여 자를. 과연 내려올까? 서울에서 탈출해서, 아니 장회장의 손길에서 벗어나 서...... 효진은 기약 없이 플랫폼에서 서성대는 느낌이었다. "내가 제법 멋진 여자라는 걸 당신한테 장담할 수가 있어요." 그녀는 진하게 감겨오며 말했었다. 과연 그녀는 그녀의 말마따나 멋진 여자였다. 미국 의, 우리나라로 치면 이화여대만큼이나 명문대학인 스 미스대학의 영문과를 나왔다고 했다. 그녀의 전공은 희곡, 지금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재미 희 곡작가, 국내 활동을 모색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고 들었다. 날카로운 눈매에서는 물리칠 수 없는 아집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 늘 찬사와 갈채에 익숙해져 있는 듯했 다. 마음 설레이게 하는 그 검은 눈은 깜박이지도 않 으며 그를 지긋이 쳐다보고는 했다. 그 반항적인 입술 에 빨간색의 루즈를 칠할 뿐 달리 화장은 않고 있었 다. 그런데 도발적인 느낌을 주는 그 빨간 입술을 쳐 다보노라면 어딘지 모르게 위험스런 로맨스를 추구하 는 타입의 여자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빗질하지 않은 것 같은 머리칼과 이브 생 로랑이라 도 디자인했을 법한 들판의 원색 꽃무늬가 대담하게 배합된 시원스런 옷매무새! 이런 것에서는 온몸을 던져 도전하는 프로 의식이 투철한 예술가 타입이라는 느낌도 주었다. 그녀의 긴 손가락에는, 누가 선물한 것인지는 몰라 도 녹색의 에메랄드가 그 진한 색조를 드러내고 있었 다.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는 그린 색상의 에메랄드! 아무튼 꿈 속에서나 그릴 법한 최고의 여자가 그의 곁에 있는 것이다, 아니 그의 품에. 더구나 그녀는 제1그룹의 장회장의 여자였다. 어떤 여자면 그의 연인이 될 수가 있는 걸까? 유명한 여자? 아니면 절묘한 선율을 탄주하는 여자? 아니면? "지퍼를 내리는 일은 당신의 몫이에요." 그녀는 그의 귓부리에 대고 속삭였다. "으음." "슬립의 어깨끈을 내리는 것도 당신 일이에요." 그의 가슴팎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의 숨결은 이미 고르지 못했다. 그녀의 높아가는 심장의 소리도 점차 뚜렷하게 전해져왔다. 효진은 여자의 원피스의 지퍼도 슬립의 어깨끈도 내 렸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고, 그리고 이내 가만가만 물었다. 그녀가 진저리를 치는 것도 전해져왔다. 그의 손길은 그녀의 드러난 어깻죽 지의 맨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브라도 나의 몫이요." 효진은 그의 손길을 옮기며 말했다. "알아요. 알아. 하지만 난 노브라예요." 그녀의 말씨는 어느새 떨려왔다. 효진의 손길을 그녀의 곧은 등줄기에서 절묘한 선을 그린 허리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새로운 여자와의 접촉은 신선하 고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물기에 젖었어도 뜨거웠다. 그녀의 두 다리는 나긋하면서도 강인했다. "오늘 밤을 기다려 왔어요." 그래, 오늘 밤은 나한테도 특별한 밤이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그를 안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멋있어요." 그녀는 신음소리를 깨물며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어쨌거나 장회장의 여자일는지도 모를 여인을 그가 쟁취한다는 기쁨은 대단한 것이었다. "오, 당신에게 매달리게 될까봐 걱정이에요." 그녀는 그들의 사랑이 끝나자 말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반년 전의 어느날 밤이었다. 정확하게는 7월의 무더운 마지막 주말의 밤이었다. 그 날 밤에도 어김없이 삼한은행장(三韓銀行長) 집에선 포커판이 벌어졌었다. "세상에 투 페아로 장화장의 스트레이트를 잡다니 요. 믿을 수가 없어요. 모두가 당신이 풀 하우스라고 잡은 줄 알았어요." 훗날에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효진에게 말했 었다. "왜 이래...... 난 그때 풀 하우스를 잡고 있었다구." "거짓말 말아요. 내 눈은 못 속여요. 당신이 그날 밤 워낙 끝발이 좋았던 건 알지만요." "그렇지 않다니까." "장회장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나 본데, 장회장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난 못 속여요." "아니, 투 페아도 어떻게 장회장의 무자비한 베팅에 끝까지 콜을 할 수 있단 말이요. 거기에 레이즈까지 하구." "관둬요. 암튼 그 승부에선 당신이 이겼어요." "흐음." "그날 밤의 당신의 지칠 줄 모르는 운세가 그것을 뒷받침했구요." "으음." "암튼 그건 굉장한 승부였어요." 그러나 앞으로의 장회장과의 승부는 어떻게 될까? 그녀를 가운데 놓고...... 장회장이 만만히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 밤, 멤버가 부족해서 장회장이 노는 포커판에 효진은 한몫 끼게 되었었다. 회갑을 바라보는 삼한은행장 김운경(金雲慶)씨와는 어쩌다가 서울대학 AMP동기생이 된 관계로 해서 알 게 되었고 어울리게 되었다. 그는 효진의 깨끗한 매너 와 승부기질을 높이 사는 듯했다. 그날 밤 장회장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명의 여 자를 데리고 왔었다. 장회장과는 어떤 관계일까? 그리 고 어느 여자가 장회장의 여자일까? 그날 밤 효진의 머리를 내내 지배한 의혹이었다. 두 여자는 그 간교함에 있어 그리고 그 무자비함에 있어 프로급 도박사를 뺨칠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 니었다. 효진은 장회장을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지능지수가 보통은 넘어 보이는 두 여자를 패배시킬 수는 없었다. 어떤 관계일까? 장회장과 두 여자의 관계가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 다. 두 여자 모두가 장회장의 여자인 걸까? 그리고 잠도 함께 자는 걸까? 설마하니 그럴까. 필시 어느 한쪽이 장회장의 숨겨놓은 연인일 터이 고, 다른 한쪽은 그녀의 친구라도 될 것이다. 게리 하 트 상원의원이 정사를 나눈 문제의 여배우 도나 라이 와 그녀의 다정한 친구 아만다의 경우처럼. 아만다는 '두 사람이 함께 잠을 잤다'고 폭로해 하 트 의원으로 하여금 대통령 후보를 포기케 했다. 그럼 어느 쪽이 장회장의 연인이고, 어느 쪽이 친구 의 역할을 맡은 것일까? 이 수수께끼는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그들 두 여인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1주일 뒤 였다. 효진이 우연히 임페리알 호텔의 엑스타시라는 이름 의 나이트 클럽에 들렀을 때였다. 그곳에서 두 여인을, 물론 장회장과 함께 재회한 것 이다. 장회장은 남 모르게 야행(夜行)을 할 때면 늘 두 여 인을 함께 데리고 다니는 성싶었다. 그런데 두 여자에게는 공통성이 있는 듯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서구적인 체취가 풍기는 여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지적인 풍모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서였다. 촌부 출신의 장회장에게 그 어떤 콤플렉스라고 있는 걸까? 지성적인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게...... 두 여자의 역할 분담은 여전히 잘 분간되지 않았다. 장회장은 두 여인과 번갈아가며 자기딴엔 신명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두 여자가 장회장을 대하는 태도가 엇비슷했다. 한결같이 농염했고 끈적했다. 두 사람 모두가 장회장의 목에 깊숙이 팔을 감고 그의 가 슴밖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녀들이 가쁘게 내뿜 는 숨소리가 효진의 귓전에도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장회장, 자주 오시나?" 효진은 그에게 친숙하게 구는 늙수그레한 지배인에 게 물었다. "한 달에 한 번쯤요." "흠, 그래요." "저 어른도 저렇게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해소되 지 않나 봐요" 지배인이 자기나름대로의 해석을 피력하는 것이었 다. 글세,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일상적으로 받는 중압 감도 대단한 것일 테니까. 거느리는 기업이 어디 한두 개던가. "함께 온 파트너는 뭣하는 여자들이요?" 효진은 한결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글세, 잘 모르겠는데요." 지배인은 희미하게 웃음지을 뿐 그 점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려고 했다. 입이 무거운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도 전혀 알지 못하던가. "안녕하십니까?" 효진은 화장실로 가는 길목에서 장회장과 부딪쳤을 때 깍듯이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장회장은 반듯하게 웃어보이며 인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일순 누구시더라?하는 표정이 떠 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여기에서 원 페아로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시라도 공갈 칠 사람을 만나는군." 장회장은 그때의 그 패배의 기억이 뼈아픈 듯했다. 장회장이 그 자신의 패배의 상처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효진은 만족했다. "우리 다시 한 번 만나 겨루어 봅시다." 장회장은 지나치며 말했다. "네, 한번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밤의 시간은 흘러갔다. 효진의 시선을 줄곧 두 여자와 장회장에게로 쏠렸 다. 거구라고 해도 좋을 장회장의 풍모! 제왕은 무치(無 恥)라는 태도를 내세우는 듯한 관중을 의식하지 않는 그의 스스럼 없고도 당당한 모습. 저절로 위풍과 위엄 이 넘실거렸다. 뭐니뭐니 해도 제1그룹의 총수가 아니 던가. 효진은 큰 뫼 앞에 섰을 때처럼 압도당하는 것을 감 지했고, 그 스스로가 왜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장회장의 모습이 보이지 안고 두 여인의 모습만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효진이 지배인에게 물었다. "회사에 급한 불 일이 생겼다며 먼저 가셨어요. 저 어른, 마음 놓고 쉬지도 못하시는군." 지배인은 제법 저간의 사정에 밝기나 하듯이 말했 다. 하긴 눈치 하나로 밥을 먹는 처지이다. 얼마 동안 저희들끼리 술추념을 벌이던 두 여자가 자리를 뜨고 있었다. 효진도 그들을 따라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효진은 두 여자를 그의 밤색 메르세데스 300SR에 태울수가 있었다. 그는 속으로 메르세데스를 잘 끌고 나왔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은 아마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모셔다 드리지요." 했을 때 여자들은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 안해 하는 기색도 없었다. 효진이 안면이 있는 사람이 어서가 아니라 사내들이 시중을 들어주는 데 익숙해져 있는 탓인가 보았다. 그리고 사내들을 보리는 데에도 익숙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들은 효진이 다가서는 것을 기다린 듯 했다. "어떻습니까? 제가 2차로 모시고 싶은데요. 지난번 에 딴 돈을 돌려드리는 셈치고요." 효진은 호텔 지하주차장을 벗어나며 말했다. 거리의 아스팔트는 아직도 휘황한 네온사인으로 밝았다. "네, 좋아요." 하는 서슴없는 대꾸가 아내 되돌아왔다. 그들은 '시바의 여왕'이라는 이름의 바를 비롯해서 몇 군데의 스낵바와 칵테일라운지를 순례했다. 효진은 말하자면 그가 단골로 다니는 바에 아름다운 두 여인을 앞세우고 시위하는 셈이었다. 바의, 역시 아 름다운 여주인들에게 보란 듯. 특히 바 '시바의 여왕' 의 젊은 여주인 현수정(玄水晶)이 시샘섞인 눈으로 쳐 다보는 것이었다. 효진과 수정은 예전에 잠을 함께 잔 적이 있었다. 토요일밤의 밀월 - 노 월 - 효진은 새벽 두시께서야 비로소 그녀들을 그녀들의 집으로 바래다 주었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이 방배동의 언덕 위에 자리잡은 효성 빌라였다. "오늘 저녁은 즐거웠어요." 첫 번째 여자는 손을 살짝 들어보이고는 돌아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관문의 갓등 앞에서 다시 돌아서 서는 차 속의 효진과 그녀의 친구를 빤히 쳐다보는 것 이었다. 그녀는 두 남녀를 밤길에 남겨두고 홀로 돌아서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불빛 아래 우뚝 선 그녀에겐 아딘지 모르게 한 가닥 적막감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묘하게도 배신당한 것 같은 표정마저 어른거린다고나 할까. "가요, 어서." 효진은 두 번째 여자의 채근에 정신을 차리며 차를 돌렸다. 효진은 얼마 동안 그의 뒷덜미에 와 닿는 여 자의 시선을 의식했다. 효진은 몇번이고 돌아보고 싶 은 충동을 억눌렀다. 첫 번째 여자가 아직도 갓등 불 빛 아래서 서성대고만 있을 듯싶었다. 효진의 메르세데스는 얼마 후 제3한강교를 지나 두 번째 여자가 사는 한남동의 UN빌리지를 향해 달렸다. 메리세데스 속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야경은, 게다가 아름다운 여인과의 낭만적인 밤의 드라이브가 곁들인 탓일까, 한결 효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둠과 고요 속에 파묻힌 그 정경엔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정취감마저 감돌았다. 멀리 힐 탑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로열 하 이츠맨선 앞에 차가 멎었을 때, "우리 집에서 한잔 하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하고 두 번째 여자는 차 속에서 말했다. 뒷자석에 자리잡은 여자의 손길이 그의 어깨 위에 실려 있었다. 여자의 따뜻한 체온도 전해져왔다. "아뇨, 늦었습니다." 효진은 깍듯이 사양했다. 효진의 이 결단에 망설임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 다. 여자의 의례적인 초대에 비집고 들어서는 졸장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으나, 그가 그녀들과의 장래를 머릿속에 그려 놓는 구도(構圖)가 따로 있어서 다. "난 어차피 한 잔 해야 하거든요. 나한테 '이사베리 타'가 있어요."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내가 목이 말라서 그래요." 여자의 권유가 형식적이 아니라는 것은 이젠 분명했 다. 어떻게 보면 진심으로 권유하는 것이다. 아니 그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를 유혹하게 만든 걸까? 비록 효진이 물리치기 어려운 호남이라고 해도, 그 리고 이 무더운 여름 밤을 홀로 보내기가 싫다고 해도 딴 이유가 있을 듯만 싶었다. 아무래도 두 여신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알지 못할 경쟁심 탓인 듯했다. 마음에 들었다 하면 먼저 쟁취하 고야 마는...... 첫 번째 여자의 아쉬운 듯이 바라보던 눈길을 이 여 자도 감지한 걸까? "오늘 밤은 너무 늦었으니 그냥 돌아가지요. 하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제가 이번 주말에 여름 휴가를 떠납니다. 부산으로 요." "어머, 그거 좋군요." "어떻습니까, 제가 초대하고 싶은데요." "나를요?" "네에, 저와 함께 해운대에 가지 않으시렵니까?" 일순 여자의 시야에 해운대 해변의 특급호텔에서의 아니면 네오 모던의 콘도미니엄에서의, 그것도 장회장 보다 젊고 건강한 사내와 보내는 여러 황홀한 장면이 영화의 신처럼 펼쳐지고 있을것이었다. "으음." 그러나 여자한테서 금세 대꾸가 없었다. 남자의 당 돌하다 할 초대에 어리둥절해 하는 걸까. 더구나 임자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초대하는 남자의 심보를 헤아리지 못하는 걸까. 1초, 2초가 흘렀다. 그리고 여자의 대꾸가 되돌아왔다. "네, 좋아요." 여자한테서 뜻밖에도 화끈한 대꾸가 되돌아온 것이 다. "네에, 당신과 함께라면요." "흐음." 효진은 그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토했다. 하도 감격 해서라고나할까. 그토록 눈 앞의 여자는 눈부셨다. 노 을 빛깔 앞의 불타오르는 사루비아만큼이나...... "그럼, 토요일 아침에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내가 공항에 따로 나가겠어요. 우리 그곳 에서 만나요." "그럴까요. 그럼 아침 11시께까진 국내선 대합실에 나와 주십시오." "그럴께요. 그럼......" 여자는 이윽고 그녀의 맨션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효진은 한동안 여자가 삼켜진 맨션의 출입문을 가만 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야성미를 느끼게 하는 사자갈기 같은 긴 머리카락의 흔들림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이는 여자의 늘씬한 몸매의 율동도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의 하이힐 소리도 긴 여운을 남겼다. 여자를 따라 집안에 들어서야 했던 건 아닐까? 지금쯤 시원한 샤워의 물줄기 앞에 우뚝 선 쭉 곧은 그녀의 등줄기를 볼 수도 있었을텐데...... 그리고 그녀 의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을 수도 있었을텐 데...... 물론 그 자신도 나신인 채...... 그녀는 과연 그와 함께 바캉스를 떠날 생각이 있는 걸까? 내일이라도 전화를 하면, "어머, 미안해요. 실은......" 하며 거부의 몸짓을 보이는 건 아닐까. 효진은 차를 돌렸다. 그리고 얼마간 심술이 난 사람처럼 액슬을 밟고 있 었다. 차는 다시금 밤의 제3한강교를 질주하기 시작했 다. 그러나 밤의 아름다운 야경은 다시는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안았다. 어떻게 보면 무의식 속에 달리고 있다고나 할까. 얼마 후 효진은 녹색의 스틸도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콜 보턴을 누르고 있었다. "누구세요?" 하는 응답소리를 듣고서야 효진은 비로소 현재의 위 치를 깨닫는 느낌이었다. 그는 방배동의 효성빌라에 돌아온 것이다. 첫 번째 여자의 집 문 앞에 말이다. "접니다. 엄효진입니다." 일순간의 망설임이 스틸 문을 통해 효진에게 전해져 왔다. "세상에!" 하는 놀라움의 아니 질린 듯한 목소리도 전해져왔 다. 문은 금세 열렸다. 그곳에 첫 번째 여자가 실크지의 하얀 나이트 가운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 나이트 가운을 헤집고 그녀의 풍만한 가슴의 일부가 드러나 보였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당황해 하는 빛이 스치고 있 었다. 그리고 동시에 기쁨의 광채가 흐르는 것도 읽을 수가 있었다. 단순한 기쁨이라기보다는 희열 같은 것 이었다. 효진이 그녀에게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알지 못할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여자는 일순 묻고는 다음 순간 눈웃음치며, "어서 들어오세요." 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효진은 현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여러 켤레 의 구두 속에서 남자 구두 하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이렇게 밤 늦게 다시 들려 죄송합니다. 실은......" "말씀하세요." 여자는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것일까, 아니면 사내의 느닷없는 방문의 진의를 헤아려서일까, 야실거렸다. 더 구나 임자 있는 여자의 아파트 문을 노크하는 그 당돌 한 속셈을 재미있어 하는 듯 싶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효진은 그를 아쉬운 듯이 떠나 보내던 그리고 불쑥 다시 찾아온 그를 티없이 반기는 눈 앞의 여자에게도 바캉스 여행에 함께 떠나자고 제의했다. 물론 그의 음흉한 속셈은 감추고, 한여름의 서울에 서의 탈출과 여름 해변에서의 즐거운 휴가에 대해서만 일깨웠다. "어머, 그거 참 매력적인 제안이네요." 여자도 효진이 숨인 음흉한 계략엔 둔감한 듯한 모 습을 지었다. "올 여름에 달리 계획이 없으시다면......" "별 다른 계획은 없어요. 암튼 잠시 올라오세요." 여자는 효진의 옷소매라도 잡아 끌 듯이 했다. 효진의 눈길은 다시금 남자 구두에 쏠렸다. 새까만 구두의 니나리찌 마크가 신경에 와 닿았다. 그는 장회 장의 구두가 니나리찌 제품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자, 어서요." 여자는 다시금 채근했다. 그러면서 눈 앞의 남자 구 두를 발로 구석진 곳에 밀어불이고 있었다. 별 볼 일 이 없다는 듯이. 여자가 건성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은 분명했다. 한남 하이츠의 여자의 경우에서처럼. "흐음." 효진은 그러나 망설였다. 구두의 임자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아서이다. 아무 래도 장회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했다. 그가 회사 의 급한 불을 끄고 지름길로 달려왔는지도 모를 일이 었다. "그럼 우리 만날 시간과 장수를 지금 정해요." 효진의 얼굴에서 망설임의 구름이 걷히지 안는 것을 확인하자 여자가 말했다. 여전히 살래 살래 눈웃음치 며...... 효진은 토요일 오전 11시에 공항 대합실에서 만나자 고 했다. 한남 하이츠의 여자에게 일렀던 것처럼. "알겠어요. 그럼 토요일에 우리 공항에서 봐요." 얼마 후 효진은 방배동의 빌라를 물러났다. 여자는 아래층 현관까지 내려와 그를 전송했다. 손을 높이 들 어 흔들기까지 하며...... 마치 오랜 동안 밀애를 나누어 온 연인들처럼 보였다. 막상 효진은 여자를 와락 껴안 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효진은 집으로 돌아오며 오늘 밤 어쩐지 두 여자를 모두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것은 여자들이 보인 반응이 너무 싱거워서다. 일 말의 주저도 저항도 없는 그 자세가 오히려 꺼림칙했 다. 어딘지 모르게 장난기가 깔려 있어 보인다고나 할 까. 잘못하면 두 여자에게 골탕을 먹는 건 아닐까. 아무튼 그날은 왔다. 효진은 주말의 아침에, 해운대에 백만 인파가 몰릴 거라는 예고가 있는 그날 아침에 김포공항의 국내선 대합실에서 두 여인을 기다렸다. 엄밀하게 말해서 두 여인 중에서 한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두 여 인 모두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여인 모두에 게 낚싯밥을 던졌으므로, 그러나 도나 라이스의 역할을 맡은 장회장의 여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필시 아만다의 역할을 맡은 여 인이 나타날 것이었다. 효진의 예측대로 한 여인만이 나타나 주었다. 아름 답게 웃음지으며...... 꽃무늬의 화려한 느낌의 스커트자 락을 휘날리며...... "우리 가요." 그녀는 그와 팔장을 끼며 말했다. 그녀는 바로 방배 동의 효성 빌라의 여자였다. 니나리찌 상표의 남성구 두를 저만치 밀어붙이던...... 효진은 일순 알지 못할 혼란에 사로잡혔다. 그는 방 배동의 그녀를 장회장의 여자로 보았던 것이다. 조소아(曺小娥)라는 이름의 여류 희곡작가를. 잘못 짚은 걸까?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그리고 원래 장회장의 여자를 노렸던 거 아닌가. 그래, 애당초 장회장의 여자를 쟁취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뭘 꾸물대는 거예요? 예선이, 걔는 오지 않아요." 정예선(丁藝善)! 그녀는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대학에서 공부 했었고, 여러 국제성악 콩클에서 1등을 했었다고 했다. 메조 소프라노인 그녀는 이탈리아 주요 오페라단과 베 로나아레나에서 '일트로바토르'를 비롯한 많은 공연도 가졌다고 했다. 그럼 장회장이 후원하는 여자는 정예선일까. 아무튼 조소아와 정예선은 정보교환을 통해서 효진 이 그녀들 모두에게 손짓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거기, 운이 좋은 편이에요. 우리 두 사람 다 거기에 게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뿔이 났 는지 몰라요. 어떻게 보복하나 생각했지만, 거길 실망 시킬 수는 없었어요.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하지만 앞 으로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일은 않는 게 좋을 거예 요." 그녀의 자존심이 효진의 매력 앞에 아무래도 굴복한 듯이 보였다. 이렇게 공항에 따라나선 것을 보면 말이 다. "미안하게 됐소. 하지만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있었 어야지." 효진은 어딘가 순진스럽다 할 어설퍼보이는 미소를 띄며 말했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효진과 함께 걸음을 옮기던 소아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글세, 누가 장회장의 진짜 여자 친군지 알 수가 있 어야 말이지." "우린 모두가 그 양반의 친구예요. 그래선 안 되나 요?" "친구도 친구 나름 아니요." "이 양반, 이제보니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네." 소아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효진을 하얗게 쳐 다보는 그녀의 눈길은 새초롬했다. 흐음, 글세 내가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효진의 이성은 분명히 일깨우고 있었다. 두 여자 중에 한 사람은 장회장이 숨겨놓는 여자라고. 그 리고 그 여자는 조소아일 것이라고.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따라나서고 있는 걸까? 엄효진은 여자들이 그를 죽자꾸나 따라는 사연을 얼 마간 알고 있었다. 물론 그의 사내로서의 매력도 남다르다. 가장 댄디 한 신사형의 이미지에다가 이지적인 면도 있고, 야심 에 찬 사업가로서의 일면도 있어, 여성들에게 이상적 인 남성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가 영동의 소문나지 않은 알 부자, 엄대진의 실질적인 후계자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의 형 엄대진의 목숨도 그다지 길지 않다는 사실이 다. 영동 알부자의 후계자! 밤색 메르세데스의 도련님! 결코 속 빈 허영만의 화려함도 아니고 실속 없는 대 명사만도 아니었다. 하루에 몇 억씩 주무르는 미남 청년! 그는 마치 현대판 동화속의 주인공과도 같았다. 그 러니 여자들이 어떻게 그의 앞에서 치마를 벗지 않겠 는가. 그러나 효진에게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한 가닥 불 안이 늘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형수 민하 경의 존재였다.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그러면서 무섭도 록 차가운 피가 흐르는 그의 형수의 존재! 언젠가는 피를 보아야 할는지 모른다. 효진은 생각 만 해도 머리가 질끈 아파왔다. "어머, 이렇게 좋을 줄은 미처 몰랐어요." 조소아는 그들이 머문 콘도의 침실의 창가에서 해운 대에 넘실대는 백만 인파를 내려다보며 환성에 가까운 찬탄의 소리를 냈다. 작열하는 태양, 망망한 바다, 그리고 해변의 끝없는 군중! 그 군중이 백사장 위에서 펼치는 현란한 색채의 조화! 사람들은 더위를 식히며 바다에 몰려오는 걸까? 아 니면 썰물처럼 도시를 빠져 나오는 바캉스대열에서 빠 질세라 이렇듯 달려오는 걸까? 누가 뭐라든 모두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우리, 빨리 가요." 소아가 서둘렸다. 그녀는 바다로 달려갈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듯이 보였다. 마크 보한이나 디자인할 법한 얼룩말 줄무늬의, 어 깨와 허벅지를 대담하게 노출시킨 그녀의 옷을 바닷가 의 뭇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생각도 흔들리는 듯싶었다. 지글거리는 모래사장보다는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청 결한 느낌의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속에 파묻혀 오수 를 즐기고 싶기도 한 것이다. 브라인드 커튼을 내리고...... 건강한 사내와 함께...... 눈 앞의 사내도 지금 그녀를 안고 싶어하고, 그녀와 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하지 안는가. "당신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 예요." 소아는 사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밤이 기다려 줄 거예요." 소아는 연극의 대사를 외듯 말했다. "처음부터 당신이 좋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따라나 선 거예요." 소아는 사내의 목에 팔을 감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은 바다로 나갈 시간이에요." 그러나 그들이 침실을 뒤로 하고 바다로 나가는 데 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자의 입술이 다가 와서다. 밀(蜜)처럼 끈적하고 당(糖)처럼 말콤한 입술 이. 그들은 모든 것을 잊은 채, 그리고 모든 것을 접어 둔 채, 그들의 침대에 허물어질 뻔했다. 그들을 방해하 는 전화벨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것은 소아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세상에, 저를 따라 이곳까지 내려 오셨다는 말이지 요?" 전화를 받는 소아가 그 아름다운 미간을 잔뜩 모으 고 있었다. 누굴까? 소아를 따라 이곳까지 내려온 사람이...... "방해하지 않을 거라니...... 이미 방해하고 있잖아 요." 소아의 말투는 다분히 힐난조였다. "암튼 좋아요. 로비에서 기다리세요." 소아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효진한테 돌아섰다. "이걸 어쩌지요?" 소아가 난감해 한다. "누가 당신을 따라 내려왔나보군." 효진은 되도록 대범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요. 초대하지 않았는데두요." "그게 누구요? 장회장?" 효진은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소아의 얼굴 표정에 서슬이 담겨져서다. "빌어먹을! 장회장은 왜 자꾸 들먹이는 거예요?" "미안하오. 하지만......" 장회장은 아마 효진의 뇌리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인물이리라. 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어떤 형태 로든 흔적을 남긴 사내일 것이므로. "잡지사예요, 잡지사." "잡지사?" "그래요, 여성예술(女性藝術)이라는...... 나를 취재하 기 위해 왔다는 거예요. 서울에서도 몇 번 만났었는 데...... 바라에서 몇 컷의 사진만 찍겠다는 거예요. 한 두 시간이면 된다고 했어요." 그래, 미국의 명문대학을 나오고, 뉴욕에서 활동하는 현역작가라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기사감이 될 것이다. 게다가 아름다움마저 갖추고 있다면 놓쳐서는 안 되는 취재원일 것이다. 거기에 장회장의 숨겨놓은 여자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다면 특종감이 될 것이다. "그까짓 한두 시간이라면 어때서......" 효진에게 있어 한낮의 한두 시간은 별로 의미가 없 었다. 두 사람은 이윽고 아래층 로비로 내려갔다. 그곳에 반반한 여성 기자와 젊은 남자 카메라맨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자연스런 취재과정에서 효진은 소아에 대해 서 몇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그녀가 뉴욕주립 대 연극과에서 강의도 맡고 있다는 것, 국제적인 연극 제를 서울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것, 국내에 제법 규모 가 큰 드라마 센터를 건립하려 한다는 것, 그것을 위 해 국내 유수의 재벌의 후원도 얻기로 했다는 것 따위 다. 그래, 그래서 장회장과 접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초 한두 시간을 내주기로 한 약속과는 달리 바다 에서의 오후의 한나절로, 밤의 시간도 내주게 되었다. 저녁도 함께 했고, 디스코 홀에도 함께 갔다. 그 사이 카메라 푸래시는 수없이 터졌다. 원숙한 아 름다음을 드러낸 소아의 모습을 쫓아서...... 그리고 그 들은 효진에게도 포커스를 맞추었다. "거기, 겁 안나요?" 마침내 두 사람만의 침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소아 가 감겨오며 말했다. "뭣 말이오?" 효진은 소아의 허리를 안으며 물었다. "우리 두 사람만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날 텐데 요." "흐음." 그 순간 효진의 머리를 스친 것은 건강한 남자와 화 려하게 미소지으며 바닷가에 선 소아의 사진을 앞에 놓고 신음하는 장회장의 모습이었다. "내가 먼저 샤워할께요." 소아는 효진의 이마에 품위있게 키스하며 말했다. "아니, 나중에......" 효진은 소아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에게 자기가 갈 때는 목욕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었다든가. 사내들이란 여자 본래의 채취 에 한결 흥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효진의 마 음이 급했다. "천천히요, 천천히." 하면서도 소아의 손놀림도 빨라졌다. 그리고 그들의 침대로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밤의 향연이 기다리는...... 이렇게 그들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그들은 뜨겁고 긴 여름동안 부산과 여수에서, 그리 고 방배동의 소아의 빌라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블라우스는 내가 벗겠어요. 하지만 즈로스는 당신 몫이에요." 소아는 언제나 그녀의 머리채를 효진의 가슴팍에 파 묻으며 말했었다. 그들의 한여름의 사랑은 한겨울까지 이어졌다. 효진으로서는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은 이상적인 여 인을 만난 느낌이었다. "당신의 나의 운명이에요." 하면서도 소아의 태도는 효진만큼은 분명치가 않았 다. 어딘지 모르게 금지된 장난을 즐기고 위험한 로맨 스를 즐긴다는 느낌을 그녀한테서 지울 수가 없었다. 돈에 게걸스럽게 매달리는 여자는 아니어도 돈엔 길들 여진 여자라는 느낌이었다. 소아가 요구하지도 안았고, 입에 벙긋 올리지도 않 았으나 드라마 센터만큼은 효진은 그의 손으로 지어주 고 싶었다. 비록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고 해도...... 장회장을 대신해서...... 그리고 분명치는 않았으니 소아가 그와 장회장 사이 를 교묘히 유영하고 있다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도 지우기가 어려웠다. 무엇이 소아로 하여금 멀어지게 하는 걸까? 누가 고자질이라도 한 걸까? 엄효진의 후계자로서의 지위가 불안정하다고. 그렇다. 민하경이 존재하는 한 그의 위치는 불안한 것이다. 효진한테서 막상 돈을 빼놓으면 얼마나 큰 매 력이 있다는 걸까. 효진의 초대에 소아의 거부의 구실이 요즘 부쩍 늘 고 있었다. 오늘밤 도고의 빅토리아호텔에서의 오래 간만의 해 후도 어쩌면 무위로 끝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효진은 카지노에서 긴 겨울밤을 하얗게 밝히며 기다 렸으나 그녀는 나타나주지 안았다. 그리고 양해를 구 하는 전화도 걸려오지 안았다. 효진에게 그날 밤 걸려온 전화라고는 그의 형의 죽 음의 소식이었다. 효진은 결단의 시기가 온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 의 피가 끓어 올랐다. 그는 이윽고 그의 메르세데스로 도고를 떠났다. 어둠속 차창 저편으로 민하경의 얼굴 이 떠올랐다. 그리고 화려하게 미소짓는 조소아의 얼 굴도 떠올랐다. 그는 동트는 새벽녘에 서울집에 당도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늘 감사합니다 ♡♠♡
감사히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