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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1,1-18
그 무렵
1 사도들과 유다 지방에 있는 형제들이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에게 따지며,
3 “당신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고 말하였다.
4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5 “내가 야포 시에서 기도하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내려앉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것이었습니다.
6 내가 그 안을 유심히 바라보며 살피니, 이 세상의 네발 달린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보였습니다.
7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8 나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9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10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것들은 모두 하늘로 다시 끌려 올라갔습니다.
11 바로 그때에 세 사람이 우리가 있는 집에 다가와 섰습니다.
카이사리아에서 나에게 심부름 온 이들이었습니다.
12 성령께서는 나에게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갔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 집에 들어가자,
13 그는 천사가 자기 집 안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
14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5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6 그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1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로 선포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요한 10,11)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목자”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유배를 겪으면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모아들일 미래의 “착한 목자”로 소개하면서(에제 34,11-16; 스바 3,19; 미카 2,12 등), 미래에 나타나 백성의 목자가 될 다윗 가문의 한 인물로 언급합니다(예레 3,15;23,4-6; 에제 34,23-24;37,24; 미카 5,1-4).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는 하느님과 하나 됨에 그 바탕이 있습니다.
곧 그는 하느님이 보낸 목자인 동시에, 보낸 분의 마음에 드는 목자입니다.
그것은 삯꾼과는 달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로 드러납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요한 10,14-16)
여기에는 “착한 목자”의 특성이 세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첫째 특성은 양들과 서로 압니다.
목자는 항상 양들과 관계하여 있고, 양 없는 목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곧 목자는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목자입니다.
그렇게 함께 있기에 서로 압니다.
이는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알 듯, 밤낮 같이 지내면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곧 양들을 “안다”(γινωσκω)는 것은 사랑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착한 목자”의 둘째 특성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있는 존재, 곧 목자가 양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양이 목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들을 위하여 있는 존재’, 이것이 바로 목자의 존재 근거요 신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목자는 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요한 3,16)
“착한 목자”의 셋째 특성은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6)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기 위해 스스로 자유로이 목숨을 내놓으심으로 목숨을 다시 얻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요한 10,17)
바로 이 사랑의 죽음과 부활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요한 10,17)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 바로 이 일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우리 주님에게서 받은 명령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식별할 줄 아는>
제가 북한 선교를 하며 그것을 후원하는 후원회 이름을 <한우리 후원회>라고 지은 것은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과 우리는 ‘한 우리 안의 우리’라는 의미가 있는 이름이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한 민족의 우리라는 뜻도 있지만 주님의 한 우리 안에 같이 있는 우리라는 뜻이 더 중요한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도 잘 알아야 하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같아서 한 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다르지만, 그런데도 주님의 우리 안에 함께 있고, 주님의 한 우리 안에 있기에 같은 양 떼이고 하나라는 점입니다.
주님의 양 떼가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우리 안에 있을 것이고, 만약 도둑의 양 떼라면 도둑의 우리 안에 얼마간 있다가 팔려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도둑의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주님의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리는 죽으러 팔려나가지 않고 푸른 풀밭으로 불려 나가는데, 주님께서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데려나가신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도매가 아니라 소매입니다.
집단이 아니라 개인입니다.
하나하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놔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가시는 것처럼 하나하나 이름을 다 아시고 각별하게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 양들을 잘 아는 착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렇지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을 잘 알기에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우리가 뭘 필요로 하고 원하는지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분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인 우리 몫은 무엇입니까?
목자의 양들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목자가 자기 양들을 아는 것처럼 양들도 자기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펭귄이나 괭이갈매기가 그 많은 새끼 중에서 자기 새끼를 알고, 그 많은 어미 중에서 자기 어미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앎은 대단한 사랑과 친밀감의 앎이기도 하지만 자기 목자를 모르고 도둑이나 삯꾼을 자기 목자로 알고 따라갔다가는 죽을 수도 있기에 친밀 이상의 생명의 앎입니다.
그런데 현대인 중의 많은 이가 어리석게도 주님이 아닌 사이비 교주를 자기 목자인 줄 알고 따라가거나 SNS로만 알 수 있을 뿐 잘 알지 못하는 인간을 마치 목자인 양 따릅니다.
이럴 때 모름은 어리석음이고 치명적입니다.
참 목자를 따르는 양 떼이어야 하는데 떼로 다니기는 하지만 그저 떼로 몰려다닐 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양들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목자를 안다는 것은 식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게 되고, 천상 목자를 따라 주님의 영원한 우리 안에 안전하게 들게 될 겁니다.
그러니 양들이 목자를 아는 것은 의사와 돌팔이를 식별할 줄 아는 것, 그 이상으로 양들에게 참으로 중요하고 목자에 대한 사랑 못잖게 양들이 꼭 갖춰야 할 능력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것을 감당하라>
“도모시용(道謀是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가에 집을 짓는데, 길 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짓는 것이 좋을까 상의하면 구구한 의견으로 제대로 완성할 수 없는 것처럼 주견(主見) 없이 남의 의견만 좇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소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기대거나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요한 10,16)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깊은 사랑을 주고받는 앎, 인격적인 일치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목자와 양인 우리들과 예수님의 관계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잘 아는 관계이기를 희망합니다.
한편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는 말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순명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안 듣는다.”는 신앙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이가 ‘저놈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고 말한다면 귀로 듣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한 목자에 한 양떼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명은 강압에 의하여 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신 것은 목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신 것이지 결코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신뢰하는 사람은 사랑의 응답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인식한다면 자신을 내어 맡기신 예수님의 희생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 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 사건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아들은 그렇게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 5,8)
사랑을 깨우치면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한 집에 살고 있는 개들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였답니다.
‘우리 주인은 나를 좋아해!’ ‘아니야 나를 좋아해!’
옆에서 듣고 있던 늙은 개가 말했습니다.
‘이봐, 주인이 진짜 좋아하는 것은 나야. 나는 내일 주인 뱃속으로 들어가거든!’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착한 목자 주님과 우정의 여정 - 사랑, 앎, 일치, 자유>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
(시편 42,3)
오늘은 5월 성모성월의 첫날이자 노동자 성 요셉을 기리는 날이자 근로자의 날이기도 합니다.
근로자의 날이라 하지 말고 그냥 노동자의 날이라 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1)
어제 미사 시 화답송 후렴이 아직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 시 성체강복 후 퇴장 성가 51장 역시 새삼스런 감동이었습니다.
다시 1절 가사를 음미해 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명예 다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성가를 들으며 새삼 주님과 관계의 깊이에 대해, 더불어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의 여정인가에 대해 말입니다.
나이 들어 몸은 노쇠해 가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파스카 주님과의 우정은 날로 새로워지고 깊어졌으면 소원이겠습니다.
문득 26년 전 이맘때쯤 쓴 “사랑”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래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날로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 1997.3
나이 50이 넘어서부터 해마다 ‘스승의 날’ 전후로 저를 찾았던 옛 초등학교 교사시절 6학년때 제자들 셋이 어제도 저를 찾아와 스승의 날, 어린이날, 과수원길 및 여러 동요를 열창해 줬습니다.
1977년 13살이었던 제자들이 46년이 지난 올해 2023년에는 59세가 됩니다.
오랜동안 잊지 않고 계속된 제자들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 역시 새삼스런 감동의 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가 착한 목자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날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관계에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여정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당신을 얼마나 닮았나 우리의 얼굴을 살피실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 역설적으로 참나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바 삯꾼이 아닌 착한 목자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비단 목자인 사제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이 본 받아야 할 착한 목자의 영성, 희생적 사랑이겠습니다.
과연 착한 목자 영성으로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이어 같은 맥락의 말씀이 반복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과 서로 앎의 우정관계가 깊어지면서, 더불어 아버지와의 앎의 우정관계도 깊어짐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에서 깊이 깨닫는 바 예수님의 자유로움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사랑의 앎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일치에 자유로움입니다.
사랑과 앎과 일치와 자유는 함께 갑니다.
그리하여 자발적 순교의 사랑도 가능한 것입니다.
어제 저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수녀님에 관한 감동적 예화를 들었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과 추기경님, 그리고 수녀님의 깊은 우정을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추기경님과 수녀님은 착한 목자 예수님과의 깊은 우정의 사랑을 공통으로 하고 있었기에 서로 간의 깊은 영적 우정도 가능했음을 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과 깊어가는 우정과 더불어 형제 도반들과의 우정도 저절로 깊어간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이래야 비로소 진정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치의 수도공동체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착한 목자 예수님 말씀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새삼 교회의 근본적 존재 이유는 선교임을 깨닫습니다.
선교 없이는 성소도 없습니다.
어제 영어 미션(mission)의 이중적 뜻을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미션은 선교 또는 사명으로 번역될 수 있고 바로 교회의 선교는 그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선교의 사명,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참으로 이런 착한 목자 예수님의 의중을 깊이 깨달은 착한 목자의 모범이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주님과의 영적우정이 날로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계속 선교적이 됨을 봅니다.
베드로의 이방인 선교에 결정적 깨달음이 되었던 무아경에 환시 신비 체험 중 인상적인 대목을 소개합니다.
여러 짐승들이 담긴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베드로 앞에 놓이고 이어지는 대화입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주님, 절대 안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베드로의 편협한 시야는 이런 충격적 체험으로 한층 깊고 넓어졌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의 벽(壁)은 활짝 열린 문(門)으로 바뀐 것이지요!
이어지는 확신에 넘친 베드로의 고백과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이 감동적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고백에 화답하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먼 이방의 한국에까지 선교가 이루어져 우리가 착한 목자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의 은총이자 선물인지요!
새삼 착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독점 자산이 아니라, 인류의 공공(公共) 자산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가면서 선교적이 될 수 뿐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며 더욱 선교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시편 43;3ㄱ.4ㄱ)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성삼일 전례는 3개 공동체가 함께 하였습니다.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입니다.
성가대는 한국어 공동체와 스페인어 공동체가 함께 하였습니다.
신자들의 기도는 3개 공동체가 같이 하였습니다.
강론은 영어와 스페인어로 하였습니다.
미사 경본은 영어, 스페인어를 같이 보았습니다.
성 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후에는 3개 공동체가 함께 성체를 모시고 행렬을 하였습니다.
성 금요일에도 십자가를 들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거리에서 하며 성당으로 왔습니다.
공동체의 규모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지만 함께 성삼일 전례를 하였고 부활의 기쁨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3개 공동체가 함께하면 분명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전례 시간이 길어지기도 하고, 다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울 점도 있습니다.
스페인어 공동체는 생동감이 있고 신심이 깊습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많아서 활력이 넘칩니다.
한국어 공동체는 짜임새가 있고 질서정연합니다.
영어 공동체는 마을 앞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3개 공동체의 중심에서 균형을 이루어 줍니다.
한 지붕 세 가족이 사이좋게 지내니 삼위일체의 신비를 삶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모든 인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30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졌는데 오늘은 1조와 2조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났으며 서로 동포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국민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이들과 유사한 그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도 차별을 받지 않고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2번의 세계대전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고, 죽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자행된 식민지 건설은 약소국의 시민들을 차별하였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더 이상 전쟁과 폭력으로 인한 인권 침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성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지 75년이 지났습니다.
국제적인 전쟁과 식민지 지배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국지적인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그로 인한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곳에서 인간의 기본 권리가 침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세계인권선언’을 하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독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세계인권선언’이 실현되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입니다.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국가의 한 연구소에서 일하던 공학도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수사의 능력을 수도회에서 잘 살려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사가 수도회에서는 하는 일은 소위 ‘막노가다’였습니다.
힘쓰는 일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자기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막노가다 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수사의 부모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잘하는 일을 시키지 않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소임으로 아들의 훌륭한 재능을 수도회에서 썩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장 수사님께 이 점을 항의했습니다.
이에 원장 수사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되기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신앙만이 이를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신이 가난한 이가 되기를 바라셨을까요?
왜 신성과 권능을 감추고 우리 가운데 그것도 가장 끝자리를 차지하며 살고 싶어 하셨을까요?
생명 자체이신 그분에게 십자가행, 골고타의 수난, 죽음의 치욕이 뭔 말입니까?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은 공학도가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썩을 수 있는 밀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큰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 능력을 살려서 일하는 것을 주님께서 과연 원하실까요?
오히려 자기 능력을 감추고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모습을 더 원하실 것입니다.
이런 겸손만이 주님을 제대로 닮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나는 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식으로 ‘나는 ~이다.’라는 표현이 모두 7번 등장합니다.
이는 주님의 신성을 사람들의 생명과 관련지어 말씀하시는 표현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분, 특별히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착한 목자’로 말씀하시면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실제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확인되었지요.
그리고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인 인지를 넘어 서로 마음이 통하여 마음의 일치를 이루는 친교를 말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무엇이든 바치는 사랑의 희생을 하는 상호 관계를 말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겸손한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마찬가지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사랑을 겸손한 마음으로 봉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려고 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겸손을 묵상해야 합니다.
자기 영광이 아닌, 주님 영광을 드러내는 삶,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되는 삶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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