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그런 뜻이었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3년 졸업할 때까지 만 9년 동안, 왕복 이십 리 길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래 그런지 걷거나 뛰는 데는 늘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해외여행 중에, 함께 잔 마라톤 하는 형제님을 따라 아침 조깅을 하다가 오른쪽 고관절 근육 쪽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습니다. 난생처음 겪은 경험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근육 마사지를 받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성도님의 한의원에 가서 몇 번의 치료로 제법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울트라 사운드 기구와 침으로 근육의 깊은 곳을 풀어주고, 고관절 쪽의 염증을 치료하는 생약을 먹은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치과나 한의원 등 병원 스케줄이 제법 잡히는 걸 보니, 저도 나이를 먹어 가고 있나 봅니다. 아래 본문처럼 ‘땅에 있는 장막 집’이 삐걱거리고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에게서 오는 건축물 곧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고후 5:1).
아침에 위 본문을 여러 번 읽으면서 ‘우리의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적지 않은 분들이 후자에 대해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라는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찰스 하지를 포함한 개혁 신학계에서 꽤 저명한 신학자들(Harris, Tasker)이 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바 성도들을 위해 예비된 하늘의 처소(處所) 즉 하늘나라(요 14:2)를 가리킨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이 구절에 대한 설교와 주석들을 검색해 보니, 대다수가 여기서의 ‘영원한 집’을 문맥의 흐름을 따라서 우리의 부활한 몸’이라고 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저명한 신약 학자인 빈센트 박사 역시 같은 입장입니다(‘The reference is to the resurrection-body’). 사실 선입관만 없다면, 누구라도 다음과 같은 본문 내용들만 읽어도 자연스럽게 같은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첫째, 위 ‘왜냐하면’은 앞으로 언급될 내용이 바로 앞의 4장 13절부터 18절에 대한 추가 설명일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장에서 다룬 내용은 우리의 존재 자체인 겉사람과 속사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위 본문은 건축물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했고 바로 다음절도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거처로 옷 입는” 것을 말씀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영원한 집’은 저 하늘의 어떤 장소로 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셋째, 또한 이어지는 내용은 이 ‘옷 입는 것’이 (우리 존재 안의)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도록 하려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4절).
따라서 위 본문은 죄로 죽었던 우리의 겉사람이 쇠하여 가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들은 거듭날 때 우리 영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신 주님께서 우리의 혼과 몸 안의 죽음까지도 삼켜가심으로 온 존재를 썩지 않을 부활체로 만드시는 과정이기도 함을 전제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과정(빌 3:11) 혹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건축’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엡 2:21-22).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주류 교단이 신봉하는 개혁신학은 주로 죄 문제 해결에 치중하다 보니, 위 본문처럼 주님께서 부활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자라가시면서 우리 존재 안의 (영적) 죽음을 삼켜가시는 방면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관찰됩니다(롬 8:10, 6, 11). 아마도 이것은 위 찰스 하지처럼 요한복음 14장 2절이 말하는 ‘아버지 집’을 저 하늘 어디엔가 있는 맨션쯤으로 크게 오해하는 것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튼 다른 사람들이 위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와 별도로, 저 자신에게는 어떤 도전을 주고 있는지를 돌아볼 때 다음 두 가지가 제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첫째, “벌거벗은 모습으로 발견되지 않도록”(3절) 즉 제가 죽기 전에 첫 열매로 들림 받도록,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영적으로) 푹 익어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계 14:1, 4).
둘째, 그것은 “자신을 향하여 살지 않고, … 주님을 향하여 사는 것” 즉 매 순간 저의 타고난 인격을 비우고 제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의 인격을 사는 입니다(15절).
첫댓글 많은 연구와 사색끝에 쓰신글이라 문외한인 제가 토를 달아 흠집을 내게될까 두렵습니다만 용기를 내서 몇자적어 봅니다.
위의 해석대로 상징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집은 입신한 분들의 간증을 보면 실제로 천사들이 집을 건축하고 있는걸 보았고 완성된 집안으로 들어가서 구경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이한건 집 인테리어는 육신에 있을때 본인들이 헌신한 정도에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예로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와 사도바울의 집은 비교할 수없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고칠수 없는 영원히 살 자기 집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살아서 영원히 살 내집에 멋진 인테리어가 되도록 비젼을 가지고 주님께 헌신을 해야 나중에 후해가 없을것이라고 그러니 살아서 천국에 비젼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