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와 '아직' 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두 시간대 속에 성도는 놓여있기에 그래서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이것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상태라는 것이다.
* 신학자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까,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소위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 공격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즉, 구원의 서정은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이고, 신약에서 말하는 것은 이런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도 전체를 염두에 두고서 말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경험을 하게 되는 믿음, 칭의, 양자 됨, 성화, 영화, 견인 등의 과정을,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이미와 아직' 이라는 것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아주 유명한 도식이 있는데, [ Φ1 → Φ2 ] 라고 해서 초림과 재림으로 나누게 되는데, 이것을 오스카 쿨만이라는 학자는 나누지를 않고, 이것을 전체를 다 보는데, 선(→)을 역사로 보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서 과거로 빨려나가고 미래로 빨려나간다는 것이다.
* 이제까지 논의되어진 종말론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 (1)철저 종말론 (2)실현된 종말론 (3)실현 과정 속에 놓여 있는 종말론 (4)실존주의적 종말론 (5)구속사적 종말론 (6)변증법적 종말론 (7)선취적 종말론 (8)전천년주의 종말론 (9)세대주의 종말론
* (1) 철저 종말론 - '신약은 완전한 종말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슈바이처 박사가 주장한 것인데, 예수님의 산상설교나 다른 말씀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다는 것이다. 구약 관점에서 볼 때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 볼 필요도 없이 지금이 바로 결정의 시간이고 종말이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 마태복음 25장이나 26장에서 곧 온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날에 아이를 밴 상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하면서 현상적으로 사건이 벌어지는 그런 상태를 적극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에 나오는 사건과 연결을 해서 종말이란 이렇게 바로 박살이 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즉, 자기들이 살아있는 그 시대에 종말이 바로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 제자들도 물론 그렇게 종말이 자기 시대에 들이닥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붙잡히시고 모든 제자들은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래서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민중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예수님께서 죽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활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활은 가만히(?) 하신 부활이기에, 자기 12제자들에게만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몇 여자에게도 보여주시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 떠나가시면서 자기들에게 부탁을 하셨는데, 성령이 오면 자기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 이때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진짜로 보았다고 말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본 것은 아니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고 하니, 자기가 하도 예수 믿는 사람을 많이 죽여서 양심의 가책이 되어 있는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자 정말 신이 노해서 그런 줄 알고, '그래, 예수님은 착한 삶이야' 라고 마음을 바꿔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분을 자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교회 -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가, 아니면 구원을 시켜주는 곳인가 ?
* 그래서 생겨난 것이 교회인데, 그 이전가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모임이 교회인데, 이제는 남을 구원시켜주는 곳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철저 종말론에서 상당히 중요한데, 지금 한국교회를 한번 보라는 것이다. 이것을 80년 전에 슈바이처가 이미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 초대교회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에 구원을 받은 자의 모임이 교회가 되는데, 그런데 갑자기 교회가 구원을 시켜주는 곳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단 교회로 오기만 하면, 성만찬과 세례 등을 법들을 통해서 구원을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성직자 회의를 열어 가지고, 그 모임에서 구원받았다고 그렇게 선언하면 된다는 것이다.
◈ 원래의 복음서를 찾아서 !!
*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신약성경에 있어서 초창기의 구절들을 학자들이 어떻게 성경을 뽑아내는고 하니, 공관복음의 내용과 사도바울의 내용을 비교해서, 같은 것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고, 다른 것은 구원을 시켜주려는 교회에서 삽입을 시켰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같은 경우는 공관복음에 포함시키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내용이, 그 당시 교회에서 성만찬을 계속 반복하면서 성만찬의 의의를 예수님의 생애와 맞추어서 짜집기(?)를 해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기에 성만찬을 해야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 예를 들어, 요한복음 4장에 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물세례를 주는 의의를 예수님의 생애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찾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 왜냐하면 학자들은 그 당시에 공관복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승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전승이 총 6개가 있는데, 이것을 'Q문서' 라고 하는데, 물론 요즘은 그것을 아주 세밀화를 시켰지만 말이다. 이것을 수원카톨릭대학의 안병철 신부가 '공관복음연구' 라는 책에서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맞추어보니까 신약성경의 문제점들이 다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 왜 주기도문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다르냐는 것이다. 주기도문이 두 개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나름대로의 신학이 따로 정해져있더라는 것이다. 누가의 신학은 안디옥 신학으로서, 팔레스타인이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이미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안디옥 신학은 당연히 헬라인들을 옹호하는데, 헬라인들은 이방인들이기에 이방인들을 옹호하는 것을 뽑는데, 그래서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높이는 것들만 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선한 사마리아 비유도 그렇고, 두 아들 비유도 그렇고, 불의한 청지기 비유도 역시나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이방인들을 높이고 유대인들을 밟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의 신학은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반면, 마태의 신학은 갈릴리에 모이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모이는 것은 예루살렘이 끝이 아니고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땅 끝까지 가도 본부인 예루살렘과 연결이 되어있기에 괜찮다는 것이다.
* 마태신학이 갈릴리에 모여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입장인 반면에, 누가신학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땅 끝까지 확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을 보면,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니까 이사야 6장을 인용하면서 '보기는 보아도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라고 하니까, '옳소이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이방인들은 환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이니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 소위 신학을 한다는 자들은 이런 것들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승의 고리나 그 여울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매일 같이 앉아서 책상 위에 성경책을 펴놓고 서로 합치고 쪼개는 작업들을 계속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나 누가, 그리고 마가도 각자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책을 지었다는 밝혀내면서, 그러한 책들 말고 원래 복음서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책들의 서로 공통된 분모를 찾는 것이다.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
* 산상설교도 마태의 경우에는 산이지만,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평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산의 이야기는 세 군데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아예 처음부터 제외이고 말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빛이나 어둠, 그리고 로고스 등의 헬라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요한이 이미 교회가 확정되고 난 뒤에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 요한복음 - 헬라적 개념들을 가지고 공관복음서를 다시 해석 !!
* 그러니 요한복음은 이미 있는 공관복음서를 가지고서 헬라적으로 다시 적었기에 원래의 복음서를 찾는 작업에서는 빼 버리고 논의를 한다는 것이다. 즉,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원래 행적을 발견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성전 청결의 경우를 보아도, 이것은 복음서의 마지막에 나오는데,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처음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구조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라는 것도, 그것은 유월절 숫자를 가지고서 계산하는데, 그런데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두 번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공생애가 2년인지 3년인지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처음 전하신 말씀이다 !!
* 그래서 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이러한 초대교회에 의해서 자기 입장에 맞추어서 각색된 복음서들 말고, 원래의 복음서를 다시 찾자는 것이다. 즉, 원래의 오리지날한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도 날리고, 누가복음도 날리고, 마가복음도 아무런 미련 없이 날려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말이다.
* 이렇게 듣고 보면 매우 그럴 듯한데, 그러나 문제는 기존 복음서들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아니라, 하나의 참고서적에 불과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마 복음서 같은 것도 아무 거리낌없이 인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빠진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말이다. 도마 복음서 외에 다른 책들도 계속 첨가하면 아마 희한한 예수님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의 예수님의 생애'나 '초인생활' 등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장사만 된다고 하면, 별의 별 짓을 다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공부를 많이 해서 사기를 치는 경우이고, 무식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목회 경험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자기 교회의 역사도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사도행전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가정행전' 이라는 책을 이미 발표한 목사도 있지만 말이다.
◈ 사람의 모든 경험은 주관적인데, 자기 환경에 얽매여 있다 !!
*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사람의 모든 경험은 주관적인데, 자기 환경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환경에 따라서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칸트의 이성철학은 윤리이다' 라고 하는데, 어떤 한 집안이 있는데, 형은 서울법대, 동생은 서울의대, 그런데 자기는 서울전문대,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다른 한 집안은, 형은 초등학교 졸업, 동생은 고등학교 중퇴, 그런데 자기는 서울전문대,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복 덩어리라는 것이다.
* 그래서 미셸푸코와 피아제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인간의 살아가는 모든 주관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 집안의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와디푸스 이론' 이라고 했는데, 길거리에서 침을 뱉는 행동을 두고서, 어떤 집안에서는 좋지 못한 행동이라고 야단을 치지만, 어떤 집안에서는 남아다운 기개를 살리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집집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 미셸푸코 -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권력에 속해있다 !!
* 이것을 한 마디로, 미셸푸코는 최근에 말하기를,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권력에 속해있다' 라는 것이다. 물론 이 권력은 성경으로 보면 죄악이고 '아담 안에서'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아버지의 권력에 속해있기에, 아들은 매일같이 짓눌려 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군대에 가보면, 경상도 출신이 고참 되면 전라도 신참을 마구 까고, 또 전라도 출신이 고참 되면 경상도 신참을 마구 까고, 이런 식으로 복수혈전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권력에 짓눌려 있다가 아버지에게 복수하면 그것을 '축복'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축복이라고 해도, 자기 나름대로의 축복이 다 따로 있다는 것이다. 못 생긴 여자는 시집가는 것만 해도 축복이고 말이다.
* 그래서 하나님 말씀인 계시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못 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무엇인가? 자기들의 목회성공이 바로 계시라는 것이다. 조용기가 50만 명을 모아놓으니까, 제 아무리 이단 같은 소리를 해도 대꾸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50명을 모은 이근호가 아무리 소리치지만, 그냥 웃고 만다는 것이다. 왜? 50명과 500000명은 게임이 안 되니까 말이다.
◈ 한국교회의 계시 - 어떻게 이렇게 교회를 키웠습니까?
* 그러니 이렇게 되면, 목회경험이 성경을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죽어도 말은 그렇게 안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말로는 제아무리 성경을 외쳐도, 그야말로 말뿐이라는 것이다. 성경공부를 하고 성경을 강조하면,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을 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의 무식함이 탄로 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목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선택된 자들만 하는 '주의 사자' 라고 하면서 뻥을(?) 친다는 것이다. - 주의 사자를 공격하면 벌을 받는다 ??
*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물론 이것이 엉터리인 줄을 알기는 아는데, 그래도 뭔가 찜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것이 좋다고 입을 다문다는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는 이것 하나 가지고 버티고 말이다. 그러니 서로 똑같다는 것이다. 너무 정곡을 찔렀나?
◈ 삼위일체는 정치적 산물의 결과인가 ?
* 그래서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에서, 이렇게 구원을 시켜주는 자들의 모임 전락을 하고 말았는데, 그래서 삼위일체 논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세 가지 신학논쟁의 정치적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첫째가 안디옥 신학으로, 인간들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고난받은 분으로 자기들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으로, 예수님은 인간이지만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인간이라고 하는 주장을 하고 싶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구조상 둘 다 동시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뭔가 꼭 하나가 앞선다는 것이다. 이렇게 반대되는 개념은 동시에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남자면 남자이고, 여자면 여자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면 하나님이고, 인간이면 인간이라는 것이다.
*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이렇게 하나님이 먼저인데, 왜냐하면 이들은 이방인 계열로서 '로고스' 라는 신(神) 개념을 이미 가지고 있기에, 신이 육체를 입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디옥 신학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면 중보자 역할이 안 되기에 말이다. 그냥 하늘나라에서 낚시대로 끌어올리듯이 올려버리면, 대속 개념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희생제물이 인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속 개념이 없이 그냥 죄를 용납해버리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보자는 인간과 하나님의 모습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예수님을 인간 쪽에다 초점을 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안디옥 신학이나 알렉산드리아 신학이나 다 말이 맞는 것이다.
* 이제 세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로마교회 신학인데, 그 당시 로마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데, 그래서 'PAX ROMA' 라는 말도 생겼는데, 그러니 인구도 가장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구가 많으면 뭐도 많은가? 세금도 많다는 것이다. 상회비를 많이 낸다는 것이다. 큰 교회가 왜 큰소리를 치는가? 상회비를 많이 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로마교회가 얼마나 입김이 세겠는가? 그런데 이 로마교회가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를 정치적으로 조종한다는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 이런 로마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직제(職制)인데, 즉, 제도라는 것이다. 이 제도라는 것은,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조직화해버리면 당연히 제사장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신부가 바로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부를 중심으로 조직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가 바로 제사라는 것이다.
* 지금도 이것을 끝까지 고수하는 곳이 로마 카톨릭도 그렇지만, 러시아의 그리스도 정교가 대표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 마디로 무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령이라고 하면서 연기를 피우면서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천주교는 가끔 하지만, 이 그리스도 정교는 매일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말씀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예배의식 자체는 너무너무 신성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정교회의 신부들을 보면 옷차림이 그야말로 제사장 그 자체라는 것이다. 너무 무거워서 움직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니까, 이러한 제사장 직분을 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재현하니까, 아무나 오라는 것이다. 얼마든지 구원을 시켜준다는 것이다.
* 이런 라틴계통의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구절이 요한복음에 있는데, '너희가 죄를 사하면 용서받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면 풀린다' 라는 것이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요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기 전에 무엇이 나오는가? '내가 네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우리라' 라고 하는 것이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그러니 어찌되었던 교회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인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누구든지 베드로의 시체를 가지고 있으면 '오야' 라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시체를 카톨릭이 가지고 있으니 정교회에서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교회에서는 베드로의 시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중요하다고 해서 예배를 드리면서 연기를 뿜는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시체가 없으니 말이다.
* 그러니 결국 사람을 구원시켜주는 곳은 그 형님뻘이 바로 카톨릭과 그리스도 정교회라는 것이다. 개신교에서 제아무리 예배갱신을 주장하고 외쳐도 그들과 게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성만찬의 의미를 제대로 살린다고 해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서 매일같이 그렇게 하는 저들을 어떻게 따라붙는다는 말인가? 개신교에서 목사의 로만 칼라를 제아무리 만들어도 신부들 앞에서는 게임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다시 카톨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신부들의 하루일과' 라는 책을 거금 2만원이나 주고 샀는데, 거기에 보면, 국가에 대해, 법에 대해, 세금에 대해, 부동산에 대해서 전부 다 나온다는 것이다. 개신교가 지금 나름대로 뭔가 하려고 하는 짓들이 카톨릭에 이미 다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책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하면 결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지, 그것도 모르고 사람을 모으려고 까불고 있으니 말이다.
* 요즘 개신교에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유치원을 세운다고 난리법석을 피우는데, 그러나 천주교를 한번 보라. 그들이 한 짓들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런 분야에 얼마나 도사들인가 말이다. 개신교에서도 앞으로 '죽을 때 땅을 바치면 구원받는다' 라는 말이 나올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주교에서 이미 그렇게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신부와 수녀들이 공짜로 학교와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니 어떻게 돈이 되지 않겠는가?
* 슈바이처가 말하기를, 그는 예수는 보고 욕하지는 않았지만 사도바울은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런 사도바울의 사상을 따랐기에 공관복음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총신교수들이 다 배우고 돌아와서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상급 차등론' 이고 말이다.
* 다시 말해서, 공관복음과 사도바울의 사상은 다른데, 이것을 서로 조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고, 공관복음의 산상설교 등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니, 이 둘을 서로 조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훈택 교수의 '믿음+행함' 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상급에 차등이 없고 예수님은 있는데, 그래서 서로 조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성경신학의 한계라는 것이다.
* (2) 실현된 종말론 - '이미 종말은 실현되었다' 라는 것인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이미 종말이기 때문에 즉각 이루어지는, 즉, '내가 메시야이다' 라는 것을 선언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예수님의 말씀은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C. H Dodd 교수가 주장을 한 것인데, 그런데 그는 끝에 가서 이것을 바꾸는데, 아직도 남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이론은 Dodd가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종말은 이미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오직 자기가 회개한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3) 실현 과정 속에 놓여 있는 종말론 - 이것은 요아킴 예레미야스가 주장한 것인데, 구원은 지금 실현되고 있는 과정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 8장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아들이 탄식하며 소망을 이루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같은 경우에는 공관복음보다 일찍 기록되어 있는데, 사도바울이 오해를 해서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착각을 했는데, 감옥에 가서 다시 생각해보니까, 나중에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옥중서신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 (4) 실존주의적 종말론 - 내가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서서 믿음으로 결단을 내리는 순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트만이 주장한 것으로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은 현대과학으로는 통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신화(神話)이기 때문에 말이다. 과학적으로 검증이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신화라는 것은 전설과는 다른 것인데, 전설에는 얼마든지 거짓말이 끼어 들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라는 것은 과학이 발달되기 전에는 세상을 삼층으로 보았는데, 땅을 기준으로 해서 땅 밑과 땅 위로 나누어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땅위의 하늘도 삼층으로 보았는데, 1층은 대기권이고, 2층은 별들이 노래하는 우주이고, 3층은 천사들의 고향이고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천국을 삼층천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 그러니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모든 우주는 하나라는 것이다. 지구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의 중심은 없다는 것이다. 천동설도 엉터리이지만 사실은 지동설도 엉터리라는 것이다. 물론 바꾸어서 말하면, 둘 다 맞는 것이고 말이다. 아인쉬타인에 의하면 빛도 휘어지는데, 그러나 이것은 옛날 사람들은 생각도 못했다는 것이다. 블랙홀도 밝혀지고 말이다. 그리고 스티브 호킹 박사에 의하면 블랙홀로 들어가서 화이트 홀로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시간여행이라는 것이다. 별 희한한 일들이 다 생긴다는 것이다.
* 그런데 시편과 전도서처럼, 땅 밑을 사람이 죽어서 가는 음부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제 아무리 땅을 파 보라? 무엇이 있는가? 과연 지옥이 있는가? 사람들이 우글우글 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물론 러시아에서 지옥을 본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말이다.
* 그러니 불트만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전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같으면 그 수준을 다르게 하고 말이다. 촌 할머니에게 컴퓨터 이야기를 하면 되겠는가? 손가락이나 수판을 가지고 말해야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란 그 당시의 공시적 통시적 문화인데, 그래서 그 당시 언어로 표현한 것을 오늘날 보니까 신화로 보인다는 것이다. 전설이 아니고 말이다.
◈ 불트만의 비신화화(比神話化) - 성경을 과학적으로 새롭게 해석하자 !!
* 그래서 지금 우리는 과학적으로 이 신화를 다시 해석해야 하는데, 그것을 '비신화화(比神話化)'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신화를 현대 과학으로 옮기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오병이어의 경우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 매료되어 있다가 보니까 점심시간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보니까 자기 도시락이 생각나서 꺼내 먹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모든 것을 헬라적으로 보아야 하니, 모든 표현을 헬라적으로 바꾸어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이야기하고,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가 있으니 예수님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음식을 축복하니까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없는데서 만든 것은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을 그러한 분으로 자꾸 만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다는 것도, 사실은 물위를 걸은 것이 아니고 황혼이 지는 바닷가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물위를 걸은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위로 걸었다고 표현을 했는데, 이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너무 너무 전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말이다.
*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기록된 것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불트만이 이렇게 변증적으로 자기 논리를 전개하는고 하니, 신약성경을 가지고서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조사해보니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성이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사건도 그러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공격을 나름대로 변호했던 것이다.
* 그런데 슈바이처는 예수는 광신자이고 도박을 했다고 했지만(GAMBLING THEORY), 사도바울도 여기에다 장단을 맞추었고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예수나 사도바울처럼 그런 광신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자체를 경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갔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든 생명이니 말이다. 예수는 실패했지만, 자기는 한번 성공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가 슈바이처를 떠받들고 있으니, 어찌 믿음이 있다고 하겠는가? 노벨 평화상만 받으면 장땡이 인가?
*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불트만이 'NO!' 라고 선언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교회보다 얼마나 더 믿음이 좋은가? 불트만 역사로서는 예수가 증명이 안 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왜냐하면 그러나 오병이어도 그렇고 복음서마다 내용도 다 다르고 말이다. 그래서 복음서들은 후대에 만들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개신교라는 것이다.
◈ 하이데거 - 이미 된 인간, 이미 될 인간 !!
* 불트만이 이런 것을 누구에게 배웠는고 하니까,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 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을 실존주의 신학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미'와 '아직'의 존재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과거가 있고 미래를 내다보는 그런 실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와 아직' 이라는 것은, 이미 철학에서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인간이 될 것이다' 라는 것이다. 즉, '이미 된 인간, 이미 될 인간'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된 인간은 이미 될 인간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을 신학자로서 철학을 기독교로 바꾸고자 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 (5) 구속사적 종말론 - '종말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아직 되지 않았다' 라는 것인데, 우리들이 구속사를 다루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스카 쿨만' 인데, 그리고 이 쿨만의 제자가 자칭 보스라고 말하는 '게르할더스 보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자가 '헤르만 리델보스' 이고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 역사의 중심이라는 것은, 과거에 믿었던 사람도 이 십자가를 보고 믿었고, 앞으로 믿을 사람도 과거에 일어난 십자가를 보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이런 역사에 무슨 중심이 있느냐는 것이다. 시간은 단지 머리 속에 남아 있는데 무슨 중심이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심은 공간적인 개념이기에 말이다.
* 예를 들어서, '사랑에 중심이 있다' 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추상적인데 무슨 중심이 있는가? 역사를 억지로 선(線)으로 그리니까 중심이 나오지 말이다. 역사는 그런 선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인생을 30년을 살았다고 하면, 그 중심이 있는가? 결혼인가? 또한 묵시적 개념에서는 '이미와 아직' 이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 (6) 변증법적 종말론 - 영원과 시간이 같이 만남으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칼 바르트가 주장했는데, 여기에서 바르트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제는 영원한 것이 역사 속에 들어갔으니까, 그러니 이제 역사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인데 무엇이 더 문제이냐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영원 속에 들어갔는데 왜 역사에 얽매이느냐는 말이다.
* (7) 선취적 종말론 - 종말은 아직 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주님의 종말이 선취(先取)가 되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이 문제인데, 총신이나 합신에서 교수들이 이것을 배워와서 가르치고 있으니까 말이다. 왜냐하면 선취적 종말론은 묵시(默示)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歷史)면 역사가 전부이지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즉,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달력(CALENDER) 말고 뭐가 더 있느냐는 것이다.
◈ 역시 역사(歷史)가 최고야 !!
*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죽었으면 그것이 바로 역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 이후가 'A.D'라는 달력으로 연결되어서 오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역사가 분명한 사실인데 묵시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소위 성경신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라는 것이다. 김세윤, 이한수, 정훈택 등이 그렇고, 총신, 합신, 장신 등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주의 신학자 판넨 베르그가 주장한 것으로, 리델보스도 그렇고 말이다. 묵시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오실 그분을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다.
* (8) 전천년주의 종말론, (9) 세대주의 종말론 - 둘 다 같은 것으로 보면 되는데, 세대주의자들이 이렇게 주장하는데, 이것은 정말로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인간복지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나 이교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왜 이렇게 잘 살지를 못하느냐?' 라는 것에 대해서 너무 답답해서 튀어나온 종말론이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도 별 볼일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패자 부활전을 다시 한번 더 하자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한번 더 재현을 해보는 의미에서 재림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비록 예수님이 처음 십자가에서는 실패했지만, 그러나 이제 다시 오셔서 아름다운 복지국가를 만들어주신다는 것이다.
* 앞의 종말론들은 다 이루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 전천년주의 종말론은, '다 이루었으면 왜 배가 고프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너무 설치니까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오셔서는 완전히 박살을 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재림이라는 것이다.
*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까,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문선명' 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가 예수라고 했다가, 이단이라고 코너에 몰리니까, 이제는 자기도 예수님의 종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단은 이렇게 카멜레온처럼 변한다는 것이다. 조용기를 한번 보라. 방언은 성령의 역사라고 하다가, 이제는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진리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 수에 따라서 목회방침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 10분 휴식 !!
◈ '이미'와 '아직'의 문제점 - 성경에 대한 선입관이 잘못되었다 !!
* 이렇게, '이미와 아직' 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을 보면서 인간의 구원에 중심을 두고서 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말이다. 즉, 성경의 핵심이 '구원론' 이라는 것이다. 기독론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게 되니까 '나를 위한 예수님'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안 받았다' 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완료라는 것은, 항상 그 전제가 미완료의 요소가 사라졌을 때, 그것을 두고서 완료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완료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리고 '긴장과 갈등'의 개념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사실 너무 애매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긴장과 갈등이 있다는 것은 사실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안식의 때에 무슨 긴장과 갈등이 있겠는가? 철학을 전혀 공부를 안 했는지 몰라도 이것은 논리적으로 정말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인데, '나는 고등학교 시절과 환갑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관계 속에 있다' 라고 하면 말이 되는가? 차라리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환갑이 될 것이다' 라고 하면 그 시간 차이가 아무리 나도 상관이 없는데, 그것이 아니고 '나는 고등학생이다. 아니다, 나는 환갑을 기다린다' 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 차라리 요하킴 예레미야스 처럼, '구원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나 이것은 총신 교수들이 모두 다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도, 십자가의 한편 강도도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완료의 의미로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이 엉터리가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선취적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높은 고원지대에서 밭농사를 짓는데, 이것을 두고서 '이미 개간을 했지만, 그러나 아직 씨를 뿌린다' 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그러나 이들은 사실 이런 것도 미완성이기에 아니라는 것이다. 열매가 없으니 말이다. 열매가 구원이니 말이다. 이것을 두고서 '1단계', '2단계' 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런 단계성이 있다는 것 자체도 사실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전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서 튀어나온 말이 '긴장과 갈등' 이라는 것이다. 아주 예리하고 똑똑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그야말로 구렁이 담을 넘어가는 듯한 두리 뭉실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러한 '이미와 아직'에 대해서 비판을 하면서,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대한 선입관이 잘못되었다' 라는 것이다. 성경이 줄기차게 말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론으로 접근하면 안 되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라는 것으로 접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이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성경의 핵심 -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 '아, 그분이 이렇게 하셔서 이렇게 구원이 되었구나!' 라는 것이지,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는 것은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은 있지만 말이다.
* 기의 경우에도, 욥이 구원을 받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욥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하냐는 것이다. 사울의 경우에도, 사울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지, 사울이 지옥 갔다는 말이 있는가? 다만, 악신이 들렸다는 말은 있지만 말이다. 사울이 지옥에 갔는지, 안 갔는지는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에도,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모세가 보여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은 이러하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말하는 것은 주(主, 아도니아)안데, 아러한 주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구약에서 말하는 주(主)와 똑같은 분이 신약에서는 나사렛의 청년인 '예수' 라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말하는 주(主)란 무엇인가를, 그 이름의 기능을 알아내어서, 그래서 그 주(主)와 예수님이 일치된다는 것을 밝혀내면,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이다.
* 구약에서 주(主)라는 것은, '승리자' 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하신 용사'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메시야로서 '구출자' 라는 의미인데, 승리했기에 건져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리했다는 것은 어떤 환경을 말하는가? 그냥 가만히 있는데 '승리자' 라는 개념이 생기는가? 지금은 전쟁 중이라는 것이다. 전쟁을 했기에 승리자가 있는 것이다.
* 구약에서 주(主)가 하시는 일은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여호와 전쟁' 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누구와 전쟁을 하는고 하니, 이방민족들과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같은 이스라엘 민족끼리 전쟁을 한다는 것이다. 남쪽과 북쪽이 하는 전쟁차원이 아니라, 선지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체 전쟁의 3/2가 넘는다는 것이다.
* 이런 전쟁을 통해서 무엇을 알려주는고 하니까, 도대체 주(主)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이 되느냐는 것이다. 모든 종교마다 다 주(主)가 있고 메시야가 있는데,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참 메시야는 어떠한 분이냐는 것이다.
* 이방종교의 바알이란 뜻이 무엇인가? 그것도 역시 주(主)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렇게 중보자가 신과 인간 사이에 끼어서 구원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 이후부터 타고난 기본인데, 그러나 이렇게 수많은 메시야 중에서 모두가 다 메시야는 아니라는 것이다.
*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모든 종교의 기본인데, 아프리카의 폴리네시아에 가면 지금도 양을 잡아서 사람의 죄를 씻는 그런 종교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례'도 그 당시 풍습이었고, '언약'도 지배자와 피자배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배자의 권리를 찾는 임대차 세금 계약(봉토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연구하는 것이 구약신학인데, 정말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 자유주의나 보수주의나 할 것 없이 모두 이런 것을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아오는데,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주(主) 개념' 이라는 것인데, 이 주(主)란 개념은 전쟁을 통해서 성립되는데, 일방적으로 자기 이름을 가지고 승리한 결과로 '남은 자'를 건지게 되는데, 이 남은 자의 주동자가 누구인고 하니,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 이라는 것이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우리 무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켰다' 라는 이것을, 구약에서 주의 이름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주(主) 개념이 바로 승리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방의 모든 종교에 대한 승리라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언약대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이란 무엇인가? 바로 제사법인데, 대신 죽음이라는 것이다.
* 여기에서 유대인들이 발끈 하는데, 그렇게 대신 죽으려고 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세푸스의 교회사에 의하면 자칭 메시야라는 사람이 수 백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3세의 나사렛 청년이 꼭 주 예수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33세의 나사렛 청년이 아무런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성취라는 것도 그렇게 해석을 하니까 그런 것이지, 그것이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억지라는 것이다.
* 3세의 나사렛 청년이 꼭 주 예수가 되어야 하는 이유와 그것을 아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주 예수의 영이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주 예수를 알고 믿는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지혜라는 것이다.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모든 지혜를 부정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강영안, 김영한, 신국헌 교수 등은 성령의 능력을 언어학으로 바꾸어놓았는데, 이것을 '현상학적 해석학' 이라고 하는 것이다. 씨슬톤이 지은 '두 지평' 이라는 책을 보면, 가다머와 리꾀르와 하이데거 등을 이야기하면서, 성경은 언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언어를 조사하면 성경 저자의 뜻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무엇인가? 성령이 언어학자의 영인가?
*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은, 사도바울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다양성' 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초창기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윤리와 도덕으로 바꾸어서 말한 것은 시건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율법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E.P 샌더스 라는 것이다. 이 샌더스에게 공부한 사람이 홍인규, 정훈택, 최갑종 교수 등이라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런 상태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보수주의 교회들이 말이다.
* 샌더스의 이런 주장이 나오니까,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만세를 부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버리면 돈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함이 나오니까, 교회봉사를 강조하면서 돈을 긁어낸다는 것이다.
* 공자가 이런 말을 했는데, 사람이 교육을 시키면 교육을 시킨 사람은 받은 사람에게 스승이 되면서 그로부터 먹을 것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도 교인들과 똑같아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떠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훈련을 시킴으로 말미암아 이런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스승인 목사는 고유한 어떤 신령한(?) 영역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팬티라도 목사팬티가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 성경에서의 명령법은, 명령법이 아니라 창조법(?)이다 !!
*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어라' 라고 하니 있었지, 있어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명령법은 명령법이 아니라, 창조법(?) 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총신 교수들이 무시한다는 것이다. 명령법과 직설법은 서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스겔 47장에 뭐라고 되어있는가?
(겔 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지금 여기서 마른 뼈에게 말하는 것이 언어구조로 해석이 되는가? 이렇게 죽은 마른 뼈에게 명령을 한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위력이라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능력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 인간은 변형과 제조는 할 수 있지만, 창조는 못한다는 것이다. 석유로 온갖 물건들을 다 만들지만 그러나 창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에너지 보존법칙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위치이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헌금도 그렇지 않는가? 개인 가정에 있던 돈이 교회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50편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제물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않겠다는 것이다.
(시 50:8)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시 50: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시 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시 50:11)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시 50: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번제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산의 새와 들의 짐승도 다 하나님 소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15절에 나와있는 데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는 몸뚱아리, 바로 그것이 제물이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산에 있는 짐승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돈 몇 푼만 달랑 들고 와서 '받으소서' 라고 하면서 자기 몸은 도망치지 말고, '이 몸을 받으소서' 라고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한심령으로 드리는 제사라는 것이다.
*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에게 명령을 한다는 것은, 명령 자체가 이미 창조라는 것이다. 이런 창조 사역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하면, 나사로는 나가야 하고, 문을 두드리면, 내가 알아서 여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두드리면 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여기서 마태복음 9장을 한번 보자.
(마 9: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 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 9: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마 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서 가라' 라고 하면 일어나서 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명령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건방지게 네가 뭔데 명령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권세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장악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보여주듯이 주님은 승리자이니까 말이다.
* 그런데 신학자들이 이런 점을 모른다는 것이다. 설득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것이다. 들을 자는 듣는다는 것이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것도 일종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회개하고 안하고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택한 자는 회개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말이다.
* 그래서 구약의 '빛이 있어라' 라고 해서 빛이 있었던 그 형태가,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명령하심으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서로 똑같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라' 라고 했을 때, 그렇게 명령하심으로, 그분의 말씀으로 그런 믿는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것인데, 그렇다면 은혜는 무엇인가? 은혜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서 믿음이 왔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이 왔다는 것이다. 은혜와 믿음,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 행위의 출처가 예수님이면 믿음이고, 인간이면 행함이다 !!
* 이것이 로마서 4장에도 나오는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믿음이라는 것은 은혜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결단력과 선택, 그것은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행위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차원이 아니라 그 출처가 어디냐는 것이다. 그 행위의 출처가 예수님이면 믿음이 되는 것이고, 그 출처가 인간이라면 행함이 된다는 것이다.
* 여기서 베드로전서 4장을 한번 보자.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말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는 것같이 하고, 봉사도 그렇게 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왜 등장하는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인데 예수님이 왜 등장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런 마음가짐을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 이번 '빛과 소금' 이라는 잡지를 보면, 한제호 라는 분이 상급에 차등이 있다고 했는데, 공관복음과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은 상급차등이 없지만, 공관복음에는 상급차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모든 상급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 저의 글을 보면, 모든 상급은 그리스도의 공로성에 근거해 있고, 그런 공로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상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상급은 생명의 면류관이 아니면 상급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의의 나라이고 생명의 나라이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상급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 그런데 교회에서 왜 이런 말을 못하는가? 사도바울과 같은 그런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교회가 구원을 시켜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천국에 넣어주는 기관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왕 오신 손님, 그냥 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 이런가? 홍등가(紅燈街)인가?
*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성경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까?' 라는 책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오직 주님의 공로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목사는 이러한 주님만을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증거해서 '나도 동의합니다' 라고 하면 구원받은 사람이고, 아니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교회에서 떠밀어서 내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 달리 감독자인가? 그런 것을 감독해야지 말이다.
* 구원자가 되려면 그 조건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무엇을 의롭다고 하는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부활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신 죽어야 하는데, 죄인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으신 분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성경에는 목사의 자존심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사는 의인도 아니고, 대신 죽은 적도 없기에 말이다. 그런 분은 주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기철 같은 경우에는, '나를 따르라' 라고 했지만, 그러나 따라가 보아야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도 자기 죄 때문에 죽었으니 말이다.
◈ 구약 - 그런 분은 없다 !! 신약 - 드디어 오셨다 !!
* 그러니 신구약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의인이고, 대신 죽은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약이 보여주는 것은 '개 코로, 그런 분은 없다' 라는 것이고, 신약이 보여주는 것은 '드디어 오셨다' 라는 것이다. 드디어 말이다.
* 여기서 갈라디아서 3장을 한번 보자. 이 갈라디아서 3장은 구약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에 대한 중요한 테마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 창세기에 22장에 보면, '네 씨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 라고 했는데, 이 '씨'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라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도 역시 단수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다윗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가? 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에 분명한데, 왜 그들은 빼버리고 한 명으로 이야기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 갈라디아서 3장에서 분명히 여럿이 아니라, 한 명이라고 다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혈통으로 태어난다고 해서 자손이 아니라, 오직 믿을 때만 자손이 된다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만을 믿는 사람이 그런 믿음의 관계 속에 있을 때만, 그렇게 아브라함의 자손과의 관계를 맺을 때,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또 문제가 발생을 하는데, '어느 놈은 믿고 어느 놈은 왜 안 믿느냐?' 라는 것이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엄마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스마엘의 엄마는 땅에 있고, 이삭의 엄마는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는 포함되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왜 안 되는가? 엄마가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태어난 자와 육체로 태어난 자는 다르다는 것이다.
(갈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그러니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언어학적으로 풀릴 수가 있단 말인가? 성경이 과연 그들의 주장처럼 문학작품인가? 어떤 인간이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가?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쓰는가? 성경은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언어학 도사라고 해도 말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에 우리들이 믿음이 생겼는데,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행위를 추가시키고(?) 믿음을 주셨는고 하니, 원래 아브라함 자손과 자손들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이기 때문에, 믿음 관계 속에 우리를 집어넣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이 바로 신구약 성경전체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일반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 종교는 자기가 도를 닦아서 구원을 받는 것인데, 기독교는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 라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공로로 구원을 받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미 구원을 받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시간문제이므로 다 잘라버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문제는 거기에다 시간을 갖다 넣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전혀 서로 맞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만약에 성경을 인간들의 시간적인 틀 속에다 집어 넣어버린다면, 구원이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기 때문에, '이미와 아직' 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인 관점으로 들어가 버리면, 구원에 대해서 '아직' 이라는 남아있다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완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아직'이 아니라 '이미' 라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신학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학교 졸업하고 개척교회를 하면 되지 유학은 왜 가는가? '시간 벌기' 인가? 믿음이 없으니까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왔으니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그래서 '이미와 아직' 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직'을 말한다는 것이다.
◈ 구원받은 사람은 미완성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
* '이미와 아직' 이라는 것은, 하나의 종교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아직' 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러브스토리'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이다. -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I am sorry'
* 남아 있는 것이 있어도 그것은 내가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주님께서 하시는 것만 바라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니오'가 아니라, '예'라고 했는데, 이러한 것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미완성을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는데, '살인하면, 남을 속이면, 바람을 피우면 어떻게 합니까?' 라는 매일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정신사태가 틀려먹은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은 전혀 아랑곳이 없고,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 팔려있다는 것이다.
* 구원을 받은 사람은 끌려오는데, 어디로 끌려오는고 하니, 구원을 해주신 그 용서의 본부로 끌려온다는 것이다. 이 용서의 본부에는 외롭게 쓸쓸히 죽은 그 아픔이 있는데,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자기 죄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아, 나의 죄 때문에 이렇게 주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셨구나!' 라고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우리가 죄(罪)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들 자신 속에서 이런 죄를 찾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 착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다만 죄인이라는 것이다. 십자가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들이 죄인이 아니라면 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는가?
◈ 나의 행실이 아니라, 십자가를 보고서 내가 죄인임을 알 수 있다 !!
* 다시 말해서, 나의 행실이 아니라, 십자가를 보고서 내가 죄인임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죄가 청산되었음도 믿는다는 것이다. 죄를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를 말고 말이다. 왜냐하면 내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분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분이 있다는 것은, '너는 까불지 마라' 라는 것이다. 하청을 준 것이 아니라 말이다.
* 이렇게 '대신한다' 라는 것은, 우리의 믿음까지 이렇게 몽땅 대신해서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까지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믿음까지도 주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내가 남편을 믿는다는 것은, 남편이 무엇을 해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음의 대상으로서 믿는다는 것이다. 아닌가?
* 그래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을 이미 주님께서 대신 이루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대신 이루었음을 믿는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자칭 개혁주의자라고 하는 '바빙크' 라는 인간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요즘 총신에서 인기가 있는데, 올라갈 때는 십자가로 올라가서 내려올 때는 십자가를 건너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국가건설 등을 외치면서 말이다. 일반 은총을 주장하는데, 즉, 복음으로 올라가서 종교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사실 올라간 것도 십자가가 아니지만 말이다. 제대로 올라갔다면 제대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 바빙크 - 복음으로 올라가서 종교로 내려온다 !!
* 이러한 '기독교 이데올로기' 라는 것은, 모든 세상을 기독교적으로 만들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믿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 지난번에 차범근 감독이 한일축구경기에서 이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용혜원 이라는 미친 시인목사가 뭐라고 말했는고 하니, 차범근이 이번에 그렇게 한 것은 대한민국의 기독교 신자 전체가 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했다는 것이다. 즉, 너무나 큰 전도를 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것이다. - 그 뒤 차범근 감독은 감독직에서 쫓겨나서 하나님께 불충(?)했음 !!
* 그러나 시편 136편을 보라. 뭐라고 하는가? 지금 해와 달이 있는 것을 기적으로 안 보고, 축구에서 이긴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에 있는 기독교 신자는 무엇인가? 만약, 축구에서 졌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된다는 말인가? 축구를 못하는 하나님은 하나님도 아닌가?
(시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3)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4)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6) 땅을 물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8)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제대로 복음이 전해지려고 하면, 비록 한일전에서 박살이 나도, '그래도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라고 하면 몰라도 말이다. 항상 감사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를 않겠는가? '저렇게 한국축구를 개판으로 만들어도 천당 간다고 자부하는 바로 저런 모습이 천국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구나' 라고 말이다.
* 물론 차범근 감독은 일본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의도로 한 것이 아니고, 순간적으로 너무 좋아서 그렇게 했겠지만, 그렇다면 그 뒤에라도, 여호와의 선하심에,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있음에도 항상 감사하는 그런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축구를 못하는 개발(?)과 절름발이와 병신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닌가?
◈ 한국교회의 자본주의 - 상급 차등론 !!
* 현대 자본주의는 힘의 법칙으로 움직이는데, 힘을 가진 자가 이긴다는 것이다. 이 힘을 배양시키기 위해 교회에서 '상급 차등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돈만 바쳐라. 그러면 장로직을 줄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안 그러면 돈이 안 되니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런 것만 연구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차범근을 보고, 류광수를 보면서, '아, 저런 것이 복음이 아니구나' 라고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더 말씀의 깊이를 더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교만해지지 말라는 것이다.
◈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은? -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뿐 !!
*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 여기서 마태복음 22장을 한번 보자.
(마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마 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마 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마 22:26)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마 22: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마 22: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 22: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 여기서 예수님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시간관을 모두 다 부수어 버리는데, 기존의 시간관을 고수하다가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시형제 결혼법'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시형제 결혼법이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맞고 변함이 없다면, 그래서 그 원칙도 변함이 없다면, 그렇다면 원칙이 없는 것으로 시작해서 논리를 전개시켜 나가는데, 이렇게 원칙이 변함없는 것과 원칙이 변함없는 것으로 하면 나중에도 그 원칙이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 여기서 잠시 시형제 결혼법에 대해서 살펴보면, 형님에게 아들이 없으면 시동생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데, 그렇게 되면 형님의 자식이 된다는 것이다. 시편 127편에 보면, 태의 열매는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되어 있는데, 즉, 가나안 땅에서 존속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약속의 땅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모두가 다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래서 맏이가 존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율법은 영원한데, 그래서 이 시형제 결혼법도 부활의 세계에까지 들어가도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자식이 없고 죽었을 때에는 시동생과 결혼을 해서 대를 잇는데, 그렇게 해서 둘째와 셋째로 내려간다면, 그렇다면 만약에 나중 부활했을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즉, 율법도 영원해야 되고, 결혼도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러한 사두개인들에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는가? 빙그레 웃었는지, 희죽 웃었는지는 모르지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서 오해를 하였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율법을 모른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이 율법을 강조하지만 그 해석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 시형제 결혼법 - 남자 살리기가 아니라, 여자 살리기 !!
*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의 능력을 증거하는, 증거의 입장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형제 결혼법은 인간의 원만한 결혼생활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형제 결혼법은 남자 살리기가 아니라, 여자 살리기라는 것이다. 여자는 약한 자이고, 즉, '고엘' 인데,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 과부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동생들을 보고서 하시는 말씀이, '네 형수를 책임져라'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니까 말이다. 여기서 살려주신다는 것은, 영생을 주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영원한 부활의 세계도 영생의 세계인데, 그 부활의 세계가 있음을 미리 보여주는 맛배기로, 그런 살려주는 틀을 만들어주는 계기로 '시형제 결혼법'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장차 올 부활의 관점에서 이 지상의 법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고 하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아브라함과 어떻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 시집과 장가 - 영생의 나라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
* 좀더 쉽게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살아있으면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다가, 아브라함이 죽으면 이삭과 함께 계시고, 이삭이 죽으면 야곱과 함께 계시는, 그렇게 함께 계시면서 불쌍한 과부를 살려주시는, 그런 사랑과 부활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영원히 인간을 사려주시는데, 그때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시집과 장가를 가는 것은 이 땅에서만 해당되고, 이것은 영생의 나라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의미라는 것이다.
* 그러니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얼마나 오해를 하고 있었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책망하시기를,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는데, 이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더 있겠는가? - 어머나 !!
◈ 성경해석은? - 영생의 나라에서 거꾸로 해나가야 !!
* 그렇다면 성경해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활의 나라, 영생의 나라에서 거꾸로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지상에서의 삶은 하늘나라의 삶을 보여주는 원형이라는 것이다. 결혼제도까지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에 가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 라고 주례나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등장한 이단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송길원 등으로 이야기되는 소위 '가정사역' 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정사역의 시발점은 새 생활 세미나로 인기를 얻었던 이동원 목사인데, 현대인들이 행복한 가정을 원하니까,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가정사역 - 이리로 와요, 와요, 와요 !!
* 분명히 성경에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고 했는데, 가정사역이 왜 튀어나오는가? 그리고 인생은 안개라고 했는데 말이다. 목사들이 이런 세미나에 모이니까 계속해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제자훈련도 그렇고 말이다. 어찌 되었던지 교회를 한번 키워보려고 말이다. 물론 말로는 가정이 소중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서로 좋은 것이 좋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결혼하기 전에는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다가, 결혼한 뒤에는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정사역인가? 계시된 말씀이 이렇게 분명히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성경을 믿는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 결혼식 주례를 할 때, '축복' 이라는 말을 다 빼고서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례사가 되면 성경을 제대로 아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다. 결혼식에 가서 축복이라는 말이 나오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끝까지 앉아 있다가는 소화가 안 되니까 말이다. 왜 이렇게 축복이 강조되는가? 그렇게 해야 돈이 된다는 것이다.
* 그렇게 아부성(?) 주례를 하면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라고 하는데, 요즘과 같은 세월에 어떻게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살 수 있는가? 자기 마누라도 먹여 살리기가 힘든데 말이다. 마누라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먹여 살린다면 최고의 신랑이라는 것이다.
* 결혼식에 기도하러 가서 그런 엉터리 주례사를 들으면 소화가 안 되어서 밥도 못 먹고 집에 와서 애꿎은 컴퓨터만 박살을 낸다는 것이다. 아픔이 없으면 글이 안 나오는데, 그런 아픔(?)이 있을 때에 제 빨리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법은? - 역사적 해석법이다 !!
* 다시 말해서,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법은 역사적 해석법인데, 그것을 두고 다윗이 이렇게 해석하니까 자기들도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윗은 자기 똘마니라고 하시면서, 유대인들에게 질문을 하신다는 것이다.
* 여기서 누가복음 20장을 한번 보자.
(눅 20:4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 예수님은 그 주(主)가 바로 자기라는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미친놈으로 본다는 것이다. 자칭 자기가 주라고 하는 놈들이 하도 많으니 말이다. 요즘에도 자칭 예수라고 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듯이 말이다.
*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이 메시야인 것을 증거해 보라?' 라고 하자, 예수님은, 성경에서 두 사람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는 나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 너, 맞아 죽을래 !!
◈ 걸림돌 - 모두가 다 예수님 앞에서 걸려서 넘어진다 !!
*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 앞에서 이런 것이 걸림돌이 되어서 다 걸려 넘어진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모두가 다 걸려서 넘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 중에 기적이라는 것이다. - 밥 먹고 합시다 !!
* 하나님과 인간의 조건은 시간적 조건이 아니라 언약적 조건이데, 처음부터 '무엇 무엇을 하지 마라' 라는 것이다. 인간은 완전한 자유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틀이 없으면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을 상당히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 죄란 무엇인가? - '나쁜 짓인가, 선한 짓인가?' 라는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 !!
* 죄란 무엇인가? 나쁜 짓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렇게 '나쁜 짓인가, 선한 짓인가?' 라는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이다. 즉,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그런데 영생의 열매는 자기가 무엇을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따먹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줘도 못 먹나? 이렇게 따서 먹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상당한 의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죄가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들어왔음에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도 따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인간은 자꾸만 뭔가 자기가 알아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이다. 죄란 일종의 '사고구조' 인데,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도 못 지키는 것은, 마음이 틀려먹었다는 것이다.
* 율법을 누가 모르는가? 이 법은 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법이 있는데, 이 법은 하나님의 영광은 고사하고, 자기 영광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에 지배를 받고 있으니 그 어떤 법을 주어도 안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을 민수기에서는 '마음의 할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위(胃)가 좋지 못하면 다 토해버리듯이, 어떤 법을 주어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바꾸어서 자기 영광으로 돌려버린다는 것이다. 자기 부인(否認)이 안 된다는 것이다.
◈ 젖먹이의 힘으로 원수를 !! - 내가 힘을 키워서 악을 이기겠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라 !!
* 시편 8편에 보면, 젖먹이의 힘으로 원수를 이긴다고 되어 있는데, 젖먹이가 무슨 힘이 있는가? 그렇다면 왜 젖먹이를 등장시키는가? 내가 힘을 키워서 악을 이기겠다고 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