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아마도 밤을 샌 일요일일 겁니다.
언제나처럼 토요일밤은 너무도 짧기만 하죠.
그나마 늦잠을 잘 수 있는 일요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토요일 밤만큼은 푸르스름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작정하고 놀아나곤 하는데... 그 밤, 저는 아마 인터넷이란 숲을 하염없이 거닐었을 겁니다.
지난 한주의 피로와 나른한 졸음이 온방을 가득 채우는 일요일...
매일 아침 알람 대용으로 사용하는 TV는 저 혼자 켜진채로 떠들고 있습니다.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들이 머리 속에서 마구 뒤엉키기 시작합니다.
내숭과 주접이 절반씩 섞인 남녀들이 저를 비웃고 사라지는가 하면,
양촌리 주민의 소소한 일상이 어느새 제 잠자리를 파고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 머리 속을 채우기 시작하는 영화의 행렬...
별로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장면과 소리들이
뇌수와 섞여 출렁이며 칵테일이 됩니다.
비몽사몽... 그렇게 뒤척이던 제가 슬며시 눈을 뜨고
이불 너머로 보이는 TV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부스스한 머리, 뺨을 누른 베개 자국,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저는 그렇게 한 우주와 만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뭔가에 그리 쉽사리 빠지는 성격이 아닙니다.
특히 TV 속의 연애담을 보면 너무 쉽게 닭살이 돋는 편이라,
TV 드라마의 사랑이야기엔 제대로 감정이입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 딱 하나 있긴 합니다.
93년에 방송됐던 <서울의 달>에 나왔던 홍식이와 영숙이...
그 커플의 이야기엔 너무 깊이 감정이입을 한 나머지
드라마 끝난 뒤 며칠동안 내내 가슴 아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영숙이가 매일밤 홍식이를 전봇대 밑에서 기다리곤 했었는데
그 뒤로 저는 전봇대만 보면 손끝부터 가슴 언저리까지가 찌르르 울리기도 했었어요.
꼭 어두운 가로등 켜진 전봇대 아래서
영숙이가 '전봇대처럼 기다리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런데 말이죠.
지난 초여름 어느날, 저는 또 하나의 사랑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헌데, 이게 좀 요상한 것이...
그 사랑 얘기란 게 사랑에 목을 매는 드라마 속의 사랑도, 영화 속의 사랑도 아니란 거죠.
시트콤 속의 사랑에 몰입한 나머지, 소리도 안들리는 컴퓨터로 화면만이라도 보겠다고
별 난리를 다 치는 저를 비웃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나라 시트콤의 역사는 무척 짧습니다.
시트콤이라는 장르를 본 건 그나마 꽤 오래됐습니다.
('코스비쇼'같은 미국의 대표적 시트콤이 진작에 방송됐었죠?
매주 일요일 아침에 방송됐었는데, 정말 인기가 많았어요...)
하지만 시트콤이란 걸 직접 제작하기 시작한 건 SBS가 개국하면서부터일겁니다.
92년이던가요?
목요공개코믹드라마 <오박사네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처음 시작됐을 거예요.
목요공개코믹드라마라는 제목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몇가지 있군요.
1. '목요일'에 방송하는 주간극이다.
2. '공개'라는 걸 보니 방청객이 있다.
3. '코믹'드라마이다.
<오박사네 사람들>같은 경우엔 녹화 후 웃음녹음을 따로 하거나
아예 샘플된 웃음을 넣지 않고 외국 시트콤처럼
방청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트촬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야외촬영이 전혀 없는 완전한 세트촬영만 했었구요.....
철저하게 스튜디오 촬영에만 의존했었어요. 그리고, 주간극이었죠.
일일 시트콤이 생겨난 건 <오박사...>가 인기를 얻은 이후의 일입니다.
상당히 인기가 있었어요. 뭐, 저질이다 어쩌다 말이 많긴 했지만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그때도 그런 말이 있었지만 거의 <코스비쇼>의 벤치마킹 시트콤이었죠.
의사라는 설정, 아롱이 다롱이 자식들(거기다 늦둥이까지)....
<오박사네 사람들>이 막을 내리면서 바로 뒤를 이은 게 <오경장>이었는데
<오박사네 사람들>만큼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어요.
암튼 이 두 시리즈 덕분에 오지명 아저씨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됐어요.
뿐만 아니라, 시트콤이라는 장르가 사람들에게 인식되기도 했구요....
뒤를 이어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각 방송사에서 시트콤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일단 기억나는대로 적어보겠습니다. 제가 적지 못한 건 여러분의 기억력으로 채워주세요.
*** SBS: <오박사네...>의 영향일까요. 확실히 가족시트콤이 강세를 보이는 것 같군요.
-오박사네 사람들/오경장
-사랑은 생방송: 오박사네의 딸 박지영과 사위 윤승원이 방송국 직원으로 출연했었죠.
저는 별로였어요..
-LA 아리랑: 장수시트콤이죠? 저도 무척 재미있게 봤답니다.
당시 계단이 있는 2층집은 미국에서 디자인해온 세트라고 하더군요.
-아빠는 시장님: 이 시트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많더군요. 연기자들도 빵빵했고,
재미도 있었어요. 좀더 갔더라면 장수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굉장히 아쉬워요....
-OK 목장: 백일섭, 조형기, 권해효 같은 연기자들이 나왔었는데....
저질 시트콤이라고 많이 욕을 먹었죠.
-미스&미스터: 역시 남셋여셋에 대한 카운터 편성이었는데...
중간에 출연자도 갑자기 바뀌고 갑자기 끝나고...
꽤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빨리 끝나서 서운하더군요.
-뉴욕스토리: 노골적인 '프렌즈' 베끼기 시트콤. 굉장히 한심한 모방이었죠. 모니카-로스를
김희선-이훈으로 그대로 옮겨놓고 시작했는데, 시트콤은 결코 트랜디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준 케이스. 청춘스타 모셔놓는다고 다 시트콤이 되는 줄 아남?
-나 어때/행진/골뱅이: 나 어때는 고등학생 대상이었는데 행진부터 대학생으로 바뀌었죠.
출연진이 무지하게 많이 바뀌었는데, 사실 골자는 그대로 계속된
시트콤들이라 그냥 하나로 묶었습니다.
색깔을 낼 듯 낼 듯 하더니 도무지 제 색을 못찾더군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차라리 '나 어때'때가 제일 나았던 듯....
-돈닷컴: 뉴논의 전신'논스톱'과 많이 비교가 됐었죠. 남셋여셋의 우희진도 나왔는데 빨리 막을 내렸어요.
-순풍산부인과: 우리나라 시트콤 역사의 한 페이지를(어쩌면 그 이상)을 화려하게 장식할 가족시트콤. 뭐, 설명이 필요없을 겁니다. 완벽한 구성, 살아있는 캐릭터, 다양한 에피소드...
마무리만 빼놓고는 최고였던 것 같아요.
-지금 방송 중인 세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허니허니>, <여고시절>
:웬만해선...은 자기색이 분명한 시트콤입니다. 아직은 2%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좋은 시트콤인 것 같아요. <허니허니>나 <여고시절>에선 아직 아무런 감흥을 못받겠어요. 최근 시작한 <여고시절>은 너무 시대착오적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