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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픽션 사이
“태종 때 고려왕실 부흥군이 궁궐 내로 들어왔나요?”
“세자(양녕대군)가 왕(태종) 앞에서 아버지인 왕을 비난하고 자신의 주장을 조목조목 말하면서 대들 수 있나요”
“조선시대에 명나라 사신을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나요?”
드라마를 보고있노라면, 세종실록을 비롯하여 신숙주, 정인지의 문집 등 세종 시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료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은 아예 역사적 사료는 뒷전에 제쳐 두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종과 그 시대의 인물들을 창조해 가는 듯이 보인다.
세종과 출연하는 인물은 단지 이름만 같을 뿐 대부분은 역사 속의 활동과 상관없이 지금의 시점에 재탄생한 캐릭터의 모습이었다.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드라마로만 볼 것이지, 역사적 사실이 왜 그리 중요한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역사드라마가 있다는 것만 해도 좋은 일 아닌가’라고 항변할 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드라마의 제작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드라마가 역사를 심하게 왜곡한다면 이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독도 문제나 동북공정으로 일본이나 중국에서 역사 왜곡 문제가 나오면 얼마나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는 우리 아닌가? 그런데 방송의 역사왜곡은 단지 시청자들의 관심만 끌면, 드라마 구성을 위임받은 작가 등 일부 제작진에 의해 방치되어도 좋다는 말인가?
특히나 공영방송인 KBS에서 ‘정통사극’, ‘대하사극’의 간판을 걸고 하는 역사드라마는 시청자들에 대한 역사 교육을 맡은 측면도 다분히 있다. 실제 대부분의 시청자는 권위를 지닌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사극은 상당한 고증을 거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존에 크게 히트를 친 ‘대장금’이나 ‘다모’에 나오는 인물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는 이러한 소재를 바탕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는 경우 작가의 창조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역사적 상황에 있을 법하게 창작하는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엄연히 있는 역사적 사실, 그것도 주자료가 매우 풍부한 경우에 대해 그것을 거의 무시하고 창작 활동을 함으로써 결국에는 역사 이해에 혼란을 준다면 굳이 이런 사극을 만들어야하는 지에 대한 회의까지 들게 한다.
이제까지 KBS는 꾸준히 대하사극을 제작했고 시청자들의 호응도 좋았다. ‘용의 눈물’이나 ‘왕과 비’, ‘태조 왕건’,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등은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면서 역사 교육의 효과도 상당히 가져온 프로그램으로 기억된다. 이들 사극 중 일부는 관심을 가지고 시청했지만, 이번만큼 정치적 상황, 인물의 성격 등에서 심한 왜곡을 일삼는 사례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세종이라는 왕 자체가 워낙 모범적인 스타일이었고, 정치, 문화의 안정기를 펼쳐갔던 만큼, 궁중 암투와 정변 등 뭔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요소가 적다고 판단해서인지 있지도 않은 사실들을 무리하게 끌어와 드라마적 흥미를 이어가려간 듯하다. 지나치게 시청률이라는 성적표만을 의식했기 때문에 사극에서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역사에 대한 고증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세종과 역사적 인물들의 실명을 등장시킨 것 역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지만, 인물은 전혀 다른 성격으로 드라마의 구성에 맞게 적절히 변형시켜 놓음으로써, 역사 인물에 대한 모욕은 물론이고, 나아가 다수의 시청자들을 혼란시키고 있다.
나약한 태종 vs 킬러 태종
‘대왕 세종’을 시청하면서 가장 불만스러운 부분은 극중 전반부에 나타난 태종의 지나치게 유약한 부분이다. 조선의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 강화의 기틀을 잡은 왕이 태종이다. 태종은 신권 중심의 선두주자 정도전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후 잠시 형인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고려의 마지막 상징 정몽주를 제거한 것까지 포함하면 조선의 건국과 왕권 확립의 중심부에는 늘 냉철함(태종은 태조의 자식 중 고려말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과 함께 냉혹감을 갖춘 인물 태종이 있었다.
태종의 냉철함은 후계자 지명에도 이어졌다. ‘장자 세습’이라는 원칙을 포기하고 셋째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중심에 바로 태종이 있었다. 생전에 자신의 의지로 왕위를 물려준 왕은 태종이 유일했으며, 무엇보다 왕이 중심이 되어 ‘국가’ 조선을 만들려는 신념 때문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주도했던 피의 숙청들은 ‘왕의 국가’ 조선을 만드는데 따르는 불가피한 희생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그려지고 있는 태종은 아들인 양녕대군의 당돌한 반응에 당황하고 신하들에게도 쉽게 흔들리는 속칭 ‘어리버리한’ 모습이다. 양녕대군이 어리와 사통하는 정황을 적은 비방이 붙은 사실을 안 태종이 양녕을 불러 비방이 붙은 사실을 묻자, 양녕은 “누구냐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만 대전으로 건너가 보세요. 군왕이 하루라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리 아닙니까?”라며 아버지 태종을 훈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태종 시대 역사 왜곡을 떠나 조선의 국왕과 세자, 나아가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마치 가족관계가 해체되고 있는 현재의 모습과도 같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 마치 사극과 현대극을 합성한 듯한 분위기를 나타냈다.
이어 양녕은 “자신이 사대부 첩실을 취해 자신의 여자로 만든 것은 아버지가 계집종을 후궁으로 들인 것과 다르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 배웠다.”는 대사를 함으로써 드라마 속에서는 태종을 ‘여러 번 죽이는’ 대단한 아들임을 과시하고 있다. 이러한 갖은 폭언과 굴욕 속에서도 ‘고얀놈’이라는 대사 한 마디로 분노를 삭인다. 이런 태종의 모습은 카리스마의 화신이 아니라, 모든 기반을 자식에게 박탈당하고 뒷전으로 물러선 쓸쓸한 현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모습과 더 유사하다.
실제 태종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록을 중심으로 태종의 본 모습에 접근해 본다.
1392년 4월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충신 정몽주가 철퇴를 맞고 선죽교 근처에서 피습되었다. 피습을 지휘한 장본인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 이로써 왕조 교체를 거부했던 최대의 걸림돌이 사라졌다. 당시 이방원과 정몽주가 주고받았던 시조인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는 이후에도 널리 회자되면서 정몽주를 충신의 대명사로 인식되게 하였지만, 이방원에게는 ‘킬러’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 주었다.
1398년 이방원은 특유의 킬러 본능을 다시 한번 발휘하게 된다. 이번의 상대는 조선 건국의 최고 주역 정도전. 그들의 악연은 조선건국을 둘러싼 권력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석에서 누누이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한 것’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을 정도로 왕조 건설에 최고 주역임을 자부했던 정도전, 그는 자신과 같은 신하가 주인이 되는 조선을 만들고 싶어 했다.
1398년 경복궁 남문에 쿠테타군을 배치한 후 우선 최대의 정적인 정도전의 제거에 나섰다. 그 시각 정도전은 자신의 자택(현재의 종로구청 자리)에서 가까운 남은의 첩 집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환담을 하던 중 불의의 일격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당시 목숨을 살려달라는 정도전의 간청을 이방원은 냉철히 뿌리쳤다. 정도전에 대한 이방원의 증오는 그의 수진방 자택을 몰수하여 말을 먹이는 사복시(司僕寺)로 사용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정도전을 제거한 후에는 세자 방석을 유배시킨 후 살해하였으니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었다.
이처럼 태종은 전형적인 킬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고려의 최고 인물 정몽주, 조선 건국의 최고 주역 정도전이 그의 손에 희생되었으니 말이다. 즉위 후에도 태종의 킬러 본능은 계속되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세종 즉위 후 상왕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왕권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사돈이자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처형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냉혹한 킬러 태종은 ‘냉철함’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치세에는 왕권강화와 중앙집권 정책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육조직계제의 단행, 전국의 수령 파견, 호패법 실시, 신문고 설치, 청계천 공사 등이 대표적인 정책이다. 최근 시민들의 휴식, 문화 공간의 중심지로 떠오른 청계천 공사의 첫 삽을 뜬 왕이 태종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600년 전 왕조 국가에서 태종은 ‘원칙’ 보다는 ‘능력’을 택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의 자리를 박차고 후견인의 위치에 서서 아들 세종을 지원하였다. 태종의 선택은 ‘세종’이라는 조선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군을 배출함으로써 후대에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태종의 모습은 ‘대왕 세종’ 전반부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신하들의 충고에 전전긍긍하고, 세자 양녕대군의 항의에도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못하는 유약한 왕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역사 왜곡이 심하다는 지적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이처럼 약해 보이기만 하던 태종은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다음부터는 다시 잘 나가던 조선 건국 초기 킬러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양녕에게는 쩔쩔매던 태종이 충녕과 소헌왕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사돈 심온에게는 원래 냉혈한 그 본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43회분)
현대 정치 상황의 패러디?
양녕대군이 폐위된 후 충녕을 겨냥한 청문회가 열리는 장면은 현재적 정치 상황을 패러디한 모습이다. 이 장면에서 충녕이 여전히 조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있다. 이미 이전에 충녕은 반군의 수괴에게 체포되어 인질로 가 있었고 이후 태종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조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 바 있었다.
‘어제의 과오를 반성치 못하고 백성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체라면 더 이상 조선의 왕자로 살고 싶지 않다.’ 대사는 그럴듯하지만 이것이 정통사극이라면 너무나 황당하다. 이 대목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북방에서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이 대립하던 부분에서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장면이 나왔다. 주민들이 멧돼지 사냥을 하고, 충녕에게 꽃을 모아 전하는 모습. 마치 2005년에 히트를 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윤회가 충녕을 찾아가 『삼국지연의』를 건네며 읽기를 권하는 장면도 역시 부자연스러웠다.
진수의 『삼국지』를 바탕으로 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조선에 보급되는 것은 빨라야 16세기초이니까 15세기 초반의 상황과는 맞지가 않다. 아마도 ‘유비를 닮아보라’는 윤회의 조언에서 충녕이 왕이 되기를 권하는 복선을 깐 것이겠지만, 굳이 이런 설정을 해서 착각을 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당시에도 널리 읽혔던 『맹자』 같은 책에는 좋은 왕이 될 것을 권유하는 대목이 많은데, 이런 부분을 드라마에 삽입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외에 정인지, 김종서, 최만리 등 훗날 집현전 학사들이 성균관 유생으로 등장하면서, 저자에서 농성하다가 역졸들에게 만신차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는 모습은 1960년대의 4.19 학생운동이나 1980년대의 대학생 시위 모습을 연상시키며,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이 효령대군을 왕으로 적극 미는 모습은 현대 정치사의 원로 정치와도 비슷한 점이 있음을 보이려는 시도들이다.
까짓것 역사적 사실만 없었다면 위에서 소개한 몇까지 사례들로서도 이 드라마는 훌륭한 퓨전 사극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종 시대에 관해서는 실록뿐만 아니라 『연려실기술』, 개인문집 등 각종 기록들이 풍부하여 작가의 상상력과 현대적인 장치의 결합으로 끌고 가기에는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다. 거기에다가 역사는 우리 국민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지, 창조적 능력이 뛰어난 일부 방송 관계자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창조 사극의 한계
원로작가 신봉승 또한 역사드라마가 막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작가가 쓰는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가 픽션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나 소설의 경우 있었던 사건, 실제의 인물을 다룰 때는 작가에게 주어진 절대 권한이나 다름이 없는 픽션도 제한을 받게 된다는 점에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가 드라마 작가나 소설가의 식견과 표준이 요구되는 대목이다.”라고 하며 역사드라마의 픽션은 작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태종 이방원의 통치 시대는 다음 시대의 장애물이 될 위험이 있는 자를 가려서 그가 어떤 자일지라도 가차 없이 제거해버렸던 시대였기에 자신의 뒤를 이은 22세의 어린 세종에게 ‘천하의 모든 악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테니,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태종시대를 드라마로 그려지면 이와 같은 시대정신 또는 시대의 정한이 고려되지 않고서는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시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최소한 이 부분이 사극에도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태종 말년 이러한 시대정신은 거의 사라지고 고려 부흥군의 존재, 양녕과 충녕의 권력 다툼이 주된 소재로 다루어졌다.
이외에 신봉승 작가는 ‘대왕 세종’이 12회까지 전개 된 내용 중 대표적인 역사왜곡 사례 10가지 정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태종이 너무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이는 점, 충녕대군이 왕이 되고 싶어하는 인물이라는 점, 세자가 명나라 사신의 술상을 엎는 대목, 집현전 학자들이 『삼봉집』을 읽는 비밀 결사를 조직한다는 것, 장영실이 반정군에 몸담은 것 등이다. 지적한 사례는 대부분 역사적 상황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들로서 원로 작가의 예리함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대왕 세종이 너무 역사를 왜곡한다는 시청자들 상당수나 전문가들의 지적 때문인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부터는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맞게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전반부에 나왔던 고려 부흥군, 양녕대군의 심한 기행(奇行) 등 어처구니없는 장면들이 사라지고, 태종의 대마도 정벌, 심온의 사사(賜死) 등이 비교적 사료에 충실하게 전개되는 듯하다.
그런데 드라마를 계속 지켜 본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양녕의 항의에 수세적으로 그려졌던 유약한 왕이 상왕으로 올라서면서 그 본성을 드러내는 태종의 갑작스러운 변신에 의아함을 느낄 수도 있다. 왕의 자리에서는 신하들에게 상당히 휘둘리는 듯한 왕이 갑자기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예전 왕 자리에 있을 때 보다 더욱 강성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태종은 시종일관 강성을 견지한 왕이었다. 그러나 드라마 초반에서 양녕과 충녕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대립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태종의 역할이 약하게 처리되는 과정 때문에 태종은 갑작스러운 변신을 꾀한 것으로 비치게 된 것이다. 이런 장면도 드라마가 일관되게 역사적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구성하지 않은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드라마의 초반부가 너무 길게 전개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충녕과 양녀의 대립에 이어 심온의 처형을 두고 벌어지는 태종과 세종의 갈등도 긴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 ‘대왕 세종’은 100회를 한다고 가정해도 세종의 즉위까지 이처럼 시간이 흘렀으니, 앞으로 세종 시대의 찬란한 업적들은 어떻게 그릴 지가 궁금하다. 정치적 안정이나 문화적 업적은 갈등적 요소도 없고 전쟁 장면도 없고 하니 그저 그렇게 그릴 것인가?
현재의 진행대로 라면, 세종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된다. 즉위과정에서 양녕과 충녕의 대립, 왕위에 오른 후에는 상왕 태종이 부각되면서 세종은 중심에서 멀어졌다. 도대체 언제나 세종이 우리 역사상 거의 흠잡을 수 없는 수많은 업적들을 수행해간 과정들이 드라마 속에서 나타나기나 할까?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한 세종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즉위 직후 집현전을 설치하여 최고의 인재들을 양성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국가의 중요 정책을 연구, 시행한 것은 ‘함께 하는 정치’의 전범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후 집현전의 모델이 홍문관, 규장각으로 계승되어 조선의 학문, 문화의 중흥을 이어간 점을 고려하면 세종의 혜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430년 토제세법인 공법(貢法)을 정하면서 세종은 이미 578년 전에 국민투표를 실시한 왕이었다. 민약불가(民若不可:백성이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를 선언하면서 백성들의 의견을 최우선시한 세종의 입장은 ‘촛불집회’로 대표되는 민심이 뿔난 오늘의 정치 현실과도 묘하게 대비되고 있다.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에서 볼 수 있듯이 농업과 의학, 천문학 분야에서 우리 고유의 것을 찾아 중국 못지않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려 한 왕, 해시계, 자격루, 측우기 등 과학기구의 발명으로 실용과 민본을 직접 실천한 왕이 바로 세종이었다. 수많은 업적들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는 최만리 등 일부 집현전 학자들과 마찰이 있었고, 집현전 학자들은 한 곳에 장기 근무를 하여 승진이 되지 않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천민 과학자 장영실의 파격적인 등용은 신분제사회의 양반들을 동요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난국을 화합과 소통으로 세종은 돌파해 나갔다.
가족사의 비극과 함께 세종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질병의 고통은 세종의 업적을 보다 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즉위 초 장인의 죽음과 장모의 관노비 전락, 사랑하는 딸 정소공주를 비롯한 왕자들의 연이은 죽음은 세종이 비판의 대상이었던 이념인 불교를 가까이 하는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즉위 단계부터가 아니라 즉위 후에도 정말로 많은 정치적, 학문적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가족사의 비극이나 질병과 같은 인간적인 아픔이라는 측면에서 드라마로 형성화 할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원천 소스를 갖추고 있고, 그것이 지닌 의미도 적지 않은 세종의 모습이 현재의 ‘대왕 세종’처럼 즉위하는 과정과 상왕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상황으로 그려지는 모습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그것도 있지도 않은 상황 설정이나 심한 역사적 왜곡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소재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사료에 근거해 만들어도, 대왕 세종은 사극에 필요한 요소가 상당한듯한데 왜 초반에는 그토록 있지도 않는 사실들을 만들어 역사 이해에 혼란을 주었는지 의문이 간다. 아마도 좀 더 자극적인 상황들을 설정하여 시청률을 높여보자는 의도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닐 것이다. 공영방송이 지향하는 대하사극이라면, 시청률에 연연하기 보다는 좀 더 완성도 높은 작품. 역사 교육과 이해에도 모범이 될만한 작품, 그래서 후대에까지 널리 기억될 그런 작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후대에까지 전할 수 있는 사극을 위하여
‘대왕 세종’ 그 자체에는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사극 프로그램이 나름대로의 전성기를 누리는 현 상황을 크게 환영한다. 얼마 전 종영된 ‘이산’과 ‘왕과 나’를 이어, ‘일지매'가 방영되고 있고, 김홍도와 신윤복을 소재로 한 ’바람의 화원‘ 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사극의 유행은 그만큼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사극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보다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역사에 대한 풍부한 상식과 교양을 갖출 것을 권한다.
신봉승 작가도 위에서 소개한 글에서, ‘혹은 시청률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고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국사정신을 혼란하게 했다면 역사드라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방송사의 위상에 상처를 내게 된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여 ‘잘못된’ 사극의 위험성을 거듭 지적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은 없는 역사까지 과장해서 자신들의 여가를 드높이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추세에 왜 우리나라는 실제 역사까지 축소 왜곡해서 왕실의 모습을 이다지도 흥미위주로만 그리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 드라마의 제작국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국영방송인 KBS다. 이 드라마가 국외로 수출되어 외국인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세가 왜곡된 채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 걱정스럽다. 더 늦기 전에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중심에 서서라도 방송이나 매체 등에서 실제 역사를 폄훼하는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방지와 그 자제 여부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한다.
‘대왕 세종’은 ‘태왕사신기’나 ‘대장금’처럼 자료 부족으로 허구적 상황들로 일부 채울 수 밖에 없는 고대사나 궁중 의녀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다. 이미 세계의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등 철저한 기록물들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다. 덧붙여 말하면 그 중에서도 세종실록은 지리지, 예지, 악지 등과 그림까지 남아있어서 실록 중의 실록으로 평가를 받는다.
앞에서도 거듭 강조하였지만, 사극 제작에는 무엇보다 역사 기록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하려면 역사 소설을 쓰든지 해서 최소한 독자들에게 혼동을 주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KBS의 대하사극 또는 정통사극으로 포장했으면 대부분은 그 속에서 우리 역사의 중요한 흐름을 드라마라는 방식으로 보다 쉽고 흥미 있게 접근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한다. 그런데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보니 전혀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는 물건으로 구성되어 있을 때 시청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반품을 할까? 아니면 신뢰하는 곳에서 준 물건이니 진짜겠지 하고 대충 쓸까? 두 가지 선택 모두 정답은 아니다.
그냥 드라마로만 봐 달라는 제작진의 항변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예 프로그램의 전반부에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과 특별한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밝히는 것은 어떨까? 그렇다면 최소한 시청자들이 이를 역사적 사실로 믿고 나와 같은 역사 전공자에게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는 횟수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정통사극을 표방한 ‘대왕 세종’은 이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믿어버리는 상당수의 시청자들에게는 수십명의 역사교사의 강의나 수십편의 역사 저술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역사교육과 역사의식의 측면에서 큰 의미를 띠고 있는 대하사극을, ‘역사는 창조에 의해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사고를 지닌 일부 위험한 제작진에게만 맡겨둘 수만은 없다.
마지막으로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역사를 좋아하는 시청자들이 사극에 보다 많은 관심과 감시를 기울일 것을 권한다. 그리고 그 관심과 감시가 ‘역사적 상황이나 기록에 충실하면서 재미있는 사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역량이 되어 사극 제작에 반영되기를 바란다. 후대에도 길이 남을 수 있는 사극의 제작에는 전공자는 물론이고 시청자의 역할이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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