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창세기 9장 20절을 보면, 포도밭을 가꾸는 첫 농군은 노아다. 노아는 대홍수 후 방주에서 나와 포도를 재배한 뒤 와인을 마시고 취하여 잠들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포도를 발효하여 만든 술인 와인이 인류사에 등장한 것은, BC 4천년 티그리스강 중류의 수메르인들에 의해서이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와인에서 세금을 거두었다는 것이 적혀 있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붉은 와인은 예수의 피로 의식에 사용되었고 성직자들이 와인 재배 연구에 참여하였다.
렉스 피켓의 소설을 영화화 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사이드 웨이]를 보는 데 전문적인 와인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혼 후유증으로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고교 영어교사 마일즈가, 대학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인 잭과 함께 와인 농장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기본 구조인 [사이드 웨이]에서, 와인은 단순한 배경 사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지역은 미국 최고의 와인 생산 지대다. 자신의 소설이 출판사로부터 상업성이 적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지독한 염세주의에 빠져 있는 마일즈가 웨이트리스 마야와 감정의 교감을 나누는 것도,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총각파티 형식으로 여행에 동참한 잭이 와인 시음실에서 일하는 스테파니와 가까워지는 것도, 모두 와인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사이드 웨이]에서 와인은 살아있는 또 하나의 등장인물이다.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처럼 빛깔에 따라 분류되는 와인들도 각각 제 역할을 하고 있고, 아무데서나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는 까베르네와, 복잡하고 다양한 맛을 지녔지만 생산하기가 까다로운 프리미엄급 와인 피노가 똑같은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마일즈가 집착하는 피노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마일즈의 캐릭터와 닮아 있다. 하지만 잭은 술술 잘 넘어가는 묵직한 맛의 까베르네를 좋아한다. 잭은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있지만 스테파니와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물론 싱글맘인 스테파니는 그 사실을 모른다. 낙천적이고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또 다른 여자와 금방 눈이 맞아 열정을 불태우는 잭의 캐릭터를 까베르네가 대신한다.
갑자기 아내와 사별한 보험회사 중역 슈미트를 잭 니콜슨이 맡은 [어바웃 슈미트]에서도 그랬지만, 알렉산더 폐인 감독은 일상의 섬세한 관찰과 캐릭터의 내밀한 변화를 드러내는 데 뛰어난 솜씨를 갖고 있다. [사이드 웨이]는 마일즈와 마야, 잭과 스테파니의 두 커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보게 되는 마일즈가 이혼의 슬럼프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사랑에 접근하는 것에 힘을 모아준다.
알렉산더 폐인의 연출에는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자의 유머가 담겨 있다. 그렇다고 근거 없는 낙관적 전망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하게 헝클어진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어떤 드라마틱한 극적 사건이나 충격적 반전이 아니다. 감독은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변화해야만 하는 자신의 내면을 서서히 발견하게 함으로써 보편적 공감대를 확산시킨다.
마일즈 역의 폴 지아매티의 연기도 괜찮지만 스테파니 역으로 등장한 산드라 오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알렉산더 폐인 감독의 부인이기도 한 그녀는, 캐나다 출신 한국계 배우다. 혼자 아이를 기르면서 와인 시음가로 일하며 열정적으로 잭과 사랑을 나누는 스테파니 역을 그녀는 담대하게 연기하고 있다.
( (별 넷을 줘도 무리가 없지만, 역시 잭 니콜슨처럼 대배우들의 깊이 있는 연기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