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수반이 세상을 떠난, 연일 굵직한 국제 뉴스가 터져 나오던 늦가을의 그 어느 날, 20세기 가장 유명한 혁명가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우리의 만남은 어두운 극장 안에서 이루어졌다. 아직 혁명에 눈뜨기 전인 스물세 살 청년 체 게바라의 남미 여행기를 다룬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보는 일은 마치 오래전 짝사랑을 만나듯 꽤나 설레는 일이었다.
영화는 체 게바라와 절친한 친구 알베르토가 수명이 다한 고물 오토바이 '포데로사'와 함께 무작정 떠난 여덟 달 간의 생생한 여행담이자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 속에서의 의대생 체 게바라는 여행에서 만난 가난한 인디오의 삶에 분노하고, 나병 환자들을 맨손으로 돌보며 남미의 현실에 눈뜨는 순수 청년이자 동시에 여자친구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고, 기계공의 아내를 꼬여낼 줄도 아는 피 뜨거운 젊은이다. 후일 쿠바혁명을 완성한 위대한 혁명가이자 이상주의자이며 낭만주의자인 체 게바라는 그렇게 청년의 얼굴을 하고 40년의 세월을 넘어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향해 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체 게바라가 세상을 떠난 지 약 40년. 그의 꿈과 이상이 곳곳에 녹아 있는 남미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체 게바라식으로 말하자면 남미는 아직 혁명 중이다. 풍부한 자원과 문화적 유산을 가졌음에도 국제적으로는 늘 미국의 뒷마당쯤으로 치부돼 왔으며 정치적으로는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대륙 남미. 그런데 이런 남미에서 최근 그 어느 때보다 좌파 바람이 뜨겁다.
좌파 바람의 신호탄은 1999년 베네수엘라 빈민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취임한 차베스 대통령이었다. 차베스는 체의 혁명 동지인 카스트로 쿠바 의장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고 다니는가 하면 미국을 공공연히 비난하면서 국제적인 문제아로 떠오른 인물이다. 그 후 2002년에는 브라질에서 금속 노동자 출신의 룰라가 60%가 넘는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에콰도르 구티에레스 대통령도 자유주의 시장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원주민과 좌파 단체의 지원을 업고 대통령직에 올랐다. 체 게바라가 혁명에 실패한 볼리비아에서는 2003년 IMF 지원 하의 시장 정책을 펼쳐온 친미주의자 로사다 대통령이 민중반란으로 축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04년 10월, 우루과이 대선에서 사상 최초로 좌파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무려 170년 동안 우파가 집권해온 우루과이에서의 좌파 집권을 선거 혁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남미에서 좌파 정권이 도미노처럼 들어서고 있는 최근의 현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민영화, 시장개방, 금융자본 등으로 상징되는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질서가 최소한 남미에서는 커다란 반발에 직면했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과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밀접한 남미는 미국식 시장경제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대륙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남미는 전례 없는 극심한 경제위기에 빠졌고 부의 양극화는 남미 전역의 고질병이 되었다.
체 게바라의 고향인 아르헨티나는 한때 '남미의 프랑스'로 불릴 만큼 풍요롭고 발전된 나라였지만 거듭된 정치권의 부패와 실정, 부유층의 도덕상실로 급기야 2001년에는 국가 부도 위기를 맞고 IMF체제에 들어갔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남미 각국의 국민들 사이에서는 1990년대 후반 일련의 경제위기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서 비롯됐다는 여론이 급속히 형성되어 나갔고 이것이 정권 교체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중 나병 환자촌에서 생일파티를 하던 체 게바라는 '남미의 단결'을 외친 후 환자촌을 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강을 맨몸으로 건너 자신의 의지를 펼쳐 보인다. 하나 된 남미, 단결된 남미를 꿈꾸던 체 게바라의 이상은 실현된 것인가.
최근 남미의 좌파 정권들은 남미 공동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공조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맏형격인 브라질 룰라 대통령이 그 중심에 있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다른 좌파 정부들이 보좌역을 하고 있다. 이미 남미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주축인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을 중심으로 자체 경제 블록을 형성해 미국과 협상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남미의 좌파 정부들은 더 나아가 정치경제적인 결속은 물론 지역 방위까지 함께 논의하는 '남미연합'의 야무진 꿈을 키워가고 있다. 체 게바라의 혁명이 미완으로 그쳤듯 남미 좌파 정권들의 실험과 도전도 성공을 보장받지는 못할 것이다. 벌써 일부에서는 좌파 정권에 대한 실망과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보다 나은 삶을 열망하는 남미 민중들의 기대와 지지가 사그러들지 않는 한 그들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1967년 혁명 중 볼리비아에서 총살된 체 게바라는 죽는 순간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자신이 그토록 소망했으며 생을 다 바쳐 이루고자 했던 평등한 세상, 단결된 남미를 죽어서라도 지켜보고 싶었던 걸까. 스크린 속에서 거짓말처럼 살아나온 체 게바라가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지금 세상은 좀 더 살 만해졌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