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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倭國)과 일본(日本)<당회요(唐會要) 및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왜(倭)와 일본(日本)」은 같은 나라(國) 또는 종족(種族) 및 인종(人種)을 말하는 것일까? 수수께끼와 같은 나라(國)와 종족(種族)이다.
사서(史書)에서 조차, 이들에 대한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가 애매모호(曖昧模糊)한 실정(實情)이다 보니,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데, 분명(分明)한 것은 과거(過去) 옛 적에 “조선(朝鮮)의 한 구성원(構成員)”으로 있었으나, 세력(勢力)의 미약(微弱)함으로 밀려, 남방(南方)과 서남방(西南方)으로 이동(移動), 이주(移住)하면서 해적(海賊)화된 집단(集團)세력(勢力)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며,
「이들은 18세기와 19세기 초(初), 서구(西歐)열강(列强)들의 식민지(植民地)개척(開拓)시대(時代), 이들의 기독교(基督敎) 및 문명(文明)을 받아들이며, 열강(列强)들 틈에서 다시 밀려 동(東)쪽으로 이동(移動), 이주(移住)하여, 유구(琉球)를 거쳐, 현 열도(列島)의 토착(土着)세력(勢力)들과 피나는 혈투(血鬪)끝에 토착민(土着民)들을 정복(征服)하고, 정착(定着)한 것이다.」라는 줄거리를 구성(構成)할 수 있을 것 같다.
○ 당회요(唐會要)는 10 세기(世紀)의 사서(史書)이고, 해국도지(海國圖志)는 19 세기(世紀)의 것이다. “왜(倭)와 일본(日本)”에 대한 기록(記錄)을 검토(檢討)해보자. <관심(觀心)부분(部分)만을 발췌(拔萃), 설명(說明)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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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회요(唐會要)〔송(宋)의 왕부(王溥)가 961년 에 편찬한 것으로, 당(唐) 덕종(德宗)때의 소면(蘇冕)과 선종(宣宗)때의 최현(崔鉉)이 쓴 “회요(會要)”를 첨삭(添削)하고, 당(唐) 말기(末期)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들을 보충(補充)하여 엮은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를 보면,
ⓐ <99 권>에는 왜국(倭國)을,
ⓑ <100 권>에서는「일본(日本)과 하이(蝦夷)국, 탐라(耽羅)국」에 대해 기술(記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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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會要 卷099 / 倭 國 : 古倭奴國也.在新羅東南.居大海之中.世與中國通.其王姓阿每氏.設官十二等.俗有文字.敬佛法.中略.衣服之制.頗類新羅. : 왜국(倭國) : 옛 왜노국(倭奴國)인데, 신라(新羅)의 동남(東南)에 있으며, 큰 바다가운데에서 산다. 대대로 중국(中國)과 통했다. 그 나라 왕(王)의 성(姓)은 아 매(阿每)씨이며, 관리는 12등급이 있다. 풍속에 문자가 있고, 불법을 공경한다. 중략. 의복(衣服)의 제도는, 자못 신라(新羅)의 것과 같다. 중략. 仍云.王國與新羅接近.新羅素為高麗百濟所侵.若有危急.王宜遣兵救之. : 거듭 이르기를, 왕국(王國)이 신라(新羅)와 바짝 다가붙어있다. 신라(新羅)가 고려(高麗)와 백제(百濟)를 침략한 바, 위급함이 있다하여, 왕(王)은 군대를 보내 구원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倭國東海嶼中野人.有耶古.波耶.多尼三國.皆附庸於倭.北限大海.西北接百濟.正北抵新羅.南與越州相接. : 왜국(倭國)은 동쪽 바다에 작은 섬 중에 야인(野人)인, 야고(耶古). 파야(波耶). 다니(多尼) 세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倭)에 부속되어 있다. 북(北)쪽으로는 대해(大海)에 한계하고, 서북(西北)쪽으로는 백제(百濟)와 접(接)하고, 정북(正北)은 신라(新羅)에 다다르며(막혔으며), 남쪽은 월주(越州)와 서로 붙어있다(相接). 頗有絲綿.出瑪瑙.有黃白二色.其琥珀好者.云海中湧出. : 명주와 무명이 조금 있고, 마노【瑪瑙 : 석영의 일종으로 장식품으로 쓰임】가 산출되는데, 황백(黃白) 두 가지의 색깔이 있다. 그 사람들은 호박(琥珀)을 좋아하는데, 바다가운데에서 솟아나온다고 전한다. 則天時.自言其國近日所出.故號日本國.蓋惡其名不雅而改之. : 측천무후(則天武后)때,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나라 가까운 곳에서 해(태양)가 나오는 곳에 있어, 일본국으로 불렀다. 그 이름(왜)이 추하고, 우아(優雅)하지 못해 이름을 고친 것이다.
● 왜노국(倭奴國) : 「반도사관(半島史觀)에 의한 왜노국(倭奴國)은 열도(列島)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의 기록(記錄)으로 보면, 우선(優先) 지형지리(地形地理)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이러한 지세(地勢)는 수천(數千)만년 전, 수십(數十)만년 전, 아니 수만(數萬)년전에 이런 형태(形態)를 이룬 것이라고 볼 때, 「전혀 다른 땅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신라(新羅)의 동남(東南)에 있다. 신라(新羅)와 바짝 다가 붙어있다(接近)는 말은, 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보면,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 왜국(倭國)의 동쪽 바다의 섬에 세 나라가 있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보면,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 남(南)쪽은 월주(越州)와 서로 붙어있다(相接)?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보면,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 그렇다면 “월주(越州)”가 어디인가를 찾으면 될 것인데, 지명(地名)을 오두방정을 떨고, 이리저리로 옮겨 놓아 정확(正確)한 당시(當時)의 “월주(越州)”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
※「월주(越州)는 절강성(浙江省)의 소흥(紹興)이란 것이 현재(現在)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남조(南朝) 송(宋)의 월주(越州) 회계(會稽)군이다. 「월(越)」은 본시 주 국명(周 國名)으로 ‘희(姬)’성으로 자작(子爵)이였는데, 회계(會稽)에 봉하고, 소흥(紹興)현에서 다스렸다. 춘추(春秋)때 오(吳)에 소멸되었는데, 절강(浙江)의 항(杭)현 이남(以南)이라고 한다.
현(現) 역사통설(歷史通說)대로 한다면, 「왜노국(倭奴國)땅 남쪽으로 월주(越州)와 서로 붙어있다」면, 왜노국(倭奴國)은 「강소 성(江蘇省)과 안휘(安徽)성 땅에 있어야 맞는 말이다.」
곧 「장강(長江)하류지대와 태 호(太湖)주변 및 남경(南京)과 강소 성(江蘇省) 일부와 안휘(安徽)성 일부(一部) 땅이 왜노국(倭奴國)이 있었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동쪽 바다의 조그만 섬에 세 나라의 작은 나라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當時) 송(宋)나라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問題)에 봉착(逢着)되며, 「월주(越州) 땅」의 본래(本來) 위치(位置)를 찾는 것이 급선무(急先務)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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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會要 / 卷100 / 日 本 國 : 日本.倭國之別種.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國為名.或以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中略.或云日本舊小國.吞併倭國之地.: 일본국(日本國) : 일본(日本)은 왜국(倭國)의 별종(別種)이며, 그 나라는 해(日)의 가장자리에 있어, 일본국의 이름이 되었는데, 혹은 왜국(倭國)이란 이름이 추하여 우아하지 못한 이름이라서, 일본(日本)이라 고친 것이다. 중략. 혹은 일본(日本)은 오래된 소국(小國)으로, 왜국(倭國)의 땅을 삼켜 병합하였다고 전한다.
● 일본(日本)은 또 왜노국(倭奴國)의 별종(別種)이며, 소국(小國)이었으나, 어느 시기(時期)에 야금야금 왜노국(倭奴國)의 땅을 삼키면서, 왜노국(倭奴國)을 아예 병합(倂合)해 버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소국(小國)이었던 “일본(日本)”역시 왜노국(倭奴國) 내(內)에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면 왜노국(倭奴國)과 접(接)해 있었으니, 왜노국(倭奴國) 땅을 병탄(倂呑)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왜(倭)나 일본(日本)」에 대해 : 당회요(唐會要)는 서력(西曆) 961년의 것이고, 해국도지(海國圖志)는 1850-1860년 사이에 편찬(編纂)된 것임을 감안(勘案)하여 비교(比較)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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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국도지(海國圖志) / 日本島國 錄을 보면,
(1) 明 史:日本,古倭奴國.中略.嘉定三十二年三月,汪直勾諸倭,大舉入寇,連艦數百,蔽海而至.浙東西江南北,濱海數千裏,同時告警. : 명사(明史) : 일본(日本)은, 옛 왜노국(倭奴國)이다. 중략. 가정(嘉定) 32년 3월, 왕 직구(汪 直 勾)등의 여러 왜(倭)가, 대거(大擧) 쳐들어왔는데, 수백(數百)척의 함선이 연이어, 바다를 덮고 도달해, 절(折)의 동쪽과 서쪽 강(江)의 남쪽과 북쪽, 바다가의 수천(數千)리가 동시에 경계가 떨어졌다. 時為萬曆十四年.於是益治兵征服六十六州,又以威脅琉球.呂宋.暹羅.佛郎機諸國,皆使奉貢. : 만력 14년 이때에, 군대를 다스리고 훈련시켜 66주를 정복하고, 또 유구(琉球). 여송(呂宋). 섬라(暹羅). 불랑기(佛狼機)등의 여러 나라를 위협하니, 모두 사신을 보내 받들어 조공하였다. 二十年四月,遣其將清正行,長義智僧,元蘇宗逸等,將舟師數百艘,由對馬島渡海,陷朝鮮之金山. : 20년 4월, 파견한 장수 청정행(清正行). 장의지승(長義智僧). 원소종일(元蘇宗逸)등의 그 장수들이, 수백(數百)척의 배를 타고,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바다를 건너, 조선(朝鮮)의 금산(金山)을 함락(陷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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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俞正燮癸巳類稿:萬曆中,台灣為日本倭所據,末年荷蘭紅毛人自西洋來,欲據香山不可,則據澎湖,又不可。: 유정섭(俞正燮)의 계사류고(癸巳類稿) : 만력(萬曆)중에, 대만(臺灣)에 일본(日本)왜(倭)가 이곳에 의거하였는데, 말년(末年)에 화란(和蘭) 홍모(紅毛)인이 서양(西洋)에서 와, 향산(香山)에서 의거하고 싶었으나 불가(不可)하였고, 팽 호(澎湖)에 의거하려 하였으나, 또 불가하였다. 適日本倭居台灣者,新奉天主教,遂許之築赤嵌城以居,今安平鎮是也。: 대만에 살고 있는 일본(日本)왜(倭)들은, 새로운 천주교(天主敎)을 받들고, 적감성(赤嵌城)을 쌓고 여기서 살았는데, 지금의 안 평진(安 平 鎮)이다. 荷蘭既得地,即數數與日本倭構爭.倭既染其教,爭不勝,盡屬東去,憤甚。: 화란(和蘭)이 이미 땅을 득하였으니, 곧 수수(數數)일 일본(日本)왜(倭)와 다툼을 벌였으나, 왜(倭)는 이미 그 교(敎)로 물들여져, 다툼에서 이길 수 없으니, 없어진 속관으로 동(東)쪽으로 떠나면서, 심히 억울하고 분통해 하였다.
● 여기서 <일본(日本)과 왜(倭)>의 정체(正體)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왜(倭)는 본시(本是) 서남(西南)아세아(亞細亞)의 인도(印度)주변의 뱅골 만(灣), 인도차이나 반도(半島) 및 남쪽지방과 필리핀등지의 바닷가에서 살던 종족으로, 서구(西歐)열강(列强)들의 식민지(植民地) 개척(開拓)에 밀려 계속 동(東)쪽으로 이동(移動)하여, 필리핀과 해남도(海南島) 및 대만(臺灣)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이후(以後) 필리핀은 대(大)여송(呂宋)에게, 대만(臺灣)은 화란(和蘭)에게 빼앗기고, 결국(結局) 동(東)쪽으로 밀려나 유구(琉球)를 거쳐 현 열도(列島)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라는 것을 짐작(斟酌)할 수 있을 것 같다.
현(現) 열도(列島)에서의 1,800년대 일대(一大)혼란(混亂)사건(事件)의 국지전(局地戰)은 이러한 연관(聯關) 선상(線上)에서 설명(說明)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며, 이에 대한 더 많은 고증(考證)사료(史料)가 발굴(發掘)되어야 증거(證據)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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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皇清通考.四裔門:日本,古倭奴國.唐鹹亨初,更號日本.或雲日本乃小國,為倭所並,故冒其號.國在東海中,東北限大山,其地東高西下,勢若蜻蜓。: 일본(日本)은, 옛 왜노국(倭奴國)이다. 당(唐) 함형(鹹亨)초에, 일본(日本)으로 고쳤다. 혹 전하기를 일본(日本)은 소국(小國)이었는데, 왜(倭)를 병합(倂合)하고, 그 이름으로 불렀다. 나라는 동해(東海)가운데에 있는데, 동북(東北)쪽은 큰 산으로 한계(限界)하는데, 그 땅은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아, 기세(勢)가 잠자리(蜻蜓)와 같다. 所統屬國,北為對馬島,與朝鮮接,南為薩摩州,與琉球接。對馬島與登州直,薩摩州與溫台直,長崎與普陀東西對峙. : 황청통고. 사예문(皇清通考.四裔門) : 그 나라에 소속된 나라들은, 북쪽으로 대마도(對馬島)는, 조선(朝鮮)과 접해 있고, 남쪽은 살 마 주(薩摩州)인데, 유구(琉球)와 접해 있다. 대마도(對馬島)는 등주(登州)에서 곧바로, 살 마 주(薩摩州)는 온 태(溫台)에서 곧 바로이고, 장기(長岐)는 보타【普陀 : 절강(浙江) 주산(舟山)군도】와 동서(東西)로 대치【對峙 : 서로 마주 대하여 버티고 있는 것】하고 있다.
● 〔國在東海中,東北限大山,其地東高西下,勢若蜻蜓 : 나라는 동해(東海)가운데에 있는데, 동북(東北)쪽은 큰 산으로 한계(限界)하는데, 그 땅은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아, 기세(勢)가 잠자리(蜻蜓)와 같다.〕는 설명(說明)은 현 열도(列島)의 지세(地勢)가 아니며, 반대(反對)로 되어있는 형편(形便)이다.
위 기록에서 마치 잠자리와 같다는 표현(表現)은 머리 부분은 짧으나 크고, 꼬리부분은 기나 작기 때문에 적절(適切)한 표현인 것 같다. 실제 열도(列島)의 지세(地勢)는 서쪽은 높고, 산악지대(山岳地帶)로 구성(構成)되어 있고,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는 그곳에서 사는 인구수(人口數)와도 비례(比例)되며, 동(東)쪽은 태평양(太平洋)에 연(連)하여 낮은 지세(地勢)로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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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萬國地理全圖集曰;日本人與漢人不同,其麵貌話音亦異,雖然藉中國之字,學唐人之禮,但其意見迥異,身體不高,眼深鼻扁. : 만국지리전도집(萬國地理全圖集)에서 이르기를 : 일본인(日本人)은 한인(漢人)과 서로 같지 않으며, 그 얼굴모양과 말하는 음(音) 또한 기이하며, 중국(中國)의 글자를 비록 문서라고 여길지라도, 당인(唐人)의 예를 배우는데, 다만 그 의견은 통하나 다르며, 신체(身體)는 키가 크지 않고, 눈은 깊게 들어가 있고, 코는 납작하다.
● 위에서 설명(說明)하는 「身 體 不 高, 眼 深 鼻 扁 : 신체(身體)는 키가 크지 않고, 눈은 깊게 들어가 있고, 코는 납작하다.」는 것은, 인종적(人種的)으로 보아도, 이들은 「서남(西南)아세아(亞細亞)의 일부 종족(種族) 및 인도차이나반도 및 남쪽지방과 필리핀등지의 인종(人種)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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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의 연구(硏究)방법(方法)은 가능(可能)한 객관적(客觀的)인 시각(視覺)을 유지(維持)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특히 반도(半島)나 어떤 특정지역(特定地域)을 미리 정해 놓고,「이곳이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있었던 곳이다.」라는 식(式)의 연구(硏究)방법(方法)은, 왜곡(歪曲)을 양산(量産)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憂慮)스러운 일이다.
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기타(其他) 조선사(朝鮮史) 기록(記錄)을 인용(引用)하면서, 전체적(全體的)인 내용(內容)을 보지 않고, 한 구절(句節)만을 인용(引用)하여 설명(說明)할 때, 전혀 다른 뜻으로 곡해(曲解)될 수 있는 가능성(可能性)이 매우 높다는 점을 염두(念頭)에 두고, 그 기록(記錄)의 전체(全體)를 숙지(熟知)하여야 올바른 판단(判斷)을 할 수 있다.
○ 조선사(朝鮮史)은 조선인(朝鮮人)의 과거사(過去事)이며, 내가 조선인(朝鮮人)의 후예(後裔)라면, 나의 역사(歷史)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내 부모(父母)가, 내 증조(曾祖), 내 고조(高祖)가 “조선인(朝鮮人)”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조선인(朝鮮人)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를 부정(否定)하는 “조선사(朝鮮史)”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선조(先祖)들이, 내가 조선인(朝鮮人)의 후예(後裔)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美國)인이다. 당연(當然)히 조선사(朝鮮史)는 남의 나라 역사(歷史)이이기일 뿐이다.」
조선인(朝鮮人)이 조상(祖上)이며, 후손(後孫)인 “나”를 인정(認定)치 않는 조선사(朝鮮史)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뜻이다.
2013년 10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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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무 선생님 이상하게 선생님의 글을 읽으려고 하면 글이 잘려서 나옵니다.
대충 문맥을 추수려서 읽으면 되겠지만 올리실 때 조금 신경 써주시면 읽는 분들이 편할 것 같습니다.
저 처럼 역사에 조예가 얕은 사람은 가끔 읽다가 한참 생각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일 밑단에 있는 글을 보이는 부분까지 써보겠습니다.
조선인(朝鮮人)이 조상(祖上)이며, 후손(後孫)인 "나"를 인정(認定)치 않는 조선사(朝鮮史)는 존재(存在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보입니다. 전체 내용이 잘려서 나오죠.
지금까지 올려주신 선생님의 글 대부분이 이렇게 보이네요.
수고하세요.
화변비율을 135 % 로 맞춰놓고 보시면 어떤 현상이 생길까요? 꼭 댓 글을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그렇게 해 놓고 보니 글이 잘 보입니다...^^!
구글 쿠롬에서는 사용자 설정이 없어서 150%로 놓고 보니 글이 다 보이네요.
선생님 덕에 하나 또 배웁니다. 많은 글을 다 수정할 수 없으니 공지에 올려두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처럼 조예가 없는 사람이 글을 읽기에는 문맥이 끊겨서
쉽게 이해가 안 될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마포대사님의 말씀처럼 끝의 글씨 한두자가 잘려나오니 읽기가 불편합니다. 제 컴만 그러는줄 알았는데 아니었었군요....
화면배율을 135%에 맞춰놓고 하다보니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 같군요. 100-120% 정도 놓고 한 번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