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방부여의 탄생과 멸망
부여는 본래 현도에 속했다. 후한 말, 공손도가 해동에 웅거하여, 위엄으로 외이를 복종시켰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에 속했다. 이때에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여, 공손도는 부여가 고구려와 선비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종녀로써 (위구태의) 처를 삼게 하였다.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三國志/魏書/卷三十魏書三十/東夷/夫餘]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北史/列傳/卷九十四列傳第八十二/百濟]
위의 두 사료에 대한 많은 이론이 있으나 저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부여의 왕인 위구태가 요동의 공손도와 결혼동맹을 맺고, 그 지원을 받아 대방의 옛 땅에 부여의 분국을 설치한 것이다. 이로써 공손도는 후한 말 버려지다시피 한 낙랑의 지배권을 얻었고, 위구태는 분국을 설치함으로써 세력을 확장하였으니 서로에게 이득이었을 것이다.
낙랑군이 있는 곳에 어떻게 다른 세력이 나라를 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은 당시 중국 변방의 운용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후한부터 진나라까지 변방은 주로 용병을 이용하여 운용되었다. 후한 때의 오환과 남흉노, 조위(曺魏)의 오환, 진(晋)의 5호(胡) 등은 변방에 들어와 살았지만 군(郡)에 소속되지 않고 일정 영역을 장악하며 반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였다. 중국의 필요에 의해 군사와 물자를 제공하고 공이 있으면 보상을 받는 공생관계였던 것이다. 원소와 조조가 운용한 오환도 유명하지만, 특히 진(晋) 때에는 이 제도가 극심하여 8왕의 난이 대부분 5호(胡)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전개되었고, 결국 이용하던 5호의 군사력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는 부작용을 야기하였다. 물론 각 군에는 행정을 담당하는 태수와 군사를 담당하는 교위(校尉)가 존재하였지만 변방민족 사이의 세력 다툼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한 간섭하지 않았다. 일례로 창려태수 배억(裴嶷), 동위교위 이진(李臻)이 있었으나 모용외는 창려 지방을 아무 문제없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할 때에도 동일하였을 것이다. 부여는 공손강의 요구에 따라 군사를 제공할 의무를 떠안는 대신, 요동과 대방에서 독자적인 나라를 건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관계는 삼국지 위서 견초(牽招)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조가 오환을 정벌하기 이전에 오환을 회유하기 위하여 견초를 유성으로 파견하였다. 동시에 공손강 역시 한충(韓忠)을 보냈으므로 둘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한충이 ‘또 부여(扶餘), 예맥(濊貊)을 부리고 있다(又有扶餘﹑濊貊之用)’라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은 부여라는 독립된 나라의 군사력을 공손강이 필요에 의해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지역이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국이 지배하는 영역이고, 변방민족들에게는 스스로 통치하는 나라라는 개념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이 시기에 변방 제군에 존재하며 독자적인 세력권을 영유한 변방민족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삼국지 부여전에 ‘부여는 요동에 속 하였다(屬遼東)’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속(屬)의 의미이다. 위구태도 동일한 형태로 공손씨와 손잡고 세력을 키워 대방 땅에 분국을 설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낙랑에는 후일 북위에서 명문가문이 된 낙랑 왕씨가 공손씨 및 부여와 동맹을 맺고 세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이 부여의 분국을 저자는 대방부여라고 칭하고자 한다.
그러나 공손강의 사망(220년 혹은 221년) 이후 공송공이 즉위하였으나 ‘엄인(고자)이 되었고 열약(劣弱)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爲閹人,劣弱不能治國. 삼국지 공손도전)’라고 한 기록으로 볼 때 공손씨의 세력은 급격히 쇠락하였던 것 같다. 공손씨세력의 쇠퇴는 부여세력의 약화로 이어졌는데 이는 그 동안 신속하던 읍루가 ‘황초(黃初) 연간(220-226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굴복시키지 못했다(以黃初中叛之.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所在山險, 鄰國人畏其弓矢, 卒不能服也)’는 읍루전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238년 사마의의 공손연 토벌 당시 고구려는 조위(曹魏)를 지원하였으나 부여의 참전 기록은 없다. 아마 부여는 공손연과 조위 어느 쪽도 지원하지 않고 관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조위는 공손연과 부여의 예상을 깨고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몰래 바다를 통해 파견하여 두 군(郡)을 평정해 버렸다(삼국지 한전). 또한,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은 읍장(邑長)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조치로 대방부여의 지배력은 사실상 와해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와해된 대방부여의 지배자가 위거 가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방부여 와해의 책임을 물어 위거의 부친은 제거되었고, 우가의 지위는 위거의 작은 아버지에게 넘어갔고, 위거는 이름뿐인 대방부여의 지배자가 되었을 것이다. 고이왕 5년(238년) 4월의 기록 ‘궁궐 문기둥에 벼락이 치더니 그 문에서 황룡이 날아 나왔다’는 이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혹은 경초(景初) 3년 기미(239)에 ....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도 한다(或云 至景初三年己未 乃崩 古爾方立)’라고 하여 고이왕의 즉위년을 239년이라고 하였는데 이 해에 위거가 대방부여의 책임자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위거가 고이왕이라는 것은 다음 장에서 설명한다. 이후 위거는 대방부여 재건을 위해 전폭적으로 친위정책을 펼쳤고 이는 성공하였다. 이것은 ’매년 사자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위의 지원을 업고 부여의 실세가 되었다.
이러한 부여의 위축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친 것은 앞서도 언급한 관구검의 고구려 정벌이었다. 부여는 전쟁이라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으나 그 방법에 있어 마여-우가와 실세 위거의 생각은 달랐다. 위거는 조위의 힘을 빌려 부여에서의 권력과 대방부여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고자 현도태수 왕기를 영접하고 군량미를 제공하였던 반면, 마여-우가는 모종의 술책으로 위거를 제거하고 부여의 실권을 되찾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우가의 ‘딴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거는 마여와 우가를 제거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철저히 조위의 편에 섰고, 이는 부여의 화려한 부활로 보답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