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역사상에 조국을 배신하여 명성을 날린 반역자들은 수없이 많다. 최근 KBS1 人氣史劇 <대조영>에서 등장하는 대표적 인물로서 고구려 멸망에 지대한 공헌을 한 동부욕살 부기원이란 인물이 있다. 부기원은 연개소문이 살아 생전에서도 당과 內通하여 고구려의 對唐抗戰에 온갖 훼방을 놓으면서 사기를 꺾게 하여 평화노선을 추구하도록 촉구했으며, 연개소문이 죽은 후, 3형제의 내분을 조장하여 남건의 策士 신성과 함께 남건으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키게 사주하여 남생을 국내성으로 쫓아내고, 급기야 분노한 남생이 당군을 몰고 평양성으로 진격하게 하여 고구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 부기원이 마침내 劇中에서, 4월 21일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부기원의 마지막 발언은, "이대로 죽기는 억울하다. 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구려를 망하게 한 책임을 나 혼자 질 수 없다."고 항변했는데, 고구려 말기 부기원과 共謀한 얼마나 많은 반역자들이 궁궐이 있었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부기원이 분노한 고구려 遺民들의 몽둥이와 짱돌에 맞아 죽는 비참한 최후는 고금을 통해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들의 행위에 경종을 울리기에 족하다.
II 미국의 경우, 30년대와 40년대는 미국공산당이 가장 절정기를 이룬 시절로서, 행정부내에 소련간첩들이 상당수 포진되었던 시기였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만큼 소련공산주의를 이해·포용하려고 노력한 인물은 미 역사상 전무후무하다. 실제로, 그는 집권하자마자, 1934년 신사협정을 통해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전시에 무기대여법(Lend Lease Act)을 통해서 총 550억 달러의 원조를 연합국에 제공했는데, 소련에게 무려 110억 달러에 해당하는 무기대여원조를 감행했다. 그는 인내심과 포용력을 가지고 공산주의체제를 대하면 언젠가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좋은 요소를 받아드리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상호교류하면서 닮아가면서 비슷한 체제로 발전해 간다고 믿었다. 이것이 유명한 ‘수렴주의 이론’이다. 부부가 평생을 살다보면 식성이나 취미, 등이 서로 닮아간다는 식이다. 루즈벨트의 참모진에는 소위 親蘇派 내지 親共派라는 인맥이 국무부, 재무부와 군부에 광범하게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전시를 물론이고 전후에도 소련에 대해 경제원조를 해서 소련과 우호관계를 지속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친소파들 중에서 루즈벨트의 최측근으로 불린 인물로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 철학에 심취했으며, 노동자들의 생활상의 개선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다. 루즈벨트가 뉴딜정책을 추진하면서 홉킨스는 대통령의 핵심 참모로 浮上하여 대통령의 특별보좌관과 상무장관을 역임했던 인물로서 트루먼행정부시절에서도 소련전문가로 인정을 받아서 외교특보로서 스탈린과 면담을 했던 인물이다. 말하자면, 스탈린의 신뢰를 얻었던 미국측 인사 중에 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대통령 참모로서의 홉킨스의 중대성은 전시의 막바지에 미국의 대소정책이 친소냐 반소냐의 중대 고비에서 결정적으로 그가 끼친 영향력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소련이 전시는 물론이고 전후 세계에서 소련과 우호협력관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줄기차게 대소원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전후 소련은 미국의 훌륭한 고객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90년대이후 소련측의 KGB 간부들의 회고록이 등장하고 베노나(Venona) 파일의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해리 홉킨스가 소련의 비밀간첩이었음이 폭로되었다.
III 현재의 한국 상황은 고구려말기 부기원이나 소련에게 막대한 원조를 해 주자고 줄기차게 주장하던 해리 홉킨스와 같은 인물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아니다, 친북좌파 정권하에서 오히려 그런 반역적 인물들이 넘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범여권 인사들은 김정일이 핵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는데 무엇이 그리 급한지 줄줄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내세우면서 한반도 평화를 운운하고 있다. 자신들을 평화세력으로 자처하고 한나라당 등 보수우익을 전쟁세력으로 몰고 갈려는 계산이 농후하다. 3월 7일~10일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면담한 이해찬 전 총리 일행은 “「2. 13 합의」의 초기단계 이행조치 기한인 60일이 끝나는 4월 중순 이후에는 진행과정을 보아가면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동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문서 서명도 기대된다”고 말하였다. 정부와 범여권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이 대통령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한 大選用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노 대통령은 4월 10일 그 동안 수차례 부인하여 왔던 386 측근 안희정 씨의 2006년 10월 대북비선접촉을 자신이 지시하였다고 밝혔다. 안희정씨는 통일부에 북한 주민접촉 신고도 하지 않은 채 비밀 접촉을 했다. 이는 북한 주민접촉시 사후에라도 반드시 신고하게 되어있는 남북교류협력법을 명백히 위반한 것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이제야 국민들은 노무현과 안희정과 같은 친북좌익들이 기를 쓰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 박물관에 보관하려고 한 의도를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명지대 송종환 교수의 언급대로, “범여권이 추진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의 의제가 북한이 주장해온 자민통(自民統) 즉, 주한미군철수가 예견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국가보안법 철폐-연방제 통일이 되어 북한의 대남전략에 이용될 우려가 높다”는 것이다. 중앙대 제성호 교수는 4월 12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한국이 북한에 건넨 것으로 추정되는 ‘비공식 문건’의 주요내용을 다음과 같이 폭로하였다. 그 문건은 “저희들은(남한정권, 편집자 주) 두 분(노무현-김정일, 편집자 주)의 상봉이 성사된다면 산적되어 있는 많은 문제들을 외세의 개입을 단호히 배제하고 두 분의 의사에 따라 해결함으로써 우리 민족 앞에 드리운 어둠을 일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며 “우리 민족의 화해와 실력을 저해하는 초대국들의 내정간섭과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중대한 문제들은 두 분의 상봉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건은 지난 해 12월 홍콩의 모처에서 남북 실무자들이 주고받고, 다시 북쪽에서 중국 지역을 거쳐 흘러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비밀문건의 내용이나 어구가 북한이 해방후 지금까지 주장해온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영합하면서 외세의 내정간섭과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논의한다는 점을 담고 있어서 심히 우려스러운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나 핵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이 없다.
IV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대화를 위해서는 비밀접촉이 실제로 필요하다. 그러나 최근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위하여 추진해온 대북 비밀접촉이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였다는 것 이외에도 비밀접촉 통로나 창구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우선, 비밀접촉을 하는 인사는 정부의 위임을 받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거나 정부의 공식 기관 인물이어야 한다. 리호남 참사의 만남을 주선한 권오홍씨는 2001년 정부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에 들어간 사유로 구속이 되고 남북협력사업자 자격이 취소되었으며, 2004년 자금 유용 등의 이유로 실형을 받았던 사람이다. 리 참사를 만난 남측의 안희정씨도 남북대화와 관련되는 기관이나 정부 부처에 속한 인사가 아니라 노대통령의 선거참모이므로 대북비밀접촉을 수행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또 안희정씨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선거자금을 모아서 불법대선자금 혐의로 구속되어 1년형을 살았던 선거참모이다. 더욱이 그는 386운동권 주사파 출신으로 사상은 의혹투성이다. 주사파란 김일성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운동권을 말하는데, 어디에서도 그가 전향했다는 기록이 없다.
다음은 안희정에 관한 ‘참여마당’ 자유게시판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남대전高 1학년이던 80년, 충남大 복학생 선배들과 어울리며 운동권 주변을 기웃거리다 계엄사령부에 붙들려가 조사를 받고 학교에선 퇴학당했다. 이듬해 서울 성남高에 재입학하지만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또 3개월만에 자퇴하고 만다. 그 뒤 대학생인 누나가 교사로 나가던 야학을 다니며 노동조합 관계자들와 ‘의기투합’했다. 83년 검정고시로 고려大 사학과에 입학하지만 학생운동으로 재학 중 두 차례나 구속되는 등 ‘파란만장한’ 학창 시절을 보낸 끝에 94년 2월에야 졸업장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 사이 김덕룡 한나라당 의원의 비서를 잠시 지내기도 했으나 90년부턴 오로지 노무현 진영에만 몸담아 왔다. 노무현이 부산의 ‘親김영삼·反김대중’ 정서에 떠밀려 92·96·2000년 총선과 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는 동안 안희정의 가계도 엉망이 됐다.”(참여마당 자유게시판)http://blog.daum.net/007nis/11243183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안희정(83학번)씨는 87년 고려대 애국학생회 및 88년 반미청년회 활동으로 각각 구속됐었던 NL주사파 핵심회원이다. 고려大의 애국학생회를 발전시킨 것이 安熙正씨 주도의 反美청년회이다. 1987년 10월에 결성된 反美청년회는 전국 대학가에 뿌리를 내린 反美 운동세력이었다. 이 反美청년회가 全大協(전대협ㆍ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前身이다.”
한때 80년대에 반미청년회의 핵심 회원으로 활동했던 강길모 인터넷 프리존뉴스 공동대표는 자신이 교육시켰던 대표적인 주체사상 신봉자로 안희정씨를 꼽았다. 강 대표는 “주사파인 그는 對北밀사가 아니라 對南밀사로 봐야 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까지 그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을 외쳤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생각이 바뀌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 특사로 갔으니 북측은 ‘오냐 내 새끼’라고 했을 것이다. 장군님이 바라는 것을 말만 해주면 알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권력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니 김정일은 남한 권력을 친구로 여길 것이 분명하다.”(김필재 기자,『한국미래신문』, 2007/4/26)
V 국가 반역자들은 거의 다 그들의 대의명분을 ‘평화’라는 미명하에 그들의 반역행위를 정당화하였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공헌한 동부욕살 부기원은 그의 반역행위를 당과의 공동번영, 和親을 위해서라고 변명했으며, 해리 홉킨스가 아직 살아있다면 자신의 간첩행위를 “전후 소련과의 우호관계를 구축하여 세계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라고 변명했을 것이다. 안희정은 자신의 대북비밀접촉을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의 호혜적 공동번영을 위하여”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친북행각을 강행하고 있는가? 보수언론은 權府의 눈치를 보면서 안희정의 대북비밀접촉과 그 내용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아래의 몇 가지 사항을 안희정에게 철저히 轉向 여부를 추궁하여 국민들에게 현 정권의 친북좌경화와 반역적 성향을 널리 알려야한다. 그래야 ‘언론이 사회적 公器’라는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것임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① “한반도에서 정통성은 대한민국에 있는가 아니면 북조선인민공화국에 있는가?” ② “6.25동란은 남침인가 북침인가?” ③ “김일성의 독립운동 행적과 그의 생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④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주둔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⑤ “당신의 조국은 대한민국인가? 아니면 북조선인민공화국인가?”
이주천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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