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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 제2 교의편
□ 제5장 팔 조
□ 제1절 진행사조
1. 신
2. 분
지난주에 삼학의 작업취사를 했고, 오늘은 팔조의 신분을 주제로
교우님께서 기본적으로 잘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잘 들으셨죠?
-네~
오늘의 주제인 신과 분은 참 중요한 것인데.. 날씨가 참 춥죠?
이런 날은 교당에 안 오고 싶지 않습니까? 나도 안 하고 싶은데.. ^^
삼학과 팔조. 팔조 중에도 진행사조와 사연사조의 관계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진리의 내용, 속성에서 나온 것이 삼학입니다.
진리로 가기 위한 방법이 삼학이고 또는 진리의 내용이 삼학이다.
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원상의 내용이 공, 원, 정 입니다.
삼학은 진리로 가는 방법과 내용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원상의 내용이 공과 원과 정이죠? 공은 진공 자리라고 하는데
진공 자리를 만들기 위한 것이 수양입니다. 그 다음 원은 영지 자리,
묘유 자리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자리는 연구. 이 자리를 연구하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 진리의 운행을 정이라고 합니다. 이 정을
우리가 그대로 닮아서 하자는 것이 취사입니다. 그래서 이 삼학은
진리의 내용이면서 동시에 진리로 가는 방법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으로 하게하는 원동력, 에너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분•의•성입니다. 신•분•의•성을 통해서 일원의 진리에 합하고
신•분•의•성을 통해서 삼학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신분의성을 통해서
수양•연구•취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신분의성으로 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면 진공 자리를 깨쳐서 일원의 진리에 합일한다. 체성에 합일한다는
말입니다. 연구도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지 말고 신분의성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연구도 신분의성으로 하게 되면 진리의 영지 자리가 내
것으로 확실하게 확인되면서 언제 어디서나 일과 이치에 밝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취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취사도 신분의성이 없으면 하다가 말아버립니다.
이 취사를 신분의성으로 하는데 신이 분으로 분이 의로 성으로 갑니다.
여기서 신은 서원이 포함된 자리입니다. 신은 서원과 한 묶음을
말합니다. 이 신분의성이 수양, 연구, 취사로 갑니다. 그리고 이 취사가
사은으로 갑니다. 이 사은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 시켜서 사람에게
들이댄 것이 사요입니다. 일체 우주에 들이댄 것이 사은입니다.
이 사은에 어떻게 보은 불공을 할 것이냐를 사람에게 들이댄 것이
사요입니다.
먼저 신으로 출발을 해서 분•의•성으로 들이대서 수양->연구->취사로
가고 그 취사가 사은의 불공인데 그것이 인류에게까지 가서 평등세계를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신으로 와야 합니다. 사은 신앙의 시작은
신이라고 합니다.
4은 à 4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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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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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 |
신信=서원, 혜 |
à진공(空) ---– 수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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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忿 |
à원(圓) 영지 – 연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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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疑 |
à정(正) ----– 취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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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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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원불교 교리의 구조입니다. 이것이 한 번 회전을 해야 합니다.
신도 분•의•성을 거쳐서 다시 신으로 가야 제대로 된 신이 되는
것입니다. 신만 따로 놀지 않습니다. 신과 같이 다니는 것이 서원과
혜입니다. 신이 신만 있고 혜가 없으면 그것은 맹신입니다.
그런데 혜만 있고 신이 없다면 난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분의성이
삼학과 사은 사요를 거쳐서 다시 신으로 와야 제대로 된 신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기독교처럼 그냥 믿으면 된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렇게 하면 신이다고 하면 좀 복잡한데 그냥 믿어라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우리 사람은 생각이 있습니다. 연구심 의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믿으라고 하면 못 믿습니다.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하면 믿겠어요? 바다를 가르고 건넜다고 하면 믿겠어요?
안 믿어지지요. 사람은 반드시 혜가 따라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맹신 미신에서 벗어나서 정신이 됩니다.
신도 자력적이 신과 타력적이 신이 같이 어우러져서 완성이 됩니다.
내가 변 불변의 이치를 활용하는 것이 신의 극치입니다. 신이 뚝
떨어져서 믿기만 한다는 것은 사실은 신이 아닙니다. 신은 신을 위한
신이 아니라 믿기 위한 믿음이 아닙니다.
신은 분•의•성을 조장하고 성불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뿌리와 같다고
합니다. 신이 없으면 만사가 깨집니다. 친구끼리 사업하다가도 한 번 못
믿으면 재판까지 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제가 이렇게 교리를 전체적으로 쭉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배우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설교 내용이 대학원정도의 수준이 됩니다.
듣는 사람의 수준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그렇습니다.
- ㅎㅎㅎ
삼학과 팔조를 알아야 합니다. 산을 타도 전체적인 산을 알고 타야지
막무가내로 산을 타는 것은 안됩니다. 삼학은 일원상의 내용이요
일원상에 합일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런데 그 방법에 추진력과 원동력이
되는 것이 바로 팔조입니다. 일원상에 합한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 안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에요.
원불교의 교리만이 아니라 직업에 갖다 들이대도 사업에 갖다 들이대고
다 마찬가집니다. 특히 신분의성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이야기이고
이것들을 적용하는 사람들은 다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턱대고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뼈대를 닦고 나가야 합니다.
사실은 제가 4, 5년 전에는 신만 가지고 세 타임을 했습니다.
세 타임도 부족합니다. 신을 가지고 10시간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신은 무엇을 믿자는 거냐? 어떤 대상을 믿자는 거냐?
어떻게 믿자는 거냐? 구체적으로 해줄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이렇게 물으면 아주 신심 없는 것입니다.
삼학이 체라면 팔조는 용입니다. 사회 사람들이 이 용을 갖다 잘 씁니다.
고시 준비생이 ‘나는 고시를 붙을 수 있다’ 라는 신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죽어라고 하는 것이 분발입니다.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합니다. 계획을 어떻게 잡고 강의는 누구에게 들어야 할까?
이것이 의입니다.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할 것인가? 당구치고 게임하고
여자를 사귈 것인가? 여기에서 정성이 끊어지면 안됩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첫째가 불신입니다. ‘내가 되겠어? 안 될 것 같아.’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제가 옛날에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긍정적
사고라는 말이었습니다. ‘웃기고 있네.. 최면을 걸자고? 합리화 하자고?
사실이 중요하지..’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 말이 맞았습니다. 신이라는
것은 긍정적 사고입니다. 불신은 부정적 사고입니다. 어둡고 기운이
합력해 주지 않습니다. 나 혼자 아무리 신이 있어도 서로 함께 합력해
주는 신도 있어야 합니다. 또 사회적이 신이 있습니다.
둘째 탐욕입니다. 원불교 다니면서 적당하게 원불교법을 활용해서
자신의 탐욕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에는 ‘전탈전여’ 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산 종사님 법문으로
‘전부를 빼앗아가고 그 다음에 전부를 준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탈전여가 안 됩니다. 탐욕을 딱 갖추고 적당하게 원불교법을
활용해서 ‘교무님 원불교는 안심인명이잖아요?’ 그러면서 제 자신의
이득만 챙겨먹고 일생을 교당에 다니면서 손님으로 있다가 갑니다.
이것은 절대 안됩니다.
셋째, 나태. 나태한 사람도 나태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불신과 나태입니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근검입니다. 부지런하면 누구나 예뻐하고 좋아하고 무엇이 이루어집니다.
마직막으로 우. 우는 제일 쉬운 말로 ‘자기 마음대로’ 입니다.
자행자지라고 하는데 자기 맘대로 하는 것입니다. 교당도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말고, 자기 맘대로 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은 주체적인 인생, 개성 있는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나태한
사람도 나태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 신분의성은 진행사조로써 내가 삼학공부를 완성하는데 가장
촉진 역할을 하는 것이고, 불신 탐욕 나 우는 그걸 못하게 장애물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리가 이렇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생활을 한 번 보세요.
나는 나태가 얼마나 있는가? 나는 신이 얼마나 있는가? 나는 욕심이
얼마나 있는가? 내가 자행자지 한 것은 얼마나 있는가? 또는 나의
분발심은 얼마나 뜨거운가? 정말 적당히 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생각
있고 까닭 있게 어떤 일을 해 보았는가? 그냥 흘러온 대로 해왔던 대로
가고 있는가?
분발심은 내가 부족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신심은 나의 긍정적인
측면이고 분심은 나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그 두 가지가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에 바탕 하지 않은 부정의 분발은 골치가
아픕니다. 그래서 신이 먼저 입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뭔가 까닭이 있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에 바탕 하지 않은 의심도 골치가 아픕니다.
의심에 놀아납니다.
신에 바탕 한 나의 부족을 발견하는 분발. 신에 바탕 한 내가 알고자
하는 의심. 그래서 그 신이 그대로 가면 신성이라고 합니다.
또한 신분의성의 준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이라는 말만 들으면 기분이 나쁘답니다. 마치 강요하는
것 같고 마치 우상을 숭배하라는 것 같고 마치 아닌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종교가에
갔다가 한 번 크게 배신을 당하거나 둘림을 당한 사람들은 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주 기분 나빠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믿자는 것인가?
이것을 같이 한 번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정전을 보시면.. 같이 할까요?
< 신이라 함은 믿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니라. >
신은 믿음이다. ‘믿을 신’자입니다. 그 신이 되면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다. 만사를 이루려 할 때란? 내 서원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내 서원을 이룰 때 무엇이 나의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
되느냐? 바로 신입니다.
정이라는 것은 요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저은 탁 정해버린 것을 말합니다.
고정했다 또는 결정했다는 말입니다. 결정했으면 된 것입니다.
결정하고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은 결정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빨리 결정해서 실수하고
어떤 사람은 결정을 너무 미루다가 결정적인 기회를 놓칩니다.
정하는 것은 안정되는 것입니다. 편안해 집니다.
오늘 화요공부방에 올까 말까 하다가 안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 하였는가 안 하지 못하였는가의 차이가 큽니다. 나는 항상
간다고 정한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핑계를 찾기 시작합니다.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오늘은
피곤하고 날씨가 춥고 낼 무엇을 해야 할 것 같고 시내 도로가 막힐 것
같은.. 등등 온갖 고민을 다 합니다. 마음을 정하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정해버리면 그대로 가면 되는데 정하지 못하면 계속 두리번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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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正信)< |
자력(自力) = ○, 삼대력, 불성, 성불 |
신(信)< |
타력(他力) | |
미신(迷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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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상사님께서 신을 정신과 미신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정신은 밝은 데서 밝은 데로 가는 것이다. 제대로 믿을 것을 믿은
것이란 말입니다. 미신은 밝은 데서 어두운 데로 또는 어두운 데서
어두운 데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고 믿으면 미신입니다.
그 정신 중에서도 자력적인 신이 있고 타력적인 신이 있습니다.
이것이 내용면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믿자는 것입니까?
여기서 토가 탁 떨어져야 합니다.
- 일원상
그렇습니다. 내가 일원상임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본래 삼대력이
갖추어져 있다. 나는 본래 불성이 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또 나는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하면 된다. 옛날에 어떤 장군이 그랬죠? 요즘 소통과 관계relationship
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하면 된다’ 라는 말은 너무 강압적이다.
그런데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니까 그런
것이고 하면 됩니다. 반대로 안 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쉬운 일도
안 하면 안되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하면 됩니다. 하면 됩니까?
‘내가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 는 신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불신이 많습니다.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은 특별한 사람. 대종사님도 특별한 사람.
9인 선진님도 특별한 사람이고 나는 달라. 다르긴 뭐가 달라요? 똥 싸고
밥 먹고 태어나고 죽는 거 다 똑같습니다.
문제는 ‘믿냐? 안 믿냐?’ 가 다릅니다. 또 전생에 닦아온 바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겠죠? 하면 되는데 함께하면 더 잘됩니다. 이것이
상호간의 신입니다. 나만 잘 하면 안됩니다. 신으로 막 나가다가 자기의
신념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는데 혼자만 밀고 나가면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은의 합력을 얻어야 합니다. 나만 내 안에 불성이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저 사람도 저 대상도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상호간의
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이 사회적 신입니다. 모두 같이 되어야
합니다. 신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머리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한 번 실수나 실패를 하면 신념이 무너집니다. 누구나 잠시의
실패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실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도 여러분들도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데 그 실수를 스스로에게나
어떤 대상에게 영원한 불신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안 된다.’, ‘저 사람은 안돼.’
이런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실패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돌고 도는
진리에 맞지도 않습니다. 절대로 맞지 않습니다.
잠깐의 실패는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번에 수능에 떨어졌다.
임용 고시에 떨어졌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실패가
아닙니다.
‘나는 믿고 있는데 떨어졌잖아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탄탄히
하라는 얘기입니다. 믿음에 바탕 해서 분•의•성이 받쳐주고 그것이
삼학으로 들이 대야 합니다. 그래야지 뭔가 됩니다.
제가 효과적인 믿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격적으로 자기 내면에 확신과 체험,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일단
불신하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크게 실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확인하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인정하고 아는 것이 정답일까? 또 하나는 인생이 그렇게 길어요? 자기가
경험하고 수용하기에는 인생이 그렇게 길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교당에 계속 다니는 사람 중에 처음에 믿음의 뿌리를 내려서 쭉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분의성과 삼학을 들이대서 사은•사요를 들이대면
다시 신이 확인되고 깊어지고 넓어져서 채워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삐딱하게 불신을 바탕으로 한 의심으로 먼저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수용한 것만 믿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자 일단 믿는 사람은 어떻게 달라집니까? 분발심이 나면서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법회만 보겠습니다. 이 대종사님의 교법이
정말로 과거 서가모니 법보다 더 좋다. 서가모니 부처님도 부처님이지만
대종사님은 더 부처님이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을
실행합니다. 일기법, 염불좌선 그리고 법회를 생명과 같이 압니다.
그런데 내가 느낀 만큼 안 만큼 체험한 만큼 믿는 사람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삐딱하게 나아갑니다. 결국에는 누가 이익입니까?
대종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한테 속은 폭 잡고 안 난폭 잡고 한 번 해봐라’ 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속지 않으려고 하고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자존심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신이라는 것은 자존심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자존심을 되찾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무조건 놓고
끝내라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놓고 나서 확실한 내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삐딱한 젊은이들은 신은 나를 놓는 것인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약자들이 믿는 것이다. 나 같은 강자는 신앙을 안 하겠다.
이런 생각을 많이 갖습니다. 저는 사실 그런 사람이 좋습니다.
에너지가 있잖아요?
특히 인과를 안 믿는 사람은 어떨까요? 자기 맘대로 살겠죠?
참회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인과를 믿는 사람은 설사 옆길로 가더라도
참회가 됩니다. 그리고 확률로 보더라도 딴짓거리를 덜 합니다. 결국
자기에게는 어떤 것이 이익이겠어요? 우리가 이익을 잘 찾아도 그런
것은 왜 계산을 하지 않을까요?
진짜 인과가 안 믿어지면 일단 믿어놓고 법문을 공부하고 자기가 연마를
해봐야죠. 제가 제일 믿기 힘든 것이 인과였습니다.
우리 아버지께 가장 많이 따지고 달라든 것이 인과였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인과? 그래야 세상이 조용히 돌아가도록 다
합리화하는 소리요.’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계속 경전을 공부해 보고 계속 하다 보니까? 이런 의심이
들었습니다. 어떤 부모라도 다 자식을 낳을 때 예쁜 아기, 건강한 아기,
똘똘한 아기를 낳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똑 같은 배에서 나온 아이들도
다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평등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 평등하지
않을까?’ 하고 짚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인과가 조금
믿어졌습니다. 제가 인과를 신앙하게 된 것은 그것입니다. 왜 평등하지
않을까?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왜 평등하지 않을까? 본래
죄인이라고 하고는 왜 사랑을 주는가? 온갖 생각을 다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곡 그것을 삼세만 바라보는 인과로 생각하지 말고 현실 속에서
보면. 자기가 지은 대로 받습니다. 결혼식만 해도 그렇습니다. 결혼식에
갔더니 사람들이 안 옵니다. 그 사람이 안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덕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안 가고 봉투를 돌리면 뭐해요? 안 갑니다.
다 품앗이인데 주고 받는 것 아니에요?
인과를 불신하는 사람들이 주로 점꽤 보러 다니고 숙명 따집니다.
시험 공부 많이 하는 사람이 점수 잘 나오죠. 시험 공부 안 한 사람이
점 봐서 점수 잘 나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불신을 하니까 설득하려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본인만 그런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그런 생각을 다 했다고
여러분들께 솔직하게 말 하는 것입니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다. 어리석음이 없다. 그름이 없다고 하는데
그걸 믿는 것이 자력적인 신입니다. 나도 원래 그름이 없고 너도 원래
그름이 없고 나도 원래 요란하지 않고 너도 원래 요란하지 않고 나도
원래 어리석지 않고 너도 원래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긍정의 힘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을 제대로 하면 걸리는 것이 나옵니다. 아니 부처님과 내가 똑
같다고?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때 아닌 것 같은데? 라는 답을 하면
불신입니다. 그런데 처음엔 똑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잖아요?
그럼 너는 뭐고 나는 뭐냐? 고 하는 것이 분발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까닭을 들이댄 것이 의심입니다. 신에 바탕 한 분발과 의심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불신에 바탕 해서 ‘한 번 생각해 볼까?’, ‘그럴까?’ 이것이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철학자들의 일생은 연구만 하다가 판이 끝납니다.
효과가 느립니다. 왜냐하면? 신에 바탕 하지 않고 의심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가는 신에 바탕 해서 의심으로 갑니다.
특히 불교 쪽이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신에 바탕 해서 신으로 가야지
의심으로 가면 안 됩니다.
그 다음은 타력적인 것인데, 타력적인 신앙은 법신불의 위력에 대한
신앙입니다. ‘이 위력에 대한 신앙의 대상이 누구냐?’
‘우리가 어떤 대상을 신앙하자는 것이냐?’ 입니다.
제가 믿음은 머리로 하거나 자존심으로 하는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첫째, 진리. 진리를 믿자고 하는데 무슨 진리입니까? 일원상의
진리입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면 변•불변의 진리입니다. 다른
말로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입니다. 그것을 믿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안 믿는 것에 따라서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
줄 아세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을 믿는 것은 시공간의 개념을
넘어섭니다. 불생불멸을 믿으면 단생관을 넘어 선 것입니다. 단생관을
가진 사람과 불생불멸의 영생관을 가진 사람은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인과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삶과 자세는 아주 다릅니다.
제가 간단히 복권 이야기 했잖아요? 인과를 믿는 사람은 복권을 사지
않습니다. 인과를 믿지 않으니까 복권을 삽니다. 진리를 믿고 안 믿는
것에 따라서 판단의 기준이 완전히 다릅니다. 보는 시야가 달라지고
시간의 느낌과 공간의 느낌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늙어서 얼마 못 산다고 할 때,
내가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을 믿는다면?
‘아. 내가 이생을 이렇게 살았으니까 이렇게 밖에 안 되었구나.’ 아니면
‘이렇게 살았으니 내생에는 이렇게 되겠다.’ 또는 ‘내가 다음 생에는
어느 집에서 태어날 것인가?, 인연을 누구한테 어떻게 걸었는가?’
를 생각하면서 참회도 되면서 연마가 됩니다.
그러나 불생불멸의 도를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두려움만 가득합니다. 아니면 한탄하면서 절망적으로 살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진리를 믿냐 안 믿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둘째는 법입니다. 법은 교리와 제도입니다. 대종사님의 사은 사요 삼학
팔조 교리와 제도, 우리가 이런 것들을 얼마나 환희 봉대하는가?
법의 공부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분발심 의심 정성
삼대력이 달라집니다.
인연에도 혈연, 불연, 법연이 있습니다. 혈연인데 불연이고 법연이다.
이렇게 하나가 되면 제일 좋습니다. 법으로까지 승화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길을 가다가 누구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교무님 제가 옛날에 원불교 다녔는데..’ 이런 사람은 불연에서 끝난
것입니다. 부처님과 인연만 있고 끝난 것입니다. 불연이 법연이 되어야
합니다. 법이 들어가야지 그 사람의 삶의 자세가 달라지고 재미를
느끼고 생활 속에서 적용이 됩니다. 불연만 있는 삶은 원불교의 삶과는
전혀 다릅니다. 법을 알면 재미를 알고 판단의 기준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고 성품의 이치에 가늠을 잡을 수 있습니다.
셋째, 스승입니다. 신(信)은 사람인(亻)변이잖아요? 여기서 사람은
성자를 말합니다. 성인의 말씀을 믿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성인이란 역대 세계의 성자, 원불교의 대종사님, 그리고 대종사님의
정통을 이으신 분, 최소한 법강항마위 이상인 분입니다.
설사 진리가 있고 법이 있고 회상이 있어도 누가 있어야 하냐?
연원자, 스승님, 끌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경전에 법이
있어도 여러분들 경전 혼자서 공부를 십 년간 한다고 해도 제가 아까
설명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천 명이면 한 명 알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 계셔서 내가 시행착오를 줄이고 효과적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참 복 중에 복입니다.
넷째, 회상입니다. 회상이 뭐죠? 회상은 이렇게 씁니다.
회상 會上
회는 모임이죠. 모임의 가장 위가 되는 모임이다. 회상이라는 것은
진리와 법과 스승. 이런 것들이 모인 집단을 회상이라고 합니다.
즉 세상 제도를 위해서 만들어진 집단입니다. 그곳에서 하는 모임,
그곳에서 하는 일, 그곳에서 배우는 것, 그곳에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반 세상 사람들의 모임과는 다릅니다.
일반 세상 사람들의 모임은 주로 친목입니다. 친목, 계모임, 동창회,
동문회 등의 모임을 모두 회라고 합니다. 이런 어떤 모임보다도 바로
법의 모임, 회상이 가장 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것들은
회중(會中)이나 회하(會下)가 되는 것입니다. 회상에 대한 믿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교무님 저는 다 믿겠는데 이 중에서 회상은 못 믿겠습니다.
그건 하나의 구조요 틀이 아닙니까? 나는 틀이 싫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데 아주 똘똘해서 탈입니다. 이 회상은 틀이 없는
회상입니다. 이 회상의 주인은 종법사도 아니고 저도 아닙니다. 서원
있는 사람, 그리고 대종사님의 법에, 부처님의 법에 함께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회상입니다.
회상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암 교당에도 주인이 따로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라도 주인이 될 수 있고 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회상으로 아는 사람은 주인입니다.
‘교무님 친구 돌 모임이 있어서 법회를 빠지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회중이나 회하입니다. 회상이라는 것은 이미 화요일,
토요일, 일요일에 선약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1년 치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교무님 그러면 어떻게 사회 생활을 하라고 해요? 너무 하지 않아요?’
이런 분들 계십니다. 그래서 저도 나름대로 여유 있게 휴가 법회를 한
번씩 주고 법회에 어쩔 수 없이 빠졌으면 화요일에 채우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우직하고 자기 생각 위주로 사는가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원불교 가려고 했더니 담배를 못 피게 한다며? 그러니 안 갈란다.’
그것은 핑계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담배를 피우라고 하고 다른 계문을
지키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교당에 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핑계를
대고 교당에 안 오겠다는 것이잖아요?
‘나는 직업상 술을 먹어야 하는데 원불교는 술을 못 먹게 한다며?
나는 안 갈래.’ 술 먹으라고 하고 다른 계문 지키라고 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하기 싫으면 온갖 핑계를 댑니다. 내가 보면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무결석 한 번도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교당은 주인 같이 계속 잘
다니는데 일생 동안 한 번도 무결석 못할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왜 그러냐? 법회가 회상이 아닙니다. 본인이 회중과 회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회상에 대한
믿음이 미안하지만 아닙니다. 융통성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나는 융통성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의 부여 자체가
중간으로 밀렸다.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왜 그런가를 압니다. 신심이
떨어질수록 회상이 밀립니다. 회상이 회하나 회중으로 가고 회중과
회하가 회상으로 올라갑니다.
|
정신(正信)< |
자력(自力) = ○, 삼대력, 불성, 성불 |
신(信)< |
타력(他力) = 진리, 법, 스승, 회상 | |
미신(迷信) |
|
그 다음은 미신입니다. 무엇을 미신이라고 하느냐?
첫째는 모르고 믿는 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맹신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교당에 발령 받아서 가면 너무너무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무님은 부처님 같아요.’, ‘대종사님 후신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그런 사람을 멀리합니다. 저에게
절대로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닙니다. 신심 있는 것 같죠? 맹신입니다.
미신입니다. 그 사람은 언제 식어버릴지 모를 사람입니다. 정신이라는
것은 평상심에 바탕 한 신입니다. 감정적 신, 일시적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겉모습이 잘 생기거나 나를 예뻐해 주는 색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진리와 법과 스승과 회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옛날에 어떤 교무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누구 잘 나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전혀 모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 잘
나왔었는데.. ?’ ‘나는 누군지 모르겠네’ 라고 답했습니다. 그것은 전임자
있을 때에는 잘 나왔다는 소리인데 교무님 바뀌니까 도망가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그 법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 교무님만을 믿은 것이죠.
그래서 교무님 바뀌니까 떠난 것입니다.
법을 믿은 것이 아니라 색상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이
솔성요론 1조에 내 놓았습니다.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을
것이요.> 그것이 원래 3조였는데 1조로 올렸습니다. 법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도 더 믿게 되어있습니다. 법을 믿고 하다 보면 스승에
대한 신도 바뀝니다. 내가 수행을 해보면 압니다.
여러분 강연을 한 번 해보면 어쩌죠? 이 자리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강연을 1년에 한 번 밖에 안 하면서 몇 달 전부터 긴장해서
소화가 안 된다고 하고 떨리고 죽겠다고 합니다. 나는 1중일 몇 번씩
합니다. 나는 어저께도 삼삼회 했습니다. 그저께도 법회를 보았고
그그저께도 법회를 보았습니다.
자기가 수행을 해 봄으로써 스승에 대한 신도 달라집니다.
‘우리 스승님들은, 우리 선진님들은 이런 것을 했구나..’ 이을 해봐야
압니다.
제가 원남 교당에 갔을 때 성균관대에 동아리를 창립하려고 아주 애를
썼습니다. 여기 저기서 주소를 받아서 모아보니 9명이 왔습니다. 없는
돈에 밥을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개강 법회를 하자고 하면서 동아리
방이 없으니 일단 원남 교당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청소를 해
놓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드디어 내가 동아리를
창립했구나..’
한 명도 안 왔습니다. 그 날 아침에 다 통화를 했는데도 아무도 안
왔습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것들이 나를 뭐로 아는 거야?’ 이런 생각을 비롯해서……
그러다가 탁 드는 생각이 이었습니다.
‘지금은 원불교가 사회적으로 조금이라도 알려져 있지만 옛날에 일제
시대의 불법연구회나 교단 초기에는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그 속에서
이렇게 엮어왔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선배님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직접 해보아야 함부로 알지
않습니다.
남들은 교당을 20년 쉽게 다닌 것 같죠? 자신이 직접 해 봐요. 20년이
그렇게 쉬운 것인가? 쉬운 것 아닙니다. 어저께 삼삼회하고 나서 어떤
양반하고 차를 같이 타고 오는데 그분은 젊을 때 혼자 다니는 노인
양반들을 속으로 비웃었답니다. 무슨 소리인줄 아세요?
가족 교화 못하고 혼자 다니는 노인 양반들을 보고는
‘가족 교화도 못하고 바보 같이 자기 혼자 다니냐?’
혼자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자기가 나이를 먹고 보니까
자기의 자식도 교당에 안 오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벌 받는 것
같다고 가족 교화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안 해보면 쉽게 아는데 저는 공감이 되었습니다. 제가 10년만 더
젊었더라면 ‘당신도 벌써 합리화 하는구먼’ 내가 속으로 그랬을 겁니다.
나도 살아보니까 ‘그려 당신 마음이 이해가 돼.’ 한 명 교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돈 버는 것하고는 게임이 안됩니다.
오직 했으면 저의 선생님이 ‘저 산을 옮기라면 내가 옮긴다. 불도저로
들이대서 며칠 동안 하면 옮길 수 있으나 사람 마음에 감동을 주어서
법당에 앉혀 놓는 것은 저 산 옮기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맞아요? 맞아요 안 맞아요? 맞습니다. 얼마나 어려운데……
그래서 교무님들도 하다가 지쳐서 기관으로 갑니다.
‘나는 이 생에 교화 체질이 아닌가 보다..’
라고 하면서 떠납니다. 너무 힘드니까..
솔직히 말하면 저도 엎어버리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신심이 없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단지 신심 없는
죄만 받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까지 상심하게 만드는 죄가 있구나.’
내가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단장이 작년에 단장을 했는데 얼마나 단원이 괴롭혔는지 단장을
그만 하겠다고 합니다. 절대로 안 한다고.. 신심 없는 단원 한 명 때문에
신심 있는 단장까지 신심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심 없는
단원은 다 쫓아 버립니다. 1년에 몇 번 안 나온 사람은 다 예비단에
넣습니다. 나는 단장, 중앙이 중요하지 예비단은 나중에 보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속 썩이면서 크는 것입니다.
신을 정당한 방법이 아닌 기이한 방법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원불교에서는
탁 잘라서 ‘나 당신한테 신심이 있소’ 라고 했다가 대종사님께 욕을
엄청 얻어먹었습니다. ‘일 안 하려고 손 잘랐지? 일 해야 하는데 손
잘라서 너 어떻게 일 할래?’ 이런 신은 정당한 정신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미신입니다. 여러분들은 자르라고 해도 못 자르겠지요.
그 양반이 나으려나..? 독도 문제 때문에 혈서를 쓰고 난리인데 그런
분발도 정분이 아니라 객분이고 감정적인 것입니다.
중요하답니다. 선수에게 슬럼프가 오잖아요? 슬럼프를 빨리 극복하는
첫째가 자기를 믿는 것이랍니다. ‘나는 본래 어떻다는 것.’
그런데 본인 스스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계속
‘안돼 안돼.. 지금 안 되고 있다.’ 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어두운 데로
끌어 당깁니다. 그런데 신이라고 하는 것은 밝은 데서 밝은 데로 계속
끌어 올라오는 것입니다.
자기 직업도 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좋게 보여집니다. 그리고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이 없으면 좋은 것도 안 좋게 보여지고
싫어집니다. 직업도 그렇고 자기 일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군인은 휴가
복귀를 하는데 마지 못해서 군대로 갑니다. 어차피 갈 것 가면 되지.
그냥 가나 마지못해서 가나 마찬가지 아닌가? 회사에 출근을 하는데
마지못해서 갑니다. 그런 사람 별로 없는데 한 두 명 있습니다.
서원과 신이 쌍두마차로 달려갑니다. < - 이루려 할 때 - > 이루려는
것이 무엇이죠? 자기의 서원입니다. 서원을 이루려는데 정하는 것이
신입니다. 반조를 할 대 서원 반조가 무섭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고시 공부하는 사람은 목적 반조라고 합니다. 목적 반조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면 힘이 납니다. 똑 같이 우리가 원불교를 만나서
서원이 아주 중요합니다.
‘큰 서원이 나야 큰 신이 나고 큰 신이 나야 큰 분이 나고 그 다음에 큰
의심, 큰 정성이 나서 나중에 큰 깨달음이 온다’ 고 하셨습니다.
서원과 신은 서로 비례합니다. 서원이 짱짱하면 신도 짱짱해져요.
서원이 약하면 신도 약해집니다. 그런데 서원이 강하면 욕심이 줄어들고,
욕심이 많으면 서원이 나오지 않습니다. 임원 너희나 많이 해라. 출가
너나 해라. 나는 내 욕심 챙기면서 살겠다. 나는 즐기면서 살고
원불교가 좋은 줄은 알겠으니 가끔씩 돈 좀 내 주지… 서원이 없는
사람은 탐욕이 있어서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이것이 그대로 불신과
탐욕과 나태로 갑니다. 그래서 우로 자기 맘대로 하는 것입니다.
신분의성 모두 비례해서 같이 갑니다. 동시에 불신탐욕나우도
마찬가집니다. 불신탐욕나태우치가 다 비례합니다. 쉽게 말해서 서로
자기들끼리 아주 친합니다. 서원은 신과 아주 친하고 신은 분발하고
친하고 분발은 의심과 정성과 아주 친합니다. 같이 묶여 돌아갑니다.
그런데 불신은 탐욕과 나태와 우치와 아주 친합니다. 그래서 보면
유유상종합니다. 불신탐욕나우가 유유상종합니다.
사람들도 똑 같습니다. 어떤 교우가 외국에 1년 갔다 와서는 자기
친구들을 묻는데 교당을 다 떠난 애들만 묻는 겁니다. 그리고 연락을
해도 다 떠난 애들만 연락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너도 떠나겠구나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떠나더랍니다. 참 놀랬습니다. 아니 신심
장하고 열심히 하는 애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 사람은 어쩌냐고 물어
보지도 않고 물어보는 사람 마다 신심 없는 사람만 물어봅니다.
‘너도 똑 같은 사람이구나 너도 사라지겠구나.’
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금방 사라졌습니다.
내가 설사 탐욕에 치우친 사람이라도 서원 있는 사람과 신심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해보세요. 그러면 나도 그런 사람 금방 됩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선근자를 친근하게 해라. >
왜냐하면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내가 전농 교당에 처음에 갔더니 법회 끝나고 술 먹으러 몇 사람이
갑니다. 내가 오늘 술 먹지 마라고 설교를 했는데 술 먹으러 가는
것입니다. ‘너는 백날 말해라 나는 먹으란다.’ 그거 아니예요?
결국 그 녀석들 이 교당에서 다 사라졌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대종사님의 교법이나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믿냐 안 믿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이 회상을 계속 가서
‘성불 하느냐? 일원상의 진리를 깨치느냐? 영생의 행복자가 되느냐?’
이것이 그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됩니다.
알고 싶죠? 믿은 만큼 알아집니다. 알아진 만큼 믿어집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이 알고 싶다면? 그것은 난상의 세계입니다. 부유난상의 세계.
믿음이 없이 알고 싶으면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합니다. 믿음이 있고
알면 괜찮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것은 맹신입니다. 알아야 합니다.
같이 알아야 합니다.
인과의 이치를 믿지 않는 것이 번뇌입니다. 요행을 바라는 믿음,
신비적이고 장엄적인 믿음, 형식적인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고 다
미신입니다.
오늘은 믿음까지 하고 다음에 분발을 하렵니다.
우리 구인 선진님께 ‘어떻게 해서 백지혈인을 내셨습니까?’ 라고 어떤
제자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몰라 대종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어..’ 그렇게
답했답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구인 선진님한테 대종사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창생을 위해서 너희 목숨을 끊으라는 소리였습니다. 칼을
집에서 갈아서 와라. 그리고 갈아서 오기 전에 너희 집 식구들하고 하직
인사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다 가정이 있고 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칼을 갈고 있으니까 마누라가 뭐하고 있냐고 묻더랍니다.
나 뭐 하고 있다고.. 라고 답 했지만 속으로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있었죠. 생사의 문제 같이 비장한 것이 어디에 있어요?
그것은 대종사님에 대한 믿음 하나 입니다.
우리 총부의 원로원 수도원에 계시는 그분들을 이 번 출가여행을 가서
만날 것인데,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의 이야기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 대종사님을 온통 믿어버립니다. 마치 맹신 같이
믿어버립니다. 일생을 그 힘으로 사셨습니다.
다단계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 들어온 줄 알면서도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우리 수도원 할매나 할아버지들이 나 인생을 여기 바쳐서 잘못 살았지만
내 판단을 끝까지 주장해야 되니까 어쩌다 이 회상 만났는지 너도
들어오라고 하겠어요? 그러겠어요? 천만의 말씀이죠.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대종사님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고 대종사님의
교법이 별거 아니고 여기서 배웠던 것이 별거 아니라면 중간에 다
사라지고 도망가야죠. 일생 동안 고생하고도 그렇게 밝은 얼굴로
‘나는 내생에도 여기 와서 또 이렇게 살련다.’ 그러겠어요?
사회에서 보면 진짜 똑똑한 사람들 많아요. 그런데 진짜 똑똑하다는
것이 무얼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인과의 진리와 불생불멸의 도를
믿고 그것에 바탕 해서 이 사회를 살아갈 때 판단의 기준과 가치관 또는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시간 쓰는 것이 다르고 돈 쓰는 것이
다르고 찾아 다니는 사람이 다릅니다. 정말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어찌 다행히 이 회상을 만났는데,
대산 종사님 법문에 이렇게 나오는데 제가 보고 놀랐습니다.
‘한 두 생 착하게 살았다고 한 두 생 선행 했다고 이 회상 만나지 못한다’
고 하셨습니다. 한 두 생 선행했다고 회상 만나는 것 아니다. 아무나
만나는 것 아니란 말입니다.
지구에 60억 인구가 넘는다고 하는데 정말로 가장 시대에 맞고
생활에 맞는 대종사님의 사은사요 삼학팔조 인 이 교법을 만나는 것, 그리고
이 일원상의 진리를 밝힌 이 회상을 만나는 것은 아무나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대종사님은 원기 백 년 내에 온 사람들은 내가 몇 생
전부터 인연 다 지어가지고 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집군성이 대성(集群聖而大成) 이라 그랬습니다.
많은 성자들의 모인 가운데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어떻게 가지냐? 사람이 많으면 믿고 장엄하고
건물이 크고 역사가 오래 되면 믿습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은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교법을 보고 살아온 선진님들을 바라보고
현실을 보면서 판단할진대 여러분들은 정말로 잘 만난 것입니다.
오직 했으면 나 같은 사람은 여기에 일생을 다 바쳤겠어요.
내가 대종사님께 껌이라도 얻어 먹어 봤겠어요? 없습니다.
이 법이 좋고 우리 스승님들이 이 회상의 미래가 앞으로 이 세상이 여기
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자 건물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명예도 있고 돈도 굴러
다닙니다. 이 중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해요? 사람이 가장 중요하죠?
사람이 건물, 명예, 돈 등을 만들었죠? 그런데 이 사람을 누가
움직여요?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내 개인도 이 세상도 마음이
들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너지를 어디다가 써야
하느냐? 바로 사람에게 써야 하고 사람의 마음에게 써야 합니다.
나도 마찬가집니다. 건물, 명예, 돈 등은 하나의 필요한 것입니다.
있으면 좋고 살아가는 수단입니다. 돈, 명예, 집, 차 다 수단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요, 내 마음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고 나면
다른 것들은 알아서 따라 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 마음이 부처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믿음이다.
여기까지 입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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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영상으로도 봤는데 놓쳤던 부분이~ 타이핑에서 정확히 보이네요^^
도움이 되셨다니 일한 보람이 있네요 고맙습니다. ^^
정확한 정리에 큰 도움을 받습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옮겨갑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항상 아껴주셔서 고맙습니다. ^^
와...대단하다..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볼 때는 복습 하시는 분들이 더 대단합니다. ^^v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