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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의 남쪽 관문,
경주 외동 답사기.
월성중학교 2학년 6반 김민욱
조금은 쌀쌀한 2월. 어느새 2학년을 졸업하고 3학년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는 시점이다. 이제 중학교 생활도 1년이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답사를 다녔지만 이번에는 가는 곳이 정말 멀어서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답사를 떠났다.
이번에 가는 외동은 경주에 네개밖에 없는 읍 중 하나로서 주로 현대중공업이 있는 울산의 하청업체들이 모여있다. 또한 울산과의 경계지점으로 옛날부터 중요한 방비지역이다. 여기 역시 답사를 즐기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다른 어디만큼이나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울산지역 답사와도 연계해서 답사할 수 있다.
제일 처음 답사한 곳은 관문성.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경주로 들어가는 관문역할을 하는 성이다. 길이가 무려 12km로 명활산성의 3배에 달하는 상당한 길이다. 그래서 만리성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까지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아 조신시대에도 성 구실을 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경주에 있는 성을 찾으려 했으나 길을 잘 몰라 울산까지 와 버렸고 어쩌다 보니 산 위에 성벽이 보이길레 무작정 따라갔다. 그리고 앞에 조그만한 절이 나왔고 그 옆으로 관문서가는 등산로가 나왔다. 오늘도 등산이구나.
(관문성 올라 가는 길. 아버지께서 앞서 가신다.)
그렇게 어느정도 올라가니 관문성이 드러났다. 산 전체에 걸처져 있는 관문성은 보기만 해도 만리성이라는 이름이 절로 생각났다. 관문성은 울산에서 산책로처럼 길을 개발해서 트레킹하기에 좋게 만들었다.
(관문성. 정말 길다.)
(관문성 성벽 터. 꽤 잘 남아있다.)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이 잘 남아있다. 고개까지만 가 보고 다시 경주로 돌아가기 위해 하산한다.
그렇게 다시 경주로 돌아가는 도중 경주와 울산의 경계를 나타내는 지점에 다보탑과 이상한 석조물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가 보니 관문성의 일부이다! 급하게 내려 가 본다. 여긴느 무너지지 않고 잘 남아있다. 비록 도로와 기찻길이 성을 끊어놓았지만 방금 천마산에서 여기까지 성이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 대단하다. 나중에 기찻길 너머의 성벽도 답사해 보아야겠다.
(관문성의 일부. 뒤에는 경주를 상징하는 다보탑이 세워져 있다. 여기는 보존상태가 완벽하다.)
완벽한 관문성을 보아서 다행이다. 이제 다음 목적지인 원원사지로 향한다. 관문성 올라가는 길이 등산길이라 녹초가 되었는데 여기 역시 만만치 않다. 구불구불 공사 중인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금강역사가 눈을 부릅 뜨고 우리를 맞이한다. 조금 더 가니 사천왕상이 천왕문을 대신해 서있다. 그리고 눈앞에 천불보전이 보인다. 여기는 후에 절을 다시 세운 것 같다. 절은 아담하고 소박하다. 제를 지내서 그런지 할머니들로 북적북적거린다.
(원원사 천불보전. 절은 최근에 다시 세웠다.)
절 뒤쪽에 나있는 계단을 올라가자 드디어 탑이 나타난다. 탑에는 십이지신상과 사천왕상이 매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여기 원원사는 예로부터 관문성과 연관된 호국사찰이다. 탑과 탑 사이에는 석등과 누군가의 무덤, 그리고 금당터가 남아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당연히 탑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이다. 탑에 십이지신상과 사천왕상을 모두 새긴 예는 매우 드물다. 여기가 보통사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정도면 보물이 아니고 국보로 지정 해줘야 하는데.
(원원사지 삼충석탑.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탑 왼쪽에는 용왕당이 있다. 안에는 용왕과 우물이 있다. 전각안에 우물이 있는 것은 참 드문데, 아무튼 그 전각에서 남서쪽, 대나무숲 안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조유구가 하나 놓여있다. 물을 담아놓았고 옆에 바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사용을 하는 것 같은데 도무지 어떻해 쓰는지를 모르겠다.
(용왕당. 이상한 석조유구와 부도탑의 기준. 안에는 우물이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석조유구. 석조의 일종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다시 용왕당으로 돌아와서 그 옆에 나있는 샛길로 들어가 본다. 그리고 이래저래 길을 해매다 보면 팻말이 나온다. 바로 부도탑으로 가는 길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계림님의 블로그를 통해 여기에 부도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본다. 길 같은 흔적을 따라 가니 팻말이 나왔다. 처음에는 팻말이 다른 방향으로 돌려져 있어 고생을 했다. 그렇게 10여분간 산을 해매다가 드디어 부도탑을 발견했다. 고려시대 이후에 보이는 석종형 부도인데 밑에 연꽃무부늬 등을 새겨 놓았다. 팻말은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 놓았다.
(원원사지 서북쪽 부도탑. 정말 열정적이지 않으시다면 여기는 가지 마시길. 길이 정말 험하다.)
다시 절으로 내려가니 아버지와 동생은 공양으로 받은 과일들을 먹고 있다. 그리고 곧 이어 옆에 죽은 새를 묻어주러 가신다. 나는 동쪽에 있는 부도도 찾기 위해 주지스님께 여쭈어 본다. 그리고 찾을 수 있겠냐고 하시더니 길을 가르쳐 주셨다. 부도를 찾기 위해 다시 원원사지로 올라와서 금당터 뒤의 무덤을 기준으로 동쪽에 나있는 샛길로 들어선다. 그렇게 남의 텃밭 옆길을 거쳐 무너질 것 같은 길을 뛰어넘어(결국 무너짐) 계곡을 건너는 일을 끝내니 비교적 큰 길이 나왔다. 큰 길의 끝은 어딘지 모르겠다. 그 큰길의 원쪽방향으로 가니 봉련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나왔다. 안 에는 스님 한 분과 보살님 한 분만 계신다. 공양밥을 주신다는 말을 마다하고 부도로 가 본다. 이번에는 세개가 밀집해 있는데 별 특징없는 석종형 부도다. 그래도 고생해서 와서 그런지 이유없이 감동이다. 여기역시 되도록이면 오지 않으시길(다시 돌아갈 때 무너진 길을 둘러 간다고 고생을 했다).
(봉련암. 원원사 주지스님께서도 잘 모르시는(!) 암자.)
(봉련암 부도탑. 세기가 함께 있다. 특별한 장식은 없다.)
부도까지 다 보고 오니 이번에는 정신이 다 빠진 것 같다. 아직 두개밖에 가 보지 못했는데 힘, 정신 모두 없다. 그런 상태로 숭복사지를 향해 또 달린다.
숭복사지는 가는 길을 해매서 조금 힘들었다. 그리하여 달리고 달려 마을 끝자락에 신식 절 건물과 탑이 두 기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숭복사지는 다른 것보다 최치원 선생님께서 전국의 사찰 중 단 4개의 사찰에만 비명을 남겼던 그 4개의 사찰 중 하나다. 현재 최치원의 비석이 있었다는 귀부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숭복사지 삼층석탑역시 아까 원원사지 삼층석탑 만큼이나 수작에 속한다. 비록 몸돌이 없어져서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기단에 새겨진 팔부신중과 몸돌에 새겨진 문무늬는 보통 조각이 섬세한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남아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뒤에는 금당터와 계단석 등이 남아있다.
(숭복사지 삼층석탑. 보존상태가 조금 좋지 않지만 조각 만큼은 섬세함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숭복사지를 지나서 경주 관광지도에는 표시되어있지 않은 연지암으로 간다. 비교적 연지암은 길 찾기가 쉬웠다. 연지암에 들어서자 대웅전 하나와 다른 건물 하나만이 있었다. 대웅전에는 오드아이의 흰 고양이와 다른 고양이 두마리가 놀고 있다가 외부사람들이 오자 경계하면서도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대웅전에 들어가자 석불입상이 하나 보인다. 조각이 잘 이루어진 이 불상은 약간 배 모양을 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가지 않고 여기 있는 게 다행이다.
(연지암 대웅전.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웅전 앞에는 고양이들이 놀고 있다.)
(연지암 내 석불입상. 보존상태는 비교적 훌륭하다.)
보살님께서 친절하게도 절 안으로 데려가셔서 떡하고 차를 대접하셨다. 보살님께서 여기 주지스님은 불국사 학감스님(스님을 가르치는 스님)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 차는 중국 보이지방에서만 나는 보이차라고 하시며 매우 바싸다고도 하신다. 그렇게 보살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절을 나왔다. 보살님께서는 일요일은 비빔밥을 준 다며 한 번 오라고 하신다. 동생은 아직 고양이에게서 눈을 때지 못한다. 새끼라 그런지 귀엽다. 나중에 꼭 다시 와야겠다.
드디어 오늘 일정도 막바지로 향한다. 그 만큼 해도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다. 그 시점에서 다서번째로 들른 곳은 괘릉. 괘릉은 비교적 정비가 깔끔하게 되어있다. 괘릉이란 이름의 기원은 이 무덤의 주인인 원성왕을 장사지내려하니 밑에서 물이 솟아나서 무덤에 관을 걸어두었다(걸괘: 掛)하여 괘릉이라 부른다. 괘릉은 무엇보다 가장 완벽한 신라 무덤양식을 보여준다. 돌사자와 문인, 무인상 등이 앞을 지키고 있다. 이는 후에 고려, 조선의 무덤에도 영향을 끼친다.
(괘릉 석주일괄. 가장 완벽한 무덤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괘릉은 또한 무인상이 특별하다. 무인상의 모습을 유심히보면 누가봐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무인상은 아라비아 사람을 본 떠 만든 것으로 경주도 아라비아와 요류를 했을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끝의 무덤에는 십이지신상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무덤의 주인인 원성왕은 김주원과 왕위 쟁탈전을 한 인물, 김경신으로 더 유명하다. 그리고 그에 얽한 이야기 역시 신라의 전설에서 절대 빠지면 안 되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만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과거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아들복이 없는 왕으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폭풍우같은 후기 신라 왕위 쟁탈전의 거의 시작점에 있는 왕이다. 하지만 독서삼품과 시행은 상당히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만약 그것이 이루어졌다면 신라가 이처럼 허무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을까?
(괘릉. 도굴당해서 정말로 관이 걸려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괘릉 뒤쪽 길을 통해 수봉정으로 향한다. 수봉정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고택이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경주고등보통학교(경주고등학교)를 세우신 '수봉 이규인'선생님께서 지으셨다. 그의 뜻대로 경주고등학교는 경주 최고의 고등학교가 되었다. 그래서 경주고등학교 재단 이름 역시 '수봉학원'이다. 고택 내부에는 건물도 건물이지만 곳곳에 널린 유물들 역시 눈길을 사로잡는다. 정원석부터 길까지 모두 절에서 가져온 주춧돌이나 돌난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마당에 위치한 우물 역시 저번 향교 우물 만큼이나 오래돼 보인다. 마치 작은 박물관을 보고 온 기분이었다.
(수봉정 내부. 우물은 지금도 물을 길어다 쓸 수 있는 것 같다.)
(수봉정의 길. 주춧돌과 돌난간으로 이루어진 길이 무척 흥미롭다.)
수봉정을 나와서 감산사로 향한다. 감산사는 김지성이 감산장전이라는 농장을 절로 바꾸면서 감산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감산사는 잘 찾아보면 매우 유물이 풍부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여기 석불입상이 두 기 있었다. 워낙에 수작 중의 수작이라 총독부에서 전시를 위해 가져가 버렸고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절을 들어서면 대적광전과 극락전, 그리고 작은 불상이 있는 바위가 보인다. 먼저 대적광전으로 들어가본다. 안에서는 한 여승과 보살님께서 제에 쓸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리고 중앙에는 석불이 하나 놓여있다. 지권인을 한 이 불상은 총독부가 가져간 불상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지 다행이 여기 남아있다. 보존은 잘 되어 있어서 좋다. 양해를 구하고 불상을 촬영한다.
(감산사 대적광전과 극락전. 최근에 지은 듯하다.)
(대적광전 석불좌상. 광배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다 알 수 있는 불상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불상이 두 기 더 있다. 먼저 극락전 내 불상. 역시 석불언데 눈 여겨 보아야라 부분은 불두다. 이 불두는 백제에서 온 불상의 일부이다. 몸은 후에 복원한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백제불상이 여기 온 지는 모르겠지만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늠비봉 오층석탑과 더불어 백제영향을 받은 귀한 작품이다.
(극락전 석불좌상. 불두만 백제불상이라고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다.)
또 하나는 입구쪽 바위에 있는 불상이다. 작은 불상인데 바위에는 동전들이 박혀(?)있다.(최고 위에 있는 동전은 동생이 올려 놓은 것이다.) 이 불상역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왜 이런데 모셔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감산사가 꽤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입구 바위에 있는 작은 불상. 대적광전 불상과 마찬가지로 지권인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뒤에 있는 감산사 삼층석탑으로 간다. 석탑은 몸돌이 없어져 기교한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다만 1층몸돌은 남아있는데 약간 길쭉한 것을 보아 경주역 앞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것 같다. 비교적 장식없는 작품으로 지붕돌이 경쾌하게 들려져 있어서 날렵하고 한 층 더 가벼운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몸돌이 남아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옆에는 석등 받침대와 다른 석조유구들이 남아있다.
(감산사 삼층석탑. 노을빛을 받아서 더 멋지게 보인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영지로 향한다. 해는 어느새 지고 있다. 길을 건너서 영지로 간다. 먼저 영지 반대편에 있는 영지 석불좌상으로 간다. 영지 석불좌상은 아사달이 아사녀를 조각하려다가 불상을 조각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안타깝게도 조선시대 유생들이 그랬는지 눈과 얼굴이 많이 파괴되어 있다. 하지만 불상 자체는 잘 만들어져 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을 간직한 채 오늘도 마음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계신다.
(영지 석불좌상. 훼손이 심하다.)
이제 정말 마지막 장소인 영지로 향한다. 영지는 노을이 져서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과연 영지에 다보탑이 비칠 수 있을까?'. 실제로 영지와 불국사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애초에 다보탑이 비칠리가 없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여기가 영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영지는 여기가 아니고 예전에 불국사 앞에 있었다는 구품연지라는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 불국사 보수 중 비가 내렸는데 비가 내린 후 불국사 랖 물웅덩이에 다보탑이 비쳤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건 말건 영지는 노을빛을 한 껏 머금고 빛을 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디가 영지인 것이 아니라 그런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지. 노을이 아름답게 지고 있다.)
쉬울줄 알았지만 엄청난 힘이 소모된 답사였다. 아버지께서는 녹초가 되셨고 동생은 상태가 좋지 못하다. 아무튼 힘들었다.
외동은 곳곳에 숨겨져 있는 유물이 많았다. 덕분에 찾느라고 고생을 했지만. 하지만 어떤 답사 만큼이나 보람있었다. 특히 섬세하고 화려한 멋이 살아있는 유물들이 많았다.
서라벌의 남쪽 관문, 경주 시ㅐ와 다른 색다른 멋을 간직한 외동. 꼭 다시 찾아가고 싶은 답사처이다.
-여정- (2013. 2. 16. 土)
울산 관문성(울산 어울길)→ 경주 관문성(경계지점)→ 원원사→ 원원사지 삼층석탑→ 원원사 용왕당→ 정체모를 석조유구(석조로 추측)→ 서북쪽 부도→ 원원사지 삼층석탑→ 봉련암→ 봉련암 부도 3기→ 숭복사→ 숭복사지 삼층석탑→ 연지암→ 연지암 대웅전 내 석불입상→ 괘릉 주차장→ 괘릉(원성왕릉)→ 수봉정→ 감산사[감산사 입구 바위 위 불상→ 감산사 대웅전 내 석불좌상→ 감산사 극락전 내 석불좌상→ 감산사 삼층석탑]→ 영지 석불좌상→ 영지
새롭게 펼쳐라!
羅新
첫댓글 제가 또 답사기를 올리고 있는 카페입니다(http://cafe.daum.net/moonhawje/). 가입을 안 하면 볼 수 없어서 조금 그렇습니다. 그래도 한 번 쯤은 들러 주세요.
위 카페에 들어가 보니 정회원이 아니라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더구나.
많은 곳을 답사하느라 수고했다.
방학은 잘 보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