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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혜옹주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태종의 서6녀인 숙혜옹주 묘역 전경 |
태종과 소빈노씨 사이의 서6녀 숙혜옹주. 숙혜옹주는 성주이씨 사후의 아들 정녕에게 시집가 3남 1녀를 낳았다. 그녀의 남편 정녕은 자는 단보이며, 옹주와 결혼하여 성원군에 봉해졌으며, 세종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
▲ 성주이씨 경모재를 조금 지나면 좌측에 창수정/해실전통장 돌 표지판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조금 들어가면... |
풍수학제조 성균관직강으로 있을때 그의 고향땅 성주에 왕자들의 태실을 두기위하여 그의 선조인 장경의 무덤을 딴 곳으로 이장해야 된다는 조정의 결정을 무시한 죄로 이듬해 파직되었습니다.(묘는 이장되었습니다) 후에 다시 의금부제조,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고 숭덕대부에 올랐다. 시호는 장절이다. |
▲ 전통장 체험하는 농원이 있으며, 농원 좌측 산자락에 숙혜옹주 묘가 있습니다. 저번에는 농원 입구까지 왔다가 발길을 돌리기도... |
“명당에 胎 묻어라”… 달밤 삽질 작전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 해발 742m의 서진산 주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조그마한 이 돌산에 요즘 밤만 되면 무언가 ‘수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올 초부터 깜깜한 밤에 손전등을 들고 나타난 일단의 사람들이 죄지은 사람처럼 뭔가를 묻고는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 무슨 일인지 한번 물어보기라도 할 법한데 이를 확인하려는 주민은 아무도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 알지만 제지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반응이다. 사실 주민들도 태봉에 ‘그것’을 묻고 싶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금기’(禁忌)이기에 실행을 못하고 있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묻는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
▲ 숙혜옹주 묘역 전경. |
10월31일 오후 태봉에서 벌채하고 있던 마을 주민 이모씨(58)는 이 질문에 “뭐긴 뭐야 ‘태’지. 부모가 자식 잘되라고 하는 일을 누가 말리겠느냐”고 반문한다. 취재진이 “한번 파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자 “이 사람들이 천벌 받을 일을 하자고 하네. 아무리 면식 없는 남이지만 자식 잘되라고 묻어놓은 태를 파내면 당신들은 좋겠느냐”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서진산 태봉에 사람들이 묻은 것은 바로 ‘태’(胎).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 아기의 탯줄이었다.
인체 적출물로 산부인과 병원에서 법적 처리절차를 거치거나 화장품, 약품 개발에 사용되는 탯줄이 이곳에 묻히고 있는 것.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병원 관계자나 폐기물 무단 처리범은 아니다. ‘수상한 이들’의 정체는 탯줄 주인인 아기의 가족(부모나 조부모)이 대부분. 일주일에 2~3쌍의 부모가 이 산에 태를 묻고 간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전언이다. |
▲ 추석 직전이라 아직 벌초가 안된 모습입니다. |
그렇다면 이들이 ‘도둑 고양이’처럼 몰래 자식의 태를 이곳에 묻는 이유는 뭘까. 또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산 가운데 왜 하필 서진산이고, 그 중에서도 태봉이란 말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태봉’(胎峰)이라는 봉우리의 명칭과 연관이 깊다. 그리고 태봉이 겪어온 역사적 발자취를 살펴보면 의문의 ‘실타래’는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다. |
▲ 숙혜옹주 묘역내 문인석 모습 |
세종이 왕자들 태 묻은 곳
세종이 이곳에 왕자의 태를 묻은 것은 풍수지리의 핵심 이론인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에 대한 그의 ‘광신적’ 믿음 때문이다. 즉 태를 명당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여 ‘왕업’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세종은 전국에 지관과 신하(안태사)를 보내 왕자들의 태를 묻을 명당자리를 수소문한 결과, 조선 최고 명당이라는 성주 서진산 태봉을 찾아낸 것. 서진산 태봉이 세종에게 어느 만큼 명당으로 비쳐졌는지는 현재 전국에 퍼져 있는 20여개의 태실지 중 가장 많은 왕자의 태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 외에도, 다른 사대부 소유의 무덤 터를 빼앗으면서까지 이곳에 태실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
▲ 숙혜옹주 뒤에 보이는 봉분이 공주의 남편 묘역입니다. |
▲ 숙혜옹주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서진산 태봉 자리는 원래 13세기 고려 말 문신인 이장경의 무덤 터. 정말 터가 좋아 그런지 그의 아들 5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학문적 명성을 떨친 것은 물론, 그의 손자 이승경은 원나라 과거에 급제한 뒤 큰 공을 세워 조부 이장경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농서군공(西君公)으로 추봉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李稷)을 비롯, 많은 인재를 배출해 명문가로 자리잡으면서 이장경은 성주 이씨의 중시조가 됐다. |
▲ 태종의 부마인 숭덕대부 성원위(星原尉) 장절공 이정녕(李正寧) 묘역 전경 |
졸지에 천하 명당을 잃게 된 이장경 후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연의 일치인지 세종 당시 풍수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던 풍수학제조(風水學提調) 자리에 있던 사람이 바로 이장경의 후손이자 이직의 손자인 이정녕이었던 것.
그는 조상의 명당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장경의 무덤을 옮길 것을 요구한 조정 관리(안태사)들의 보고를 없었던 일로 무시한 죄로 파면되는 고초를 겪는다. 태종의 아홉째 딸이자 자신에게는 누이동생이 되는 숙혜옹주의 남편(부마) 이정녕을 파면하면서까지 무덤 터를 빼앗은 데서 세종이 얼마만큼 ‘태봉’에 집착했는지 엿볼 수 있다. |
▲ 성원위의 묘는 숙혜옹주 봉분 뒤에 있으며, 묘비에도 '배 숙혜옹주 전주이씨 부하'로 새겨져 있습니다. |
“地氣와 안 맞으면 오히려 禍” |
▲ 성원위 이정녕 묘역내 문인석 모습. 옹주와 부마 묘역에 망주석이 없네요... 장명등은 10여년 전에 도난 당했다고 합니다. |
결국 재실과 묘각을 세우지 않았으면 세종이 보낸 지관들의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곳은 정말 명당일까. 전주 우석대에서 풍수학을 강의하는 김두규 교수는 “성주 태실 터는 풍수지리학상 대표적 명당인 돌혈(突穴)에 속한다. 그중에서도 최고 명당인 대돌혈이 바로 이곳으로, 좌청룡 우백호 등 풍수의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다.
실제 산 아래에서 바람이 몰아쳐도 태봉 꼭대기는 바람 한점 불지 않는다. 대단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편 이몽일 교수(경북대 지리학과)는 태봉과 이를 둘러싼 서진산이 그 자체로 태아와 자궁의 형세를 하고 있다며 이렇게 주장한다. “이곳은 어머니의 두 다리(서진산 줄기)가 청룡, 백호가 되고 자궁 깊숙이 자리잡은 태아가 바로 혈(태실 명당)인 형세다. 이때 서진산 주봉에서 태실이 안치된 혈까지 이어지는 산줄기(來龍)가 바로 탯줄에 해당되는 것이다.” |
▲ 풀을 헤쳐 보니 호석이 사각이어서 사각 봉분입니다. |
▲ 성원위 이정녕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그런데 이곳에 자식의 태를 묻은 부모의 마음처럼 그 자식들이 무병장수하거나 발복을 누린 것은 아니다. 사실 이곳에 태가 묻힌 왕자들의 말로는 그리 복되지 못했다. 단종 축출과 관련해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이 유배되거나 죽었고, 이와 관련해 일어난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마저 유명을 달리했다. 이곳에 태가 묻힌 단종의 죽음은 더욱 비참했다. 게다가 세조는 임금이 된 후 이 다섯 형제의 태와 태실을 모두 산 아래로 파 던져 현재 이들의 태실은 기단만 남아 있을 뿐이다. |
▲ 숙혜옹주 봉분 아래 위치한 2기의 봉분은 후손의 묘역인 듯 합니다. |
제3대 태종대왕(太宗大王) [1367 ~ 1422] 가계도
정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 ~ 1420] 적1남 아들 [생몰년 미상]
서1남 경녕군(敬寧君) [1395 ~ 1458] (효빈 김씨) 옹주(翁主) [1400 ~ 1402] (숙의 최씨 소생) |
숙혜옹주 묘역 위치도 |
지도 좌측 상단 화살표는 농장, 그 아래 시작 부분이 숙혜옹주 묘, 그 뒤에 성원군 묘. 소재지 : 경기 포천시 창수면 주원2리 374-1 |
지도 중앙의 화살표 부분에 숙혜옹주 묘역이 있습니다. 창수면사무소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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