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오래 전부터 나는 고향이라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방학이면 부산에 가서 지냈고 직장생활도 부산에서 시작하였기에 이렇다 할 추억거리도 없는 편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이기심의 발로인지 몰라도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갖추지 못하여 금의환향을 하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튼 또 다른 이유도 있어 고향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남들은 고향에 들러 운동회에 참석도 하고 동창회를 하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살아가는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하는 처지로 살아왔다. 그래도 국민학교 모임은 부산으로 가지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요즘 들어 마음이 매우 무겁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공장생활이라는 탓도 있겠지만 막상 공장에서 일어나는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파트 근로자들은 물건을 대략 잘 만들어서 팔리기만 하면 되질 않느냐? 는 것이고, 검수를 담당하는 나는 정확한 공정과 조금의 흠이라도 생기면 바로잡아야 하겠다는 서로 다른 생각차로 생겨나는 의견대립이 있다.
딱히 어느 편이 합리적이고 생산적이라고 단정 지워버리기가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한편으로 보아서는 다음에 발생할 클레임은 별개로 하여 제처두고서라도 당장의 실적을 올려보자는 뜻이고, 나로서는 클레임으로 그로 인하여 반품 등이 발생하는 공장의 이미지도 생각하고 무엇인가 틀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다.
일단 공장 애기는 여기서 접어야겠다. 솔직히 마음에서 떠나가고 가슴에 담고싶지 않은 재미없는 이야기들이니까...
바깥은 퇴근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을 향하여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 길가 가게에서 간식을 사먹는 사람, 그리고 휴대전화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군중 속을 헤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넓은 차도를 지나 이면도로로 접어들었다. 이면도로는 저녁노을이 사라지고 하나 둘 켜진 가로등이 밝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에 지나쳤던 이발관이며 불 꺼진 자전거 수리점을 지나 한적한 골목길에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 앞에서 덩치가 커다란 젊은이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가 말을 걸어왔다.
“저어! 제가 이야기 드릴 게 있어서...”
나는 순간 고갤들어 그의 얼굴을 눈여겨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다름 아닌 지난주 퇴근길에 다리 위에서 만났던 사내가 아닌가? 순간 나는 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너 저번에 다리위에서 나 만나지 않았어? 뭐라고 고향이 00이라고? 나도 그곳인데 어디서 고향을 팔아먹어! 당장 가지 못해!”
나에게 도움을 청하려다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는 나를 바라보던 그는 황급히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다보니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어떻게 된 이야기냐고?
지난주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나는 그날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는데 중간 지점에서 덩치가 매우 큰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를 만났다. 사내는 나를 보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저어! 여기서 00까지 걸어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순간 나는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하고 생각하였고, 내가 방황하던 시절에 무전여행(사실은 돈을 조금 가지고 있었음)을 한답시고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고, 사내가 말한 길도 걸어 보았기 때문에 그의 질문에 답을 하였다.
“아마 하루는 걸릴 거요. 천천히 걸으면 하루 반 정도 걸리고” 그러자 사내는
“차비가 없어서 그런데 혹시 천 원짜리 하나 있으면 주시면 안 될까요?”
순간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 말하기를 “그곳까지 차비가 얼만데?“ 하였더니 ”4,500원입니다.“ 라고 하더라고.
나는 그곳까지의 차비는 맞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내가 돈이 별로 없는데” 하며 2천원을 그에게 주면서 “이 돈 가지고 모자라는데 어쩔 거요?”하고 하였더니 그는 “저번에도 사정을 해서 타고 갔습니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하여간 알아서 사정을 하든지 하고 빨리 집에 가라”고 하며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내를 오늘 다시 만난 것이다. 나는 그의 속셈을 알았으니 이번엔 돈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긴 하지만 내가 속임을 당하였다는 사실과 나의 고향 이름을 더럽히고 다닌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고 만 것이다.
나는 젊은 사내를 고함을 질러 꾸짖어 돌려보냈지만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애 엄마에게 그 사내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더니 요즘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돈을 주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래도 나는 젊은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냐? 며 '우리사회가 정말 큰일'이라고 말하였다. 학교를 졸업해도 취업이 되질 않으니 저렇게 해서 아마도 PC방에서 잠을 자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우리 형제들은 설날에는 우리 집에 모이고, 추석에는 작은 형네서, 어머니의 생신 때는 큰 형네서 모이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까진 설날에 우리 집에서 모여 아침밥을 먹고 고향의 친척들을 방문하였으나 이내 고향의 어른들이 돌아가셨고, 큰 형네는 미국에 사는 자녀들에게로 가셨다고 하여 올해는 이동을 하지 않기로 정하였다.
살아갈수록 고향에 대한 정도 멀어지고 살림살이도 팍팍해 지는 것 같다.
고향!
나에겐 고향무정이라고나 해 둘까.
내가 오늘 그 젊은 사내에게 화를 내엇던 것은 어쩌면 그가 나를 속인 것 보다는 그래도 그나마 한가닥 남아있는 고향이라는 것에 대한 애착심이 발동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유가 있으면 어려운 남을 돕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다. 솔직히 그들에게 있어서는 고향이며 명절의 의미가 무엇이고, 오늘 나로호가 떠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하늘로 솟구쳐 날아 오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그 돈으로 자신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일 것이다. 적어도 지금 그들의 형편에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