陽地를 지양하며 은거한 금은(琴隱) 박성양(朴成陽)
문무를 겸비한 금은(琴隱) 박성양(朴成陽)은 도학이 높고 충절이 뛰어났으며,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남쪽 왜구를 평정함에 큰 공을 세운 대대로 공훈을 세운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인품이 부드럽고 의지와 기개 또한 맑고 높았다고 한다.
선생의 생몰년은 알 수 없고,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금은(琴隱)이며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고려의 명장 중량장 박윤후(朴允厚)의 아들이며, 함양박씨(咸陽朴氏) 시조 박언신(朴彦信:박혁거세 29세손인 경명왕 셋째아들)이 속함대군(속함은 함양의 옛 지명)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시조로 삼았다. 이렇듯 박선(朴善)을 중시조로 하는 함양박씨는 그의 10세손에 이르는 약 300여 년 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특히 5세조 박신유(朴臣蕤) 후손부터는 크게 번성하여 아들 6형제『지문(之文), 지빈(之彬), 지량(之亮), 지수(之秀), 지온(之溫), 지영(之潁)』중 지량은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충렬공 김방경 휘하의 지중군병마사로 출전, 큰 공을 세운 후에 함양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5대손인 박성양이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학식과 인격 또한 고매한 스승 포은의 뜻을 받들어 고향에서 은거(隱居)한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반도 국가 여건 상 오랜 세월 위로는 오랑캐가, 남으로는 왜구의 침략이 수없이 많았다. 그 많은 침략 중 1397년 5월에 왜구가 선주에 침입이 있었는데 여러 공론들이
“문무를 두루 갖춘 금은 공이 아니면 이를 토벌할 인물이 없다.”
함에 선생은 오직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왕명을 받들어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부산포에 닿아 적과 대치한 끝에 60일 만에 난을 평정하였다.
이에 왕이 크게 칭찬하여
⌜석자 칼로써 나라를 편히 하고 한 가닥 채찍으로 세상을 평온케 했다.⌟
란 글을 내리고는 늘 왜구들이 난립하는 남변을 한 해만 더 지켜 달라는 유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비로 나라 중임을 감당키 어려우니 다른 임무로 바꿔 달라 하여 결국 경상좌영병마절제사(慶尙左營兵馬節制使)가 되었다.
그 후 1419년(세종원년)에 기해년에 왜구가 쳐들어와 노략질하므로 왕이 이종무(李從茂:1360~1425)를 삼군 도절제사로, 선생을 우군 절제사로 하여 토벌케 하니 왜적들이 선생의 위풍을 멀리서만 보고도 겁을 먹고 도망쳤다는 일화는 그저 흥미로 하는 말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대마도를 정벌하고 개선해 돌아온 선생에게 세종은 친히 이종무, 최윤덕과 함께 말 한필 씩 하사하였고 왕이 더 내린 상훈 또한 기꺼이 마다하고 현 봉양면 분토리로 내려와 후진양성에 힘써 후세에 길이 귀감이 됨을 지금도 후손들은 자랑스러워 한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이란 노랫말에‘~ 대마도 정벌 이종무 ~’라는 가사가 있어 익히 알지만 선생의 대마도 활약상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많음을 아쉬워 할 뿐이다.
한편 선생의 묘지명을 지은 회재 이언적은 부인이 바로 선생의 증손이며 회재 선생의 처가가 춘산면이라는 인연이기에 이곳 빙계서원에 배향된 연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의성은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해안지방에서도 불을 붙이면 꺼지지 않을 만큼 화력을 가진 성냥을 만든 ‘성광성냥’ 공장이 전국에 유일하게 지금 남아 있다. 지금은 성냥이란 단어를 통상적으로 쓰지만 당시 내려오는 일화에는 선생이 계시는 지역에서만은 감히 후손들이 선생의 존함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하여 성냥이란 말을 입에 내지 못하고 목간, 또는 다황이란 말로 성냥을 지칭했다고 한다. 소리 나는 대로 말하면 같은 발음이기에 후손들의 조상 흠모하는 마음이 여실히 담겨 있는 대목이다.
선생은 봉양면 분토리에 봉산재라는 사당과 묘역을 후손들이 조성했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몇 평에 불과하지만 혈장이 뛰어나 합수지점에서 묘역을 오르는 10여 분에 가까운 모든 산세가 혈에 속한다는‘학의 혈’또는‘봉의 혈’이란 말을 하는데 풍수학적 전문지식이 없다 해도 보편적인 자연경관만 보더라도 좋은 곳이란 느낌을 받기에 주저함이 없다.
1818년(순조 18) 가음면 양지리에 명곡서원(明谷書院)을 지어 배향되고, 선생이 졸한지 400여년만인 1868년(고종 5년)에 가선대부이조판서겸도총부부총관(嘉善大夫吏曹參判兼都摠部副摠管)에 특승(特陞)되었다. 1975년에 경내에 신도비(神道碑)가 새로 세워졌으며 현재 서원 내에는 사당인 경덕사(敬德祠), 명교당, 동 서재, 6칸의 주소(廚所) 등의 전각들이 있고 유물로 박성양의 책판 80여 장을 소장하고 있다.
선생의 저서로는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보관 중인 「금은실기(琴隱實記)」1책이 있다. 권두에 이만규(李晩煃)의 서문과 태조가 내린 시 1수가 있고, 1권은 시와 서(書) ·증유(贈遺) ·척실(摭實) 및 부록이 있으며 선생이 지은 글은 시 2수와 서 2편뿐이며, 부록에 묘지명 ·유사 ·행장 ·묘갈명 등이 있는데, 묘지명은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짓고, 행장은 김굉(金宏)이 지었다. 회재 이언적은
‘그의 학문 깊음은 의리에 맞게 처세했던 덕이다. 학문은 천인을 관통하고 공훈은 사 직 보존했다.’
라고 묘지명에 썼다. 2권 부록으로 상언초(上言草)가 있으며, 여기에는 예조 회계 ·이조 회계 ·이조 망기(望記) ·교지 ·시장(諡狀) ·시장안본(諡狀按本), 사림이 본 읍에 올린 단자, 시장을 요청할 때 각 서원에 돌린 통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특히 증직과 시호를 내리는 절차와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지식이 부족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는 없다.’ 라는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처럼 충절에 불타는 가슴을 가진 선생과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세계의 우뚝 서는 국가로 나아가고 있음을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