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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과 항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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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이란 같은 혈족사이에 세계(世系)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기위한 문중(門中)의 법이며, 항렬자란 이름자 중에 한글자를 공통으로 사용하여 같은 세대를 나타내는 돌림자를 말한다.
우리의 선조들께서는 자손들의 항렬자와 배합법까지 미리 정해서 후손들이 그것에 따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가문과 종파에 따라서 차이가 많으나 대개의 경우는 아래와 같은 방법을 사용 한다.
1.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으로 쓰는 경우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변을 사용하여 순서적으로 쓰는 경인데 이를 제일 많이 쓰고있다.
2. 십간(十干)순으로 쓰는 경우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를 순서적으로 쓴다.
3. 십이지(十二支)순으로 쓰는 경우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순서적으로 쓴다. |
성씨와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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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란 본시 혈통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부호로서 혈연의 관계를 나타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을 무렵, 즉 씨족 중심을 벗어나 부족사회(部族社會), 또는 부족국가(部族國家)로 형성 발전하면서 서로의 가통을 호칭하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은 본관(本貫), 본향(本鄕), 관향(貫鄕), 관적(貫籍), 선향(先鄕)등으로도 부르며, 시조의 출생지나 정착지 등으로 본을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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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본관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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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동조 동본 동성(同祖同本同姓) 같은 시조에 같은 본, 같은 성을 사용하는 경우로 이것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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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동조 동본 이성(同祖同本異姓) 같은 시조에 같은 본이나 성을 하사 받거나 그 밖의 이유로 성이 달라진 경우이다. 가락국의 수로왕 후손으로 김해의 본을 쓰면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金海許氏)등으로 갈려 사용하는 경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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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동조 이본 동성(同祖異本同姓) 같은 시조의 후손이면서 본을 다르게 쓰고 있지만 성은 같은 경우다. 파평 윤씨의 시조 신달(莘達)의 후손이면서 남원(南原), 함안(咸安), 덕산(德山), 신령(新寧)등으로 각각 다른 본을 사용하고 있으나 성은 같은 윤씨를 사용한다. 또 신라 알지왕의 후손으로 강릉, 광산 등 본은 달라도 성은 같은 김씨를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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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동조 이본 이성(同祖異本異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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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이조 동본 동성(異祖同本同姓) 시조가 다르면서 본과 성이 같은 경우이다. 수로왕계의 김해 김씨와 일본계로 임진왜란때 귀화한 김충선(金忠善)계 김해 김씨가 그러하며, 남양 홍씨(南陽洪氏)에는 시조가 다르다 하여 당홍(唐洪)이라 부르는 남양 홍씨와 토홍(土洪)이라 부르는 남양 홍씨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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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이조 동본 이성(異祖同本異姓) 시조가 각각 다르므로 성도 다르지만 시조의 발상지가 같아서 본이 서로 같은 경우이다. 경주 이씨(慶州李氏)와 경주 손씨(孫氏), 청주 이씨와 청주 한씨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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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이조 이본 동성(異祖異本同姓) 시조가 다르므로 본도 다르나 성이 같은 경우다. 파평 윤씨와 해평 윤씨(海平尹氏), 안동 장씨와 덕수 장씨, 광주 이씨(光州李氏)와 연안 이씨등이 그러하다. 이족이라면 성과 본관을 다르게 쓰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한 지방에 여러 성씨가 연고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
성씨의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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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발생근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거니와 전해지는 자료도 많은 부분 소실(燒失)되어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중국 성씨 제도의 영향으로 고조선시대부터 왕족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부족 국가시대가 도래하면서 집단의 지배자가 생겨나게 되고 다른 부족과 구별 하기 위하여 호칭의 형태로 성이 생겨나고 그 세력이 점차 커짐에 따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성은 초기에는 왕실, 귀족에 국한되어 사용되다가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이나 귀화인에게 사성(賜姓)을 하면서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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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로 성씨 현황을 살펴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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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구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성을 사용했다. 삼국사기 제 13권 고구려 본기에 시조(始祖)인 주몽은 고(高)씨를 사용했고, 건국공신인 재사에게는 극(克)씨를, 무골에게는 중실(仲室)씨를, 묵거에게는 산실(山室)씨를 사성한 기록이 있다. 그 외에 일반적으로 사용한 것으론 을(乙), 예(禮), 송(松), 마(馬), 동(童), 예(芮), 목(穆), 연(淵), 우(于), 주(周), 손(孫), 을지(乙支), 명임(明臨)이 있다. 그리고, 왕이 신하에게 사성(賜姓)한 경우 중 중국의 사신으로 가 활약하여 얻은 경우가 있는데 고구려 때에도 장수왕은 중국으로 보낸 사신들에게 고익(高翼), 마루(馬累), 손수구(孫材仇), 동등(童謄)의 성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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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 백제의 시조(始祖)인 온조는 부여(扶餘)씨로 되어 있으나 이는 문헌상으로 성을 사용한 4세기 근초고왕때의 기록이다. 이 외에 일반적으로 사(沙), 연(燕), 협(?), 국(國), 묘(苗), 목(木), 흘(屹), 왕(王), 진(眞), 해(解), 직(直), 장(張), 사마(司馬), 흑처(黑處)씨 등이 있다. 이는 자연 발생적이라기 보단 왕이 지방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과정 중 회유책으로 사성(賜姓)이 이용 되었다고 사려된다. 성이 문헌상 정비되고 출현한 것이 백제의 중앙집권을 이루던 전성기때임은 이를 증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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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라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삼국시대 성은 왕과 소수의 귀족 계급과 중국을 왕래한 사신들이 사용하였다. 신라도 역시 그러했는데 특히 김인문, 최치원, 장보고, 김지량, 박계업등은 유명하다.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는 박(朴)씨, 경주 김씨의 시조(始祖)인 김알지(金閼智)는 김(金)씨로 되고, 그 외 경주의 여섯 마을의 촌장들에게 회유의 목적으로 사성(賜姓)하였다.
<1>양부-이(李) <2>사량부-최(崔) <3>점량부-손(孫) <4>한지부-배(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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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야 시조(始祖)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은 6개의 금란(金卵)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고 해서 왕으로 추대하고 김(金)씨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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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려 족보의 발생시기와 맞물려 성으로써 사람의 혈통을 구분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더구나 고려 초기 문종왕 9년(1055) "성이 있는 자에게만 과거시험에 응시 할 자격을 준다."하여 지배층을 형성하는 요건으로 성의 역할도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 성씨 개념이 확립된 것은 고려 초 중기로 보아야 한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법적 제도적 여건이 零받침되고, 일반 사람들에게 뿌리 의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으로 국가 구성원의 힘이 가문 중심의 벌족 세력 단일로 개편되고, 문벌의 세력 구조가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는 권력구조에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왕건은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인 홍술(弘述)에게 홍(洪)씨를 백옥(白玉)에게 배(裵)씨를 삼능(三能)에게는 신(申)씨를 복사귀(卜沙貴)에게는 복(卜)씨를 사성(賜姓)하여, 각각 홍 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兼)으로 개명(改名)하였다. 재밌는 사실로는 충주(忠州) 어(魚)씨의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원래 지(池)씨 였는데 태어 날 때부터 체모(體貌)가 기이하고 겨드랑이 밑에 비늘 셋이 있어 고려 태조가 친히 불러 보고나서 어(魚)씨로 사성(賜姓)하였다고 한다.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보면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후 목천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태조의 미움을 사서, 각기 우(牛), 마(馬), 상(象), 장(獐)씨 등의 짐승이름으로 사성하였는데, 후에 우(于), 상(尙), 돈(豚), 장(張)씨 등으로 변성(變姓)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성이 생긴 원인 중 하나인 임금이 노(奴)하여 신경질적으로 지어준 성의 경우이다. 이렇게 고려 시대는 과거 제도의 영향과 족보의 생성으로 일반 서민에게도 성이 확대되는 중요한 시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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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 조선 시대는 천민까지도 성을 갖게 된 시기이다. 이유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군인을 징발하기 위해 병역 의무가 시행되면서 호적법에 따라 시행된 것이다. 이로서 우리 나라는 모든 국민이 바뀌지 않는 자신이 고유한 성을 갖게 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65가지 성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 영조때 도곡 이의현이 지은 도곡총설에는 298가지 성이, 정조 때 양엽기에는 486성이, 영조 46년에 편찬되어 정조 6년에 증보를 시작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조선초에 무려 4296성이었던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는 289성으로 줄어들었으며 다시 496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성씨에 관한 문헌으로는 동국여지승람과 양성지의 해동성씨록, 조중운의 씨족원류, 정시술의 제성보등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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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근대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전 국민이 성을 호적에 등록하게 되었다. 1930년 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250성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