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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해의 그물에 갇혀, 법망경(브라흐마잘라경, D1)에서 본 62가지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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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견을 표로 만들어 보고자
한 가지 정리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62가지 견해에 대한 것이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 나오는 62견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62견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진 것이 없을까 해서 인터넷검색을 해 보았지만 찾지 못하였다. 외국사이트에서도 역시 발견할 수 없었다. 디가니까야를 새로 구입하였기 때문에 표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두 번역물과 빠알리원전과 영역을 참고하였다.
참고자료
1) 빠알리 원전: Brahmajālasuttaṃ
2) 전재성박사 번역: 디가니까야 M1, 하느님의 그물의 경
3) 각묵스님 번역: 디가니까야 M1, 범망경(梵網經)
4) 영역: 빅쿠 보디 번역, Brahmajāla Sutta: The All-embracing Net of Views
브라흐마잘라경에 실려 있는 62가지 견해(ditthi)는 부처님 당시 유행하였다. 지배종교인 브라만교의 영원주의를 포함하여 육사외도의 여러 사상들이 총 망라 된 62견은 부처님의 연기법적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의 ‘견해(ditthi)’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견해를 ‘사견’이라 하는데, 이는 한자어로 ‘사견(私見)’이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사견(邪見)’이라는 의미도 있다. 62견은 한마디로 ‘삿된견해’라는 것이다.
왜 62견이 삿된견해일까?
경에서는 62견에 대하여 ‘망설(adhivuttipadāni)’로 표현 되었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취하지 않는 사견의 언어라는 뜻이다. 왜 62견이 삿된견해일까? 이에 대하여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과거와 관련된 견해(Pubbantakappika)
1. 영원주의(Sassatavāda)-네 가지
내 용
공통이유
견해 유형
자아와 세계가 영원하다.
전생의 여러 가지 삶에 대한 기억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한다.
1)수십만번 태어난자
2)십우주적 주기로 태어난 자
3)사십우주적 주기로 태어난 자
4)추론자이자 탐구자
네 가지 유형의 공통주장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yathā sassato attā ca loko ca vañjho kūṭaṭṭho esikaṭṭhāyiṭṭhito; te ca sattā sandhāvanti saṃsaranti cavanti upapajjanti, atthitveva sassatisama’’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어, 뭇삶들은 유전하고 윤회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 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
초불
(각묵스님)
자아와 세상은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
영역
(빅쿠 보디)
the self and the world are eternal, barren, steadfast as a mountain peak, standing firm like a pillar. And though these beings roam and wander (through the round of existence), pass away and re-arise, yet the self and the world remain the same just like eternity itself.
62가지 사견중에 과거와 관련된 것은 18가지이다. 그 중에 영원주의가 있다. 영원주의는 한마디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 (sassataṃ attānañca lokañca paññapenti)”는 견해를 말한다. 영원주의자들은 왜 이런 견해를 갖게 되었을까. 경에서는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 중 세 가지는 과거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들에 대한 것이다.
선정삼매 수행을 하여 전생을 보는 자가 있는데, 한 생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십생, 아니 수십만생의 전생을 보는 자이다. 심지어 10우주 주기, 40우주 주기의 전생을 보는 자도 있다. 1 우주 주기는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기간을 말한다. 1 우주기는 1겁 또는 1대겁이라 하는데, 1요자나(약 14km) 되는 정방형 바위를 백 년에 한번씩 비단으로 닿게 하여 마멸되는 시간을 말한다.
40 우주 주기라면 우주가 40번 생겨났다가 깨진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한량없이 윤회 하고 또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2. 부분적 영원주의-부분적 비영원주의(Ekaccasassatavāda)- 네 가지
내 용
공통이유
유 형
자아와 세계가 부분적으로 영원하고 부분적으로는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1)천상에서 수명과 공덕이 다하여 인간으로 태어난 한 어느 뭇삶
2)유희로 퇴락을 겪는자 (킷다빠도씨까, Kiddāpadosika)
-화락천과 타화자재천의 신들
3)마음의 퇴락을 겪는자(마노빠도씨까, Manopadosika)
-사대왕천의 신들
4)추론자이자 탐구자
-추론으로 두드리고 탐구로 뒤쫒아서 스스로 이해하는 자
부분적 영원주의자는 전생을 한 번 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먼저 태어난 자를 창조주로 여기고, 자신은 창조주에 의하여 창조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1) 천상에서 수명과 공덕이 다하여 인간으로 태어난 한 어느 뭇삶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yo kho so bhavaṃ brahmā mahābrahmā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ṃ, yena mayaṃ bhotā brahmunā nimmitā, so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ati. Ye pana mayaṃ ahumhā tena bhotā brahmunānimmitā, te mayaṃ aniccā addhuvā appāyukā cavanadhammā itthattaṃāgatā.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우리를 창조한 이 존귀한 하느님은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여 전변하는 것이 없이 영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 온 것이다.’
초불
(각묵스님)
‘이 존귀하신 범천이야말로 우리들의 창조자이시다. 그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기 마련이며,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그렇게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 존자 범천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런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으며, 수명이 짧고 죽기 마련이며, 이곳에 태어났다.’
영역
(빅쿠 보디)
He is permanent, stable, eternal, not subject to change, and he will remain the same just like eternity itself. But we, who have been created by him and have come to this world, are impermanent, unstable, short-lived, doomed to perish.
62견 중에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
부분적 영원주의자는 네 가지가 있다. 가장 첫 번째로 설명되는 창조이야기를 보면 유일신교의 창조론을 보는 것 같다. 62견 중에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우주적 스케일로 소설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언제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세계는 괴멸되는 때가 있다. 세계가 괴멸될 때에 대부분의 뭇삶들은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세계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고 스스로 빛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영광스럽게 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대부분의 뭇삶은 ‘작은 영광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소정천, 색계 3선천) 이상의 높은 하느님세계(범천)와 비물질계(무색계)에 태어나 남아 있던 뭇삶(중생)을 말한다. 그런데 세계가 괴멸될 때, 즉 우주가 소멸기(괴겁)에 이르면 대부분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세계’는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난다고 한다.
광음천은 색계 2선천을 말한다. 우주가 소멸기에 이름에 따라 존재들이 수명이 더 아래인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 광음천은 어떤 천상일까.
하느님(브라흐마)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광음천에 사는 존재들은 선정의 정신으로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에 ‘정신으로 만들어진 자’라 하고, 기쁨이라는 음식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쁨을 먹는 자’라 하고, 자신의 광명이 있으므로 ‘스스로 빛나는 자’라 하고, 허공을 나는 자이므로 ‘공중을 나는 자’라 한다. 경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언제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세계가 생성되는 때가 있다. 세계가 생성될 때에 텅빈 하느님의 궁전이 나타난다. 그 때 어떤 뭇삶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에서 죽어서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고 스스로 빛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영광스럽게 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우주가 괴멸기를 지나 우주혼돈기를 거쳐 우주생성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텅빈 하느님 궁전은 원래 태어난 존재가 없기 때문이라 한다. 우주가 완전히 파괴 되고 난 다음 새로 우주가 생겼을 때 텅빈 공간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 텅빈 공간이 다름 아닌 색계 초선천이다. 색계 2선천인 광음천에서 8대겁 살다가 수명과 공덕이 다하여 아래 세상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곳이 새로 생겨난 세계로서 수명이 1대겁 이하인 색계 초선천이라 한다.
색계 초선천까지 주기적으로 파괴된다
색계 초선천 중에 가장 높은 곳이 대범천으로서 수명이 1대겁이다. 그런데 색계 초선천까지는 주기적으로 파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범천 사함빠띠가 부처님에게 청원할 때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이와 같이 성찰하셔서 진리를 진리를 설하지 않고 그냥 있기로 마음을 정하신다면 세계는 멸망한다. 참으로 세계는 파멸한다.(S6:1)”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주가 소멸기에 이르면 색계 초선천인 대범천 까지 모조리 파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함빠띠는 범천(하느님) 중에서 부처님에게 우호적이었고, 또 불사의 가르침을 받아 세상이 파괴 되기 전에 윤회를 끝내려 하였기 때문에 법을 펼칠 것을 청원 했다고 볼 수 있다.
천상도표를 보면
이렇게 주기적으로 색계초선천 까지 파괴 되는데, 우주생성기에 이르자 다시 색계 초선천이 생겨난 것이다. 마치 무주공산과도 같은 ‘텅빈 하느님 궁전(색계초선천)’에 최초로 한 존재가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 대한 천상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색계천상에서 우주의 주기와의 관계
색 계
생성
명 칭
수 명
비 고
삼선(三禪)
화생
(20) 변정천(遍淨天)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64 대겁
(19) 무량정천(無量淨天)
한량없는 영광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32 대겁
(18) 소정천(小淨天)
작은 영광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16 대겁
이선(二禪)
화생
(17) 광음천(光音天)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8 대겁
우주가 소멸기(괴겁)에 이르면 대부분 광음천에 태어남
(16) 무량광천(無量光天)
한량없이 빛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4 대겁
(15) 소광천(小光天)
작게 빛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2 대겁
초선 (初禪)
화생
(14) 대범천(大梵天)
위대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1 아승지겁
-색계초선천까지 우주가 주기적으로 파괴됨
-우주가 생성기(성겁)에 이르면 텅빈 하느님의 궁전이 생겨남
(13) 범보천(梵輔天)
하느님을 보좌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1/2 아승지겁
(12) 범중천(梵衆天)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 세계
1/3 아승지겁
표를 보면 색계 초선천 즉, 대범천까지 우주가 성주괴공함에 따라 주기적으로 파괴 됨을 알 수 있다.
우주의 성주괴공
참고로 우주의 성주괴공에 대한 표는 다음과 같다.
우주의 성주괴공과 기간
우주 성주괴공
기간
우주소멸기(壞 刧)
1 아승지겁
1대겁 (또는 겁)
우주혼돈기(空 刧)
1 아승지겁
우주생성기(成 刧)
1 아승지겁
우주유지기(住 刧)
1 아승지겁
아승지겁을 무량겁이라고도 말한다. 우주를 성주괴공 4주기로 나누면 각 주기당 1아승지겁이므로 4아승지겁이 된다. 4아승지겁이 1대겁(또는 겁)이기 때문에 1겁 이하의 수명을 갖는 색계 초선천에 사는 뭇삶들은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파괴를 면할 수 없다. 이러한 주기는 만드는 자도 없고 만들게 하는 자도 없다. 우리의 마음이 조건에 따라 생주이멸하고, 삶이 생로병사 하듯이, 우주 역시 조건에 따라 성주괴공하는 것으로 본다.
하느님(브라흐마)의 고독
이렇게 최초로 텅빈 공간인 색계 초선천에 화생한 최초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 홀로 살았기 때문에 ‘오 다른 뭇삶들이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불만을 갖고 동요를 일으킨다. 그러자 다른 뭇삶들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에서 죽어서 그 뭇삶의 권속으로서의 하느님 궁전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고 스스로 빛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영광스럽게 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수명과 공덕이 다하여 아래 천상에서 홀로 태어난 존재의 고독을 엿볼 수 있다. 너무 오랫동안 홀로 살다보니 심심하고 무료하고 권태로웠을까 “오, 다른 뭇삶들이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고대한다.
그러다 마침내 새로운 존재가 화생하게 된다. 수명이 8대겁에 달하는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색계 2선천의 광음천)에서 수명과 공덕이 다한 자가 죽어서 수명이 1대겁도 되지 않고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 아래 세상인 초선천에 태어난 것이다.
먼저 태어난 자가 창조주가 되고 나중에 태어난 자가 피조물이 되고
그런데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자를 발견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 먼저 태어난 한 뭇삶이 있었는데, 그는 이와 같이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예전에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바랬는데, 그러한 내 마음의 서원 때문에 이 뭇삶들이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나중에 태어난 한 뭇삶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와 같이 ‘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한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먼저 태어난 자가 창조주가 되고 나중에 태어난 자가 피조물이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단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하느님, 창조주, 조물주 등 각종 수식어가 붙는다. 마치 유일신교에서의 창조 설화를 보는 것 같다.
부분적영원주의와 부분적비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가 생겨나는 이유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착각을 하게 되었을까. 경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서 뭇삶이 먼저 태어나면, 더 수명이 길고 더 용모가 아름답고 더 힘이 세다. 그러나 뭇삶이 나중에 태어나면, 더 수명이 짧고 더 용모가 추하고 더 힘이 약하다.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어떤 뭇삶은 그 무리에서 죽어서 이 세상에 오는 경우가 있다. 이 세상에 와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정근하고 수행하고 방일을 여의고 올바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서 마음의 삼매를 경험하여 바로 전생의 삶의 형태를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를 창조한 이 존귀한 하느님은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여 전변하는 것이 없이 영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에 온 것이다.’라고 말한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색계 초선천에서 살던 자가 인간으로 태어난 경우를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 났지만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한다. 물론 선정수행을 말한다. 사선정단계에서 전생을 볼 수 있는 신통이 생기는데, 다만 바로 이전 생 밖에 보지 못한다. 이전 생이라는 것이 자신의 창조주라 믿고 있었던 먼저 태어난 자에 대하여 영원한 존재라 착각한다. 그 자는 아직까지 그곳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경우 죽어서 인간 세상에 태어 났으므로 무상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분적영원주의와 부분적비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가 생겨나게 된다.
자신의 전생을 잘 모르기 때문에
경에 표현된 이야기를 보면 마치 유일신교의 창조설화를 보는 듯하다. 영원히 변치 않는 존재의 근원인 창조주가 있고, 그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고, 피조물은 창조주를 아버지로서 경배하는 것이 유일신교의 신관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단지 수명과 공덕이 다해서 아래 세상에 먼저 왔을 뿐인데, 먼저 온자나 나중에 온자들이나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먼저 온자나 나중에 온자들이나 모두 자신의 전생을 잘 모르기 때문에 삿된 견해가 발생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삿된 견해를 깨는 이야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바까브라흐마경(S6:4)이 그것이다.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브라흐마) 바까(baka)
바까 브라흐마는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으로 묘사 되어 있다. 마치 브라흐마잘라경에 실려 있는 이야기의 모델이 되는 듯한 바까 브라흐마는 너무 오래 산 나머지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자신이 영원한 존재인 것으로 착각한다. 이를 부처님이 바로 잡아 주었다.
주석에 따르면, 바까 브라흐마는 수명이 500대겁인 광과천(색계 4선천)에 태어 났다. 그 다음에 태어난 곳이 더 아래 수명의 세상인 변정천(색계 3선천)인데 수명이 60대겁이다. 다음으로 태어난 곳이 ‘빛이 흐르는 하느님의 세계’라는 광음천(색계 2선천)인데 수명이 8대겁이다. 이어서 태어난 곳이 텅 빈 하느님의 궁전이라는 색계 초선천인 대범천이다. 대범천의 경우 수명이 1대겁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아래 세상으로 윤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명이 고작 1대겁인 세계에 살면서 창조주 행세를 하는 것이다. 또 이렇게 윤회 하여 1대겁의 세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래 살았는지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리고 자신은 영원한 존재라고 착각하며 영원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까 하느님(브라흐마)의 망상을 깨어 주는 것이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바까에게 바까의 전생 이야기를 들려 줌으로서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든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이라 여기는 전도된 인식을 깨우쳐 준다.
2) 유희로 퇴락을 겪는자 (킷다빠도씨까, Kiddāpadosika)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ye kho te bhonto devā na khiḍḍāpadosikā, te na ativelaṃ hassakhiḍḍāratidhammasamāpannā viharanti. Tesaṃ na ativelaṃ hassakhiḍḍāratidhammasamāpannānaṃ viharataṃ sati na sammussati. Satiyāasammosā te devā tamhā kāyā na cavanti; niccā dhuvā sassatā avipariṇāmadhammā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anti . Ye pana mayaṃ ahumhā khiḍḍāpadosikā, te mayaṃ ativelaṃ hassakhiḍḍāratidhammasamāpannā viharimhā. Tesaṃ no ativelaṃ hassakhiḍḍāratidhammasamāpannānaṃ viharataṃ sati sammussati. Satiyā sammosā evaṃ mayaṃ tamhā kāyā cutā aniccā addhuvā appāyukā cavanadhammā itthattaṃāgatā.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이 킷다빠도씨까가 아닌 존귀한 신들은 오랜 세월 웃고 놀고 쾌락을 즐기는데 빠져 지내지 않는다. 오랜 세월 웃고 놀고 쾌락을 즐기는데 빠져 지내지 않으므로 그들은 새김을 잃어 버리지 않는다. 새김을 잃어 버지지 않아서 그들은 그 무리에서 죽지 않으며,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여 전변하는 것이 없어서 영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킷다빠도씨까였는데, 오랜 세월 웃고 놀고 쾌락을 즐기는데 빠져 지냈다. 오랜 세월 웃고 놀고 쾌락을 즐기는데 빠져 지내면서 우리는 새김을 잃어버렸다. 새김을 잃어 버려서 우리는 그 무리에서 죽어서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 온 것이다.’
초불
(각묵스님)
유희로 타락하지 않은 그분 신들은 오랜 세월 웃고 유희하는데 빠져 지내지 않았다. 오랜 세월 웃고 유희하는데 빠져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챙김을 놓아버리지 않았다. 마음챙김을 놓아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 신들은 그 무리에서 죽지 않았고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기 마련이며,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그렇게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유희로 타락해 버려서 오랜 세월 웃고 유희하는데 빠져 지냈다. 오랜 세월 웃고 유희하는데 빠져 지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챙김을 놓아버렸다. 마음챙김을 놓아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리에서 떨어졌고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으며 수명이 짧고 죽기 마련이며 이곳에 태어났다.'
영역
(빅쿠 보디)
'Those honorable gods who are not corrupted by play do not spend an excessive time indulging in the delights of laughter and play. As a consequence they do not become forgetful, and because they do not become forgetful they do not pass away from that plane. Those gods are permanent, stable, eternal, not subject to change, and they will remain the same just like eternity itself. But we were gods corrupted by play. We spent an excessive time indulging in the delights of laughter and play, and as a consequence we became forgetful. When we became forgetful we passed away from that plane. Coming to this world, now we are impermanent, unstable, short-lived, doomed to perish.'
3) 마음의 퇴락을 겪는자(마노빠도씨까, Manopadosika)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ye kho te bhonto devā na manopadosikā, te nā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nti. Te nā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ntā aññamaññamhi cittāni nappadūsenti. Te aññamaññaṃ appaduṭṭhacittā akilantakāyā akilantacittā. Te devā tamhā kāyā na cavanti, niccā dhuvā sassatā avipariṇāmadhammā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anti. Ye pana mayaṃ ahumhā manopadosikā, te mayaṃ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imhā. Te mayaṃ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ntā aññamaññamhi cittāni padūsimhā, te mayaṃ aññamaññaṃ paduṭṭhacittā kilantakāyā kilantacittā. Evaṃ mayaṃ tamhā kāyā cutā aniccā addhuvā appāyukā cavanadhammā itthattaṃāgatā.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이 마노빠도씨까가 아닌 존귀한 신들은 오랜 세월 서로 질시 하지 않고 지낸다. 오랜 세월 질시 하지 않고 지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마음을 퇴락시키지 않고 서로 마음이 퇴락하지 않아서 몸이 피로해지지 않고 마음이 피로해지지 않는다. 몸이 피로해지지 않고 마음이 피로해지지 않아서 그들은 그 신들의 무리에서 죽지 않으며,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여 전변하는 것이 없이 영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노빠도씨까였는데, 오랜 세월 서로 질시 하며 지냈다. 오랜 세월 질시 하며 지내면서 우리는 서로 마음을 퇴락시켰다. 서로 마음이 퇴락하자 몸이 피로해지고 마음이 피로해졌다. 우리는 그 무리에서 죽어서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 온 것이다.’
초불
(각묵스님)
'마음이 타락하지 않은 그분 신들은 오랜 세월 [분노로] 서로를 응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분노로] 서로를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타락하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마음이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도 피곤하지 않고 마음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분 신들은 그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기 마련이며,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그렇게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 타락하여 오랜 세월 [분노로] 서로를 응시하였다. 그런 우리는 오랜 세월 [분노로] 서로를 응시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타락하게 하였다. 그런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타락하게 하였기 때문에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리에서 떨어졌고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으며 수명이 짧고 죽기 마련이며 이곳에 태어났다.'
영역
(빅쿠 보디)
'Those honorable gods who are not corrupted by mind do not contemplate each other with excessive envy. As a result, their minds do not become corrupted by anger towards one another, their bodies and minds do not become exhausted, and they do not pass away from that plane. Those gods are permanent, stable, not subject to change, and they will remain the same just like eternity itself. But we were gods corrupted by mind. We contemplated each other with excessive envy and as a result our minds became corrupted by anger towards one another. When our minds were corrupted by anger, our bodies and minds became exhausted and consequently, we passed away from that plane. Coming to this world, now we are impermanent, unstable, short-lived, doomed to perish.'
4) 추론자이자 탐구자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yaṃ kho idaṃ vuccati cakkhuṃ itipi sotaṃ itipi ghānaṃ itipi jivhā itipi kāyo itipi, ayaṃ attā anicco addhuvo asassato vipariṇāmadhammo. Yañca kho idaṃ vuccati cittanti vā manoti vā viññāṇanti vā ayaṃ attā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atī.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시각이라고도 하고 청각이라고도 하고 후각이라고도 하고 미각이라고도 하고 촉각이라고도 하는 그 자아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영원하며 전변하는 것이 없이 항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
초불
(각묵스님)
'눈이라 하고 귀라 하고 코라 하고 혀라 하고 몸이라 부르는 이런 자아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으며 변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마음(心)이라 하고 마노(意)라고 하고 알음알이(識)이라 부르는 이런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기 마련이며 영속 그자체인 것처럼 그렇게 존재한다.'
영역
(빅쿠 보디)
'That which is called "the eye," "the ear," "the nose," "the tongue," and "the body" — that self is impermanent, unstable, non-eternal, subject to change. But that which is called "mind" (citta) or "mentality" (mano) or "consciousness" (viññāṇa) — that self is permanent, stable, eternal, not subject to change, and it will remain the same just like eternity itself.'
추론하고 탐구하는 자들의 견해이다. 마음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으로 보고 있다. 하는 변하는 마음과 또 하나는 변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감각기관으로 느낀 마음은 수시로 변하지만, 본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선불교에서 불변하는 마음을 상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변하지 않는 마음은 무엇일까. 경에서는 ‘자아’라고 하였다. 그 자아라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심(心), 의(意), 식(識)이라 한다.
심(心), 의(意), 식(識)이란 무엇인가
한자어 심(心), 의(意), 식(識)에 대응되는 빠알리어는 찟따(citta), 마노(mano), 윈냐나(viññāṇa)이다. 이 마음에 대한 세 가지 술어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마음(心, citta)과 정신(意, mano)과 의식(識, viññāṇa)은 초기불교의 주석적 전통이나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마음’은 심리적인 측면에서의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의 정서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유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인지적인 측면의 중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음은 인도철학에서 사유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의도-충동-기분-성격-마음의 상태-인상에 대한 반응을 대변한다. 그리고 마음은 ‘심장’으로 구체화된 요소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서 ‘정신’은 우리의 이지적이고 추론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의 중심을 말하며, 우리의 의식의 지적-사유적 기능을 대변한다. 그 정신은 마음에 비해 보다 미세한 요소적 특성 즉, 보다 미세한 느낌이나 사유를 대변한다. 그리고 ‘의식’은 감각과 감각적 반응인 지각의 중심으로 순수한 알아차림을 대변한다.
(심의식에 대한 주석, 전재성박사)
일반적으로 마음이라 부르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심, 의, 식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크게 세 가지로 분류 되는 마음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성전협회와 초불의 번역어를 함께 실었다.
구 분
심(心)
의(意)
식(識)
빠알리어
citta
mano
viññāṇa
성전협회번역
마음
정신
의식
초불 번역
마음
마노
알음알이
영역(빅쿠 보디)
mind
mentality
consciousness
설명
1) 정서적, 인지적 측면의 중심을 의미
2)의도-충동-기분-성격-마음의 상태-인상에 대한 반응을 대변
1)이지적이고 추론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의 중심을 말함
2) 마음에 비해 보다 미세한 요소적 특성 즉, 보다 미세한 느낌이나 사유를 대변
감각과 감각적 반응인 지각의 중심으로 순수한 알아차림을 대변
심( citta)이 일반적으로 넓게 쓰이는 용어임에 비하여 의(mano)는 좀더 세분화 되고 구체화된 마음을 말한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마노(mano,意)에 대하여 ‘정신’으로 번역하였다. 초불에서는 빠알리 원어 그 자체로 하여 ‘마노’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식(viññāṇa)의 경우 오감으로 받아 들이는 감각적 반응에 대한 알아차림이라 한다. 이를 전재성 박사는 ‘의식’이라 번역하였고, 초불에서는 ‘알음알이’라고 번역하였다.
알음알이는 무슷뜻일까?
찟따(심)에 대한 번역어는 마음으로 동일하지만, 마노와 윈냐나에 대한 번역은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윈냐나에 대한 번역을 보면 영어로 consciousness로 되어 있다. Consciousness는 의식, 인식, 정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초불의 경우 윈냐나에 대하여 ‘알음알이’라 하였다. 알음알이는 무슷뜻일까.
알음알이에 대한 국어사전적 의미는 ‘서로 가까이 알고 지내는 사람’ 또는 ‘ 어려운 일을 잘 피하는 꾀 바른 수단’ 또는 ‘늘어나는 재주나 슬기’등으로 되어 있다. 알음알이가 마음이라는 의미의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초불에서 번역된 청정도론 해제에 따르면 알음알이에 대한 술어 설명이 있다. 알음알이는 빠알리어 윈냐나를 우리말로 풀어서 번역한 것이라 한다.
빠알리 윈냐나는 vi(분리해서)+√jñā(알다)에서 파생된 명사라 한다. 윈냐는 개념작용(산냐)이 생기기 이전의 단계로 매찰나 대상을 접하는 순간, 순간순간 생기는 현상을 ‘분별해서 안다’는 뜻이다. 따라서 분별해서 안다는 뜻으로 알음알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알음알이라는 말은 선가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절에 가면 일주문에 ‘入此門來莫存知解(입차문래막존지해) 無解空器大道成滿(무해공기대도성만)’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해석하면 “이 문을 들어오거든 알음알이를 피우지 말라. 알음알이 없는 빈 그릇이 큰 도를 이루리라.”라는 뜻이다. ‘아는체 하지 말라’또는 ‘분별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처럼 알음알이는 선가에서 익숙한 용어이다.
알음알이 용례
하지만 알음알이를 윈냐나의 번역어로 사용하였을 때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알음알이가 ‘분별하여 안다’는 뜻의 윈냐나의 번역어라고 하지만 마음을 나타내기에는 동떨어진 듯하다. 초기불교에서 심의식은 때에 따라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하였는데, ‘알음알이’라는 술어가 과연 ‘마음’이라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에 대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D16)
2) 눈의 알음알이는 … 귀의 알음알이는 … 코의 알음알이는 … 혀의 알음알이는 … 몸의 알음알이는 …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D22)
(초불번역서에서)
알음알이 술어가 들어간 경의 문구이다. 첫번째 문장에서 ‘무한한 알음알이[識]’이라 하였는데, 대괄호치기로 한자어 [識]을 삽입하여 알음알이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였다. 알음알이라는 말이 마음과 같은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쉽게 다가 오지 않기 때문에 취한 조치라 본다.
두번째 문장에서 ‘마노의 알음알이’라 하였는데 이는 술어에 대한 설명을 별도로 보지 않으면 이해 하기 힘들다. 또 사전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알음알이가 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전재성박사는 ‘마노윈냐나(manoviññāṇa)’에 대하여 ‘정신의식’으로 번역하였다.
3. 유한-무한론(Antānantavāda)- 네 가지
내 용
공통이유
유 형
세계가 유한하거나 무한하다고 주장한다.
마음의 삼매를 경험하여 자각한다.(1-3번유형)
1)세계가 유한하다고 주장하는 자
2)세계가 무한하다고 주장하는 자
3)세계가 유한하거나 무한하다고 주장하는 자
4)세계가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추론자이자 탐구자
1) 세계가 유한하다고 주장하는 자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antavā ayaṃ loko parivaṭumo. Taṃ kissa hetu? Ahañhi ātappamanvāya padhānamanvāya anuyogamanvāya appamādamanvāya sammāmanasikāramanvāya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āmi, yathāsamāhite citte antasaññī lokasmiṃ viharāmi. Imināmahaṃ etaṃ jānām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이 세계는 유한하고 둘레를 갖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정근하고 수행하고 방일을 여의고 올바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서 마음의 삼매를 경험하여 세계에 관하여 유한하다고 자각하기 때문이다.’
초불
(각묵스님)
'이 세상은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마음의 삼매를 얻었다. 마음이 삼매에 들어 유한하다는 인식을 가져 세상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은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다라고 안다.'
영역
(빅쿠 보디)
'The world is finite and bounded. What is the reason? Because I attain to such concentration of mind that I abide perceiving the world as finite. For that reason I know this: the world is finite and bounded.'
2) 세계가 무한하다고 주장하는 자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antavā ayaṃ loko parivaṭumo’’ti, tesaṃ musā. Ananto ayaṃ loko apariyanto. Taṃ kissa hetu? Ahañhi ātappamanvāya padhānamanvāya anuyogamanvāya appamādamanvāya sammāmanasikāramanvāya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āmi , yathāsamāhite citte anantasaññī lokasmiṃ viharāmi. Imināmahaṃ etaṃ jānām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이 세계는 무한하고 한계가 없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 이 세계는 유한하고 둘레를 갖는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이 세계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정근하고 수행하고 방일을 여의고 올바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서 마음의 삼매를 경험하여 세계에 관하여 무한하다고 지각을 하기 때문이다.’
초불
(각묵스님)
‘이 세상은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은 거짓이다. 이 세상은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나는 마음이 그 삼매에 들어 무한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세상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은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았다'
영역
(빅쿠 보디)
'The world is infinite and boundless. Those recluses and brahmins who declare the world to be finite and bounded speak falsely. The world is infinite and boundless. What is the reason? Because I attain to such concentration of mind that I abide perceiving the world as infinite. For this reason I know this: the world is infinite and boundless.'
3) 세계가 유한하거나 무한하다고 주장하는 자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antavā ayaṃ loko parivaṭumo’’ti, tesaṃ musā. Ananto ayaṃ loko apariyanto. Taṃ kissa hetu? Ahañhi ātappamanvāya padhānamanvāya anuyogamanvāya appamādamanvāya sammāmanasikāramanvāya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āmi , yathāsamāhite citte anantasaññī lokasmiṃ viharāmi. Imināmahaṃ etaṃ jānām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이 세계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 이 세계는 유한하고 둘레를 갖는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이 세계는 무한하고 한계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거짓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정근하고 수행하고 방일을 여의고 올바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서 마음의 삼매를 경험하여 세계에 관하여 위아래로 유한하다고 자각하고 옆으로 무한하다고 지각을 하기 때문이다.’
초불
(각묵스님)
'이 세상은 무한하기도 하고 유한하기도 하다. 이 세상은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은 거짓이다. 이 세상은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역시 거짓이다. 이 세상은 무한하기도 하고 유한하기도 하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나는 마음이 그 삼매에 들어 위아래로는 유한하고 옆으로는 무한하다는 인식을 가져 세상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은 무한하기도 하고 유한하기도 하다라고 안다.'
영역
(빅쿠 보디)
'The world is both finite and infinite. Those recluses and brahmins who declare the world to be finite and bounded speak falsely; and those recluses and brahmins who declare the world to be infinite and boundless also speak falsely. The world is both finite and infinite. For what reason? Because I attain to such concentration of mind that I abide perceiving the world as finite in the upward and downward directions, but as infinite across. For this reason I know this: the world is both finite and infinite.'
4) 세계가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추론자이자 탐구자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antavā ayaṃ loko parivaṭumo’’ti, tesaṃ musā. Yepi te samaṇabrāhmaṇāevamāhaṃsu – ‘‘ananto ayaṃ loko apariyanto’’ti, tesampi musā. Yepi te samaṇabrāhmaṇā evamāhaṃsu – ‘‘antavā ca ayaṃ loko ananto cā’’ti, tesampi musā. Nevāyaṃ loko antavā, na panānanto’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이 세계는 유한한것도 아니고 무한한것도 아니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 이 세계는 유한하고 둘레를 갖는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이 세계는 무한하고 한계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거짓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이 세계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거짓이다. 이 세계는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초불
(각묵스님)
'이 세상은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은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은 거짓이다. 이 세상은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역시 거짓이다. 이 세상은 무한하기도 하고 유한하기도 하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역시 거짓이다. 이 세상은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영역
(빅쿠 보디)
'The world is neither finite nor infinite. Those recluses and brahmins who declare the world to be finite and bounded, those who declare it to be infinite and boundless, and those who declare it to be both finite and infinite — all these speak falsely. The world is neither finite nor infinite.'
4. 회의주의(Amarāvikkhepavāda)- 네 가지
내 용
공통점
유 형
이러저러한 것에 관하여 질문받으면 네 가지 근거를 통해서 말의 꼬투리를 잡아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분명히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1) 궤변유형 1
2) 궤변유형 2
3) 궤변유형 3
4) 궤변유형 4
1) 궤변유형1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idaṃ 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idaṃ a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Tassa evaṃ hoti – ‘ahaṃ kho ‘‘idaṃ 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mi, ‘‘idaṃ a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mi. Ahañce kho pana ‘‘idaṃkusala’’nti yathābhūtaṃ appajānanto, ‘‘idaṃ akusala’’nti yathābhūtaṃ appajānanto, ‘idaṃ kusala’nti vā byākareyyaṃ, ‘idaṃ akusala’nti vā byākareyyaṃ, taṃ mamassa musā. Yaṃ mamassa musā, so mamassa vighāto. Yo mamassa vighāto so mamassa antarāyo’ti. Iti so musāvādabhayā musāvādaparijegucchā nevidaṃ kusalanti byākaroti, na panidaṃ akusalanti byākaroti, tattha tattha pañhaṃ puṭṭho samāno vācāvikkhepaṃāpajjati amarāvikkhepaṃ – ‘evantipi me no; tathātipi me no; aññathātipi me no; notipi me no; no notipi me no’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나는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분명히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만약 내가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거나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면, 그것은 나에게 거짓이 될 것이다. 나에게 거짓인 것은 나에게 고뇌가 될 것이고 나에게 고뇌가 되는 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짓을 말하는 것을 혐오하여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지 못하고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것에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이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아닌 것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초불
(각묵스님)
'나는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만일 내가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면서도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설명하거나,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설명한다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것이고, 곤혹스러운 것은 나에게 장애가 된다.'라고.
이처럼 그는 거짓말을 두려워하고 거짓말을 혐오하여, '이것은 유익함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고 '이것은 해로움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얼버무리거나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아서,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는다.'
영역
(빅쿠 보디)
'I do not understand as it really is what is wholesome and what is unwholesome. If, without understanding, I were to declare something to be wholesome or unwholesome, my declaration might be false. If my declaration should be false, that would distress me, and that distress would be an obstacle for me.' Therefore, out of fear and loathing of making a false statement, he does not declare anything to be wholesome or unwholesome. But when he is questioned about this or that point, he resorts to evasive statements and to endless equivocation: "I do not take it thus, nor do I take it in that way, nor do I take it in some other way. I do not say that it is not, nor do I say that it is neither this nor that.'
2) 궤변유형2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idaṃ 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idaṃ a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Tassa evaṃ hoti – ‘ahaṃ kho ‘‘idaṃ 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mi, ‘‘idaṃ a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mi. Ahañce kho pana ‘‘idaṃ kusala’’nti yathābhūtaṃ appajānanto, ‘‘idaṃ akusala’’nti yathābhūtaṃ appajānanto, ‘‘idaṃ kusala’’nti vā byākareyyaṃ, ‘‘idaṃ akusala’nti vā byākareyyaṃ, tattha me assa chando vā rāgo vā doso vā paṭigho vā. Yattha me assa chando vā rāgo vā doso vā paṭigho vā, taṃ mamassa upādānaṃ. Yaṃ mamassa upādānaṃ, so mamassa vighāto. Yo mamassa vighāto, so mamassa antarāyo’ti. Itiso upādānabhayā upādānaparijegucchā nevidaṃ kusalanti byākaroti, na panidaṃ akusalanti byākaroti, tattha tattha pañhaṃ puṭṭho samāno vācāvikkhepaṃāpajjati amarāvikkhepaṃ – ‘evantipi me no; tathātipi me no; aññathātipi me no; notipi me no; no notipi me no’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나는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분명히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만약 내가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거나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면, 그것은 나에게 욕망이나 탐욕이나 성냄이나 분노를 일으킬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집착이 될 것이고 나에게 집착이 되는 것은 고뇌가 될 것이고 나에게 고뇌가 되는 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는 집착을 두려워하고 집착을 혐오하여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지 못하고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것에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이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아닌 것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초불
(각묵스님)
'이것은 유익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만일 내가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면서도,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설명하거나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설명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열의나 욕망이나 성냄이나 아니면 적개심을 가져올 것이다. 나에게 열의나 욕망이나 성냄이나 적개심을 가져오는 것은 나에게 취착이 될 것이요, 나에게 취착이 되는 것은 곤혹스러운 것이고, 곤혹스러운 것은 나에게 장애가 된다.'라고.
이처럼 그는 취착을 두려워하고 취착을 혐오하여, '이것은 유익함이다.'라고설명하지 않고, '이것은 해로움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얼버무리거나,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아서,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는다.'
영역
(빅쿠 보디)
'I do not understand as it really is what is wholesome and what is unwholesome. If, without understanding, I were to declare something to be wholesome or unwholesome, desire and lust or hatred and aversion might arise in me. Should desire and lust or hated and aversion arise in me, that would be clinging on my part. Such clinging would distress me, and that distress would be an obstacle for me.' Therefore, out of fear and loathing of clinging, he does not declare anything to be wholesome or unwholesome. But when questioned about this or that point he resorts to evasive statements and to endless equivocation: 'I do not take it thus, nor do I take it in that way, nor do I take it in some other way. I do not say that it is not, nor do I say that it is neither this nor that.'
3) 궤변유형3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idaṃ 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idaṃ a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Tassa evaṃ hoti – ‘ahaṃ kho ‘‘idaṃ 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mi, ‘‘idaṃ akusal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mi. Ahañce kho pana ‘‘idaṃ kusala’’nti yathābhūtaṃ appajānanto ‘‘idaṃ akusala’’nti yathābhūtaṃ appajānanto ‘‘idaṃ kusala’’nti vā byākareyyaṃ, ‘‘idaṃ akusala’’nti vā byākareyyaṃ. Santi hi kho samaṇabrāhmaṇā paṇḍitā nipuṇākataparappavādā vālavedhirūpā, te bhindantā maññe caranti paññāgatena diṭṭhigatāni, te maṃ tattha samanuyuñjeyyuṃ samanugāheyyuṃ samanubhāseyyuṃ. Ye maṃ tattha samanuyuñjeyyuṃ samanugāheyyuṃ samanubhāseyyuṃ, tesāhaṃ na sampāyeyyaṃ. Yesāhaṃ na sampāyeyyaṃ, so mamassa vighāto. Yo mamassa vighāto, so mamassa antarāyo’ti. Iti so anuyogabhayā anuyogaparijegucchā nevidaṃ kusalanti byākaroti, na panidaṃ akusalanti byākaroti, tattha tattha pañhaṃ puṭṭho samāno vācāvikkhepaṃāpajjati amarāvikkhepaṃ – ‘evantipi me no; tathātipi me no; aññathātipi me no; notipi me no; no notipi me no’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나는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분명히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만약 내가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거나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면, 생각건대 박식하고 총명하고 논쟁에 밝고 털끝을 맞추어 쪼갤 정도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지혜로서 사견을 척파하면서 돌아다니는데, 그들이 그것에 관하여 반대로 힐문하고 이유를 묻고 질책할 것이다. 그들이 그것에 관하여 반대로 힐문하고 이유를 묻고 질책하면, 나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못할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고뇌가 될 것이고 나에게 고뇌가 되는 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힐문을 두려워하고 힐문을 혐오하여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지 못하고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라고 해명하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것에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이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닌 것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초불
(각묵스님)
'나는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만일 내가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면서도,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설명하거나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설명한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학식있는 사문·바라문들은 영리하고, 다른 자들의 교리에 능통하고, 머리털을 쪼갤 수 있는 능숙한 궁수처럼 [요점을 지적하고], 예리한 통찰지로써 다른 견해들을 단번에 잘라버린다고 생각괴는데, 이 [유익함과 해로움에 대해] 그들은 나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이유를 물어서, [내가 말한 이유 가운데서 허점을 발견하여] 나를 논파해 버릴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이유를 물어 나를 논파하면, 나는 그들에게 대꾸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곤혹스러운 것이고, 곤혹스러운 것은 나에게 장애가 된다.‘라고.
이처럼 그는 계속된 질문을 두려워하고 계속된 질문을 혐오하여, '이것은 유익함이다.'라고 설명하지 않고, '이것은 해로움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얼버무리거나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아서,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는다.'
영역
(빅쿠 보디)
'I do not understand as it really is what is wholesome and what is unwholesome. Now, there are recluses and brahmins who are wise, clever, experienced in controversy, who wander about demolishing the views of others with their wisdom. If, without understanding, I were to declare something to be wholesome or unwholesome, they might cross-examine me about my views, press me for reasons and refute my statements. If they should do so, I might not be able to reply. If I could not reply, that would distress me, and that distress would be an obstacle for me.' Therefore, out of fear and loathing of being cross-examined, he does not declare anything to be wholesome or unwholesome. But, when questioned about this or that point, he resorts to evasive statements and to endless equivocation: 'I do not take it thus, nor do I take it in that way, nor do I take it in some other way. I do not say that it is not, nor do I say that it is neither this nor that.'
4) 궤변유형4-열여섯 가지지 질문에 대하여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atthi paro loko’ti iti ce maṃ pucchasi, ‘atthi paro loko’ti iti ce me assa, ‘atthi paro loko’ti iti te naṃ byākareyyaṃ, ‘evantipi me no, tathātipi me no, aññathātipi me no, notipi me no, no notipi me no’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만약 그대가 나에게 ‘저 세상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내가 ‘저 세상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저 세상은 있다.’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닌 것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초불
(각묵스님)
‘만일 그대가 '저 세상이 있소?'라고 내게 묻고, 내가 '저 세상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저 세상은 있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는다.
영역
(빅쿠 보디)
'If you ask me whether there is a world beyond — if I thought there is another world, I would declare that there is. But I do not take it thus, nor do I take it in that way, nor do I take it in some other way. I do not say that it is not, nor do I say that is neither this nor that.'
열여섯 가지 질문유형
1) 저 세상은 있는가?
2) 저 세상은 없는가?
3) 저 세상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인가?
4) 저 세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인가?
5)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이 있는가?
6)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이 없는가?
7)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인가?
8)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인가?
9) 선업과 악업의 업의 성숙으로서의 과보가 있는가?
10) 선업과 악업의 업의 성숙으로서의 과보가 없는가?
11) 선업과 악업의 업의 성숙으로서의 과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인가?
12) 선업과 악업의 업의 성숙으로서의 과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인가?
13)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14)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15)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것인가?
16)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인가?
5. 우연론(Adhiccasamuppannavāda)- 두 가지
내 용
공통주장
유 형
자아와 세계는 원인없이 생겨난다.
자아와 세계는 우연히 생겨난다.
1) 우연론자
2) 추론자이자 탐구자
우연론자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adhiccasamuppanno attā ca loko ca. Taṃ kissa hetu? Ahañhi pubbe nāhosiṃ, somhi etarahi ahutvā santatāya pariṇato.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자아와 세계는 우연히 생겨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내가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은 현존의 상태로 전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불
(각묵스님)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역
(빅쿠 보디)
'The self and the world originate fortuitously. What is the reason? Because previously I did not exist, but now I am. Not having been, I sprang into being.'
목각인형이나 청동상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움직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또 식물인간으로 수십년간 산 사람이 갑자기 깨어났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불교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마치 목각인형처럼, 청동상처럼, 식물인간처럼 죽은 듯이 살다가 갑자기 깨어나는 경우가 있다. 색계 4선천의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에 사는 존재이다.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존재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들을 ‘아산냐삿따데와(asaññasattā devā)’ 라 한다. 우리말로 ‘지각을 여읜 신들’이라는 뜻이다. 마음이 없이(acitta) 생기하는 미세한 물질적인 몸만을 갖는 자들을 말한다. 물질적인 몸은 있는데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마치 인형처럼 동상처럼 식물인간처럼 사는 존재를 말한다. 마치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것 같은 존재를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마음이 없이 태어났을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그들의 생기는 다음과 같이 이해 되어야한다. 즉, 어떤 자는 이교의 땅에서 출가하여, 바람의 두루채움(風遍, vayokasina) 등에 대한 준비명상을 하여 네 번째 선정을 일으키고, 선정에 들어 마음의 오염을 본다. ‘마음이 있으면, 손의 절단 등의 괴로움이 모든 두려움을 생겨나게 한다. 이러한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무심의 상태에 적정이 있다.’라고. 이러한 마음의 오염을 보고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갖추면, 죽은 뒤에 지각을 여읜 뭇삶들(無想有情, asaññasattā)가운데 태어난다.
(무상유정천 주석, 전재성박사)
마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모든 고통이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만 없으면 고통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선정수행을 닦은 결과 색계 4선천인 무상유정천에 태어나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선사들이 ‘마음을 내지 말라’든가 ‘분별하지 말라’ 는 등의 법문을 듣는 것 같다.
죽어야 사는 존재
마음을 내지 않는 ‘무심’이나, 분별하지 않는 ‘무분별’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 이어지는 주석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그의 마음에는 죽음의 마음( 死心, cuticitta)의 소멸에 의해서 그것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때 물질의 다발(색온)만이 거기에 나타난다. 방금 활의 현의 힘으로 쏘아진 화살이 현의 힘에 의해서 허공을 나는 것처럼, 그들은 선정의 힘이 쇠퇴하면 그 때에 물질의 다발이 소실된다. 여기서 결생에 대한 지각(patisandhisañña)이 생겨난다. 그러나 여기에 생기한다는 지각에 의해서 죽음이 시설된다. 그래서 지각이 생겨나면 그들은 ‘그 신들의 무리에서 죽는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무상유정천 주석, 전재성박사)
무심과 무분별의 상태로 마음이 일어남 없이 마치 죽은 듯이 사는 존재가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마치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듯한 이들은 죽어야 사는 것이다. 죽어야 그때서야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전생을 보니
이렇게 죽어야 사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우연론을 설명할 때 이용된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을 여읜 뭇삶이라는 이름의 신들이 있는데, 그런데 지각이 생겨나면 그들은 그 신들의 무리에서 죽는다.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어떤 뭇삶은 그 무리에서 죽어서 여기에 오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와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정근하고 수행하고 방일을 여의고 올바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서 마음의 삼매를 경험하여 지각이 생겨나는 것을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sutta- 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무상유정천에서 죽은 듯이 살다가 죽어서 다시 마음이 일어나 태어난 곳이 인간계라 하였을 때를 말한다.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난 자가 선정수행을 하여 자신의 전생을 보게 된다. 그러나 지각(마음)이 일어난 것은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바로 이전 전생의 경우 아예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론자가 되는 이유
그 결과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경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는 이와 같이 ‘자아와 세계는 우연히 생겨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내가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은 현존의 상태로 전변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sutta- 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이것이 우연론자가 되는 이유이다. 바로 이전 전생에서 마음이 없는 상태로 있다 죽어서 마음이 다시 생겨 났기 때문에 자신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미래와 관련된 견해(Aparantakappika)
6. 사후유지각론(Saññīvāda)- 열여섯 가지
내 용
유 형
사후에도 자아에게 지각이 있다.
1) 자아는 물질을 지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2) 자아는 물질을 지니지 않으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3) 자아는 물질을 지니기도 하고 물질을 지니지 않기도 하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4) 자아는 물질을 지니는 것도 아니고 물질을 지니지 않는 것도 아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5) 자아는 유한하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6) 자아는 무한하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7) 자아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8) 자아는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9) 자아는 단일한 것에 대한 지각을 지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10) 자아는 다양한 것에 대한 지각을 지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11) 자아는 한정된 것에 대한 지각을 지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12) 자아는 무한한 것에 대한 지각을 지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13) 자아는 오로지 즐거운 것이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14) 자아는 오로지 괴로운 것이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15) 자아는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16) 자아는 괴로운 것도 아니고 즐거운 것도 아닌 것이며,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7. 사후무지각론(Asaññīvāda)- 여덟 가지
내 용
유 형
사후에는 자아에게 지각이 없다.
1) 자아는 물질을 지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없고, 질병을 여읜다.
2) 자아는 물질을 지니지 않으며, 죽은 후에 지각이 없고, 질병을 여읜다.
3) 자아는 물질을 지니기도 하고 물질을 지니지 않기도 하며, 죽은 후에 지각이 없고, 질병을 여읜다.
4) 자아는 물질을 지니는 것도 아니고 물질을 지니지 않는 것도 아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없고, 질병을 여읜다.
5) 자아는 유한하며, 죽은 후에 지각이 없고, 질병을 여읜다.
6) 자아는 무한하며, 죽은 후에 지각이 없고, 질병을 여읜다.
7) 자아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없고, 죽은 후에 지각이 있고, 질병을 여읜다.
8) 자아는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없고, 질병을 여읜다.
8. 사후비유비무지각론(N'evasaññī-nāsaññīvāda)- 여덟 가지
내 용
유 형
사후에는 자아에게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1) 자아는 물질을 지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질병을 여읜다.
2) 자아는 물질을 지니지 않으며, 죽은 후에 지각이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질병을 여읜다.
3) 자아는 물질을 지니기도 하고 물질을 지니지 않기도 하며, 죽은 후에 지각이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질병을 여읜다.
4) 자아는 물질을 지니는 것도 아니고 물질을 지니지 않는 것도 아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질병을 여읜다.
5) 자아는 유한하며, 죽은 후에 지각이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질병을 여읜다.
6) 자아는 무한하며, 죽은 후에 지각이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질병을 여읜다.
7) 자아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없고, 죽은 후에 지각이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질병을 여읜다.
8) 자아는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며, 죽은 후에 지각이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질병을 여읜다.
9. 허무주의(Ucchedavāda)- 일곱 가지
내 용
유 형
현존하는 뭇삶은 단멸하고 파멸하고 멸망한다.
1)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만들어지고, 부모에게서 생겨난 자아
2) 천상에 있고 물질로 이루어졌고 아직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속하고 물질적인 자양을 먹는 다른 자아
3) 천상에 있고 물질로 이루어지고 정신으로 만들어지고 일체의 수족을 갖추고 감각능력에 결함이 없는 자아
4) 무한공간의 세계를 성취한 자아
5) 무한의식의 세계를 성취한 자아
6)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성취한 자아
7)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성취한 자아
62가지 견해 중에서 단멸론에 해당되는 것이다. 62가지 중 55가지가 영원주의와 관련 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허무주의 견해는 7가지이다. 그렇다면 왜 허무주의적 견해를 갖는 것일까?
두 종류의 허무주의자가 있는데
허무주의자에 대한 빠알리가 웃쩨다와다(Ucchedavāda)이다. 한역으로 단멸론자(斷滅論者)라 한다. 주석에 따르면 두 종류의 단멸론자가 있다.
Smv.120에 따르면,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늘눈을 얻은 자와 하늘 눈을 얻지 못한 자이다.
1) 하늘눈을 얻은 자로서 거룩한 님(아라한)의 죽음을 보지만 다시 태어남을 볼 수 없거나, 혹은 단순한 죽음-아직 배울 것이 남아 있는 학인이나 범부의 죽음-을 보지만 다시 태어남은 볼 수 없어서 허무주의를 갖는다.
2) 하늘눈을 얻지 못한 자로서 ‘아무도 내세를 알지 못한다.’라고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또는 ‘나무에서 떨어진 잎사귀가 다시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또한 그렇다.’라는 등의 추론에 의해서 허무주의를 갖는다. 이러한 경우 갈애와 사견에 의해서 분별하고 망상하여 일곱가지 근거에 의한 허무주의를 갖게 된다.
(허무주의 주석, 전재성박사)
두 가지 허무주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의 경우 아라한의 죽음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일반 범부들이 생각하는 허무주의이다. 아라한의 죽음은 다시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허무주의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성자가 아닌 범부들이 생각하는 허무주의이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
범부들이 생각하는 허무주의는 진리를 알지 못해서 발생한다. 이를 갈애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십이연기에서 갈애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렇게 세 가지로 본다. 이중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일반 범부들이 생각하는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죽고 싶다’는 것도 갈애로 보는 것이다. 그런 갈애는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 이럴 경우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본다. 단멸론적 허무주의자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그러나 성자의 경우 철저하게 무아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같은 허무주의가 아닌 것이다.
허무주의적 견해
그렇다면 허무주의적 견해는 어떤 것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벗이여, 이 자아는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만들어지고, 부모에게서 생겨난 것으로 몸이 파괴되어 단멸하면 사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벗이여, 이러한, 이 자아는 완전히 단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뭇삶이 단멸하고 파멸하고 멸망한다고 주장한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sutta- 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이것이 전형적인 허무주의적 견해이다. 이런 허무주의자들을 인터넷상에서도 볼 수 있다. 소위 단멸론자들을 말한다.
단멸론자들의 견해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처님은 현세의 가르침만 펼치셨지 내세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현세에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은 현법열반론자들과도 유사하다.
현법열반론자들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로서 지금 여기에서 쾌락을 즐기는 것을 열반으로 보는 잘못된 열반관을 지닌 자들을 말한다. 이렇게 단멸론자들은 허무주의와 현세적 쾌락주의가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단 한 번 뿐인 이 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가면 그 뿐이라 한다.
단멸론자들은 내생은 볼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생각하지 말자고 한다. 그래서 몸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경에서 말라는 것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단멸론자들에게 사람들은 왜 얼굴모양이 서로 다르고 또 성향이 각기 다른 것인가에 대하여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할까. 거의 대부분 부모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생물시간에 배운 지식을 활용하여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이 몸과 마음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놀랍게도 경전에 고스란히 쓰여 있다는 사실이다. 경에서도 허무주의자들은 “부모에게서 생겨난 것으로~”라고 식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런데 이런 허무주의자, 단멸론자들이 인간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총 7가지의 허무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는 인간(1)을 포함하여 욕계천상(1), 색계천상(1), 무색계천상(4)에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천상에 사는 존재들도 죽으면 내세도 없고 완전히 단멸한다는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삿된 견해이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업이 남아 있는 한, 그 업의 힘으로 인하여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 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10. 현세열반론(Diṭṭhadhammanibbānavāda)-다섯 가지
내 용
유 형
현존하는 뭇삶은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
1)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기는 자
2)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
3)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
4) 평정하고 새김이 있는 행복한 삶이라 부르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
5) 평정하고 새김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
번민과 동요(Paritassitavipphandita)
이상 62가지 삿된 견해를 살펴 보았다. 크게 과거와 미래를 나누어 보면 과거에 대한 견해가 18가지이고, 미래에 대한 견해가 48가지이다. 또 62가지 견해에 대하여 상견과 단견으로 나눈다면 영원주의를 포함하여 55가지 견해가 영원주의에 해당되고, 7가지가 단견에 해당되는 허무주의 견해이다.
이와 같은 견해가 왜 삿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경의 말미에 실려 있다. 이에 대한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Imehi kho te, bhikkhave, samaṇabrāhmaṇā pubbantakappikā ca aparantakappikā ca pubbantāparantakappikā ca pubbantāparantānudiṭṭhino pubbantāparantaṃ ārabbha anekavihitāni adhimuttipadāni abhivadanti dvāsaṭṭhiyā vatthūh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수행승들이여, 그 가운데 영원주의자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네 가지 근거를 통해서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 존귀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갈애에 사로잡혀 번민하고 동요한 결과, 자신들에게 감지된 것일 뿐이다.
초불
(각묵스님)
비구들이여, 여기서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이 네 가지 경우로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갈애에 빠져 있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단지 느낀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느낌이 [견해와 갈애에] 의해 동요된 것일 뿐이다.
영역
(빅쿠 보디)
Therein, bhikkhus, when those recluses and brahmins who are eternalists proclaim on four grounds the self and the world to be eternal — that is only the feeling of those who do not know and do not see; that is only the agitation and vacillation of those who are immersed in craving.
6가지 견해를 가진 자들은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갈애 때문이다. 그래서 갈애에 사로잡혀 동요한 결과가 자신들에게 감지된 것 뿐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견해에 매혹되고 견해의 즐거움에 의해서 견해의 감지에 의해서 기뻐하는 그들은 갖가지 근거를 주장하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 자성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해채 감지한 것으로, 이는 갈애라고도 불리우는 번민에 의해서 동요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흐름에 든자(예류자)에서 볼 수 있는 부동(不動)은 아니라는 것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Phassapaccayavāra)
이렇게 현상을 여실히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자들이 견해를 주장하는 것은 접촉에 의해서라고 한다.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Tatra, bhikkhave, ye te samaṇabrāhmaṇā sassatavādā sassataṃ attānañca lokañca paññapenti catūhi vatthūhi, tadapi phassapaccayā.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수행승들이여, 그 가운데 영원주의자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네 가지 근거를 통해서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단지 접촉을 조건으로 시설한 것일 뿐이다.
초불
(각묵스님)
비구들이여, 여기서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이 네 가지 경우로 자아와 세상이 영속한다고 천명하는 것은 단지 감각접촉[觸]을 조건한 것이다.
영역
(빅쿠 보디)
Therein, bhikkhus, when those recluses who are eternalists proclaim on four grounds the self and the world to be eternal — that is conditioned by contact.
영원주의를 예로 든다면, 영원주의자들이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접촉(phassa) 때문이라 한다. 주석에 따르면, 이는 견해의 접촉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견해에 매혹되고 견해의 즐거움에 의해서 견해의 감지에 의해서 기뻐하는 그들은 네 가지 근거를 통해서 영원한 자아와 세계를 주장하지만, 그것 또한 접촉을 조건으로 갈애와 견해에 동요되어 감지하는 것으로 본다.
접촉이 없는 인식의 불가능
그렇다면 바른 견해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접촉 없는 인식은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Tatra, bhikkhave, ye te samaṇabrāhmaṇā sassatavādā sassataṃ attānañca lokañca paññapenti catūhi vatthūhi, te vata aññatra phassā paṭisaṃvedissantīti netaṃṭhānaṃ vijja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수행승들이여, 그 가운데 영원주의자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네 가지 근거를 통해서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접촉없이 그것을 인식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초불
(각묵스님)
비구들이여, 여기서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은 네 가지 경우로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이 영속한다고 천명하는데, 감각접촉[觸] 없이도 그런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역
(빅쿠 보디)
"Therein, bhikkhus, when those recluses who are eternalists proclaim on four grounds the self and the world to be eternal — that is conditioned by contact. That they can experience that feeling without contact — such a case is impossible.
부처님은 “그들이 접촉없이 그것을 인식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접촉없이 감지한다고 하면 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실재 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다는 말과 같다. 마치 기둥이라는 것이 넘어지는 집을 지탱하는 강한 조건이라 기둥이 받치지 못하면 그것은 서있지 못하는 것처럼, 접촉 또한 감지의 강한 조건이라 그것이 없이는 이러한 견해의 감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수행처에서 경행을 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 처음 가면 경행부터 가르쳐 준다. 왼 발 오른 발 옮길 때 마다 발다닥에 접촉 되는 감촉을 느끼라고 한다.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땅의 요소, 바람의 요소 등 사대를 느끼는 것이다. 이 느끼는 것이 감각접촉(phassa)이다.
이렇게 차가운지 뜨거운지 부드러운지 등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발을 이동할 때 의도와 옮기는 행위를 통하여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누가 만든 자도 없다는 것과 경험하는 자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철저하게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라 법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손을 단지 손이라는 명칭이나 이름으로 아는 개념화를 방지하고 접촉에 따른 느낌으로 알아 실재하는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느낌을 대단히 중요시 한다. 만일 느낌을 이야기하지 않고 개념을 이야기 한다면 웃음거리가 된다.
견해에 의한 유전연기론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sabbe te chahi phassāyatanehi phussa phussa paṭisaṃvedenti tesaṃ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그들 모두는 여섯가지 접촉의 감역을 통해서 잇따라 접촉하면서 그것들을 감지한다. 그것들에 대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초불
(각묵스님)
그들 모두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들[入,處]을 통해 [갖가지 대상과 맞닿아] 계속해서 일어나는 감각접촉으로 인해[사견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런 느낌이 그들에게 갈애를 생기게 하고, 갈애는 취착을 생기게 하고, 취착은 존재를 생기게 하고, 존재는 태어남을 생기게 하고, 태어남은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을 생기게 한다.
영역
(빅쿠 보디)
만일 접촉을 통하여 느낌이 감지 되었을 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경에서는 필연적으로 느낌이 갈애로 발전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여 마침내 절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견해의 그물에 갇혀
구 분
내 용
빠알리원전
Ye hi keci, bhikkhave,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pubbantakappikā vā aparantakappikā vā pubbantāparantakappikā vā pubbantāparantānudiṭṭhino pubbantāparantaṃ ārabbha anekavihitāni adhimuttipadāni abhivadanti, sabbe te imeheva dvāsaṭṭhiyā vatthūhi antojālīkatā, ettha sitāva ummujjamānā ummujjanti, ettha pariyāpannā antojālīkatāva ummujjamānā ummujjan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수행승들이여,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과거-미래를 생각하는 자로서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라도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갖고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망설을 주장한다면, 모두가 이러한 예순 두 가지 그물코를 가진 그믈에 사로 잡혀, 거기에서 빠져나가려고 오르락내리락 하면 할수록, 거기에 갇힌 채 그물에 조여 발버둥 치게 될 뿐이다.
초불
(각묵스님)
비구들이여, 과거를 모색하고, 미래를 모색하고, 과거와 미래를 모색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단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은 모두 이 62가지의 그물에 걸린 것이다. 그들은 위로 오르고자 하나 그물에 걸린 채 오르게 된다. 그들은 참으로 그물에 완전히 갇혀서 오를 뿐이다.
영역
(빅쿠 보디)
Fish net
견해의 그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는 “여섯가지 접촉의 감역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알 때,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분명히 안다”라고 하였다. 느낌 단계에서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때 견해의 그물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브라흐마잘라경 해제에 대한 것이다.
브라흐마잘라경(D1) 해제
구 분
내 용
전재성박사
영원주의-네 가지, 부분적 영원주의-네 가지, 유한∙무한론-네 가지, 회의주의-네 가지, 우연론-두 가지, 사후지각론-열여섯 가지, 사후무지각론-여덟 가지, 사후비유비무지각론-여덟 가지, 허무주의-일곱가지, 현세열반론-다섯가지가 있다. 모두 도합 육십이 기지의 잘못된 견해가 있다. 부처님은 이 모든 사견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 사견을 지닌 자의 운명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부처님은 상세한 분석을 통해서 사견이 여섯가지 감역을 통한 반복된 접촉에서 기인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을 통해서 잇따라 접촉하면서 그것들을 감지한다. 그것들에 대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여섯가지 접촉의 감역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 때, 이 모든 잘못된 견해 즉, 사견을 초월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러나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이든지 사견을 지닌 자는, 예순 두 가지 그믈코를 가진 그믈에 사로 잡혀 거기에서 빠져나가려고 오르락내리락 하면 할수록, 거기에 갇힌 채 그물에 조여 발버둥 치게 되는 물고기와 같은 신세가 된다.
각묵스님
견해의 문제에 대한 고뇌를 누구보다 많이 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디가 니까야』의 첫 번째가 되는「범망경」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견해를 과거에 관한 것 18가지와 미래에 관한 것 44가지로 나누어서 모두 62가지로 분류해서 심도 있게 설명하고 계신다. 이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8가지 과거를 모색하는 자들
I-1. 영속론자들 - 4가지
I-2. 일부영속 일부비영속론자들 - 4가지
I-3. 유한함과 무한함을 설하는 자들 - 4가지
I-4. 애매모호한 자들 - 4가지
I-5. 우연발생론자들 - 2가지
㈏ 44가지 미래를 모색하는 자들
II-1. 사후에 자아가 인식과 함께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16가지
II-2. 사후에 자아가 인식 없이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8가지
II-3. 사후에 자아가 인식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8가지
II-4. 단멸론자들 - 7가지
II-5.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 5가지
그러나「범망경」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견해를 모두 62가지로 정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범망경」은 오히려 왜 이렇게 다양한 견해가 생길 수밖에 없느냐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명쾌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견해란 조건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본경에서 견해는 ‘느껴진 것(vedayita)’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을 복주서는 “체험되고(anubhūta) 경험된 것(anu-bhavana)”으로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이 경험된 것은 대상과 감각기능과 알음알이의 세 가지가 서로 조우할 때 일어나는 감각접촉[觸, phassa]에 조건 지워진 조건발생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조건 발생을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말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견해를 감각기능․감각대상․알음알이[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에서 기인한 감각접촉의 산물이라고 불교의 연기 구조로 명쾌하게 정의하신다. 이렇게 하여 견해의 문제는 마침내 괴로움의 발생 구조[流轉門]와 소멸 구조[還滅門]를 적나라하게 밝힌 연기의 가르침으로 회통이 되고, 이것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로 정리된 불교 만대의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으로 귀결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이런 연기의 가르침이야말로 무아의 가르침이요 무아의 가르침은 바로 존재론적인 실체인 자아를 해체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연기-무아로 존재론적인 실체인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떨쳐버릴 때 그것이 바로 견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러므로 62견은 연기-무아를 철견할 때 극복된다는 것이 본경의 결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본경은 팔정도의 첫 번째인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견해의 내용인 연기의 가르침을 천명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4부 니까야의 첫 번째인『디가 니까야』를 대표하는 첫 번째 경으로 결집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도 볼 수 있는 62가지 삿된 견해
브라흐마잘라경을 보면 이제까지 인류가 가졌던 견해가 총망라 된 것 같다. 62가지 견해에 걸려 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빠짐 없이 기록 되어 있다. 이런 견해는 오늘날도 볼 수 있다.
오늘날 영원주의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일신교의 종교가 대표적으로 영원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또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종교 역시 영원주의 부류에 속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존재의 근원을 찾다 보면 필연적으로 제1의 요인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마음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죽음을 편안한 휴식처럼 생각하고 반면에 삶은 힘겨운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 이다. 소년이나 연예인들의 자살, 심지어 황혼고독에 따른 노인자살이 증가하는 것도 잘못된 견해에 따른 것이다. 죽으면 현존하는 뭇삶은 단멸하고 파멸하고 멸망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단멸론적 허무주의에 따른 것이다. 허무주의는 육체가 죽음에 따라 정신 또한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도시의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네온싸인과 함께 밤문화가 번성하는 것은 지금 여기서 즐기자는 쾌락주의 산물로 본다. 이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을 말한다. 이를 ‘현법(ditthadhamma)열반’이라 한다. 이는 잘못 적용된 열반개념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경에 따르면 선정수행의 성취에만 가치를 두는 것 역시 현법열반으로 본다는 것이다. 초선정에서부터 사선정에 이르기까지 느끼는 희열과 행복, 평정에 대하여 열반을 성취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연기법이다. 모든 현상이 조건에 따라 일어 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로 대표 되는 62가지 삿된 견해는 논파 된다. 그런 62가지 견해는 단지 견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진리라고 볼 수 없다.
2012-12-16
진흙속의연꽃
첫댓글
책으로도 나온거 같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