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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성경의 문서적 고찰
성경은 과연 어떠한 책이고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 하였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여기고 있으나, 앞서서 지적했던 여러 자료들
을 보았다면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해 어느정도 의구심이 생겼으리라고 본다.
중세시대에도 오경 안에서부터 많은 후대의 삽입구들을 찾아낸 최초의 과학적 성경 비평학자
인 에즈라(Ibn Ezra. 1092~1167)와 같은 유대인 학자가 있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중세 교권주의에 도전하여 라틴어 성경보다는 히브리어 성경 원문의 언어학적 연구를 중요하
게 취급하게 된다.
17세기에 이르러서 대표적 성경 비평가들인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스피노자(B. Spinoza)
그리고 리샤르 시몽(Richard Simon)과 같은 학자들은, 성경연구에서도 다른 일반 문학연구에 적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성경비평학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때문에 상당한 기간 동안 방해를 받았으나, 18세기 계몽주의의 물결로 인해 성경 역시
분석의 도마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가블러(J. P. Gabler)의 대전환에 의해서 성경비평학은 마침내 기독교의 교리적 요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연구를 전개할 수 있는 본격적인 성경 비평학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그라프, 벨하우젠과 같은 학자들이 종교 사학파를 이루어 '자료비평'이라는 새로운 해석학적 방법을
등장시켰다. 20세기에 와서 궁켈과 모빙켈 등이 중심이 된 양식비평학이 등장했고, 폰 라드, 노트 등이
편집 비평을 탄생시켰다.
신학자들이 성경을 비평하는 방법에는 7가지가 있다.
그것은 본문비평, 자료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 양식비평, 문학비평, 역사비평을 말한다.
성경에는 원본이 없다. 수천종의 사본들중에 내용이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실정인데,
지금 여러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성경은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비평법에 의해 여러가지 사본을 비교,
검토하여 재구성된 성경이다. 어느 사본을 번역의 기초로 삼았느냐에 따라서 성경의 내용이 다르기도
하는데, 일부 과격한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보는 성경 이외의 것은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는
극언까지 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한다.
▶ 같은 사건을 두고 엇갈리는 오경의 내용
상당수의 일반 평신도들은 아직도 오경의 저자가 모세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오경은 바빌론
유수 이후에 기록되어 BC 400 년 무렵에 유대교의 정경으로 인정된 것이다. 수많은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속속들이 발견되는 오래된 성경의 사본들을 보면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성경의 사건들은
역사적이지도 않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 역사가 요세푸스들 까지도 모두 모세 저작설을 언급하고 있는데, 필로와
요세푸스는 모세가 자기의 죽은 이후의 일(신명기 34:5~12) 까지도 기록하였다고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모세가 죽은일을 어떻게 모세가 기록했는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탈무드 성경(Baba Bathra 14b)에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여호수아의
저술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일은 아니다. 오경속에서는 같은 사건이
여러번에 걸쳐 언급되거나, 같은 사건에 대해서 엇갈리거나, 반대되는 결과를 나타내기도 한
다. 그 몇가지 예를 보자.
(1) 설화, 율법의 반복과 병행
① 아브라함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기의 처 사래를 누이 동생으로 일시 가장시킨 일이 두 번
반복된다. (창 12:10-2-, 20:1-18)
② 아브라함이 아들 얻는다는 약속을 세 번이나 받았다 (창 15:4, 17; 16, 18:10).
③ 이삭 이름의 뜻을 네 번이나 말하고 있다 (창 17:17-19, 18:12-13, 16:6).
④ 하갈의 추방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된다. 하나는 그녀가 이스마엘을 낳기 전에 추방되는 이야
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이 커서 소년이 되었을 때에 추방되는 이야기이다. (창 16:4-14, 21:9-21).
⑤ 안식일을 지키라고 여섯번 거듭하고 있다 (출 20:8~10, 23:12, 31:13~17, 34:21, 35:1~3; 레 23:3).
⑥ 벧엘이라는 지명을 두 번에 걸쳐 명명한다.(창 28:19. 창 35:15)
⑦ 여호와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두 번 말하고(출 3:14-15, 6:2-3), 모세가 사명을 받는
데 주저하기를 두 번 (출 4:10-12, 6:12), 대변자 아론을 보낸다고 두 번 언급하다.(출 4: 4:14-16, 7:1-2).
⑧ 무교절을 지키라고 세 번 되풀이하고 있으며(출 23:15, 34:18; 레 23:6), 맥추절, 수장절에
대해서도 세 번 언급되어 있다(출 23:16, 34:22, 레 23:15).
⑨ 브엘세바가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맺은 계약에서, 또하나는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창 21:31, 26:33)
(2) 설화, 율법의 불일치
① 두 가지 서로 모순된 창조설화 (창 1:1~2:4, 창 2:4b~25 자세한 것은 4장에 언급했다).
②홍수때 창세기 6:19~20에는 방주에다 모든 짐승들을 한 쌍씩을, 창 7:2~3에는 정결한 짐
승 일곱쌍 부정한 짐승 한 쌍을 보호하라고 되어 있다.
③ 파라오에게 요셉이 두 가지 충고를 한다.(창 41:34에는 풍년 때 1/5의 곡식을 저장하라고
요셉이 파라오에게 진언하고 있으나, 창 41:35에서는 모든 곡식을 모으도록 진언하고 있다)
④ 출애굽기 20장 24절, 12장 7절, 2장 9절, 26장 25절, 35장 7절에 의하면 어디에서든지 제단을
쌓을 수 있지만, 신명기 12장26절에 의하면 제물은 반드시 한 곳에서만 여호와에게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⑤ 노예에 대한 법규도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출21:2~11, 신15:12~18, 레25:39~55)
⑥ 모세의 장인이 두 가지 이름으로 기록된다. (출 2:18에는 르우엘, 출 3:1, 4:18, 18:1~12에는
이드로라 되어 있다).
⑦ 출애굽기 17장에는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받고 반석을 후려쳐 물을 얻지만, 민수기 20장
에는 그것이 여호와에 대한 불복종으로 묘사되고 모세와 아론은 벌을 받는다.
⑧ 법궤를 만드는 방법도 불일치 한다. (출 25:10~22에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이 방법을 받았다고 되어
있으며, 출 37:1~9에서는 브사렐이 궤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신 10:1~5에 의하면 모세가 직접 궤를
만든 뒤에 돌판을 거기에 넣었다고 되어 있다).
⑨ 회막치는 장소도 엇갈린다.(민 2장에서는 회막을 진안에 치라고 되어 있으나, 출 33;7에는
진 밖에 치도록 되어 있다).
⑩ 출애굽기에서는 여호와가 히브리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 배불리 먹이지만, 민수
기 11장 32절~34절에는 만나에 불평하는 히브리인들에게 여호와가 메추라기 떼를 보내 죽게
만든다.
⑪ 창세기 32장28~30절에 의하면 야곱의 이름이 브니엘에서 이스라엘이라고 바꿔졌는데,
창세기 35장10~15절에 의하면 벧엘에서 그렇게 바꿔졌다는 것이다.
또 다음 본문을 서로 비교하면 더 많이 그러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창세기 21장31절과
26장33절, 창세기 12장10~20절과 20장1~18절, 창세기 6장19~20절과 7장2~3절등이다.
⑫ 출애굽기 6장3절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창세기 12장 8절, 21장 33절, 22장 14절등에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리며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간 지명까지 짓는다.
(3) 연대의 불일치
① 오경은 상당히 많은 시대착오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6장31절은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이 이러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은
모세가 사망하고도 훨씬 후대에 등장했다. 그 외의 시대착오 기사는 창세기 12장6절등에서 발견된다
② 율법에 나타난 법규들은 사막을 방황하는 유목생활의 것이라기보다는 정착생활의 것임을
반영한다.(출 22:5,29 23:10)
(4) 문학적 불일치
오경의 저자가 모세 한 사람이라면 그 한 사람이 신의 이름을 여러가지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언어와 문체상의 차이가 많이 나타나 있는데 이를 단순히 주제가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가
나타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언약의 산이 시내산이라고 불리는데, 다른 경우에는 호렙산이라고 불린다.
모세의 부친은 루엘 호밥 그리고 이드로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예언자적 어세와 제사장적 어세
두 가지 어세가 내포되어 있다.
오경이 한사람의 저작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높은 수준의 학문이 요구되지 않으며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일 뿐이다. 이런 모순에 의해서 제기된 자료비평법에 의한 분류를 소개하겠다.
▶ 오경을 구성하고 있는 4갈래의 전승
자료비평은 성경의 형성사를 파악해나가는 방법이다.
성경은 구전이나, 전승, 설화등이 바빌론 유수이후에 하나로 합쳐진 문서이다. 여러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에서 앞서 언급했던 모순들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문체나 어휘의 변화와 같은
흔적으로 자료들을 구분하게 되었다.
그라프-벨하우젠(Graf-Wellhausen)의 이론에 의해서 오경은 다양한 특색을 지닌 여러 문서
의 집합체(통상 J.E.D.P문서라 칭한다)라는 것으로 판명 되었다.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5권(토라,
흔히 모세 오경이라고 한다)이 다음의 여러 갈래의 구두전승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1) 야훼계(J문서)
BC 950년에서 850년 부터 내려오던 전승으로 추정된다.
신을 야훼(Yahweh or Jahweh)라 부르며, 문체는 단순하면서도 박력이 있고 신인 동형론(신
이 인격화되어 있다)으로 표현되었다. 이 문서는 주로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발견된다.
저자의 기본적인 관심은 남쪽 유다에 있었으며, 세속화가 심해지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다윗,
솔로몬 왕조에 사명을 고취하고 격려, 견책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자료의 신학
은 세속화 반대 신학, 약속의 신학이다.
(2) 엘로힘계(E문서)
신을 엘로힘(Elohim)이라고 부르고 있는 전승으로, BC 850년에서 750년 사이에 생성된 전승
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도 주로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발견되는데 야훼문서 보다 덜 신인 동
형론적으로 신을 인격화 하지 않으며,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신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엘리
야 시대의 종교적 혼합주의에 대항하여 여호와의 경외사상을 강조한 것이다.
그 예로 창세기 20장 1절 이하에 아브라함이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바쳤다는 내용에서
여호와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줌으로서 여호와를 경외하게 한다. 엘로힘 문서는 지도자의
역할을 중요시하여 여호와의 거룩성을 부각시켜 여호와를 경외하게 만들려한다.
출애굽기 서두에는 족장사에서 민족사로 넘어가는 과정을 썼으며 엘로힘 문서의 핵심인물은
모세이다. 야훼계는 교리에 밝지 못하지만 엘로힘계는 교리에 밝은 사람들이 수집한 것이다.
이자료는 북방 이스라엘에서 형성된 자료로서 북쪽 지파 에브라임과 꿈이나 천사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3) 신명계(D문서)
BC 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신명기(Deuteronomy)의 약어로 주로 신명기에 수집된 법률과 관습을
담고 있다. BC 621년 요시아왕의 종교개혁때 힐기야 제사장에 의해서 발견 되었다고 알려지는 율법으로
(발견이 아니라 그들이 이 문서의 창조자일 가능성이 큼) 신명기는 유대교의 경건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제사는 한 곳 성소에서만 허락 되어 있으며,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남자들은 제사장이 되어
제단에서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 D는 축복과 저주가 반복되는 역사관을 정립했다. 즉 여호와
의 명령을 순종하면 축복을 누리고, 불순종은 신의 저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민족주의적인 신관, 인과응보적인 역사관, 합법적인 성소에서의 예배의식, 약자보
호사상, 성민으로서의 행동규범, 선택사상, 계약사상이 나타난다. M.노스(M.Noth)는 신명기
를 신명기적 역사서의 서론으로 취급한다.
(4) 제관계(P문서)
BC 600~500년 사이에서 유래되었으며 바벨론 유수때 정체성 확립을 위해 등장한 신학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 문서는 제사장적인 성격을 가진 문서로서 주로 제사장에 관계되는 것, 족보 및 여호와의 위
대함 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서는 제사장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레위기
의 나머지 제사법과 오경의 나머지 역사 부분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아론의 후손에서 나온 제
사장만이 제사를 드리도록 허락되어 있다. 이 문서의 문체는 형식적이고 반복적이다.
E와 마찬가지로 P문서도 야훼(Jahweh-주 여호와)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P에는 거룩한
법전(Code of holiness-레17~26)이 들어있고 이 법전을 흔히 H라고 표기한다.
월터 브루거만(W.Brueggemann)은 P의 신학은 '생육과 번성의 신학'이라고 규명했다.
그 예로 창세기 1장 28절에 등장하는 축복선언에는 5개의 동사가 나오는데 이 동사는 P저자
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다. '생육하라'는 더 이상 불임이 되지 말라로, '번성하라'는
더 이상 후손의 문이 닫히지 말라로, '땅에 충만하라'는 '더 이상 쫓겨나지 말라'로,'정복하
라'는 '더 이상 비굴하지 말라'로, '다스리라'는 '더 이상 통치당하지 말라'로 해석했다. 이러한
선포는 비참한 포로상태의 유대 백성들을 격려하기 위한 P저자의 핵심 메시지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P저자는 성별(성스러운 구별)을 강조했는데 성별의 두 가지 구체적 수단은 할례와
안식일 준수였다. J저자의 창세기 15장에는 언약의 표징으로서 할례가 없는데 비해 P저자의
창세기 18장에는 언약의 표징인 할례가 있다. 바빌론 유수기때 유대 민족이 종교적으로 할례
를 지키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 정체성 확립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세의 율법은 그 완전한 형태(J,E,D,P)를 BC 500~400년에 이르러 다 형성되었다.
[최정호 / 성경연구를 위한 방법론 / 서울:은혜출판사, 1991.][Locker, H / All about Bible Study /
Grand Rapids: Zondervan, 1977]
벨하우젠의 JEDP론은 현재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이론이지만, 보수주의 학자중에는 성경은
톨레도트(계보,족보라는 말)의 방식에 의해, 각 단락이 주제별로 강조 하고자 쓰여진것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JEDP론이 창세기 1장과 2장의 불일치에서 발전된 이론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JEDP론에 대항하기 위해 제기된 이론인 것 같다.
이런 이론은 거의 억지에 가까운 주장에 불과하며(창조의 순서가 아예 틀려 버리는 것을 시점의 차이라고만
주장할 뿐이다), 천지창조외의 오경의 다른 부분에서의 불일치에는 아무것도 설명해 줄 수 없는 주장이다.
분명한것은 오경이 여러 문서를 짜깁기한 결과물 이라는 것 이고,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
엇갈리게 기록 된것이라는 점은 진실이다. 반면에 JEDP이론은 그 모순점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이론이며
학자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정설이다.
▶ 서기관들의 오류
수세기에 걸쳐 인간의 손에 의해 필사된 성경은 필연적으로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5000종이 넘는 구약의 고 사본은 그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 수많은 사본들
을 비교하여 원문에 가까운 내용을 얻어내는 것이 본문비평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성경의 사본들이 하나같이 내용이 틀린것일까? 오늘날에는 복사기로 복사를
하면 되지만, 그 당시에는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베껴 써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잘못 옮겨 쓰거나,
서기관(히브리어로 그들을 소프림-soprim-이라고 했음)들의 신학사상이 내용물에 새로 추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의 히브리어는 난해함의 극치이다. 모음은 없고 자음만 있었으며, 띄어쓰기와 문장구분도
없었으며, 수백개의 단어만으로 모든 표현을 사용했으므로 한 개의 단어가 여러개의 중복되는
표현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서기관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잘못 옮겨 쓰는 일이 생기
곤 하였다.
복사를 하는 또 한가지 방법으로 한 사람의 낭독자가 읽어 주고 여러명의 서기관들이 받아쓰기를 하는
방식인데, 이 방법을 따르면으로 한번에 여러개의 사본을 만들 수 있었지만, 서기관이 잘못 듣고 잘못
쓰게 되거나, 낭독자가 잘못 읽어 필사자가 잘못 기록한 경우,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경우 등에는
많은 착오가 생기기도 했다.
또는 서기관이 틀린 글자 또는 문법을 고치거나, 내용을 보충하기도 했으며, 아예 서기관들의
신학적인 견해에 의하여 고의적으로 내용이 변조되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다.
필사본들과 번역서들이 서로 차이를 나타내는 이유는 크게 나누어 필사자들의 비의도적인 변조와,
의도적인 변조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1) 비의도적인 변조
고대 문서는 필사자에 의해 손으로 직접 기록되었기 때문에 필사자가 다른 문서를 앞에 놓고
보면서 복사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것을 받아쓰거나 하면서 부지불식간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몇 가지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비슷한 철자를 혼동하여 기록한 실수.
② 철자의 위치를 변동시킨 경우.
③ 동일하거나 유사한 두 개의 철자나 단어 혹은 구가 이어지는 경우에 하나를 빠트리고 하나
만 기록하는 실수.
④ 비슷한 어미를 가진 단어들이 반복됨으로 말미암아 단어, 구, 절 등을 생략하는 경우.
⑤ 문장의 시작 부분에서 비슷한 단어들이 연속됨으로 말미암아 한 문장이나 문장 대부분을
생략하는 경우.
⑥ 비슷한 철자, 단어, 구 등을 중복하여 기록하는 경우.
⑦ 낱말이나 문장을 잘못 띄어쓰는 경우와, 잘못 붙여쓰는 경우.
⑧ 비슷한 발음이 나는 단어를 혼동하여 기록하는 경우.
⑨ 모음역할을 하던 자음들이 남아있어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
⑩ 모음을 잘못 붙인 경우.
(2) 의도적인 변조
필사자들은 본문을 복사하다가 난해한 부분이나 문맥이 부드럽지 못한 부분에서는 의도적으
로 첨가, 삭제, 고의적 수정을 가했다. 이러한 고의적인 수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① 병행구절에서 단어나 구를 골라 뽑아서 융합시키는 경우.
② 인물의 성품을 나타내는 형용어귀 혹은 직접화법을 소개하는 어귀를 첨가하는 경우.
③ 주어나 목적어가 되는 이름을 첨가시키는 경우.
④ 발음이나 의미가 비슷한 문장끼리 융합시키는 경우.
⑤ 동의어를 대용한 경우.
⑥ 본문의 전후상황과 조화를 위해 내용을 수정하는 경우.
⑦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이유 때문에 본문을 변조하는 경우.
▶ 본문비평에 쓰이는 구약의 사본들
성경의 원본이란 것은 현재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것은 BC 2세기 부터 10세기에 걸쳐 생겨난 사본들 뿐인 것이다. 5천종류를 넘는 구약의 사본들은
수없이 모사를 거듭한 사본 인데다가 내용 또한 똑같은 것이 단 한가지도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본들과 역본들을 비교, 연구하여 차이점과 공통점을 밝히고 원래의 본문을 확인해 내는 작업을 본문
비평이라고 한다. 본문 비평에서 권위있는 구약 본문은 마소라 본문, 사마리아 오경, 70인역 등이 있다.
본문 비평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본들은 무게로 달아 보는 것이지 수로 헤아리는 법이 아니다. 즉, 문서의 양이 많아졌다고 해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오래된 것일수록 원문에 가깝다.
셋째, 번역본보다는 히브리어 본문이 원문에 가깝다.
마소라 본문이 우선되지만 사해사본들도 잘 참고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70인역과 마소라 본문과의
관계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위조한 70인역보다 히브리 원어로 기록된 마소라 본문을 더 중요하
게 보지만, 예레미야서의 경우 70인역이 마소라 본문보다 7분의 1이나 짧다. 이것은 마소라
사본이 나중에 많은 것을 덧붙였다고 추측된다.
그렇지만 70인역과 마소라 본문이 서로 다른 부분은 그 경우 경우에 따라 문법, 어휘, 내용, 전
후관계등 여러가지 사정을 보고 어느 것이 원문에 가까울지 판단해야 한다. 히브리 본문이 다
른 나라 말로 옮겨지면서 달라지는 좋은 보기로서 이사야 19장 25절 후반절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분문의 전승 연대와 사본의 지역적 분포성과, 다양한 사본의 족보 사이의 계보성도 파
악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본문비평의 자료로 쓰이는 가장 가치있는 성경의 사본들을 살펴보자.
(1) 마소라 사본(the Hebrew Masoretic Text)
10세기 말에 등장한 사본으로써 마소라 학파라 불리는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의 본문을
보존하기 위해 전승에 기초하여 제작한 사본을 말한다. 그들이 사용한 본문의 기원은 AD 1세
기경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원래 자음뿐이던 히브리어가 사어(死語)가 되어 올바른 독법을
잃어 버리자 모음 부호,억양법을 첨가한 사본을 만들었다. 마소라 사본중 AD 1008년에 기록
된 레닌그라드 사본은, 히브리어로 구약성경의 본문을 모두 담고 있는 사본이다.
지금 구약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마소라 인쇄본중에서 최신판은 '비
블리아 헤브라이카 제4판'인데, 이를 보통은 그 출판지 이름을 따라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
투트가르텐시아'(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1977), 줄여서 베하에스(BHS)라 부른다. 제3판은
그 대표 편집자의 이름을 따라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킷텔'(Biblia Hebraica Kittel 3), 줄여서
베하카(BHK3)라 부른다.
BHK의 제 1,2판은 야콥벤 하임 벤 아도니아가 편집하고, 1524년 다니엘 봄베르그가 베니스에
서 출판한 제2의 랍비경전에 기초한 것이고, BHK3는 랍비경전이 히브리어 성경 본문 비평작
업에 미친 기여도가 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깨닫고 키텔이 레닌그라드 도서관에 있는 사본을
연구하고 있던 칼레의 제안에 따라 레닌그라드 사본을 자신의 BHK(3판)의 편집기초로 삼게
되었다. 또한 BHS는 사해사본의 일부 단편을 참고하여 제작 되었다.
NIV는 BHK3에 기초하고 있으며, NKJV는 BHS를 기초로 번역 했으며, KJV는 BHK1을 기초로
하여 번역 되었다.[D.A.Waite Defending the King James Bible, 1996, 2nd edition]
종래 독일어권 학자들을 중심으로 비평판 히브리어 성경을 편집해 왔으나, 현재에는 세계 성
서공회 연합회가 주선하고 전세계 학자들이 참여하여 2002년 완간을 목표로 하는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제5판'(Biblia Hebraica Quinta=BHQ)을 편집하고 있다.
그 사이에 이런 히브리어 성경들의 밑바탕이 되는 레닌그라드 사본보다 한 세기 앞서 93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알렙포 코덱스가 발견 되었으나, 1947년 반 유대폭동 때 일부가
손상되었다. 그러나 이 알렙코 코덱스를 기초로 해서 히브리 대학에서 독자적으로 비평판 히브리어 성경을
'히브리 대학교 성경'(The Hebrew University Bible=HUB)이란 이름으로 엮어내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이사야서(1995)와 예레미야서(1997)만 나와 있다.
현재에는 구약 번역본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마소라 사본 이지만 세부적인 점들에 있어
서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본문도 매우 많다. 예를들어 BC 3세기 중엽부터 생겨난 70인역 헬라
어 성경의 어떤 부분의 대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히브리어 본문, 쿰란 사본을 포함한
사해 두루마리가 보여주는 히브리어 본문, 오경에 제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마리아 전통의
오경 본문이다. 그 밖에도 BC 2세기 후반기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무랍바트 두루마리와 마사
다 사본 같은 것들도 있는데, 이것들 모두 마소라 전통과는 차이가 있다.
(2) 사해사본(Dead Sea Scrolls)
히브리어 본문 중 가장 오래된 구약 사본으로, 1947년 사해 북방에 있는 쿰란 공동체의 동굴
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 동굴은 BC 8~7세기경 건축 되어 BC 2세기말 부터 AD 2세기초까
지 예수와 비슷한 행적을 보이는 의로운 선생을 추종했던 에세네파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구
약이다. 에스더를 제외한 모든 구약 성경의 단편들이 발견 되었고, 구약의 주석서 들과 함께
에세네파에 대한 기록들도 발견 되었다. 11개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문서들의 대부분은 고문서
학적 분석 및 탄소추정법을 통해 BC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보다 앞서 기록된 것으로 레
위기와 사무엘서(BC 3세기)의 단편들도 발견 되었다.
첫 번째 사해문서가 발견된 뒤 몇 년동안은 다양한 출판물이 발행 되었지만, 제4동굴에서 수
만개의 단편이 발견되자 문제가 달라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에 설립된 작은
국제학자들이 연구의 공식결과를 발표할때까지 두루마리의 공개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8명의 한정된 학자들중 팀의 한명이 사망하면 그를 대치할 새로운 학자 한사람만을
추가하면서 공개하지 않았다. 그후 1967년 6일전쟁으로 예루살렘동부와 두루마리에 대해서
관할권을 이스라엘이 획득했지만, 역시 두루마리팀에 대해서 아무런 정책변화는 없었다.
고대 아람어와 고대 히브리어에 해박한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상황으로 볼 때 당시의 연구팀은
너무나 적은 인원이었다. 제임스 밴더캠은 "수만개의 단편들은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여
덟명의 전문가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77년 옥스퍼드 대학의 게저 베르메시 교수는 이 일을 가르켜 20세기 최고의 학계 스캔들이라고 불렀으며,
기독교측이 압력을 넣어 기독교에 큰 타격을 줄만한 내용을 고의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그 팀은 마침내 20명의 학자들로 확대 되었다. 1990년에는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의
에마누엘 토브의 인솔아래 50명이 넘는 학자들로 확대되었으며, 두루마리의 공개를 결정하게 된다.
1991년에 '미간행 사해 두루마리 예비판'(A Preliminary Edition of Unpublished Dead Sea Scrolls)이
발행 되었다. 그후 캘리포니아 주 산마리노에 있는 헌팅턴 도서관측에서는 사진전체를 모든 학자들이
이용할수 있게 '사해두루마리 팩시밀리판'(A Facsimile Edition of the Dead Sea Scrolls)이 출판됨에 따라
사해문서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가 시작 되기에 이른다.
사해문서가 공개 되자, 기독교계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의 발견으로
구약성경의 권위가 많이 쇠퇴 하였으나, 이 사해문서의 발견으로 기독교는 또 다시 긴장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예수의 존재를 위협할 만한 에세네파의 메시아의 존재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3)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Pentateuch)
사마리아가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서 분리해 나갈 때 그들이 경전으로 인정하는 것은 오경뿐이었다.
1616년 이탈리아의 한 여행가가 다마스커스에서 처음 발견한 사마리아 오경은 당시에는 오경
연구의 가장 빠른 자료로 여겨졌다. 단편들까지 합쳐서 150여 개의 두루마리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가장 최초의 것은 9세기경에 기록된 것이고 대부분은 14~15세기의 것들이다.
특히 이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꼽히는 사마리아 오경은 세겜의 그리짐산
기슭에 위치한 사마리아 회당에 보관 되어 있는 것으로, 아론의 증손자 이름이 붙여져 아비샤
두루마리라고 불린다. 아비샤 두루마리는 적어도 9명의 필사자들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여겨
지며, 이 가운데 1149년에 기록된 것이 가장 최초의 것으로 밝혀졌다.
사마리아 오경은 BC 108년에 하스모니안 왕조의 히르카누스 왕이 그리짐산의 사마리아 성전
을 파괴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오경과는 신학적 차이를 반영하는 독자적 경전으로 발
전되기 시작했다. 또한 사마리아 오경만의 독특한 히브리어 서체가 쿰란에서 발견된 소위 고
어체 히브리어 두루마리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당시부터 사마리아 오경이 구분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오경은 각각 그리스어, 아람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 되었다.
사마리아 오경은 약 1900군데에서 마소라 오경보다는 70인역의 오경과 유사한 면을 보인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AD 10세기 무렵에 등장한 마소라 사본이 상당부분 변질 되었음을 파악
하고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 오경도 상당부분 변질된 부분이 많다. 사마리아 오경이 마소라 오경과 가장
큰 차이점은, 복수형인 엘로힘 대신 단수형 엘라를 사용하거나 여호와를 의인화한 표현들을
고치는 등 절대적 유일신론을 더욱 강조 했고, 모세를 비롯한 중요인물들의 권위를 부각시키
기 위해 그들의 인간적 약점들이 언급된 구절들을 의도적으로 고쳤으며, 신이 지정한 거룩한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세겜의 그리짐산이라고 한 점이다. 특히 출애굽기 20장과 신
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 끝부분에 그리짐산에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
는 별도의 규정을 구체적으로 첨가한것이 주목을 끈다.
(4) 70인역(Septuagint=LXX)
BC 3~1세기경 등장한 70인역은 이집트 왕 프톨레미(Ptolemy Ⅱ Philadelphus)의 요청에 따
라 BC 8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70(또는 72)일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터툴리안', 성 '어거스틴', 성 '제롬' 등등의 초기 교부들은 모두 이 번역 본들이 신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저스틴 교부는 70인이 따로 번역 했으나 글자 하나 까지 일치 된
신의 영감에 의한 작품이라고 치켜 세웠다. 그러나 저스틴은 프톨레미 왕이 헤롯 왕에게 친서
를 보냈다고 말하면서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헤롯은 프톨레미보다 200년쯤 뒤의 사
람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LXX)은 하나의 통일된 번역 이라기 보다는 번역
기술이나 히브리어 지식이나 문체 등에 있어서 서로 매우 다른 여러 사람의 번역들을 모은 것
으로 보인다.
70인역의 욥기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6분의 1정도 짧으며, 예레미야서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8
분의 1정도 짧고 그 순서도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내용 또한 많은 부분이 잘못 번역 되었는
데, 70인역에 의하면 창조의 시점이 1195년이나 담겨져 있고 '무드셀라'가 '노아'의 홍수가 나
고도 14년이나 계속 살아 남은 것으로 계산 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구약성경이 70인역이었다. 그들은 70인역 성경에서 기독교에 유리한 내용
을 찾아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기독교적인 내용들을 덧붙이게 되었다.
카톨릭백과사전은 70인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70 인 역을 채택 하였다. 70 인 역은 히브리 원본과 달랐다. 몇 권의 책과 구절들이 더
추가 되었을 뿐 아니라.....(중략)....... 부분적으로 번역의 실수가 있었고....(중략)..... 더구나
70 인들은 유대 랍비들이 쓰는 것과는 다른 히브리 경전을 토대로 번역하는 바람에...." [카톨
릭백과사전 vii, 316]
"70 인 역은 믿을 바가 못 되니 제 멋대로 번역되고 변조 되었으며....(중략)....따라서 교회에
의해서 거부 되었다" [카톨릭 백과사전 iv, 625]
한편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구약으로 증거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경전을 위조했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이 나타났다. 따라서 AD 2세기경에 히브리 본문에 맞도록 새로운 헬라어 역본 들이
등장하게 된다. 2세기초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아퀼라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증거하
기 위해 위조한 70인역의 구약의 메시야 관련 위조 부분을 히브리 원전에 맞게 번역함으로 아
퀼라역(a')이라는 헬라어 축어적 역본을 만들었고, 2세기 말엽 심마쿠스는 아퀼라의 축어역과
달리 히브리적 표현을 없애고 순수한 헬라어를 사용한 의역본을 내놓았다. 이 외에도 레오도
티온역, 역자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세 개의 역본이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구약을 위조했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AD 230~240년
에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igen)은 6500쪽이 넘도록 각 쪽에 여섯 란을 두고서 그 때 구할
수 있던 히브리 성경, 그것의 발음을 헬라어로 바꾸어 적은 것, 아퀼라 번역본, 심마쿠스 번역
본, 70인역, 레오도티온 판을 각각 적어 넣어 서로 비교하도록 하는 헥사플라(Hexapla)를 편
찬했다. 오리겐은 히브리 원문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인들이 70인역을 위조 한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의 논쟁을 적당히 무마시키기 위해서 이 6가지 본문을 비교 하면서, 그 나름대로 다
섯번째 란의 70인역을 새롭게 수정했다.
이 70인역이 나중에는 헥사플라와는 따로 떨어져서 그것만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을
70인역의 헥사플라 개정판(BHK의 GH) 또는 오리게네스 70인역(BHS의 GO)이라고 부른다.
그 뒤로도 70인역은 그 나름대로 여러 가지 개정판 사본이 생겨났다.
70인역의 가장 중요한 사본으로는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시나이 사본을 들수 있다.
현재 여러가지 70인역 사본들을 비교하여 만들어 놓은 비평판 헬라어 성경으로는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 것은 괴팅겐의 70인역으로써 여러 사본을 비교하여 가장 원본에 가까와 보이는 본
문을 재건한 것이로 1931년부터 나오고 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번째는 1935년에 출간된 랄프스 70인역인데, 이것은 70인역 사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5) 페쉬타(Peshitta)
시리아 정교회가 전수해 왔으며 '페쉬타'라고 일컬어지는 시리아어역 성경의 기원에 대하여는
정확한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페쉬타가 70인역에서 번역된 것이라고 주장
하지만 페쉬타가 반영하고 있는 본문이 마소라 본문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거나 근접하는 것
으로 보아 페쉬타는 AD 2~3세기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한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페쉬타 사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AD 5세기의 것이 있고, 나머지는 5세기에서 1
2세기에 걸쳐 기록된 사본들이다.
(6) 아람어 탈굼(Targum)
바빌론 유수 이후 회당에서는 성경을 낭독한 다음 히브리어 보다 상용어(常用語)인 아람어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위해 아람어로 해설해 주었다. BC 2세기에 이르러 이런 구두 해석이 정교
해지고 고정화 되어 전승 되면서 문서화 되게 된다. 여기서 탈굼이라는 아람어 역본이 등장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탈굼은 오경, 예언서, 성문서집 등이다.
'타르구밈'(탈굼의 복수형)이라고도 불리는 탈굼은 그 형태가 아주 다양하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문자적 번역만을 시도한 온켈로스의 탈굼이 있는 반면, 일명 '가짜
요나탄 탈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탈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나중에 아람어 역시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아람어도 히브리어와 같은 운명
을 겪었다.
(7) 라틴어 역본(Latin Vulgate)
라틴어로 성경이 처음 번역된 것은 2세기 말엽 북아프리카에서 였고, 3세기 경에는 유럽에서
도 기독교 공동체가 발전하고 헬라어에 대한 지식이 보편화 되면서 유럽 개정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은 "신앙의 초기에 헬라어 사본을 우연히 입수한 자가 스스로 두 가지 언어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번역에 뛰어 들었다"라며 당시의 무분별한 번역에 대해 혹평 했는데 그 수만
큼이나 다양한 역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역본들은 문학적 언어가 아닌 지방어나 투박한 평
민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역본들을 통틀어 고대 라틴어역 이라고 부른다. 무절제한 첨삭
과 본문의 와전이 더해져 나가며 혼란을 일으켰다.
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대 라틴어 역본의 한계와 불완전성을 로마교회의 지도자들이 인식하
게 되었고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가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오늘날 제롬으로 알려져 있
음)에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을 요청한다. 제롬은 383년 복음서를 먼저 번역하여 405년에 번역
을 완성했다.
제롬의 역본은 이후 수 세기동안 서방 기독교 국가 전역에서 받아 들여져서 '공통적인'(vulgat
a :'대중적인'이라는 뜻도 있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어 사본도 오늘날
약 8,000개정도 있으며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제롬의 라틴어 번역본 역시 오늘날 원본이 없는
실정이다.
이 역본은 로마 교회의 공인 본문이 되어 교회 용어 뿐만 아니라 라틴어가 로만스어로 발전하
는 과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롬의 역본 역시 전달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와전되었고 원형
을 되찾으려는 또 다른 수많은 수정본이 만들어 졌다.
트렌트 공의회(1546년)의 결정에 따라 교황 클레멘스 8세 때(1592년)에 당시 수집가능한
모든 사본을 모아 수정본을 만들었는데 이 수정본이 현재 로마 교회의 공인본이 되어있다.
원래 성경에는 장(章)의 구분이 없었는데, 13세기에 스테판 랑튼이 라틴 번역에다 장을 구분해 놓았고
이것이 오늘날 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 구약이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받기 까지
유대교적인 문헌과 기독교적인 문헌은 무수히 많다. 그 무수한 문헌중에서 정경을 추려내는
과정은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 모든 과정에 성령이 역사 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는 신약의 유다서를 읽어 보면 알수가 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다서 1장 14~15절]
에녹은 창세기 5장에 등장하는 인물로 965년간 살았고 여호와가 데려갔다고만 간단하게 기록
되어 있다. 다시말해서 오늘날의 정경화된 구약속에서는 에녹의 예언이나 그가 남긴 말 따위
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위에 언급된 에녹의 예언은 외경에 해당하는 에녹서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구약의 중간시기에
무수히 많은 묵시문학과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문헌이 등장했는데 이를 간약적 문헌이락 부른
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것들을 열심히 읽었다. 따라서 유다서의 저자는 에녹서를 인용해
버린 것이다. 유다서의 말이 맞다면 에녹서는 어째서 정경에서 제외된것일가? 결국 정경을 추
려내는 과정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
이 아닌가?
두산세계대백과는 구약의 형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헤브라이성경의 정경화 과정은 긴 세월과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바벨론 포로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정체성이 와해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기존의 전승들을 묶어 펴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토라가 정경으로 공인되었을 것이다. 역시 동일한 정체성의 위기에 몰
렸던 마카비혁명시대(BC 2세기)와 예루살렘 멸망(AD 70년경) 이후 헤브라이성경의 제2부와
제3부의 책들이 정경으로 공인 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구약성서 Old Testament 항목]
유대교 경전(구약)의 정경화 과정은 긴 세월과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바빌론 유수 이후에 기존에 떠돌아 다니던 전승들이 문서화 되었고, 후대의 편집과정을 거쳐
BC 400년 무렵 오경(Torah)은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라(Torah),
즉 모세 오경은 유대교의 정경으로 가장 먼저 인정 받았다.
구약성경은 토라(Tanak=Torah,율법), 네비임(Nebiim=Nevi' m, 예언서), 우케투빔(Kethubim
=Keth v m, 그리고 聖문서)로 분류된다. 이 세가지 명칭의 순서는 이런 문서들이 성경으로 채택된
역사적 순서를 말해 주기도 한다.
(1) 오경의 형성
오경은 1개 이상의 문서 편집으로 형성된 합성문서이고 오랜기간의 발전과 진화를 거친 종교적 산물이다.
오경은 어떻게 기록 되었을까? 아무도 명확한 정답을 내릴수는 없다. 오경과 아울러 유대 역사나 예언자들의
설교가 언제 문서화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학문적 추구를 통하여 얻을 수 있었던
최선의 설명은 율리우스 벤하우젠의 '문서설'이다.
바빌론 유수 이전에 여러 가지 전설과 법률을 모은 것들이 구두(口頭)에 의해 대대(代代)로 전
승 되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등의 전설이 민중 속에 계속 인기를 모으
며 이 입 저 입으로 전해졌다. 그 후 유대인의 정체성이 확립되어갈 무렵에는 여러 법률, 다양
한 찬양시, 전설들이 단편적인 문헌으로 하나둘씩 나타났을 것이다.
먼저 남쪽의 유대 왕국에서 고대 유대 역사서가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 문서에는 신을 야훼
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야훼라는 말의 첫 글자를 따서 'J문서'라고 부른다. 그 다음으로 북왕
국에서 발생된 것이 'E문서'라고 한다. 이것은 J 문서보다 1세기 이상 늦게 편집 되었을 것이
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BC 621년에 유대왕국의 요시야 왕의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성전에서 발견
된 책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학자들은 이 책을 현재의 신명기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문서를 'D문서'라고 한다.
이렇게 D문서가 발견됐을 때는 이미 J, E라고 하는 서사적 역사 문서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파
악한다. D문서를 모세가 준 율법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J, E 와 D를 함께 섞고, 모세의 죽음 이
전까지의 이야기 속에 삽입했다. 이렇게 하여 오경은 점진적으로 진화해 갔다.
그 다음 문서가 거룩에 대한 규칙과 원리를 규정한 'H문서'가 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
에 의해 작성되었던 문서가 'P문서'(제사장 문서)이다. P문서의 특색은 유대민족의 종교적 제도나 절기들의
기원을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5개,혹은 4개의 각각 독립된 문서들이 수집, 편집, 삭제, 첨가의 과정을 거쳐 오경
이라는 오늘날의 문서형태가 되었다.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BC 400년 경에
유대교에서 성경으로 인정 받았다.
(2) 예언서와 성문서의 형성
바빌론 유수 이후에 여러 전승들이 오경으로 묶여 지면서 유대교가 정립 되어가고, 이때쯤부
터 예언서와 성문서라 불리는 문서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네비임(Nebiim), 즉 예언서들(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소예언서)과,
케투빔(Kethubim), 즉 성문서(聖文書)들(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다니엘,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룻기)은 BC 2세기의 마카비 혁명시대와 AD 70년경의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되었다.
예언서의 경우 마카비 시대에 씌여져 과거의 유명한 선지자들의 이름을 빌려 지나간 사건들을
예언인 것처럼 조작이 이루어졌다. 성문서들은 거의 대부분 운문(韻文)들이며, 일부는 역사를
서술한 서사시들이다. 정확한 역사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 전설들이 공통적으로 말
해주는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성경의 여러 문서들이 모이고 수집되어 정경화 되었다
는 것이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구분되는데, 전기 예언서는 여호수아서, 사
사기, 사무엘, 열왕기, 4권의 책을 말하고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 소선지
서를 말한다.
성문서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모여서 되었기에 율법서나 예언서처럼 동질적 통일성을 가지진
못했다. 성문서는 민중에게 인기가 높았던 탓에 성경으로 간주되었던 것일 뿐, 율법이나 예언
서처럼 전체적으로 또는 공식적 결정에 의해서 정경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
랫동안 성경이라기 보다는 종교 문학으로 간주되어 내려 왔었다. 성문서는 대부분 익명의 책
들이어서 그 저작자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위대한 인물(다윗, 솔로몬, 에스라 등)이
쓴 책으로 간주했다.
(3)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받기까지
대부분의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졌는데,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즈
라 4:8∼6:18, 7:12∼26, 예레미야 10:11, 다니엘 2:4∼7:28 등)은 아람어로 쓰여졌다. 이 아람어는
유대인 포로기 이후에 점차로 유대인의 구어(口語)로써 히브리어를 대신하게 되었던 방언이었다.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는 사무엘, 열왕기를 상,하권으로, 소예언서 12편을 각기 1책씩
으로 분리하여 편집 했으며, 본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24권의 책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39권으로 재편집 했다.
구약의 정경이 지금의 39권(히브리어 원전에서는 24권)으로 정해진 것은 AD 90년경의 얌니아 회의에서
였다.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무너지게 지자 위기감을 느낀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정체성을 고수하기위해 정경을 확정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오경만을 고수하던 사두개파가
괴멸된 이후 바리새파가 주도하여 AD 90년경 팔레스타인 지중해 연안의 작은 마을 얌니아(Ja
mnia)에서 회의를 개최한다.
개신교측에서는 이 회의에서 결정된 유대교 경전을 토대로 정경으로 확정 지었으나, 카톨릭은
외경을 구약성경과 동등한 권위로 수용했다. 구약성경의 토비트, 유딧 등 7서와 에스델서의
일부분 등 몇몇 부분이 그러한데 카톨릭에서는 이것을 '제2정경(7권)'이라고 부른다.
▶ 구약은 성경에서 제거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비롯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탈 유대화를 하여 유대교에서 갈려져 나왔다.
AD 1세기의 초대교회에서는 구약성경만이 그들의 유일한 성경이었다. 초창기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는
율법을 지키려고 고수하는 교인도 있었으나 서서히 유대교의 율법은 자취를 감춰가게 되었다.
구약을 대체할 복음서와 사도들의 기록들도 서서히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은 아직도 기독교의
경전으로 남아있다.
구약은 일찍부터 기독교 경전으로서 인정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비판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다.
그 이유는 구약이 철저하게 유대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구약속에서 수없이 기록된, 이방인에
대한 입에 담기조차 힘든 여호와의 저주들, 지킬수 없는 유대인의 율법, 공정성을 상실한 여호
와의 징벌, 등은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들에겐 쉽게 받아 들여질수 없다.
따라서 기독교에서의 구약에 대한 논란은 초대 기독교시절부터 끊임없이 제기 되었으며,
종교개혁때부터 현대신학까지 구약이 과연 기독교경전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수많은 논란을
야기 시켜왔다.
현재까지도 기독교는 구약과 상당한 기간동안 긴장관계에 있으며 아직까지도 구약속의 끔찍
한 성경구절을 가지고 의문을 제기하는 신자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특히 구약의 존재가치에 대해 문제제기의 불을 당긴것은 영지주의자 마르시온(Marcion.
AD 85~160년경)이었다.
초대 교회가 겪어야 했던 성경의 해석자들 가운데서 마르시온의 해석 만큼 두려운 것이 없었다.
다른 영지주의자들은 학파를 건설하는 데 불과했으나, 마르시온은 자칭 정통파 교회를 대적할 만한 교회를
세웠으며, 그 교인 숫자가 한 때 급격히 성장함으로써 자칭 정통파와의 대결에서 누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될지 그 결과가 심히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마르시온은 구약을 완전히 포기하고, 신약만을 정경화 시켜서 기독교를 탈유대화시키려고 했다.
그는 영지주의자로써 물질세계 자체가 악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러므로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는
역시 악하거나 무지하다는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받아 들였다.
마르시온의 주장에 따르면, 구약에서는 율법이 선포되고 신약에서는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예수는 사랑의 하나님이었던 반면에 구약의 여호와는 복수심에 불타는 열등한 저질신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구약은 열등하고 저질스러운 유대잡신의 율법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마르시온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에 대해서 저주와 전쟁, 피의복수 명령을 내리는 배타적인 여호와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 없다고 주장 했으며, 구약의 여호와는 우주를
창조한 저급한 데미우르고스(Demiurgus :제작자)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수없는 하나님
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과격한 바울주의자였던 마르시온은 구약을 신약의 하나님과는 다른 열등한 신의 율법과 문서
로 간주하여 결국 구약 전체를 거부한것이다. 그가 인정하는 정경은 그에 의해서 탈 유대화된
10편의 바울서신(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
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과 누가복음 뿐이었다.
그리고 소아시아 출신의 선주였던 그는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재산을 모
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성경통신대학 제3권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 1992년]
물론 그는 이단으로 배척받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이성을 지닌 여러분들이라면, 구약속에서의
무자비한 폭군 여호와에 대해서 이해할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주장은 3세기에 와서 마니교
(Manichees. 215~277)도들을 통해서 신, 구약의 구분정신이 더욱 확대 되기도 했다. 마니교
도들은 모세에게 내려진 율법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암흑의 왕'이 준것이라고 주장했던 것
이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3권 / 이동진역 / 문학수첩 / P.317]
그렇다면, 구약은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은 구약의 존재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억지논리를 만들어 왔다.
이런 보수적인 신학계의 대표적인 세가지 모델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약속(Verheissung)과 성취(Erfuellung) 모델이다.
7장의 '억지로 끼워맞춘 예수신화'라는 글에서 언급했듯이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을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하여 예수의 일대기에 끼워 맞췄다.
사실 구약의 내용은 신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박해받고 있는 유대민족에게 축복을 내려
주겠다는 것을 제외하면 예수에 대한 예언이 전혀 없다.
다만,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왜곡시켜서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방식의 문제점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한 구약의 일부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의 구약들은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두번째는 모형론(Typologie) 모델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약의 사건이
모형(模型, Typos)으로 간주되고, 그 모형들과 상응하는 원형(原型, Antitypos)이 신약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모세의 출생시에 일어났던 유아학살과, 예수출생시에 일어났던 헤롯대왕의 유아학살은
미드라쉬적 서술법으로 연관성이 있다. 즉, 예수의 출생을 모세의 출생과 비슷하게 기록하여, 그가 모세처럼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는 유대인들의 구원자라는 전형적인 모형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 전부를 이렇게 모형론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또한
구약의 사건을 토대로 본래 가지고 있지 않은 미래적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도
생긴다.
세번째는 기독론 모델이다.
이것은 예수를 중심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인데, 이런 해석의 대표자라고 할수 있는 피셔
(W. Fischer)는 구약의 모든 내용이 예수를 암시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방법의 창시자들은 바로 영지주의자들 이었다. 이것은 앞뒤 문맥이나 사건의 내용
등은 고려하지 않고 아전인수격으로 구약에 주석을 다는 일이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약의 존재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유대교
경전에서 비롯된 구약은 상당부분 기독교 교리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런 점 때문에
기독교 정경으로부터 구약을 제거하자는 마르시온적 태도는 중세기부터 종교개혁과 현대
신학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구약에 대한 부정적 입장 가운데 대표적인 학자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보기로 한다.
독일 개신교 신학자 였던 하르낙(A von Harnack. 1851~1930)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마르시온:
이방의 하나님에 대한 복음'에서 마르시온이 구약의 정경성을 부정하게 된 것은 오로지 기독교적인
하나님 개념의 본질을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바 있다. [A. von Harnack / Mar
cion: Das Evangelium vom fremden Gott, (Leipzig, 1924), 222. H. Graf Reventlow, op. cit., 40]
바울 신봉자였던 마르시온에게 구약은 진리를 반대하고 진리로부터 후퇴케 하는 것으로 파악
되었다고 하르낙은 정의했다. 구약은 단지 바울의 안티테제(Antithesis)의 형태로, 율법과 복음,
진노와 은혜, 행위와 믿음, 육과 영, 죄와 의, 죽음과 생명의 강력한 대조를 보인다.[A.Har
nack / History of Dogma,]
하르낙은 마르시온의 입장을 두둔하면서 구약을 기독교 정경에서 제거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
워 했다.
"AD 2세기에 구약을 거부한 것은 오류였다. 당시 핵심적인 교회가 이러한 오류를 수용하지 않은 것은
옳았다. 16세기에 구약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그 때까지만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당시 종교개혁의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도 개신교에서 구약을 여전히 정경의 문서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종교와 교회가 불구가 된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다." [A. von Harnack / op. cit., 217. H. Graf Reventlow,
op. cit., 40~41]
라이프지히 대학에서 앗시리아학 교수를 역임했고, 브레슬라우 대학, 베를린 대학등을 거쳐
구약성경의 역사를 중근동 지방의 환경 가운데서 보는 안목을 넓혀 놓았던 델리취(Delitzsch
Friedrich. 1850 ~ 1922)는 두 권으로 된 '대 사기극'(Die grosse Taeuschung)이라는 저서에서
구약성경에 대해 혹평했다.
델리취의 주장에 따르면 구약의 역사서들은 역사적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없으며, 여호와는 특정한 민족의
신으로서 도덕적 수준이 너무 낮은 저질스런 신이라고 평가했다. 또, 여호와만 도덕적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라 구약속의 선지자들을 비롯한 중요한 인물들은 모두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며, 시편은 도덕적으로 저급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는 이런 유대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여호와를 우주를 창조한 창조신과
동일시한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유대교의 여호와 신앙을 전 세계에 전파한다는 것은 미친 생각이라
는 것이다. [H. Graf Reventlow, Hauptprobleme der alttestamentlichen Theologie im 20. J
ahrhundert. Ertraege der Forschung Bd. 173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
chaft, 1982), 36-37.]
양식비평을 개척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불트만(R. Bultmann. 1884~1976)은 구약성경은
신약의 전제(presupposition)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보았으며 구약과 신약의 신
학적 불연속성을 주장했다. [ R. Bultmann, "The Significance of the Old Testament for the
Christian Faith", 14.] 불트만은 구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약은 유대인들에겐 계시로 받아 들여졌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약은 더 이상 계시가 아니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역사는 이미 흘러갔고 끝이 났...(중략)...
즉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에게 더 이상 계시의 역사가 아니다." [ R. Bultmann /
"Die Bedeutung des Alten Testament fuer den christlichen Glauben", Glauben und Verste
hen Ⅰ, Tuebingen, 1933="The Significance of the Old Testament for the Christian Faith",
B. W. Anderson, op. cit., 31.]
바움게르텔(F. Baumgaertel. 1888~1981)에 따르면 구약은 오직 우회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으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약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부정적
인 방식'(via negativa)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F. Baumgaertel / Verheissung: Z
ur Frage des evangelischen Verstaendnisses des Alten Testaments (Guetersloh, 1952), 151.]
"구약은 일차적으로 종교에 대한 증언이고, 이 종교는 비기독교적인 종교이고, 구약을 이해함
에 있어서 구약은 원래 복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F. Baumgaertel / "Der Dissensus im V
erstaendnis des Alten Testaments", Evangelische Theologie 14, 1954, 312.]
"구약은 복음 밖에 있는 종교로부터 온 증언이다. 따라서 구약은 우리에게는 이질적인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은 기독교라는 종교와는 다른 자리에서 생긴 것이다
." [F. Baugaertel / "The Hermeneutical Problem of the Old Testament", B. W. Anderson,
op. cit., 145.]
구약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구약 성경학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신약성경학자들의 글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필 하우어(P. Vielhauer)와 헨센(E. Haenchen)같은 신약학자들은 구약의 근본진술
들은 그 본래의 의도로 본다면 기독교 정경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P. Vielhauer / "Pa
ulus und das Alte Testament", in: Studien zur Geschichte und Theologie der Reformation
(FS E. Bizer),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69), 33-62.] [E. Haenchen / "Das Alt
e <Neue Testament> und das Neue <Alte Testament>", in: Die Bibel und Wir, (Tuebinge
n, 1968), 13-27.]
린다스(B. Lindars)는 구약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구약은...(중략)....오직 복음에 이르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재촉하는 종으로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중략)....그것도 그 길을 인도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 B. Lindars / "The Pl
ace of the Old Testament in the Formation of New Testament Theology", New Testament
Studies 23, 1976/77, 86.]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
"(신약에) 구약이 인용된 것은 그것이 의도적인 진술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요약하면 첫 번째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독립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았고 이 보다는
해석된 권위를 가진 것으로서 그 가치를 부여했다" [James D. G. Dunn/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 (London, 1977), 94.]
구약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배타적인 고대 유대인이 남긴 문서
이다. 특히 구약이 저질스러운 이유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전쟁과 폭력을 명령하는 여호와,
이방인들에 대한 저주, 죄를 지은 사람과 관계없는 엉뚱한 사람에 대한 여호와의 혹독한 벌,
사소한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도 죽여버리는 여호와, 불합리한 율법 ,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를 요구하는 여호와등이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성경이 반인륜적이라는 이유로 어린이 금서목록에 올릴 것을 주장하는
변호사도 있었다.
"토픽 - 獨변호사 성경은 어린이에게 불량도서: 독일 변호사 2명은 성경이 끔찍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런 내용이 삭제되지 않을 경우 어린이 금서목록에 공식적으로
올려야 한다는 청원서를 크리스티네 베르크만 가족장관에게 2일 제출.
이들은 일부 학부모를 대리해 제출한 청원서에서 성경이 섬뜩한 일부 내용을 신의 뜻이라고
미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량학살, 인종차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 간음자와 동성애자에 대
한 잔인한 처형, 자기 자식 살해 및 기타 외고집 행위 등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
한편 뮌헨 가톨릭교회 관계자는 성경을 어린이 금서목록에 올려야 한다면 역사책이나 신문도
마찬가지여야 한다며 이들의 요구를 터무니없다고 반박하고 이런 문서를 제출한 변호사들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논평." [뮌헨 AFP=연합뉴스]
참, 재미있는 기사가 아닌가? 성경이, 특히 구약이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가득찬 것이라는 것
은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르낙은 개신교에서 구약을 여전히 정
경의 문서로 보존 하고 있는 것은 종교와 교회가 불구가 된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구약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들은 구약이 제거 되면
기독교의 케리그마(kerygma)가 상당히 빈곤해질 것이며, 창조신앙도 흔들리게 될것이라고 주
장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흔들리게 되면서, 어느종교를 믿어도 선하고 올바
른 삶을 살면 구원받을수 있다는 종교로 변하게 될것이라고 주장한다.(이슬람교도 이런 교리
를 갖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복음전파의 걸림돌이 되며 신자들이 줄어들게 될것이라고 두려
워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 치고 발버둥 쳐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부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신교는 아직도 구약에 미련을 두고 성경의 무오성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면서, 유대 민족신
여호와의 배타성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째서 유대인
제일주의의 선민사상, 즉 배타성으로 무장한 구약성경에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가?
또한, 비과학적인 창조주의 신앙을 버릴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구약을 버린다면,
진화론도 신의 창조섭리로 받아들일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것이라고 충고하고 싶다.
필자는 본서에서 예수의 존재자체에 허구성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가 허구의 인물이던 실존
인물이던간에 기독교가 배타적이지만 않다면 무엇을 믿던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
한다.
신약의 내용도 문제가 아주 없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자는 대체적으로 좋게 평가를 내릴수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정말로 마음에 와 닿는 모든이들 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훌륭한
가르침을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구약을 읽고 있자면 역겹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기독교인들이 구약에 대한 미련을 버릴 때, 기독교는 배타성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세계종교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 신약성경의 등장
초대교회시절에는 신약성경이 없었다.
또한, 당시의 교인들은 종말론적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 신약성경에 대해서 그다지 필요를 느
끼지 않았다. 즉 ,초대 기독교인들이 성경(Scripture)이라고 했을 때, 이는 곧 구약을 의미한
것으로서 주로 셉투아진트(Septuagint: 70인역)라고 알려진 헬라어 구약성경을 의미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의 가르침으로 알려진 짧은 경구들이 구전으로 전승 되었고 사도
들의 서신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구전시대라고 한다. 그러다가 초대교
회의 종말론적 기대감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자, 각종 교파에서 신약성경이 등장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의 실제적 출현은 구전의 방법에서 기록의 방법으로 변하면서, 도마복음서와
같은 짧막한 경구와 사도들간의 서신들에서부터 시작하여, 복음서, 행전, 계시록등 여러 종류
의 많은 기독교 문헌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나그 하마디 문서의 발굴로 인해 초대교회가 종말론적인 영지주의적인 성격을
지녔고,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교파들,그리고 교파들간에 각각 다른 복음서와 사
도행전들이 혼잡하게 난무했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바울의 서신들 뿐만 아니라 짧막한 구전의 전승들을 낭독하곤 하였다. 당시
에는 아직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복음의 목록이 없었으므로 교회에 따라 낭독하는 복음서들이
서로 달랐다. 각 교파마다 서로 다른 교리와 각각의 신약성경이 난무 했었기 때문이다.
신약문서의 첫 출발은 바울 서신이었고 가장 먼저 책으로 수집 되었다.
바울 서신들이 집성되어 발간된 장소는 AD 90년경의 에베소였다고 학자들은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업이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졌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확답을 얻을만한 역사적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두가지 가설이 있다.
첫째는 빌레몬서를 매개로 해서 추리해 본 굿스피이드와 존 녹스의 가설이다.
그들은 빌레몬의 종 이었던 오네시모와 에베소 교회 감독이었던 오네시모를 동일인으로 본다.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주 했을때 객지에서 바울을 만나 도움
을 받게된다. 그 오네시모가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고나서 바울의 편지들을 모아 출
판하는 일에 착수했다는 가설이다.
둘째는 미국 침례교 학자 다나의 가설인데 바울의 사망이 그의 서신을 수집하는 계기가 되었
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구전에 의해서 전승되던 예수의 행적을 담은 복음서는 바울의 서신들보다 늦게 등장했
다. 초기의 복음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한 짧막한 구절들이었다. 그러한 가르침이 집대성
되서 도마복음서와 같은 문헌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학자들은 도마복음서가 초기의 복음서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한다. 도마복음서는 오늘날의 복음서가 형성되기 전에 예수의 교훈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자료 문헌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이 이른바 Q문서설인데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할때 이것을 자료로 사용했을것이라는 것이다.
Q라는 것은 본래 자료(Quelle)라는 뜻을 가진 독일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관복음 특히 마태
와 누가의 두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예수의 교훈이 어떤 동일한 자료에서 발생되었다
는 생각에서 끌어낸 가상적 자료이다.
예를들어, 도마복음서에는 예수의 행적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수와 제자들의 문답을 담고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4복음서속에서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이 도마복음서속에 거의
다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Q외에 증빙서라고해서, 예수의 생애에서 성취된 구약 예언들을 모아 놓은 성구집이 있다.
이와 같은 자료 문서들 외에도 누가, 마태가 개별적으로 특별히 참고했던 자료집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생애와 사도들의 서신을 연결시키기 위해 구전으로 떠돌아 다니던 사도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으로 등장하게 된다. 공동 서신이 한 그룹으로 모인것은 상당히 후대 즉, 2세기 말
이후의 일이었다.
묵시록(默示錄)은 처음에 널리 알려졌으나 2세기 후반경에 이르러서는 인기를 많이 잃게 되었다.
특히, 로마에 적대적인 감정을 나타낸 요한계시록은 정경으로 채택되어 견고한 위치를 얻까지
200년 이상이나 싸움을 겪어야 했다. 실상 그 싸움은 그 후까지 계속되었고, 현대 교회에서도
그 책을 정경에 완전히 넣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차츰 여기저기서 신약성경이 등장하고 있을때 마르시온의 도전은 교회의 반응을 요구하고 있
었다. 마르시온은 다른 영지주의자들보다 더 큰 위협을 교회에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독자적 감독들과 독자적인 성경을 갖춘 교회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J.L.
곤잘레스 / 초대 교회사 / 서영일 역 / 은성]
마르시온의 독자적 노선에 대항하여 자칭 정통파들은 전체적으로 기독교 경전의 목록을 마련
하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 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한 교파에서
스스로 정경(canon)을 작성, 발표했으므로 자칭 정통파 들은 정경화 작업을 착수 하기 시작했
다. 그것이 바로 무라토리 정경 목록이라는 신약성경 목록이다.
AD 170 년경의 무라토리 정경목록에는 현재의 신약 27서 중에서 베드로 전 후서, 야고보서,
요한3서, 히브리서가 빠져 있다. 베드로 전서를 제외한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 2-3
서, 요한 계시록등의 책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어려운 투쟁을 거쳐서 정경으로 채택된 것이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은 그 각 책의 사도적 저작권 문제 때문 이었다.
신약 27권 중에서 베드로후서, 요한 2-3서, 유다서, 요한 계시록을 제외한 정경이 5세기 초에
시리아(수리아) 말로 번역되어 표준성경의 구실을 하였는데 그것을 페쉬타(Peshitta)라고 부른다.
동방의 시리아교회는 지금까지도 계속 22권짜리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
4세경의 유세비우스(270~340)는 정경을 호모레고메나(Homolegomena: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진 책),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일부의 반대가 있었던 책), 노타(Nota:가짜책)의 세 가지로 분류하면서
정경의 목록을 제시했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 후서, 요한 2-3서를 안티레고메나에
분류했고, 요한 계시록은 호모레고메나에 분류했지만 노타에 넣어야 된다고 자기의 의견을 덧붙였다.
4세기 경의 예루살렘의 키릴(AD 315~386)은 신약성경의 강의목록에서 요한 계시록을 제외
한 모든 책을 소개했다. 요한계시록은 11장에서 언급했듯이 로마제국을 비판했다는 지적 때문
에 가장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한 경전 이었다.
AD 367년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경과
똑같은 목록을 제시했다. 이 신약성경 27권을 393년에 힙포 레기우스에서, 397년에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각각 정식 채택했고 어거스틴도 이 정경을 지지했다고 한다.
그것이 마침내 제롬의 라틴어 번역(Vulgata)을 통해서 전 서방 교회에 유포, 사용 되었다. [박
창환 / 성경의 형성사 / 대한기독교서회] [김남중 / 논문:성경의 형성사]
▶ 본문비평에 쓰이는 신약의 사본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AD 2~10세기 사이에 쓰여진 사본들만 남겨져 있을뿐 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본들 역시 내용이 같은것은 하나도 없다.
초기 번역본에 대한 사본들도 약 1만개 이상 보존되어 있고 교부들의 인용문도 수천에 달하고
있다. 따라서 부분이든 전체든 신약이 수록된 헬라어 사본은 대략 5,500여 개 정도가 있다.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은 단편(=파편)들 뿐이지만 신약 전체의 40%가량을 포함한다. 반 이상
이 AD 4세기경의 것들이고 그중 가장 오래된 단편적인 사본 하나는 AD 140년경으로 여겨다.
현존하는 파피루스는 모두 이집트에서 발견 되었는데 사본상의 차이가 극심하기 때문에
AD 2~4세기 동안 이집트에서는 지배적인 신약의 본문유형이 없었음을 나타내 준다.
신약의 사본에는 대자사본(大字寫本)과 소자사본(小字寫本)이 있다.
9세기까지 신약은 헬라어 대정자(大正字,대문자)를 단어와 단어 사이의 띄어 쓰기도 없이
연속적으로 기록했다. 9세기 무렵부터 현재의 헬라어 성경체와 같은 초자체(草字體,소문자)로
단어와 단어 사이도 띄어서 기록하고 구두점도 생겨나게 된다.
전자에 속하는 사본으로 바티칸 사본(부호 B), 시나이 사본(부호 S), 알렉산드리아 사본(부호A),
에프레임 사본(부호 C)이 있고, 후자에 속하는 사본은 대개 8세기 이후의 것으로 현재 2300가지
이상이 있다.
사본을 읽는 데는 후자가 더 쉬우나, 연대가 후대의 것이고 정정 가필 등이 많아 원본을 회복해 보려는
본문비평에는 대자사본이 보다 유효하다.
성경 사본 형성 과정에 있어서, 대개의 경우는 필사자가 자신의 교리대로 설명을 붙이거나, 의견을 붙이거나
해서 점점 길어지고 늘어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이 본문비평의 가장 초보적
원칙은 문서의 양이 많아질수록 후대에 변조된것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교리에 맞지 않으면 삭제하는
경우도 있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삭제 보다는 내용을 변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사본의 재료로는 무엇보다도 파피루스(papyrus)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이집트의 나일강(江)
연안에 있는 갈대의 일종인 다년초이다. 이 자료가 BC 11세기부터 문서에 사용되었고, BC 2세기 말경부터는
점점 송아지 가죽이나 양가죽이 이에 대용되게 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성서의 사본과 번역본]
5,500여개의 사본중에서 파피루스 사본은 98개(대부분 파편들), 대문자 사본 300개(가죽종이),
소문자 사본 2800여개등이다.
각각의 신약의 사본역시 구약의 사본과 마찬가지로 내용이 같은 것이 거의 없는데, 구약의 경우
서기관들이 필사할 때의 오류와는 양상이 다르다. 영지주의는 물론 수많은 종파로 갈려져
극심한 혼잡을 이루었던 초대교회시절, 자신들의 교리에 맞춰 내용을 추가하거나 변조하는 경
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물론 초대 기독교인들도 구약을 위조했다.)
신약의 문서적 날조라는 문제에 대해 쮜리히의 로버트 케일 박사의 논문집 '현대인의 종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같은 대목을 고친 두명의 수정자들은 각기 정 반대의 뜻으로 돌려 놓는수도 있다. 이것은 그
가 속한 교파의 독단적 교리, 즉 도그마 해석에 따라서 생긴 의도적 변개다. 어쨋든 산발적인
교정에 의해서 그리고 보다 많은 계획적인 교정에 의해 도저히 손댈수 없을 정도의 텍스트에
혼란이 일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중략)....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이 애당초 부터 오늘날
과 같은 형태로 존재 했다고 단정하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
옛날부터 존재했었다는 식으로 고지식 하게 믿고 있다.
그들은 모르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2백년 동안에 걸쳐 구약성경 이외에는 성경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대개가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또 구약의 중요한 부분이 기독교 초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했었다는 사실(예수가 설교의 바탕으로 삼고 있던 이사야서도 기원2,3세기 경에 마무리
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학계에서는 지배적이다.)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
신약의 본문비평에 사용되는 사본들을 살펴보자.
(1) 시나이 사본 (Codex Sinaiticus)
1884년 시나이산의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독일 신학자 티셴도르프(Constatin von Tischendorf)에 의해
발견된 AD 4세기경의 사본이다.
첫 번째로 발견된 것은 구약성경에 속하는 43매의 박피지(薄皮紙)로, 작센 후작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사본이라고 하며, 이것은 라이프치히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후에 티셴도르프가 수도원을 3차로 방문 했을때 구약성경의 150장과 신약성경 부분 148장
을 발견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헌상 했다. 이 자료는 페테르부르크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가
혁명 후인 1933년 영국에 10만 파운드에 팔아 넘겨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나이 사본은 구약의 상당 부분과 신약의 정경(正經) 전부와 바나바 서신 및 허마의 목자와 같은
약간의 외경(外經)이 들어 있는 것으로, 1881년의 영어성경 개정판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시나이 사본에는 수정된 곳이 무려 1만6천 군데나 된다. 이것은 저자들로 보여지는 7명의
교정자들 손에 의한 것들로 세번 수정되고 네번째의 원전에 의해 바꿔진 대목도 허다하다.
히브리어 사전을 저술해낸 일류 전문가 프리 드리히데리츄는 시나이 사본인 이 원전 속에서
3천 군데나 베낄때 잘못 쓴 대목을 지적하고 있다.
이 사본에서 마가복음은 16장 8절에서 끝나고 요한복음 7장 52~8장 11절의 간음한 여자의
기사, 요한복음 5장 4절, 8장 1~11절, 마태복음 16장 2~3절, 로마서 16장 24절, 마가복음 16
장 9~20절, 요한일서 5장 7절, 사도행전 8장 37절 등과 많은 내용들이 없으며 외경까지도 정
경으로 담고 있다. (내용들이 없다는 것은 해당구절이 후대의 추가된 내용이라는것을 시사하고 있다)
(2) 바티칸 사본 (Codex Vaticanus)
AD 330~340년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본으로 1457년 바티칸 도서관에 등록되었으며
10과 1/2X10인치나 되는 큰 사이즈의 필사본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그러나 바티칸 사본은 구약에서 창세기 1장 1절~46장 28절, 시편 105장 26절~137장 6절,
사무엘상, 열왕기상, 느헤미야의 부분들이 없고, 신약에서는 히브리서 9장 14절 이후,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모두 없다.
(3) 알렉산드리아 사본 (Codex Alexandreia)
5세기초에 기록되었고 1627년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던 루카리스에 의해 영국왕 찰스 1세에게
헌정되었다. 원래는 외경을 포함한 헬라어 성경 전체를 담고 있었으나 현재는 구약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신약도 일부가 빠져 있다. 구약은 2명, 신약은 3명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4) 기타사본들
이 외에도 중요한 사본들로 에프라임 사본(5세기초), 베자 사본(5, 6세기)등이 있다.
AD 4세기부터 10, 11세기의 언셜체 사본은 대부분은 단편(파편)들이지만, 그 고대성 때문에
과거 신약 성경 본문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로 여겨졌다.
소자사본(小字寫本)들은 초서체로 쓰여진 9세기에서 17.8세기의 것들이다. 모두 2,500여 개
가 넘는 사본이 남아 있지만 역시 대부분 단편들이다. 이밖에도 매일매일의 예배 중에 읽혀지
던, 신약 성경에서 발췌된 글을 수록한 독서성구집등도 신약의 원문을 복원해 내는 중요한 비
교문헌중에 하나이다.
(5) 기타 역본들
AD 1000년경 이전에 헬라어 성경에서 직접 번역된 라틴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고대 슬
라브어, 고대 그루지아어 역본들도 신약 성경 본문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이다. 어떤 경우에는
구약성경이 이미 사용되고 있기도 했고 구약의 완역이나 부분역에 이어 신약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콥트어(Coptic)는 고대 이집트어의 가장 후기 형태인데 3세기경에 처음으로 한 방언으로 신약
이 번역되었고 4세기 후에는 거의 모든 성경이 이 방언으로 번역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콥트
어 역본 대부분은 12~14세기경의 것으로 3세기의 것과는 다른 방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트어(GOTHIC) 역본은 번역자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번역자가 알파벳을 만들어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몇 개의 역본 중 하나이다. 4세기 중엽 울필라스가 만든 역본의 일부가 전해지고 5,6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그렌테우스(Argenteous) 은(銀)역본은 보라색 양피지에 은색 잉크를 사용한 호화판
사본으로 고트어 역본 중 가장 완전하게 남아있다.
아르메니아어(ARMENIAN) 역본은 예배시에 시리아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에 반대해서 5세기초 성경과
전례서의 번역이 시작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5~8세기에 원래의 역본을 개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반적으로 이 역본은 어법의 아름다움과 번역의 정확성이 매우 탁월하여 역본 중의 여왕이라 불린다.
이 외에도 시리아어, 그루지아어, 이디오피아어, 아랍어 역본들이 전해지고 있다.
(6) 교부들의 인용구
많은 교부(敎父)들이 글을 쓰면서 자기들이 볼 수 있었거나,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신약의 내용
을 인용한 것들이 있다. 비록 짤막한 인용일지라도 그들의 인용은 본문 비평가들이 원본을 찾
아가는 과정에 도움을 줄수 있다. 그러나 교부들은 자기가 가진 사본을 자기의 글에 인용하면
서 실수로 잘못 인용할 수도 있고 고의로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7) 모들렌 파피루스의 진위공방
한편 1901년 이집트 룩소에서 발견된 모들렌 파피루스(Magdalen papyrus : P64)라는 세조각
의 파피루스가 있다. 이 작은 파편은 1953년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감정 되었으나 1994년
티데라는 사람이 AD 66년의 것이라고 주장한적이 있다.
이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모들렌 파피루스는 2단(段) 형식으로 제작되어 있는데 2~3세기의
파피루스 사본은 모두 1단 형식이고, 2단형식은 구약성경의 사본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1세기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AD 5세기 경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nus)사본도 각 페이지 마다 2단(段)으로 나뉘
어져 있고 한 단에는 46~52행의 글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리아 사본도 1세기의 유
물이 될수 있을까?
또한 작가는 2~4세기에 사용된 언셜체와 글씨체가 약간 다르다며 이 사본이 1세기의 것이라
고 주장하는데, 1세기의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붓 또는 두터운 펜을 사용해 흘려쓰는 러스틱
(rustic)체가 유행했다.
나머지 그의 주장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들 이다. 글자 몇개밖에 나오지 않은 작은 파편을
가지고 마사다 요새에서 발굴된 문서와 비교하거나, 일부의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을 가지고
쿰란의 사해사본과 비교한다.
필자가 이 사본의 사진을 아무리 들여다 봐도 글자가 붙어 있다는 것을 느낄수 없었다. 신약의
사본이 두루마리 사본과 달리 대부분 양면을 기록한 코덱스 사본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필자가
확인한 사진이 한쪽면 뿐 이었다고 해도, 그 한쪽면에 붙어 있는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E와 T의 글자 끝부분이 아주 살짝 겹친것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미미해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글자는 확실하게 전부 떨어져 있었다.
그외에도 그 작가는 야고보가 처형되자 그 때부터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가르켜 노미나
사크라라고 불렀다고 주장하면서 사본에 기록된 글자와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처형
되자 그 때부터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그렇게 불렀다는것은 어디에서 근거를 찾는지 모르
겠다. 야고보가 산헤드린에 끌려온것은 요세푸스의 저서에 나오지만(물론 요세푸스의 저작물
은 위조 가능성이 크지만)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 용어를 사용했다는것은 어디에 근거 한 것일
까?
또한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들렌 파피루스는 너무 작은 파편이라서 방사성 동위원소도 할수 없
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유다복음서도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AD 220~340
년쯤의 것으로 판명했는데 왜 과학적인 검증을 피하는 것일까? 그리고 티데라고 작가의 이런
궤변은 신학계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킹제임스 성경 이외에는 사탄이 변개한 성경?
말씀보존 학회에서는 'KJV'외에는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기존의 교회로
부터 강한 공격을 받고 있다. 이른바 KJV는 히브리어로 된 마소라 사본에 충실하지만, 그 이외
의 성경은 레닌그라드 사본, 사해문서, 70인역, 알렉산드리아 사본등을 참조로 했다는 것을 비
난의 근거로 삼는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① 로마서 13장 9절
[NIV]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KJV] "너는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
NIV와 개역성경은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구절을 삭제했다고 한다.
② 고린도전서 7장 2절
[NIV] "비도덕적인 일이 많기 때문에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KJV] "음행하지 않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③ 창세기 10장 21절
[개역한글]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펫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KJV] "셈은 모든 에벨 자손의 조상이요, 형 야펫의 동생이라. 그에게서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야펫과 셈의 관계가 서로 엇갈리게 등장한다.
④ 출애굽기 22장 28절
[개역한글]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KJV] "너는 신들을 욕하지 말며 네 백성의 치리자들을 저주하지 말지니라."
⑤ 민수기 24장 8절
[개역한글]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꺽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KJV] "하나님께서 그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으니, 그의 힘이 마치 유니콘과 같도다.
그는 그의 원수 된 민족들을 삼키며, 그들의 뼈를 꺽고, 그의 화살들로 꿰뚫으리로다."
KJV에는 유니콘으로. 개역한글판에는 들소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단지 몇가지 예로 필자가 말씀보존 학회에서 일부만 가져온 것이다. 말씀보존학회에서
제시하는 엇갈리는 구절은 끝이 없고, 그걸 다 옮기는 것은 쓸데없는 지면낭비이니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과연 그들의 주장이 맞을까? 그러나 정확히 따지자면 필자는 KJV보다 요즘나온 성경 NIV,
공동번역판등이 훨씬 우월하다고 평가를 내린다.(개역한글판은 여기서 제외 하겠다.
번역이 엉망인데다가 잘 쓰이지 않는 고어가 많아서 뜻이 제대로 파악이 않되는 개판성경이라고 필자는
평가를 결론 내린다.)
KJV판을 적극 지지하는 '딘 버간 학회'(Dean Burgon Society)의 도날드 웨이드박사(Dr. D. A.Waite)에
의하면 새미국표준역본(NASV)은 구약전체에서 따져볼 때, 20,000군데에서 30,000군데의 바뀐 내용을
담고 있으며, 새국제역본(NIV)는 마소라 본문을 기초로 했지만 가장 오래된 사해문서와 라틴어 역본,
페쉬타, 탈굼등도 번역에 참조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킹제임스역본(NKJV)은 표준원문(Textus Receptus)으로 BHS를 번역의 기초로 삼
았으며, 70인역, 라틴번역판, 고대 역본, 사해 사본도 참조했다고 주장하면서 정통(?) KJV와
달라 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이나 신학대학원에서 사용하는 신약은 네슬/알란드(Nestle/Aland)의
제27판 헬라어 신약성경이다.
반면에 KJV는 '헤 카이네 디아테케'(He Kaine Diatheke : 헬라어로 신약이라는 뜻)라고 불리
는 본문(Triniterian Bible Society에서 재출간한 것)을 사용했다. 이것은 프레드릭 H.A. 스크리
브너(Frederick H.A. Scrivener)가 편집하여 1894년에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가 최초로 출간한
헬라어 원문의 복원판 이다. 이것은 베자의 5번째 판본을 토대로 하고 있다.
최근에 계속해서 발견되는 성경의 사본들은 성경을 복원시키는 자료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최근에 발견된 더욱더 오래된 사본들을
아예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KJV는 히브리 원문인 마소라 사본에 충실하다고 주장하지만, 마소라 사본은 앞서 언급했듯이
AD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BC 2세기에 제작된 사해문서와 연대기 적으로도 비교도 않되
는 것이다. 또한, 원래 자음뿐이던 히브리어에 마소라 학자들이 모음을 만들어 붙였으며, 예레
미야서의 경우 마소라 본문이 70인역보다 7분의 1정도나 내용이 많다. 즉, 마소라 사본 역시
나중에 많은 내용이 덧붙여진 것이다.
앞서 본문비평에서 언급했듯이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본을 비교 검토해야 한다.
오로지 마소라 사본만으로, 그것도 마소라 계열의 레닌그라드 사본조차 배격하면서 오래전에
편찬된 BHK1만을 고집 하겠다는 것은, 알기쉽게 잘 번역된 공동번역판 또는 표준새번역판 성
경을 외면하고, 난잡하기 그지없는 개역한글판만을 고집하겠다는 외고집 행위나 다름없다.
(필자는 이 책을 쓰면서 공동번역판 또는 표준새번역판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싶었지만, 개신
교인들이 주로 보는 성경이 개역한글판 이기에 어쩔수 없이 개역한글판을 사용했다)
더욱이 '한글판KJV'는 '개역한글판'만도 못하다. 대한성서공회의 설명에 따르면 개역한글판이
오래전에 번역된것이기는 해도 여러번에 걸친 개정에 의해 본문비평에 따른 연구결과가 반영
되어 있다고 한다. 반면에 '한글판KJV'는 '영어KJV'를 한글로 번역한 2중 번역이다!
만약, 히브리어나 헬라어 사본들을 비교 검토해서 직접 한글로 번역했다면, 그것은 그 순간 KJV가
아니라 독자적인 버전의 성경이 된다. 결국 '한글판KJV'는 '영어KJV'를 한글로 번역한 2중 번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성경으로는, '현대인의 성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영어의 TEV(Today's English
Version)를 한글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은 2중번역 이므로, 신학자들의 연구에 쓰이지도 않고 예배용으로
외면받는 성경이다.
그야말로 KJV를 제외한 나머지 성경은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는 주장은, 성경에 대해서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광신자들의 추태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