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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2011년 5월 20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사도13,26-33 요한14,1-6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김찬선신부님
“형제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어제에 이어 바오로 사도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유다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뽑으시고
들어 높이시고
이끌어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시고
판관을 세워주시고
왕을 세워주셨음을 얘기하고
이제 구원자 예수님을 주셨음을 얘기합니다.
바오로가 얘기하고픈 것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좋은 것을 주셨고,
좋은 것 중에서도 좋은 것인 구원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아끼고 아끼던 것을 아낌없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되게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의 얘기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것은
제가 한 형제를 크게 실망시킨 애깁니다.
그 형제는 저를 무척 사랑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형제에게 주는 것도 없고 해주는 것도 없는데,
그렇게 보답이 없는데도 그 형제는 저에게 꾸준히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형제가 싹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저에게 아주 쌀쌀맞게 대하고 아예 피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 “왜 저러지?”하면서도 무심히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가장 아끼던 것을 저에게 주었는데
저는 그것을 다른 형제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애착하지 않는다는 가난 차원에서 또는
형제애를 나눈다는 차원에서
형제들이건 신자들이건 저에게 주신 것을 제가 소유하지 않고
바로바로 더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주었는데
그 형제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매우 서운했던 것입니다.
얼마라도 간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었어야 했는데, 적어도
아끼던 것을 준 것임을 알아주기라고 했어야 했는데
저는 정말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주 나쁘고 못된 놈이었습니다.
오늘 바오로의 말씀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구원의 말씀을
알아보지 못하였음을 꼬집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버리고,
은총을 알아보지 못하고 악처럼 단죄하고,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죄처럼 죽여 버립니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하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하고,
지금 나에게 전해진 말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하고,
이 시간 괴롭다고,
그것은 형편없다고,
그 말은 쓰다고
오히려 타박하고 흘려버리고 버려 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돼지들에게는 더 이상 진주를 주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버린 돌 모퉁이돌 삼으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돼지로 여기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오히려 당신 아드님처럼 모퉁이 돌로 삼으시겠답니다.
"영원한 길벗(道伴)" /이수철신부님
신자들의 고백을 듣다 보면,
‘사는 것이 재미없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처음 호기심에 재미있게 읽던 책도
중반 넘어서는 뻔히 짐작되는 내용에
재미를 잃고 대충 책을 넘기듯,
우리의 삶이라는 책도
읽어갈수록 재미를 잃어가는 게 보편적 현실 같습니다.
바로 영성생활의 위기를 반영합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재미없는 삶이
우리를 타성에 젖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삶의 의미도 서서히 퇴색되어 가면서
소리없이 스며드는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비인간화의 추세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새삼 수도영성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자가 수도자이며,
하느님을 찾는 일이 수도자의 일이라 합니다.
매일 수도자는 무엇인가 묻는 자가 수도자이며,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자가 수도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수도자(修道者),
구도자(求道者),
공교롭게도 가운데
‘길’ ‘도(道)’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길을 닦는 재미로,
길을 찾는 재미로 살아가야 하는
영적 인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주님의 길을 잃어,
주님의 길이 보이지 않아 산란해 지는 마음이요,
하느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때
밝아지는 길눈에
선명히 나타나는 주님의 길이요 내적평화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방황은
생명의 아버지께 가는
진리의 길이신 주님을 잃어버림으로 시작됩니다.
우리의 참 기쁨이자 재미는
하느님을 찾아 주님과 함께 길을 갈 때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고정불변의 객관적 길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을 찾는
길눈 밝은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길입니다.
냉담으로 믿음 약해지면
시야에서 사라지는 주님의 길이기에,
날마다 새롭게 찾아야 하는 주님의 길입니다.
새삼 길벗, 도반(道伴)의 고마움을 깨닫게 됩니다.
혼자 가는 인생길 너무 외롭고 쓸쓸하기도 하여,
유혹도 많고 중도에 포기하기도 쉽고
길 잃어버릴 위험도 큽니다.
마라톤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함께 어울려 뛸 때
동료 주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중도 포기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가는 길 벗,
길동무,
도반 있어 아버지께 가는 길 재미있습니다.
길벗과 함께
하느님을 찾아
주님의 길을 걷는 재미로 사는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주님을 찾는
도반들인 형제들이, 공동전례가 한없이 고맙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부활시키신 주님이
우리의 참 좋은 길벗입니다.
보이는 길벗들 다 사라져도
보이지 않아도 영원한 길벗,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부활하신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삶의 이정표와도 같은 미사를 통해
하루의 길을 환히 밝혀주시고,
친히 우리의 길벗이 되고자 오십니다. 아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빛나는 작은 길 /양승국 신부님
아주 크고 사납고 나이도 먹어 산전수전 다
겪은, 그래서 사는 것도 지루해 보이는 큰 개와
인형같이 작고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도 모르고,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새끼 강아지가 있다면
아이들은 어느 쪽으로 달려가서 놀겠습니까?
아마도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이들은 작고 어린 강아지 쪽으로 달려가겠지요.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도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잘 성장해서
체격도 이젠 당당하고, 공부도 곧잘 따라가고,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는 아이와 어린 시절부터
못 얻어먹어 체구도 또래 아이들과 크게 비교될 정도로
왜소하고, 자주 아프고, 늘 뒤처지는 아이가 있다고
할 때, 먼저 시선이 가는 쪽은 어느 쪽일까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연히 덜 떨어진
아이에게로 시선이 먼저 가겠지요.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일까요?
우리가 그간 쌓아온 업적 때문일까요? 우리의 성공,
승승장구해온 빛나는 삶 때문일까요?
제 생각은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한계,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의 결핍은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를 향한 한량없는 하느님의 측은지심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봤습니다.
결핍, 작음, 나약함, 연약함, 소박함...이런 단어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성장제일주의
경제우선주의 구호에 파묻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홀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좁고 작은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작은 모습으로 오셨고
인간으로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겸손의 삶을 일관되게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은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
젖어들지 않으시고 초지일관
가난과 소박함을 바탕으로 한 무소유의 삶,
영적 삶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길’이라고 지칭하십니다. 오직 그 길만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그 길,
오늘 우리의 묵상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작음과 겸손함, 한없는 자기낮춤,
가난을 배경으로 한 빛나는 작은 길입니다.
아버지의 집 /송영진신부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라고 누가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대답하셨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문이 좁고,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이 많다는 것뿐이지
구원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거나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을 보면,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은 문이라고 해도,
그래도 구원받을 사람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자격만 갖추면 모두 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묵시록 7장 4절-8절의 '십사만 사천 명'은 상징적인 숫자일 뿐이고,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정해져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5월 20일의 복음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고 하십니다.
거처할 곳이 많다는 말은,
그 공간이 무한정 넓어서 모든 사람을 충분히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자격만 있다면 다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스스로 안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못 들어가겠지만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할 것이고,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들어갈 생각이 없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 것이고,
그래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경쟁'이 아닙니다.
누구나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아니, 함께 가야 합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남태평양의 어떤 섬나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에서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명을 거부하고 원시 상태로 사는 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도 좀 더 잘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고
은행을 만들어서 거래를 하는 등의 경제활동을 하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미래를 위해서 저축도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 나라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할까?
기자가 그들에게 왜 행복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의 전통을 지키면서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그들 자신의 대답이고,
진짜 행복의 원인은 다른 데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방송을 보면서 왜 그들이 행복할까, 궁금해 하면서
그들에게 없는 것과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남들보다 더 잘살고 싶어 하는 경쟁심과 이기심과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자도 없었지만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추장이 은행장을 겸하고 있었지만 사는 모습은 똑같았습니다.
경쟁심과 이기심과 욕심 없이 함께 사는 모습... 그곳이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곳에 가서 직접 보고 싶지만
우선 방송에서 보이는 그들의 모습만 보면,
우리에게는 없고(우리는 잃어버리고) 그들에게는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이 같은 단순함과 순수함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에 뉴스 시간 때마다 보도되는 몇몇 은행에 관한 일들을 보면,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만 살자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추한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그게 바로 지옥의 모습입니다.
가난한 서민들은 평생 저축한 돈을 잃고 통곡하고 있는데,
잘사는 자들은 자기 돈을 미리 다 챙겨서 사라지는 모습... 사탄의 모습입니다.
제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감독 권한을 가진 곳의 비리가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제도를 정비하고 법을 만들고 제대로 감독을 한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몇몇 국책 사업 때문에
지역갈등이 폭발하고 있다는 뉴스도 자주 보게 되는데,
그런 갈등에서도 역시
'함께 살자.'가 아니라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심을 봅니다.
한쪽에서는 울분을 터뜨리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웃으면서 흐뭇해하는 모습...
글자 그대로 정나미가 떨어지는 장면입니다.
과연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
어떤 곳이어야 할까?
내일에 대한 믿음 /엄기선 신부님
언제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집니까? 불안한 마음이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는 것은 평화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조금만 이상해도 전전긍긍하는 우리들 모습을 보고 믿음을 심어 주신
주님은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것을 살펴봅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삽니다. 사회적인 악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죄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얽매여 신앙인으로서의 도리를 못한다면,
우리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미래의 불안을 떨쳐야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때문에 오늘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면 하느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고 하느님께 신뢰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어지는 시간이라는 선물 앞에 오늘 하루도 살아 볼 가치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오늘을 하느님 은총 안에 사는 것이 바로 우리들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길은 꽃을 보고 찾는 게 아닙니다! /반명순 수녀님
본당에 부임한 후 며칠 안 되어 가정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행하던 신학생이 “수녀님께서 어제 다녀오셨다니
집은 금방 찾을 수 있겠지요?” 라고 묻기에
그 근처에 꽃이 많이 피어 있던데, 곧 찾을 수 있다며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막상 집 부근에 도착하자
도통 가름할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여기냐고 눈빛을 마주하는 신학생에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길모퉁이를 돌아서는데,
그곳에도 흐드러지게 핀 꽃무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나, 여기도 꽃이 있네.” 나의 경탄과 놀라움에
기가 막힌 신학생이 점잖게 한마디 합니다.
“수녀님, 길은 꽃을 보고 찾는 게 아닙니다!”
나의 수도 삶에서 ‘길’은 화두였습니다.
‘생명의 길을 어디로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하는 게
열병같이 따라다녔습니다. 찾고자 했던 관계의 길은 난해했고,
사랑의 길은 모호했으며, 진리의 길은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상처를 받고, 상처를 입히기도 하며,
못다한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옳다고 여기며 걸어온 길의 끝에 서서 이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님, 이 길이
주님께서 앞서 가신 길입니까?’ 하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사도 토마스가 예수님과 동반했던 수많은 시간의 끝에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듯이, 제가 잃었던 막다른 길에 서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이정표를 보았습니다.
제가 찾던 길은 지식 속에도, 권위와 인정 안에도,
명예와 재화의 한가운데도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았던 형제 · 자매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작은 일들,
보잘것없어 지나쳤던 사건들 안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길은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되는 것이며, 그분 안에 머물 때만
생명과 진리의 빛 안에서 걸어갈 수 있음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이제 제가 아는 길만이 길이라고 고집하지 않으려 합니다.
주님을 표지판으로 삼고 제가 모르는 다른 길을
따라 나의 이웃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박동순 신부님
진리가 아닌 것을 믿고 생활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생명을 잃을 뻔한 사람이 생명을 되찾았을 때, 그 사람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남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얘기고 나 자신의 얘기입니다.
길은 목적지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목적지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이 바로 생명입니다.
모든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가야 하고, 모든 진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수 있고, 모든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서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실 뿐 아니라
사람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끌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그 길의 목적지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을 알려주시고, 그 길이 되어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하느님한테서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온 우리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도록 그 길이 되어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끝없이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사셨고
십자가의 길, 영광의 길을 걸으며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의 문 /박민서 신부님
우리는 많은 문들을 지나갑니다. 방문, 현관문, 식당문…. 이 문들의 특징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가는 구원의 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과는 다릅니다. 구원으로
가는 마음의 문은 고리가 안에 있어서 밖에서 두드릴 수는 있어도 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열어야만 열리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내가 열어야만
열릴 수 있지만 항상 열려 있는 문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 향하는 문입니다.
그 문은 우리를 향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아기가 자궁 안에서 10개월 동안 기다리다가 자궁 문을 통과하여 세상으로
나올 때 엄마의 도움도 받지만 전적으로 자신이 온 힘을 다하여 자궁 문을
나오는 과정을 갖게 됩니다. 나오는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고통과 두려움을
겪게 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면 밝은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사랑하는 엄마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그때 아기와 엄마의 고통은
경이로운 감탄과 축복과 은총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과정이 고통일 수 있지만 그 너머 나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또 그렇게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도 지금 겪고 있는 고통 속에
숨지 않고 스스로 고통의 문을 열고 나와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용서합시다 /김기현신부님
살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의 결과가 나쁘게 예상될 때 마음이 산란하고,
중요한 시험이 다가올 때 마음이 산란합니다. 또
가까운 사람들과 다툼이 있을 때 마음이 산란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산란해 질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관계에서 주고받는 갈등과 상처가 가장 크고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것들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는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정할 수는 있다.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살아가면서 상처를 주고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어떻게 용서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용서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음주운전자로 인해 남편을 잃고
오랜 세월 분노와 슬픔으로 살았던 부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 상처가 아문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러진 팔이 붙는 것과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부러진 팔이 붙기는 하지요. 하지만
뼈가 제대로 붙지 않아 팔이 비뚤어지게 되죠.
또 팔이 너무 약해져서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다시 부러지게 되지요.
용서하지 않고 그냥 방치된 상처는
아물긴 아무는데 뒤틀리고 나약한 내면세계를 만들 뿐이지요.”
이처럼 용서는 시간만 지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기로 결심한
사람만이 그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하기로 결심하기가 힘든 대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작업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종이란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신앙심이 깊고 착실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고3 때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불량배들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인종의 부모님은 열심한 신자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안 가해자 학생의 부모들은 여러 차례 인종이의 부모님을
찾아와 예수님 이름을 들먹이며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인종이의 부모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학생들을 용서하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절대 당신 아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당신들을 보면 무척 괴롭습니다.”
이렇게 정말 하기 어려운 용서를 신앙 행위로 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용서를 하고 나서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 점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한 바로 그 주간 주일미사 중에 아들이
주님 품에 안긴 것을 환시로 본것입니다. 이 체험을 하고 나서
인종의 어머니는 비로소 가해자 학생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는 곧 화해다.’ 라는 생각입니다.
용서는 상대방과 관계없이 나와 나의 미래를 위해서
나 혼자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화해는 쌍방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실수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굳이 상대방을 찾아가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라고 말했다가,
더 큰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같은 공동체 자매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아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오랫동안 그 자매를 멀리했는데, 우연히
그 자매와 함께 기도회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봉사자끼리 사이가 안 좋은 것이 마음에 걸려 그 자매를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에게
“우리 서로 용서하고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합시다.” 라고 말했더니,
상대방이 하는 말이 “그래, 당신 잘못을 당신이 알겠지?”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용서했다고 해서,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과 반드시
관계를 재계하고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화해는 용서가 이루어진 다음에 생각할 문제이고,
쌍방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어느 한 쪽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마음을 열지 않고 있을 때는 아직 화해할 시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참조)
오늘은 나와 나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화병에 걸리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살아가기 위해서
‘용서하는 일’에초점을 맞춰 봅시다.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누구냐? /양승국 신부님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이 재판을 받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일선 파출소를 거쳐 경찰서로
넘어간 아이들은 검찰로 넘어가게 되고
구치소와 소년분류심사원을 거치게 되는데, 다 합해서
짧게는 한달, 길게는 두세 달 가까이 걸리기도 하지요.
전혀 와보지 않았던 낯선 곳들을 전전하면서 아이들은
나름대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불안하고 답답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도 한 아이를 법정에서 데리고 나왔는데,
아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우선
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지요.
먼저 아이를 음료수 자판기 앞으로 데리고 갔지요.
시원한 음료수를 하나씩 뽑아든 우리는 잠시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말을 건넸지요.
"반갑다. **야! 그 동안 고생 많았지? 어디 아픈 데는 없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 집에 가면 지낼 만 할거야."
즉시 아이의 얼굴이 편안해지는 것을
저는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 우리 교육자들, 부모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안심시키는 사람이어야 되겠구나.
이 땅에서 팍팍하게 청소년기를 보내느라
갖은 스트레스로 맛이 간 아이들이 마음 편히
기대고 쉴 수 있는 고향의 언덕 같은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겠어!" 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한가지
큰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틈만 나면 <나는 간다.
머지 않아 곧 떠날 것이다>고 말씀하시는데...혹시라도 예수님이
먼저 떠나시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거지?
저분은 그간 우리의 중심이자 희망이었는데...저분이
떠나고 나면 우리는 끝장나는 것 아닐까?"
불안과 걱정에 휩싸여 살아가던
제자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위로의 말로 제자들을 안심시키십니다.
"너무 그렇게 걱정들 하지 말거라. 내가 있지 않느냐?
내가 누구냐? 내가 나 혼자만 잘먹고 잘 살겠다고
너희들을 버리고 떠날 사람 같으냐?
기억하거라. 이별은 잠시란다.
내가 먼저 가는 이유는 너희를 위한
명당자리를 잡기 위한 것이란다.
너희가 안심하고 푹 쉴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서
선발대로 약간 일찍 떠나는 것이란다."
이렇듯 우리의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안심
시키시는 분,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우리의 안전과 평화와 구원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분,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독서>; 주님 안에 모두 한 형제 /경규봉 신부님
바울로는 유대인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구원의 말씀을 선포한다.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은 예배 때마다 예언서를 읽지만
예언서의 올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 구세주로 이해하지 못하고 처형하였다. 이는 그들이
무지했기 때문이며, 예수님을 처형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도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미 예언하신 하느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의 처형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며,
이는 곧 구속사의 핵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예수님을 처형한 유대인들이 불법적이고 부당한 행위임을 여실히 증명해 주셨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정당하고 올바른 것임을 인정해 주셨다.
따라서 바울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이단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믿어온 그 하느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성취된 소식이다.
바울로와 사도들은 이 모든 것의 증인이며,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무지를 벗겨주고자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바울로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라는 시편(2,7)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곧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세상에 오신 메시아임을 선포한다.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주재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사람들이 서로 믿음이 다르고, 그래서 그분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라도
그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분 앞에서는 인종도, 신분이나 지위도,
성별의 구분도 필요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그분께는 소중한 존재이며,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한 형제이다. 사람을 구분하고 편을 가르는 것은 사람일 뿐,
그분은 편을 가르지도 않으시며, 차별대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분 안에 살고, 그분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분처럼
사람을 구분하여 차별대우하지 않는다. 모든 이를 형제로 대하고, 사랑으로 맞이한다.
그 어떤 죄나 허물과 잘못, 부족함이나 연약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낸다.”(1고린 13,7)
예수님께서도 결코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대우하지 않으셨으며,
모든 이를 사랑으로 감싸셨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창녀나 세리뿐만 아니라
불구자나 죄 많은 여인까지도 예수님은 사랑으로 감싸주셨다.
사도 바울로 역시 예수님처럼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며 끌어안는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인 형제 여러분”
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예수님을 처형한 것은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고 그들을 두둔한다. 그들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소중한
형제이며, 하나임을 선포하며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한다.
그들은 주님을 처형했기에 구원에서 제외될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아야 하는 형제임을 선포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편을 가르고 구분을 한다면, 그래서 우리와 다르다는
까닭으로 그를 기피하고 단죄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아직도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안에 그들을 감싸고 형제로 대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에 너무 부족하다.
오늘 주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그래서 나와 전혀 다른 이들까지도 사랑
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가득하기를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예수님 자신이 우리가 걸어갈 길이다 /박상대 신부님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마감할 즈음에 이제 곧 세상을 떠나야 함을
내다보시고 사랑하시는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후
손수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특별한 사랑을 행하셨다. 이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까지 겸손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고, 서열(序列)에 관계없이
'모두가 서로를 마땅히 섬겨야 함'을 엄중하게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을 토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도 선포되었다. 이 계명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 안에서
세상이 예수를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을 이어갈 제자들의 사명은 분명해졌다.(요한 13장)
그러나 예수님의 고별식(告別式)이 순풍에 돛단 듯 매끄럽게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스승을 팔아 넘기게 될 가리옷 사람 유다는 사탄의 굴레를 쓰고
이미 그 자리를 떠났다. 제자단의 으뜸인 베드로조차 목숨을 바쳐서라도
스승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하루 밤을 넘기기도 전에 스승을 세 번
씩이나 배반할 것이라는 예언을 마음에 새겨야 했다. 사태가 이쯤 되었다면
고별식장의 분위기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부에 와 닿는다. 여기까지가 요한복음 13장의 흐름이다.
고별식장의 삼엄한 분위기는 모두를 걱정과 불안으로 몰아간다.
당장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대체 스승은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
제자들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드디어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진다:
"너희는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마라." 걱정이나 불안에 듣는 약은
딱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동시에 희망이며 신뢰심이다. 그러나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
제자들의 걱정과 불안이 제거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통상
무지(無知)에서 불안과 걱정이 싹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을 수 있는 설명을 덧붙이신다. 예수님의 '가심'은 잠시의 이별이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 즉 하느님 나라에 모두를 위한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시는 이별이며, 있을 곳이 마련되면
다시 와서 모두를 데려가실 때까지의 이별이다.(2-3절)
예수께서는 이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고
제자들의 '앎'(지식)을 전제하신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동반했던 제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토마스가 나서서 "우리는 당신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5절) 라고 반문한다. 토마스는 아직도
불안과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과 '그 길'에 대한 자신의 앎이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표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요,
그 길은 바로 당신 자신임을 밝혀주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예수께서 가실 곳은 아버지의 집이다.
아버지의 집이란 아버지 자신을 말한다.
이곳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닌 아들의 고향이다.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아들 외에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곳에 친히 가서
제자들의 집을 마련하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렇다. 이 말씀은 비유법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
도식을 사용한 자기계시인 것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지식이 부족해서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불식(拂拭)시키셨다.
믿음에 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만큼은 아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음만으로 모든 것은 끝난다.
예수님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박아미 수녀님
오래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다. 신학원론 수업에 들어온 교수
신부님이 학생들을 향해 주먹을 내미시며 “여기, 내 손 안에
묵주가 있습니다. 믿습니까?” 하셨다. 뜬금없는 질문에 웃기만 하는 학생,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학생, 장난기 어린 말투로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는
학생 등 일순 강의실은 술렁거렸지만 학기 초라 서로 서먹해서인지
이내 조용해졌다. 그러자 신부님은 주먹을 펴서 묵주를 보여주시고
다시 움켜쥔 다음 “내 손 안에 묵주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습니까?” 하셨다.
그러자 강의실이 떠나갈 듯이 모두 힘차게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부님은 “아뇨. 여러분은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내 손 안에 묵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야지 믿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신부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던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 이후로 결심했던 것 같다. ‘믿음은 일종의 도박이다.
그래, 용기를 갖고 온전히 투신해서 믿음의 고지에 다다르도록 하자!’
그러나 수도 삶이 깊어갈수록 신부님이 일깨워 주신
믿음에 대한 개념에는 변화가 없지만
믿음 앞에 취하는 나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내 의지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것에서 믿음의 대상인 그분께
더 오래 시선이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결심하게 된다.
그분께서 비춰주시는 만큼만 내디디며 믿음의 길을 가자고….
믿음의 길에서 때론 토마스와 필립보같이 우문(愚問)을 던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가난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당신 자신에 대한 커다란 신비를 현답(賢答)으로 선사해 주신다.
토마스와 필립보의 질문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길·진리·생명’이라는 예수님의 자아 계시적 선언을 듣거나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적인 내재를 확고하게 인식할 수 있었겠는가.
A Patre ad Patrem /김찬선신부님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별을 선언하시며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는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솔직하고 정확한 토마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고,
그래서 당연히 그 길도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사실은 토마스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대개 토마스 아니면 필리보가 나서기에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내색하지 않고
은근슬쩍 묻어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어쩌면 이 제자들과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디를 가는지 모르다니!
자식이 가면 어디로 가나, 아비 있는 곳으로 가지!”하고
제법 아는 체하지만 사실은 이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인지
우리도 확신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토마스의 이런 대답에 주님께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당신이 분명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고,
지금 마침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나 있는 길을 따라 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심으로서
당신이 길을 마련하시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을 가는 중에 누가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병원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거와 같이
당신이 지금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더 나아가 당신이라는 길을 통해야지만
아버지께 갈 수 있다 하십니다.
수도생활 문헌, “Vita Consecrata(Consecrated life, 축성생활)”는
우리의 삶을 하나의 여정으로 표현하는데,
그 여정을 “A Patre ad Patrem"이라고 요약합니다.
“From Father to Father”,
“아버지로부터 아버지께로”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은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여정인데
이 여정을 먼저 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길 삼아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길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갑니다.
이 길은 우리를 잘못 인도하는 법이 없어,
다시 말해서 가는 법을 참되게 알려주기에 진리이시고
이 길을 따라 가면 우리는 살 수 있기에 생명이십니다.
성녀 글라라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유언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 분의 연인이요 모방자(His lover and imitator)인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가르쳐주었습니다.”
가는 길을 모를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길을 묻고
그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고마운데
글라라에게 있어서 프란치스코는 먼저 이 길을 가며
길을 가르쳐주는 길잡이였습니다.
우리도 서로 길잡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서동원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4,1)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을
제시해 주시는 ‘길’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계시해 주시는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이를 실천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2ㄱ.3)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더라.”는
조선 정조 시대 저암 유한준의 말은 신앙인인 우리가 하느님과 만나는 과정을
잘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음에도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난 후에 그분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예수님의 공생활의 의미를 깨달은 다음,
예수님이 주님이며 세상의 구원자임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여정에서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더욱 간절히 찾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온전히
봉헌한 순교자들의 후손으로서 진리요 생명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이웃과 세상에 말과 행동으로 전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지금 당장 바꾸세요 /정병덕 신부님
요즈음 저는 담배를 안 피우지만, 예전에는 상당한 양의 담배를 피우던
골초였지요. 그래서 제 곁에는 늘 담배 냄새가 났고, 사람들은 그 담배 냄새가
너무 싫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수록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어느 날 저녁 잠들기 직전에 다짐을 했습니다.
“내일부터 담배를 끊는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타협을 하게 되더군요.
“하루아침에 담배를 어떻게 단번에 끊니? 천천히 줄이자.”
하지만 이렇게 하면 평소와 똑같이 담배를 피우게 되고 그러면 절대로 담배를
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바로 지금부터 담배를 절대 입에도 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렇게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를 갖겠다는 것은 서서히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를 끊는 것처럼
단번에 바꾸어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스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타협하고 싶을 때,
주저앉아 포기하고 싶을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면서,
내게 필요한 변화를 지금 당장 단번에 이루도록 해보면 어떨까요?
3V이신··· /김연희 수녀님
길을 걷다가 언뜻 고개를 돌렸는데, 한 마트의 상호가 눈에 띄었다.
‘3F-Friendly, Fresh, Fun’이라고 쓴 것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2년 전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에서 실시한 ‘여성 리더십’에 대한 강의가 생각났다.
21세기 리더십을 3F로 정의할 수 있는데, 여기서 3F는 ‘Fiction, Feeling, Feminine’이라고 했다.
과거에 평가받지 못한 덕목이었으나 이 3F가 없으면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이렇게 중요한 몇 가지
삶의 원칙을 단어의 머리글자로 요약해서 기억하기 좋게 하는 것이 유행처럼 보인다.
3M, 3S 등등.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셨던 예수님이 ‘V’ 모양으로 손을 올리시고
“나는 3V다.” 하며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오늘 복음에 앞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스승의 말씀을 중단시키며 조금은 엉뚱하게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13,36) 하고
물었다. 토마스 사도도 덩달아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 하고 질문한다.
토마스 사도가 이해했던 물리적 의미의 길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영적 의미로 답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이라고 하시며 그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길(Via) · 진리(Veritas)
생명(Vita)은 그리스도께서 중개자요 계시자요 구원자이심을
가리키는 가장 중요한 의미로 깊숙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한다.
평소 자주 바치는 기도를 이 순간 마음 모아 다시 기도한다.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더불어,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오직 당신만이 저의 길이시고 진리시며 생명이십니다. 아멘.’
길이신 그리스도 /오상선신부님
출장이 유난히 잦은 나에게
어떤 자매가
<신부님, 운전을 좋아하시나봐요?>라고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 길을 좋아하지요.>라고 답했다.
수도생활 여정 안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 나의 테마는 <길>이다.
얼마전에는
10여년 전 양로원 할머니들을 방문하기 위해
자주 다녔던 비포장길을 다시 가본 적이 있다.
이제는 너무도 길이 잘 포장되어 있어
언제 지나쳤나 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때 울퉁불퉁한 비포장길,
비가 온 뒤면 버스가 패인 웅덩이를 피해 곡예 운전을 하고
한시간쯤 여정을 마치고 나면
마치 말을 탄 듯 속이 확 뒤집어 지는 체험도 하였었는데...
그 당시에 그 비포장길은
나에게 길에 대한 많은 묵상꺼리를 제공하였었다.
우리 인생살이, 수도생활의 여정도
바로 이런 비포장길이라는 것,
때론 웅덩이도 있고 큰 돌멩이도 있어
피해 가야 할 때도 있고
느리지만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
고속도로는 절대로 아닐 것이라는 것,
이 길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었고,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라는 것...
그래서 지금도 유난히 시골길을 즐겨 찾는다.
갈수록 도로확장으로 인해 오지길이 없어지는 아쉬움을 느끼면서...
길을 걸을 때마다,
길을 달릴 때마다,
그림 속에 있는 길을 볼 때마다,
<길이신 그분>을 만난다.
그분이 나의 길이다.
그분이 나를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시는 안내자이다.
나는 그 길을 즈려밟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 길이 없다면
나는 길없는 길을 무작정 헤메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길을 건는다.
노랫말처럼, 무작정, 정처없이 걷는 나그네 길이 아니고
그분과 함께
그분을 밟고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희망의 길이다.
이 길을 함께 가는 도반들이 많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선물이다.
이렇게 함께 길을 걷는 도반들과
그분을 즈려밟고
하느님 나라로 향해가는 이 발걸음이
어찌 무거울 수 있으리오?
고속도로를 경쟁하면서 쌩쌩 달리는 것보다
느리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골길을 산책하는 것이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도반들이여,
오늘도 함께 걸읍시다.
길이신 그분과 함께
그분을 살며시 즈려밟으며...
아버지 중의 아버지 /김동하 신부님
‘고향’ 하면 도시보다는 시골을 먼저 떠올립니다. 시골에는 맑은 하늘이 있어
구름과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정겨운 흙길이 있어 이야기꽃을 피우며 걸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씨를 지닌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골이야말로 몸을 놓고 마음을 풀기에는 알맞은 곳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시골 같은 고향을 우리 마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이신 성령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1코린 6,19 참조).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시기에 마음은 영원한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다 지치거나 힘이 들 때에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영원한 고향인
마음을 둘러보아야 합니다. 마음에 떠 있는 말간 구름이나 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펼쳐진 풋풋한 흙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보고 마음을 걸을 수 있을 때 아버지 중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 무거운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생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 가는 길 /김찬선신부님
오늘은 말 장난 같은 나누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잘 곱씹으면 의미가 없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디로 가는 길이예요 하고 질문을 받습니다.
그때 우리는 “학교에 가는 길입니다.”
“시장에 가는 길입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저도 거기 가는 길인데요.”하고 그 사람이 또 대답하면
“그러면 저를 따라오세요.”하고 우리가 또 대답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학교로 가는 길,
시장에 가는 길이 됩니다.
신앙적으로 바꿔서 어디로 가는 길인지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모두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니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주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버지께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길 위에 선 사람입니다.
또 그러니
우리는 길 위에 선 사람이고
우리는 아버지께 가는 길입니다.
흘러가는 돌멩이 /고진배 수사님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나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유기서원 기간을 마감하면서 종신서원을 준비하는 피정을 했습니다.
종신서원 후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냇가의 작은 돌멩이'로 살아가자.
냇가 한귀퉁이에 그리 크지도 않고 잘생기지도 않은 돌멩이가 있었습니다.
햇빛이 비칠 때면 뜨거워졌고, 어둠이 깔려 기온이 내려가면 추위에 떨었습니다.
어느 날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흘러와 주위를 덮더니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금방 그칠 것 같던 소나기가 바람을 타고 더 거세게 퍼붓더니만 냇물은 금세
물이 불어 급류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돌멩이도 급류에 휩쓸렸습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급류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급류를 타고 굴러가는 돌멩이는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튀어나온 모서리가
깨어지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면서 함께 흘러가는 돌멩이들과 부딪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돌멩이는 그 물과 함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듯이
낮은 곳을 향해 하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굴러갔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부딪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깨어지지 않아도 되는 저 넓고 깊은 바다였습니다.
그 넓고 깊은 바닷속은 수많은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어떤 폭풍우에도 끄떡없는, 그야말로 아늑하고 평화로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곳,
이 세상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꿈꾸며 염원하는 천상나라였습니다.
돌멩이가 가고 싶어했던 바로 그곳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자 하는 자리는 우리가 염원하는 자리입니다.
내가 가야 할 자리이며 우리가 가야 할 자리입니다.
그 길은 부딪치는 아픔이 있고, 깨어지는 슬픔과 서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늑하고 평화스러우며 행복한 자리입니다. 누가 그 자리를 마다하겠습니까?
침묵 /노성호 신부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가던 길을 잃고 헤매게 되면 마음이 산란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놓았던 업적, 수많은 사람들과 맺고 있었던
인간관계, 온갖 정성과 성의를 아끼지 않았던 소중한 시간 등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을 체험하게 되는 날이 바로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 침묵할 수 있다면…. 어느 날 좀 여유 있게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때보다 목적지를 향해 30분 정도 서둘러서 출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린 눈으로 길이 막히게 되었고, 약속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긴 했지만, 순간 ‘조급해해도 소용없다. 어차피 길은 막히는 것이고
약속 시간에 늦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진정시키면서 정신적인
짐이라도 덜자’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조급해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에
양해를 구하고, 느긋하게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늦기는 했지만,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지요.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왜 그리도
힘들고 어렵고 정신적인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차피 좀 늦더라도 약속 장소에는 갈 수 있는 것이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늦을 것이라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는데, 괜히 혼자서 끙끙거리며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관건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침묵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가’이겠지요. 침묵 속에 머물 수 있다면 그만큼 빨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나갈 수 있겠고, 그렇지 못하면 침묵하는 연습을 조금 더 해야겠지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본질적으로 근심하는 존재, 인간 /양승국 신부님
3년 남짓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던 예수님에게 있어
제자들은 늘 안쓰러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큰 마음먹고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아직도 스승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아직도 한쪽 발은 육의 세상에
다른 한쪽 발은 영의 세계에 들여놓은
어정쩡한 상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온전한 투신, 완벽한
자기이탈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자들 내면 깊숙한 곳에는
다양한 근심걱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곳에 정주(定住)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생활에서 오는
불안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그물망을 좁혀오는
바리사이들의 존재도 큰 위협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좋은 선택
이었는가 하는 의문도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내면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불안감에 떠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믿음’을 지닐 것을 강조하십니다.
타성에 젖은 믿음, 막연한 믿음,
물에 물 탄 것 같은 미지근한 믿음이 아니라
제대로 된 믿음, 강렬한 믿음,
진심이 담긴 믿음을 요청하십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성경에서도 인간을 끊임없이 방랑하는 존재,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헤매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역시 인간에 대해
‘본질적으로 근심하는 존재’로 정의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근심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야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안셀름 그륀, ‘다시 찾은 마음의 평화’, 성바오로 참조)
결국 근심은 자기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가지는
현실적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상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가게 되는 근심 걱정,
그 앞에서 결국 해답은
마음 크게 먹은 일이더군요. 대범해지는 것입니다.
관대하게 마음먹는 일입니다.
최종적으로 주님께 항복하는 일입니다.
그분 손길에 우리 존재
전체를 내어맡기는 일입니다.
아무리 견디기 힘든 일이 다가와도
‘하늘아래 별 일이 다 생기지’ 하며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자주 맞이하게 되는
실패나 어려움을 당연시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존을 위한 염려에만
얽매이지 말고,
인간의 실존을 가능하게 했고,
인간을 잘 알고 계시며 인간을 위해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믿음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국 끊임없는 근심걱정,
갖은 고민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은
그간 집중되었던 우리의 시선을
나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오 6장 33-34절)
우리의 최종적인 지향, 궁극적인
관심이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가지고
나 자신에만 관심을 집중시킨다면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흔들릴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는 온통
걱정에만 사로잡힐 것입니다.
늘 나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하니
항상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시선을
하느님께로 돌려보십시오.
많은 것이 순식간에 해결될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 자신에게서 해방되니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토록 나를 짓눌렀던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되니
삶은 장밋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노력하십시오. 잔잔한 호수처럼 완벽한 평화,
그 어떤 풍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평화.
결국 그런 평화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데서 출발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봉헌하는데서 시작됩니다.
2011.5.20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사도13,26-33 요한14,1-6
“길은 어디에?” /이수철 신부님
길을 찾는 사람이요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구도자(求道者)입니다.
길을 찾지 못해, 길이 막혀,
길을 잃어 방황이요 절망입니다.
길이 상징하는바 삶의 방향,
삶의 목표, 삶의 의미입니다.
보이는 길 넘어 보이지 않는 길을
찾는 사람입니다.
보이는 길눈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눈도 좋아야 합니다.
오늘은 ‘길(道)’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예도(藝道), 법도(法道), 기도(棋道),
다도(茶道), 인도(人道), 주도(酒道) 등
길 ‘도(道)’ 자가 들어가는 말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이란 말이 중국어 성경에서는
‘도(道)’로 번역되어 사용합니다.
길 중의 길이신, 하느님께 이르는
왕도(王道)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전 신학교 시절 후배의 방을 방문했을 때
방벽에 붙어있는 왕도란
글자를 보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왕도(王道) 보다 더 좋고 높은 길이
주도(主道)입니다.
‘왕(王)’ 자위에 점 하나 붙이면
‘주(主)’ 자가 되어 주도(主道)입니다.”
후배도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듯
깊이 공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주님의 길인 주도를 통해 하느님께 이릅니다.
묵상 중 퍼뜩 떠오른 말마디가
‘길은 어디에?’이며
바로 오늘 강론의 제목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지금 여기에’입니다.
지금 여기서 눈만 열리면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주님의 길을 발견합니다.
이 길만 찾으면 삽니다.
다른 보이는 길도 줄줄이 열립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길이라고 다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아름답게 포장된 죽음의 길도 많습니다.
길이라도 다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미사여구로 포장된 거짓의 길도 많습니다.
생명과 진리이신 하느님께 이르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뿐입니다.
이 길을 발견하여 이 길 따라
하느님을 향해 갈 때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누구나 마음의 눈 만 열리면
지금 여기서 발견되는 주님의 길입니다.
길을 찾는 제자들에게 당신 친히 길임을
알려주신 고마운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고별담화입니다.
오늘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아버지를 믿고 주님을 믿을 때,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지금 여기서 발견되는
주님의 길이요, 바로 여기
공동체가 아버지의 집임을 깨닫습니다.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이 상징하는바
언젠가 살게 될 천상 아버지의 집입니다. 하여
거처할 곳이 많은 여기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을 무수히 찾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위로와 평화를 찾아,
또 주님의 길을 찾아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세고에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위안과 평화입니다.
얼마 전 모임 시 아빠스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위안을 주는 것은 관상의 기준입니다.
정말 관상적인 공동체는 위안을 주는 공동체입니다.
또 형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주는 공동체가 좋은 관상공동체입니다.”
요지의 말씀인데 이런 공동체라면
지상에서의 ‘아버지의 집’ 공동체라 할 만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기쁨에 넘쳐
설교하는 사도 바오로,
청중들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쳐줍니다.
주님의 길을 발견하여
그 길 따라 갈 때 넘치는 기쁨이요
위로와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생명이자 진리이신 아버지께 이르는 길을
열어주신 주님이시요,
바로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삶의 이정표와도 같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날, 새 생명을 선사하시고 새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멘.
길 없는 길 /강영구신부님
10년 전쯤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을 재미있게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대학교수가
선승(禪僧) 경허(鏡虛)의 발자취를 뒤쫓는 내용입니다.
오도(悟道)의 경지에 도달한 경허(鏡虛)는 환속하여
박란주(朴蘭舟)라는 이름으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사라집니다.
그는 선승(禪僧)이기도 했지만 괴승(怪僧)이기도 합니다.
‘길 없는 길’을 혼자 걸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은 ‘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아버지의 나라가 있습니다.
눈 밝은 사람이 그 길을 봅니다.
그 길을 본다고 다 그 길을 걷지 않습니다.
길 없는 길, 예수의 길은 좁은 길이며 험한 길(마태7,13-14)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길은 사랑과 자비의 길이며 용서의 길입니다.
그 길을 걸으려면 자기 포기의 길도 걸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길을 보기는 하지만 자기의 길을 고집하고 자기 길을 갑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길이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 길을 발견한 눈 밝은 사람이 그 길을 걸어 도피안(度彼岸)합니다.
거기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그 나라를 누립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자신이
‘길 없는 길’을 걸어 스스로 길이 되었습니다.
당신도 예수의 길을 걸어 아버지 나라에 도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먼 훗날 누리는 무엇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합니다.(一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