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복이 되는 삶
마23:10-12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의 어린 아이가 방에서 장난감 벽돌로 건물을 만들며 놀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아들의 놀이를 보면서 물어보았습니다.“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니?" 그때에 아이가 뒤돌아보면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댑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아빠. 지금 교회를 짓고 있어요."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에서는 아직 장난꾸러기에 말썽쟁이인 아들이 갑자기 그렇게 말을 하니 “조그만 녀석의 마음에도 믿음이 생겼네”라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되지?" 아이가 뭐라고 했을까요? "아빠도 참. 교회에서는 조용해야지. 사람들이 다 잠들었으니까요. 떠들면 모두들 깨잖아요!"
교회 성도들이 많이 졸던지, 아니면 아이의 아빠가 유독 그런 것 같습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에 영향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철학자 E. H Carr는“역사에서 독립적인 개인은 없다”했습니다. 오늘도 서로 인사하는 모습, 찬양하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까지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과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들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고 싶은가?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나누면서, 서로에게 복이 되는 삶을 향한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회개하지 않으면 변한다.
마23장은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일일이 지적하셨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을 무려 7번이나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실망이 얼마나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서기관들은 다윗 시대부터 성경을 필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율법에 능통한 제사장들도 많았습니다. 존경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서기관들 중에 상당수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로마의 헬레니즘 문화에 의하여 신앙이 변질되던 시대에 평신도들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신앙과 율법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제사장들보다 존경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존경받음에 익숙해지고, 율법의 권위로 사람들을 억압하며, 자신들의 위선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강탈했던 자들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인기를 추구하며,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눅18:11-12의 말씀입니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니, 그들은 어느 순간 변했던 것입니다.
이시간 분명히 깨닫기 원합니다. 믿는 자는 회개하는 자입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 공생애의 첫선포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웨슬리 목사님은“회개는 믿음의 문을 연다”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신앙은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은혜와 성령과 축복을 사모하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아멘
둘째, 하나님을 기준 삼는 자의 영향력
회개가 사라지고,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상대방보다 높아져야 합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화려한 겉모습과 높은 자리를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 유다 백성의 지배자가 바뀔 때다 권력자의 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아닌, 자신이 기준이 되는 자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벤츄라교회는 저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을 말씀과 약속을 기준삼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도 살고, 가정도 살고, 이웃도 살고 교회도 사는 것입니다.
지난주 갈렙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갈렙하면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민13장)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의 정탐꿈은 보고하기를“가나안 거민은 강합니다.”,“신장이 장대합니다.”,“우리 자신은 메뚜기 같습니다.”라는 부정적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기준이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20세 이상의 사람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38년 동안 매일 100명 이상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그 땅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14:9)고 외쳤습니다.
갈렙은 이날의 신앙적 교훈을 언제나 기억하고 살았고, 그것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85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사는 자의 본을 보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교회에도 늘 사람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벤츄라교회와 성도는 늘 하나님의 기준이 승리한 교회인줄 믿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기준이 승리하는 교회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부족하면 제가 하나님의 기준을 외치겠습니다. 제가 부족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준을 외쳐주세요. 하나님의 기준 외에는 어떠한 것도 틈타지 못하는 교회되기를 원합니다.
셋째, 세상적 기준을 극복해야 합니다.
여러해 전에“서울시내 초교 5학년을 대상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란 조사를 했습니다. 그때‘편하게 살고 싶다’,‘부자로 살고 싶다’,‘유명해지고 싶다’란 답변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구원의 확신과 함께 인생의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자아관, 이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세계관, 그리고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를 결정짓는 가치관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광야에서 받은 첫 시험이 바로 자아관, 세계관, 가치관에 대한 것이었다.(김형준 동안교회)
예수님의 인생 기준은 분명했습니다. 세상 기준을 극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세상 극복은 십자가 사건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상적 흐름의 대세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과 능력의 예수를 바라보며, 로마 제국을 대항해 군대를 일으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왕으로서의 기대감이 대세였습니다.
예수께서 대세를 쫓아가셨다면 십자가의 처형이 아니라, 대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고, 이스라엘의 해방시킨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민족의 해방자요, 새로운 왕국을 일으킨 왕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업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는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12)
이 말씀은 결국 자신에 대한 말씀이셨습니다. 강력한 왕이나 영웅이 아니라, 채찍 맞고, 피가 튀고, 조롱거리가 되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간 결과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에서 가장 잔인한 죽음을 당하셨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분의 이름은 전인류의 구원자로 가장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순간 그분의 사랑 앞에 굴복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회개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준이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기준을 극복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바보 소리 들어도, 이렇게 살다가 천국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