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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양 굴지의 규모와 시설을 자랑한다고 했던 시민회관 건물에 화재가 난 것은 1972년 12월 2일 MBC-TV 10대 가수청백전이 화려하게 전개되고 있던 오후 8시 28분이었다.
시민회관 대강당 무대는 MBC 기술자들에 의해 휘황찬란하게 꾸며져 있었다. 가수쇼가 시작된 지 한 시간여가 지나 대강당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에 있을 때,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위에 가설된 조명장치가 터지면서 불이 붙었다. 주최측이 급하게 막을 내렸더니 그 막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온 강당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불이 날 당시 관객의 3분의 2 가량은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지만 아직도 회관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불이야」하는 고함소리를 듣자 앞을 다투어 빠져 나오느라 계단 위에 넘어지는가 하면 2, 3층에서 유리를 깨고 뛰어 내리는 등 현장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었다. 무대 쪽에서 천장으로 불길이 치솟자 사람이 밀어닥쳐 어린이와 여자들이 계단에 깔렸고, 수십명이 2층에서 1층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사상자는 더 늘어만 갔다. 무대 뒤 또는 옥탑 근처에서 근무중이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질식 후 불에 타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소방관 400명, 군병력 170명 등 1,020명을 동원하고 군헬기 1대의 공중지원을 받으며 진화 구조작업을 펼쳤다. 시내 각 병원과 군 구급차가 동원되어 사상자를 실어 날랐고,지원나온 미8군 소방관들이 급수를 돕기도 했다. 그리고- 화재발생 1시간반만에 큰 불길이 잡히고 2시간만인 오후 10시반경이 돼서야 불은 완전히 꺼졌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51명(남 20명, 여 31명)이 질식 또는 소사했으며, 76명(남 34명, 여 42명)이 부상을 당해 74명이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사망자 가운데는 이남용 시민회관 관장도 포함되었는데 이관장은 사무실 의자에 반 듯이 앉아 있는 것을 업고 내려와 세브란스병원에 옮겼으나 이미 숨져 있었다.
▶인명피해 **사망 : 51명 **부상 : 76명 ▶재산피해 **2억 5천만원 추산
재산피해액은 2억 5,000만원으로 추산되었다. 화재의 원인규명 과정중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만든 건물임에도 소방시설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압축적 고도성장 속에서 외형을 키우기에만 집중하여 내부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적 현실을 단면적으로 보여준 것이었고 1990년대에 줄을 이었던 대형사고의 전주곡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시민회관 건물은 현재의 세종문화회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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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였던 19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에 가장 뒤진 부분이 남측의 문화시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북한의 만수대예술극장 같은 대공연장에 맞서는 시설을 세우고 싶어 했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11월 7일. 서울 광화문 근처에 4층 규모의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자리)이 건립됐다.
원래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 대통령의 아호를 딴 ‘우남회관’으로 지으려했으나 공사가 지지부진하다 마침내 완공된
건물이다.
요즘 세종문화회관이 예술 공연을 위주로 하는 것과 달리 시민회관은 그야말로 ‘대중음악의 전당’이었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 극단 예그린악단의 ‘살짜기 옵서예’를 비롯해 패티김, 최희준, 펄시스터즈, 하춘화 리사이틀, 윤복희 쇼 등
스타들의 공연이 잇따랐다. 1969년 5월 17일엔 ‘플레이보이배 쟁탈 보컬그룹 경연대회’라는 그룹사운드 페스티벌이
열려 젊은이가 구름처럼 몰려들기도 했다. 당시 민간방송인 MBC와 TBC(동양방송)도 각각 남진과 나훈아 리사이틀을
주최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72년 12월 2일 ‘MBC 10대 가수 청백전’이 열리던 시민회관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가수 쇼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났을까. 오후 8시 28분경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가설된 조명장치가 터지면서 불이 붙었다. 주최 측이 급하게 막을 내렸더니 그 막에 불이 붙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화염이 번져 나갔다.
3000여 관객 대부분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나 계단에서 다른 관객에게 밟히거나 무대 뒤 또는 옥탑 근처에서 근무
중이던 사람들이 희생됐다. 사망 51명, 부상 76명.
이 사건은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 1974년 청량리역 대왕코너 화재와 더불어 1970년대 전반기 서울시내 3대 화재
사건의 하나로 기록됐다.
세종문화회관은 시민회관이 불탄 지 6년 만인 1978년 완공됐다. 박 대통령은 세종문화회관을 5000명이 동시에 입장해 회의할 수 있는 ‘통일주체국민회의’ 회의장으로 지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많은 예술가의 문제 제기로 다목적 공연장으로 설계가 변경됐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지시로 애초 설계에 없던 파이프오르간도 설치됐다. 일본 NHK홀보다 더 큰 동양 최대의 파이프오르간이었지만 무대 중앙이 아니라 오른편 벽에 설치해야 했다.
개관일은 4월 14일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생일(4월 15일) ‘김 빼기 작전’의 하나로 결정된 날짜였다.
현재의 세종문화예술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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