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의 서평이죠?
엉겁결에 뮤지컬 <영웅>을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8월 초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한다는 공연인데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하얼빈 의거를 다룬 작품입니다.
기왕 관람하게 됐으니, 관련 도서를 읽고 가야 스토리 이해가 잘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들게 된 거죠. 현재 진행형으로 바쁜 와중에 말입니다.
도서명: 하얼빈
저자: 김훈
* 이 도서는 시각장애인 재활통신망 넓은마을 도서관에 데이지 형태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김훈 작가님은 내게 <칼의 노래>로 기억된 소설가이다. 이순신 장군의 고뇌를 다룬 작품으로 아직도 몇 대목이나 장면들은 기억에 선하다. 👩🦯
그런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소재로 한 소설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이번에 우연히 검색하다가 알게 됐다. 제목은 《하얼빈》이다.
🇰🇷🤔 📚 🤔🇰🇷
한 가장이자 세례받은 신자가 총을 들기까지 - 《하얼빈》
소설은 크게 두 인물의 시점을 오가며 전개된다. 하나는 초대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 다른 하나는 안중군 의사이다. 글은 그들의 전 생해를 다루지 않는다. 이토가 초대 조선 통감 자리에서 물러나고,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를 위해 고향을 등진 시기를 집중적으로 주망한다.
🔎 먼저 서두를 여는 건 히로부미이다. 때는 고종을 위협해 폐위시키고 순종을 앉힌 시점이다. 순종의 아들 태자 이은은 신문물을 깨친다는 명목 파에 일본에 볼모로 유학을 가게 된다.
히로부미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하지만 곧 조선 통감 자리에서 물러나는 은퇴를 앞둔 그의 속은 편치 못하다.
왕실이 이름만 남고 거의 박살이 나자, 유생들이 잇따라 격분하고 치욕스러워 자진을 택했다. 그러나 이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건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니었다. 민초들이 일으키는 봉기였다.
“일파가 흔들리니 만파가 일어선다. 산촌에서 고함치면 어촌에서 화답한다.” 🫡
소설 속에서 주둔군 정보참모가 썼다는 설정으로 등장한 ‘상황개요’ 되시겠다. 군대 정보참모 치고 문장력이 참 좋은 것 같다. 산과 들, 바다 할 것 없이 온 나라 민초들이 여기저기서 일본 물러가라고 일어서고 있다는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이토는 그 상황개요를 보고 이 시국에 뭐 이런 한가한 놈이 다 있나 기가 차서 바로 그 주둔군에 한소리 날린다. 귀 주둔군 정보창모의 문장력 참 뛰어나다, 무슨 풍류남아냐?
작가의 소설적 허구가 발휘된 대목이겠지만, 개인적으로 한없이 묵직할 수밖에 없는 소재에서 이런 유머 코드를 넣은 건, 아주 잘한 소설적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무거운 이야기인데, 숨을 쉴 틈은 만들어줘야지.
“아름다운 솜씨다. 짐승을 쏘기에는 아깝구나.” 🧐
한편 소설의 또 다른 축인 안중근은 막 상해에서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돌아온 참이다. 그는 29살의 나이였고 상해에서 독립 자금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첫째인 딸 현생은 8살이 되었다. 그리고 장남이 태어나 있었다. 그는 종교적으로 깊은 인연이 있는 빌렘 신부에게 그 아들의 세례를 받고, 분도라 이름을 지었다.
🔎 안중근의 원래 이름은 응칠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읽고 글씨를 잘 썼다고 기록은 전한다. 하지만 방랑벽이랄지 역맛살이랄지, 그런 기질이 있어 부친이 진중하게 한곳에 뿌리를 내리라는 의미에서 안중근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안중근이 떠돌이와 다름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의병 활동을 한 걸 보면, 개명이 그의 기질을 누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안중근은 본가에서 주로 사냥을 했다. 명사수인지 곧잘 노루를 잡아오곤 했던 듯하다. 사냥꾼이라니, 역사를 통해 그의 거사를 알고 있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가 언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결심하고 계획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결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안중근은 세례를 통해 도마라는 이름을 받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살인은 10계명에 언급된 해서는 안 될 죄 중 하나가 아닌가.
또 그에게는 처자식이 있었다. 아내 김아려는 셋째 아이를 가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안중근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막내 아이 준생을 뒤로 한 채 고향을 떠나왔다.
👩🦯 글쎄,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안중근 의사의 애국지사적인 면모는 마땅히 존경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미래를 빚진 후손으로서 그의 헌신을 기려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가족을 두고, 죽을 줄 알면서, 그 길을 떠나올 수 있었는지.
가족들은 은연중 그의 여정의 끝을 예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려봤자 들을 양반이 아님을 알아 체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안중근은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역사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소설 《하얼빈》은 그 역사를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그렇기에 이야기 속에서도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총성이 울렸다. 그중 3발은 초대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몫이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으며,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사형 집행 전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 📚🤔 🌺🇰🇷
《하얼빈》 - 그는, 그들은 왜 총을 들었는가? 우리는 왜 총을 들어야 하는가!
“나는 다만 일개의 국민으로서 했다. 의병이기 때문에 하고, 의병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김훈의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결심하고 하얼빈 의거를 실행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작가 김훈은 청년 시절부터 안중근의 짧고 강렬했던 생애를 소설로 쓰려는 구상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하기사, 안중근은 위인이기 이전에 서사가 참 매력적이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만큼 쉽게 손댈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젊은 나이에, 가정을 둔 상황에, 천주교 신자로서, 목숨을 버리고 암살을 결행하는 게 쉬울 리 만무하다.
🔎 여기서 잠시, 하얼빈 거사는 안중근만의 몫은 아니었다. 그와 이토 암살을 함께한 동지 우덕순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얼빈역의 이전 체가구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열차가 체가구역을 그냥 통과하면서 안중근이 총을 겨누게 되었다.
소설 《하얼빈》 속에 등장하지 않지만, 당시 안중근의 동료에는 조도선, 유동하도 있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 일행을 만나 함께 하얼빈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안중근과 우덕순만을 등장시켰다. 왜일까?
조도선과 유동하도 안중근․우덕순과 함께 하얼빈까지 동행했다. 그리고 실제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당했다. 그런데 왜 소설에서 빠졌는가 하면, 작가가 보기에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와 큰 연관성이 없어 보여서 소설 전개상 제외했다고 한다. 일종의 소설적 첨삭인 셈이다.
좌우간 독립을 위해 뭉친 그들은 환경이나 태생이 달랐다. 일단 안중근과 우덕순만 봐도 그랬다. 안중근은 나름 양반집 자제였다. 지식인이기도 했다. 우덕순은 그와는 반대였고, 신문 수금원이며 담배팔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리고 다른 동료들 또한 이토 암살을 위해 뜻을 함께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함께 움직였다. 다른 무수한, 이름 석 자 남기지 못한,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독립 운동가들이 그랬다. 그들은 양반이나 학자, 무인 계층도 있었지만, 대개는 평범한 민초들이었다. 수금원이자 담배팔이인 우덕순처럼 말이다. 따지자면 안중근 역시 지역 유지이긴 했지만, 그 또한 학자 같은 게 아닌 포수였다.
정말 의외롭게도, 독립 운동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꼭 유학을 다녀오거나, 지식인이거나, 부유한 계층의 이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우덕순은 말했다고 한다. 의병이라서 이토 암살에 가담한 게 아니라고. 다만 한 국민으로서 했을 뿐이라고. 🇰🇷
당시 조선의, 대한제국의,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왕실은 일본의 위협에서 살아남기에만 급급했다. 고종은 협박에 의해 강제 폐위되었고, 순종은 그저 꼭두각시 허수아비였을 따름이었다. 눈치 보기에만도 바빴다. 그 누구보다 나라를 지켜야 하고, 그 누구보다 주권을 사수해야 하며, 그 누구보다도 원통함에 못 이겨 칼을 갈며 암중모색을 해야 하는 지도자 계층은 그랬다. 살아남으려 침묵했고 외면했고, 심지어 서슴없이 매국도 했다.
오히려 힘없고 빽도 없는 민중들이 보신일랑은 내팽겨쳤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주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이었다.
이 대목만 봐도, 우리나라는 ‘국민에, 국민의’ 나라는 맞는 것 같다. 무기력하고 무능한 윗물 대신 아랫물이 먼저 행동하고 앞장섰으니까.
단지, 끝에 가서 윗물들이 헛짓하며 자기 공로인 양 다 가로채 ‘국민을 위한’이 실행 안 된 게 문제인 것 같다.
예전에 <백범일지>였던가. 아무튼 독립 운동 및 애국지사 관련 도서를 읽고 쓴 감상문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었다. 우리나라는 다시 한일합병과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당연지사 치욕스러운 역사의 반복은 안 될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문장을 적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좀 다른 이유에서 나라를 잘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썼다.
왜냐하면, 과거 역사와 달리 이 ‘헬조선’에 질린 요즘 세대들은 결단코 3대를 넘어 대대손손 망한다는 독립 운동 따위 하지 않을 테니까. 해봤자 위정자들이 다 해먹어버리는 선례가 있으니, 그냥 이놈의 나라 따위, 콱 망해버리라지 하는 심정으로 각자도생하지 않을까?
그런데 소설 《하얼빈》을 통해, 정확히 말해서는 역사에 인물이자 소설의 등장한 우덕순을 보면서, 그 밖에 이름 없이 역사에 스러졌을, 그 평범한 애국지사들을 떠올리며 좀 생각이 달라졌다.
그들은 왕실을 위해 독립을 외친 게 아니었다. 양반가나 권력자를 위해 외치지도 않았다. 충의 같은 막연한 이상을 좇으려 독립에 뛰어든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나라, 그들의 세상이 부조리했기에 그것을 떨치고자 했을 뿐이다. 내 가족이 사는 세상이 이대로는 영 못스겠기에 독립을 외쳤을 따름이다.
‘국가’란, 결코 한 왕조나 정당이나 특정 권력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작게는 내 가족과 내 이웃이 사는 땅이요, 크게는 내가 사는 세상이다.
독립 운동가들은 그저 자신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이 사는 세상이 막장이 되는 걸 더는 볼 수 없어 저항한 것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다시금 역사가, 결코 그래서는 안 되고, 만약 되풀이가 된다면 역사에 쪽팔린 기록으로 남을 테지만, 일본이 러시아 푸틴처럼 대규모 헛짓거리를 하더라도,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어찌저찌 명맥을 유지하려고 발악은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발버둥의 주체는 정치인들은 아닐 것이다. 치욕스럽기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의 근현대사 속 애국지사들이 증명하듯이.
“……여기까지 오기는 왔구나. 여기서부터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세상을 향해서 말을 해야 하는구나. 여기서부터 다시 가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여기서부터 사형장까지…… 말을 하면서……” 🤨🇰🇷
나는 앞서 안중근 의사가 왜 총을 들었을까, 어떻게 가족을 두고 하얼빈에 올 수 있었을까 의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우덕순의 경우를 보며 안중근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 총을 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겨냥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토가 만든 세상에서 그의 가족과 이웄과 친우와 동료들이 행복할 수 없었기에. 그의 사람들에게 이토가 구축한 세상이 아닌 좀 더 나은 세상을 주고 싶었기에.
이로써 안중근은 왜 목숨을 걸고 암살을 결심했을까 하는 의문은 조금쯤 풀렸다. 그러나 아직 의문 하나가 남는다. 그는 무엇을 이루고자 했을까? 이루고자 한 일이 꼭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었나?
🔎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이 독립을 외치기 위해, 대한민국은 일본의 치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랬다고 어필한다. 즉,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은 일종의 수단이었던 거라고 말이다.
당시 일본은 자신들이 대한민국을 합법적으로 통치하고 있음을 전 세계적으로 광고하려 노력했다. 요컨대 한국 혹은 대한제국의 왕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통치해줄 것을 원했고, 일본은 대한제국의 문명 개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식으로 호도한 것이다. 걔네는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남의 나라 침략해 점령하는 것인 모양이다. 허, 어이가 없어서. 이 정도 되면 곡해도 수준급 아닌가?
실제 잒가가 소설 집필 및 참고용으로 차용한 기록을 보면 그랬다. 이토 암살 직후부터 체포된 안중근을 심문하는 과정 전부에서 그의 행위에 정치적인 의사가 업고, 무지에 의한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몰고 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말미에 붙은 후기를 보면 일제가 안중근 사후 그의 가족 및 그 자녀들을 동원해 벌인 여론 선동은 정말이지, 같은 사람 자식 맞나 싶을 정도로 인간적이지 못했다. 안중근의 장녀와 차남을 이용해 부친의 행위에 대해 사죄하도록 하고, 일본에 굽히도록 하는 게 보통 심보로 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 사죄는 가능하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 모든 상황과 사상과 이념을 떠나, 한 인간이 한 인간을 해친 것은 맞으니까. 소위 말해, 유감을 표할 수는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 유감이 일제강점과 일제치하를 옹호하는 쪽으로 호도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아, 혹시 또 모르겠다. 그런 것일수도. 일본 입장에서는 나름 위인인 인물을 죽였으니, 그 범인과 가족을 끝까지 괴롭히고 이용해주겠다는 음험한 속내였을지도.
황산벌 전투에 나가기 전, 계백 장군이 왜 손수 가족들을 하늘로 보내고 전장으로 갔는지 예전에는 이해를 못했다. 개똥 밭이어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말이 있으니까. 그런데 안중근 의사의 가족에게 일제가 한 짓을 보면, 계백 장군의 선택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여하튼 뮤지컬 <영웅> 감상을 위해 소설 《하얼빈》을 들었지만, 가끔 이런 역사적 픽션과 논픽션이 절묘하게 배합된 소설을 읽는 것도 썩 괜찮은 것 같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덧붙여 안중근이 법정에서 조목조목 따진 이토 암살 이유 및 일본의 만행을 열거한 내용은 중간에 다 말하지 못하고 끊겼을 확률이 현실적으로 높을 것 같다. 자신들의 치부를 전국적으로 세계만방에 떠들도록 그냥 두었을 리 만무하니까.
또 이토 히로부미가 총에 맞고 유언으로 남긴 “바보 같은 놈” 어쩌고 하는 대사도 소설적 허구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총을 세 발이나 맞았는데 나 쏜 놈 누구냐고 질문한다거나, 그녀석 참 어리석은 놈이네 하고 논평할 여유 같은 게 있을 리가.
👩🦯 총평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소설답게 《하얼빈》은 적당한 첨삭이 된 것 같지만, 각각의 파트에 덧붙은 주석이나 자료 출처를 보면 꽤나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쓰여진 작품이라 하겠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첫댓글 광복절을 앞둔 시점의 절묘한 타이밍 이다.
50여년 전에 읽었던 소설하고는 다른 사실 기반으로
역사의 참된 작품 같다.
등 떠밀려 영웅된 자 없다.
희생만으로 하나뿐인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초인이 아닐까?
애국 애족.
급변하는 현시대적 흐름속에 우리가 적절하게 대처해야 하는 지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