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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특상(三特相)과 삼법인(三法印)>
삼특상(三特相)은 「무상(無常. anicca)ㆍ고(苦. dukkha)ㆍ
무아(無我. anatta)」로서 초기불교에서 설해진 것이고,
삼법인(三法印)은 「제행무상ㆍ제법무아ㆍ열반적정」으로서
대승불교에서 설해진 것이다.
그런데 삼특상과 삼법인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구별 없이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삼특상인 「무상ㆍ고ㆍ무아」를 삼법인이라 잘못 말하기도 한다.
‘삼특상’이란 세 가지 특징이란 의미로서
무상(anicca)ㆍ고(dukkha)ㆍ무아(anatta)를 말하는데,
초기경전 도처에서 부처님이 설하셨다.
특히 <쌍윳따니까야>에 잘 설해져 있다.
한편 <법구경> 등에서는 삼특상을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개고(諸行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했다. 그러나 같은 말이다.
그리고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용어는 초기경전이나
상좌부 아비담마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삼법인은 대승불교의 교설이 확실하다.
그러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삼특상은 오온(五蘊)으로 대표되는
유위법(有爲法)의 특징을 밝힌 것이다.
모든 유위법은 그것이 선법이든 불선법이든
모두 무상이요, 고요, 무아라는 것이다.
여기서 열반은 제외된다. 이렇게 삼특상은 유위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유위법이 무상ㆍ고ㆍ무아임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해탈 열반은 실현된다고 한다.
※유위법(有爲法)-유위법은 형성된 것을 말하며,
이에 반대되는 형성되지 않은 것을 무위법(無爲法a)이라 하는데,
곧 열반(涅槃, nibbāna)이 무위법이다.
그래서 삼특상은 유위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유위법(有爲法)에는 「무상ㆍ고ㆍ무아」의 세 가지 성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
그리고 물질(色)-사물 등이 해당된다.
유위(有爲)라 하는 것은 위작(爲作), 조작(造作)의 뜻으로
일부러 ‘만들어 진 것’이라는 의미다. 바로 ‘연기(緣起)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우주의 일체존재는 모두가 연기된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에 의한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을 유위라 한다.
그래서 유위법(제행)의
‘무상’을 꿰뚫은 해탈을 무상해탈(無相解脫)이라 하고,
‘고’를 꿰뚫어 실현한 해탈을 무원해탈(無願解脫)이라 하며,
‘무아’를 꿰뚫어서 실현한 해탈을 공해탈(空解脫)이라 한다.
이런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을 삼해탈(三解脫)이라 하며,
이는 <화엄경>에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유위법(제행)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하는
삼특상에서는 당연히 무위법인 열반은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삼법인은 북방의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한 것으로
열반을 포함시키는데, 여기서 법은 유위와 무위를 다 포함한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제행개고(諸行皆苦)보다는 열반을 포함시켜
법의 도장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苦)’를 포함시킨 삼특상은 유위법의 측면을 강조해
무상ㆍ고ㆍ무아를 꿰뚫어 볼 것을 설한 것이고,
‘열반’을 포함시킨 삼법인은 열반까지 포함한
제법을 다 포함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행의 입장에서 보자면, 삼특상은 강한 메시지가 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를 꿰뚫어 봄으로써 해탈 열반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거듭 강조하는 해탈 열반을 실현하는 길이다.
그러나 삼법인은 수행에 관한 메시지보다는
불교 전반의 특징을 밝힌 것이다.
삼특상의 내용을 검토해보자.
1. 무상(無常) -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諸行, 산스크리트어 sarva samskara)에서,
제(諸, sarva)는 ‘일체’ 또는 ‘모든’의 뜻이다.
그리고 행(行)은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m이라는 말과
kara라는 ‘만든다’ ‘행한다’는 의미가 합쳐진 말로서,
‘함께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어떤 존재를 만들고,
어떤 일을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아무 원인과 조건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는 행이나 존재가 아니라
어떤 원인과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爲作] 존재나
어떤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상(無常)은 산스크리트어 anitya를 번역한 말이고,
‘항상(恒常)’이라는 nitya의 반대말이므로
‘무상’이라는 글자 그대로 ‘항상 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 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삼특상 중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첫 번째로 설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중생들의 전도몽상(顚倒夢想, 잘못된 생각)을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즉, 이 세상에 항상 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이 세상에 영원한 실체가 있다는 영원주의에 빠져 있어서
이런 전도몽상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논리적 전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상을 맨 앞에 제시한 것이다.
무상(無常)이란 영원함(항상 함)이 없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변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 모든 생각,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모두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때문에 제행은 “인연화합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행위(제행)와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존재들은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가진다는 것이 연기설의 핵심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항상 하지 못하며, 무상하고,
고정불변의 독립된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존재하는데,
조건으로 발생된 것은 영원할 수가 없다.
조건이 해체되면 실체라고 했던 것도 사라져버리니까.
그래서 독립된 실체가 있을 수 없고, 그래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인연에 의해서 생긴 모든 사물은 한바탕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 위의 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풀잎의 이슬 같고, 번갯불과 같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제행무상은 불교적 존재론인 동시에
연기법에 대한 시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법의 시간적인 관점에서 인과 연에 의해
잠시 현재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고정적일 수 없으며,
더더욱 영원할 수는 없고, 무상해서 변한다는 말이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됐을 때 얼음과 물은 별개가 아니다.
얼음과 물은 다만 변화했을 뿐이며 다른 것이 아니라는 원리,
이것이 ‘불이(不二)’이다. 그 모양과 형태가 다르므로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변화의 측면을 ‘무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상은 고정됨이 없음을 말하는데,
만약 고정돼있다면 어떻게 물이 얼음이 될 수 있으며,
어린이가 어른이 될 수가 있고, 나무가 자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고정돼있다는 것은 바로 죽은 세상일 것이니,
그런 이치란 있을 수가 없다.
이 사회가 점점 발전하는 것도 무상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의 감정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이 일순간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화가 불끈 솟았다 하자.
화가 났을 땐 분명 화가 나 있었으나
상대방이 사과를 해서 기분을 풀리고 나면 어느 새 화가 사라지고 만다.
이럴 때 화의 실체란 무엇인가. 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슬픔, 불행뿐만 아니라 기쁨, 행복 같은 감정도
어느 순간 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했지만
어느새 사랑이 식어버려 헤어지게 되는 것도 무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사람은 모두 생로병사(生老病死)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즉, 만들어진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해
결국 소멸되고 만다는 말이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별이 생기면 일정 기간 동안 머물렀다가 무너져 공으로 돌아가고,
우주도 마찬가지다.
불교에서 항상 하는 유일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무상의 이치는 불교의 기준이요,
근거요, 법인(法印)인데, 절대 독존의 변치 않는 유일신은
바로 이 무상의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세속적인 진리(俗諦)와 절대적인 진리(眞諦)로
구분해서 설법하셨는데,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세속적인 진리에 속한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변하지 말아야 한다.
열반이 진제이다. 열반으로 향해 가는 것이 제행무상이다.
열반으로 가기 위해 부단히 변화고 있음을 말한다.
제행무상은 번뇌가 없는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다리다.
다리를 건너가 열반으로 가야 한다.
2. 고(苦) - 제행개고(諸行皆苦)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도 하는데,
초기불교에서는 그냥 ‘고(苦)’라고 했다.
초기불교에서 성립된 세 가지 근본교의이자,
초기불교의 핵심사상인 삼특상(三特相)의 하나이며,
모든 형상이 고(苦)로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일체개고는 일체가 고통이다. 모든 것이 고통이란 말이다.
이 말의 원 뜻은 제행개고(諸行皆苦)이다.
즉, 모든 행은 모두가 고통이라는 뜻이다.
행(行)이란 뭘 하고자 하는 의지, 바램이다.
제행(諸行)의 원인은 무명(무지) 때문이다.
"나"가 있다는 무명, 그래서 12연기에서 무명 다음에 행(行)이 따른다.
행(行)이란 모든 마음의 움직임이다.
즉, 모든 생각도 근본은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모두가 다 마음의 작용이다.
왜 모든 행이 고통일까?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법에 대한 생각이든,
모든 유위법은 ‘나’라는 것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행의 원인은 ‘나’가 있다는 무명으로 인한 탐욕(바램)이다.
제행무상이기 때문에만 고통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고통이다.
탐욕 자체이기 때문에 고통이다.
그래서 고(苦)는 무상(無常), 무아(無我)와 더불어
삼유위상(三有爲相-현상계에 있어서의 세 가지의 모습)으로서
불교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제법무아(諸法無我)에 대해서는 불교 이외의 일반사람도
이를 쉽게 인정하지만,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해서는
무상이나 무아처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일체(一切) 현상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므로
실로 무상하다. 중생이 번뇌에 사로잡혀 고(苦)에서 허덕이는 것은
그들이 무상한 것을 상주(常住)하는 것으로 알아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개고(一切皆苦)는
무상, 무아인 것은 고통이라는 것을 밝힌 명제이다.
즉, 고(苦)의 인식이 불교의 출발점이다.
염세철학은 도피의 논리이나 불교는 참여와 해결의 논리이며,
화합과 창조의 논리이다.
고통도 즐거움도 실체가 없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무상과 무아라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집착함으로써 오는 고통이 일체개고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당면 목적은 고(苦, duhkha)의 해결이다.
그런데 중생이 겪는 고의 원인은 무지와 집착, 무명과 갈애라고 했다.
즉, 중생이 겪는 고통이란 이런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마음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또한 마음의 탐(貪)⋅진(瞋)⋅치(痴)가 고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은
모두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경전에는
‘모든 것은 고다.[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했다.
일체개고라는 말은, “윤회(輪廻) 전생(轉生)하는 범부에게는
일체의 현상은 고(苦)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윤회를 벗어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결코 고가 없는 상태를 얻을 수 없다는 말이며,
윤회 전생하는 범부에게 쾌락과 행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절대적인 적정(寂靜)의 낙(樂)은 결코 얻을 수 없다.
때문에 범부에게 있어서는 현상세계는 고(苦)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일체개고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을 통해 해탈을 해야
고에서 벗어난 열반에 이를 수 수 있다는 말이다.
3. 무아((無我) - 제법무아((諸法無我)
불교에서 ‘법(法)’이라고 하면 ‘진리’ 혹은
‘진리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외에도 ‘존재’ 혹은 ‘일체(세상만사)’,
‘모든 존재(삼라만상)’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예를 들면, 삼법인에서 ‘법’은 진리를 의미하지만,
여기 제법무아의 제법(諸法)에서 ‘법’은 진리라는 뜻이 아니라
존재, 일체(세상만사), 혹은
모든 존재(삼라만상)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무아(無我)’란 이론적으로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我-아트만)가 없다는 말이다.
즉, 모든 것이 고정된 변하지 않는 그러한 실체가 없듯이,
‘나’라는 존재 또한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한 작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만난 인연으로 존재하게 됐다.
그래서 ‘나’도 연기된 존재라는 것이다.
연기된 존재이기 때문에 무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아의 “내가 없다”는 것에서
‘나’라는 것은 ‘나’ 개인 뿐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 사물까지,
이 세상의 일체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 우주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사람이나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도 무아이며,
나무나 풀이나 돌이나 지구, 태양, 우주와 무생물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무아이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사건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일과 사람들의 감정, 사상, 이념까지
모든 것이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삼라만상, 세상만사가 무아라는 것이다.
이 제법무아는 제행무상이 ‘나(我)’에게 적용됐을 때
깨닫게 되는 경지로서 연기법에 대한 공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상호연관과 연기적인 도움을 통해서만
그 자리에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고 하는
연기법의 공간적인 관점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공(空)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즉,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존재도
그것이 고정된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인연 따라 연기되어진 존재로서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있는 것이란 의미다.
예를 들어, 여기에 자전거가 한 대 있다고 하자.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자전거이지만
연기법에서는 이 또한 무아(無我)인 것이다.
즉, ‘자전거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전거는 인연 따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어서 공(空)한 것이란 의미다.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자전거는 언젠가는 녹슬어 사라질 것이며,
공간적으로 보더라도 바퀴와 체인과 의자와 바퀴살과
모든 부속품들을 해체한다면, 그 순간 자전거는
자전거로서의 기능과 이름을 잃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전거가 아니라 각각의 부속품들일 뿐이다.
‘자전거’라는 이름을 가지기 위해서는 각각의 부속품들이
인연 따라 조화롭게 화합해 서로를 붙잡아주고
서로를 의지해 조립됨으로써 각각이 있어야 할 곳에
서로에 의존해 있어야 자전거라 할 수 있다.
상호의존(相互依存) 혹은 상의상관(相依相關)이라는
연기적인 모임이 없고서는 자전거가 생겨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의 자전거는 있기는 있되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일러 무아(無我) 혹은 공(空)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인연가합(緣起假合)이란 인연 따라 합쳐진 모습이지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잠깐 거짓으로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제법무아는 어느 하나 남김없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거짓으로 잠시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인연이 다하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연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하고 있다.
인간 또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막을 수 없다.
‘나’라는 존재를 놓고 보더라도 어느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외모도 변하고, 성격도 변하며, 능력도 변하고, 체질도 변하고,
생각도 끊임없이 변해가다가 결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중생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특정한 모습을 정해 놓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려 한다.
가진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린다.
그러니 고(苦)가 따라 오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여기에 이렇게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무아라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듯이 일체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할 뿐이라고 했는데,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면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 인연 따라 이런 모습으로,
이런 성격으로, 이렇게 생긴 몸뚱이를 받아 이번 생에 나왔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나의 모습도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고,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억겁의 세월 가운데
한 찰나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실체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실체란 없고, 일체가 무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我執)으로 말미암아 대립⋅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파멸을 초래하고 있다.
이 같은 우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일체는 무상할 뿐만 아니라
무아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봐야 한다.
더구나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自燈明 法燈明)」라고 하셨고,
「자신에 의지하고 법(法)에 의지하라(自歸依 法歸依)」라는
말씀을 강조하셨으며,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제법무아에서 부처님이 말한 무아는 ‘있다 없다’는 것에
치우친 이론이 아니다. 부처님이 말한 무아란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 제법(諸法)을 실체로 봐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 즉, 아(我)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어떤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부처님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무아는 일반적으로 제법무아라는 명제로서 설명됐고,
불교의 근본진리라고 하는 연기설(緣起說)은 이 무아설을 기초로 조직됐다.
따라서 불교에서 무아설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라든가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면에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부와 명예, 권력 등을 가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나 모든 것이 변하는 제행무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항상 할 수 없고, 언젠가는 사그라질 그런 무상한 것이고,
제법무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애쓰며 모으고 만든
내 것이란 것도 사실은 그 실체가 없는 거짓된 모습에 불과하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나와 나의 모든 것은
모두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어서 그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고 만다.
인연을 모르고 연기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이라고 하는 집착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ㆍ고ㆍ무아」 세 가지 진리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예외가 없으며,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
불교는 이 세 가지 보편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고 봤던 부처님의 관점은
종종 염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에 대해서 불교의 논사(論師)들은
절대적인 부정 위에서만 절대적인 긍정이 생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곤 했다.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진실을 똑바로 직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각자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국은 모든 것이 고통일 뿐이라는
진실을 깨달은 후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한 마음을 견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하나의 깨달음이다. 또한 모든 것이 고통인 까닭은
모든 것이 덧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생겨난 것은
차츰 변해 가고 마침내 스러져 간다.
한 찰나의 순간조차 전혀 변화 없이
고정된 채로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진실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었다.
부처님 생존 당시 자이나교라든지, 브라만 교단에서는
영원한 어떤 것을 인정하는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진리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 점에서 매우 독창적인 차별성을 가졌다.
더 나아가서 왜 덧없는가?
모든 것은 불멸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 그 무엇도 영원한 고정 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이것이 하나의 진리이다.
이러한 「무상ㆍ고ㆍ무아」 세 가지 진리를
철두철미하게 깨닫는 것은, 곧 불교의 핵심을 아는 것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이, 부처님”과 다를 바 없는
경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삼법인(三法印)에 대해
이견이 생기는 것은 법을 적용하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가 유위법인 오온(五蘊)을 중심으로 교설을 펼치는데 반해
대승불교는 유위법인 오온뿐만 아니라
무위법인 열반까지를 포함시켜 교설을 펼치고 있다.
즉, 대승불교는 유위와 무위를 통틀어 광범위한 개념으로
법인(法印)을 삼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삼특상(삼법인)은 중생을 지배하는 결정적 법칙이다.
무명(無明)에 휩싸인 중생의 오온은 무상과 무아, 고를 수반한 채
생로병사를 겪는다. 오온은 존재하지만 무상이고 무아이고
고이므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유위법인 오온을 통찰해
무상(無常)을 깨달으면 위없이 자유로운 무상해탈(無相解脫)을 이루고,
무아(無我)를 깨달으면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공해탈(空解脫)을 이루며,
고(苦)를 깨달으면 더 이상 구할게 없는 무원해탈(無願解脫)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삼법인을 오온에 속하는 절대적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승은 무상ㆍ무아ㆍ고 거기에 더해서
열반까지도 실체가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삼법인이든 삼특상이든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의 법을 공(空)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교리에서는
오온 그 자체가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어떠한 법칙도 진실할 수 없다.
눈병으로 인해 일어난 허공의 무늬들이
아무리 다양한 모습을 펼쳐 보인다 해도
실제가 없어서 허공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온 자체가 실제가 아닌 공이므로
당연히 오온에 따른 어떠한 법칙도 실제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이 공하므로 무상도 공하고 무아도 공하며
고도 공할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열반마저도 공하다고 가르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세상 일체의 모습은
전부 허깨비 같은 존재들이어서 무상하지도 항상 하지도 않으며,
실체가 있는 것도 실체가 없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또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다.
대승불교의 이 같은 논리는 비단 삼법인에 관한 내용뿐만이 아닌
초기불교의 모든 교법에 관한 내용까지 포함한다.
대승에서는 제법의 공성을 파악하면 삼법인만이 아닌
십이연기(十二緣起), 사성제(四聖諦), 업(業), 사과(四果) 등의
제반 진리들도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고 설한다.
<금강경>에 어떤 법도 얻은바 없는 것을 이름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한다는 구절이 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내용이 확고부동한 진리는 아니며
부처의 진정한 깨달음은 얻어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초기불교는 부처님이 수행을 통해
삼법인을 비롯한 12연기와 사성제 등의 모든 이법을 확인하고
이를 진리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공이라는 명제 하나를 깨달으면
삼법인ㆍ12연기 등의 법칙도 실제의 모습이 아니어서 얻었다라고
할 만한 내용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꿈속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여인은 본래 허구이므로
만난 적도 헤어진 것도 없는 것처럼
일체의 존재들이 공하다면 비록 수행을 통해
법칙을 발견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공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다만 중생들이 오온을 비롯한 일체의 법이 공하다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무상하다느니 항상 한다느니 괴롭다느니
즐겁다느니 하는 분별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오온을 관찰할 때
초기불교처럼 무상과 무아와 고를 관찰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오온이 실재하지 않는 공임을 관찰해
무명을 타파하고 삼법인마저 뛰어넘을 것을 강조한다.
오온이 연기된 존재라면 오온은
실재가 아니며 오온이 실재가 아니라면
무상ㆍ무아ㆍ고ㆍ열반 등의 법인과 특상도 실재가 될 수 없다.
다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대승불교가
삼법인을 무시하거나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이와 같은 교설을 수용은 하되
대승불교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과정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
불도를 닦는 보살은 삼법인(삼특상)을 진리로 삼되
종국에 가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진리를 유상교(有相敎)라 하고
대승불교의 진리를 무상교(無相敎)라 한다.
유상교란 확인하고 얻을 만한 법칙이 있다고 보는 가르침이고,
무상교란 확인하고 얻을 만한 법칙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초기불교의 삼법인(삼특상)은 범부들에게 있어 거부할 수 없는
확고한 진리였다. 범부들의 보편적 시각에서 보면
세간은 무상이며 무아이며 고라고 설하는 초기불교의 교설이
훨씬 합리적이고 사실적일 수 있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자칫 관념론에 빠지기 쉬운 약점을 지닌다.
오온을 관찰 할 때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무상과 무아와 괴로움이지 공은 아니다.
오온을 관찰 할 때에 삼법인은 확인하기
용이해도 공은 확인하기 어렵다.
공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깨달음의 영역이지만
과연 공을 어떻게 체득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초기불교만큼 그 방법을 흔쾌히 답하기 힘들다.
이러한 이유로 대승불교에서는 오온을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수행보다는 철저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모든 것이 분별로 인해 나타나는 허망한 것이므로
분별을 타파하면 일체가 공해져 존재의 그물에 걸려
장애를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는 한쪽에서는 삼법인을 궁극적 진리로 가르치고
한쪽에서는 공을 궁극적 진리로 가르친다.
똑같은 좌선이지만 한편에서는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라 하고,
한편에서는 분별심을 타파하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라고 한다.
또한 초기불교를 가르치는 도량에서는
제법의 생멸을 강조하고 대승불교를 가르치는 쪽에서는
제법의 불생불멸을 가르친다.
삼법인을 결정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공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불자들은 혼란해 한다.
그 접합 점을 찾아야 할 때다.』 - 이제열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