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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조선왕조 500년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조선왕실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황실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사연구 및 전시,교육 활동을 통해 국민과 함께하고있으며.앞으로도 옛 선조들이 남긴 고품격의 문화재를 통해 오랜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문화 터전으로 거듭나게 노력하여 문화발전에 앞장서겠다고 개관한 박물관이다.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황실 문화유산을 감상하면서 우리의 문화적 유산을 느껴 보았다.국립고궁박물관은 시설규모가 연면적 18,284㎡이고 상설전시면적이 11.132㎡이며 특별전시면적이 448㎡로 1992,12 덕수궁내 궁중유물전시관을 신설하고 2005. 8 경복궁내 국립고궁박물관 부분 개관하였으며 2007,11 국립고궁박물관 전관을 개관하였고 소장품으로는 조선 왕실 및 대한 제국 황실 유물 4만여점과 국가 지정문화재 국보 1건,보물 14건 등을 전시중에 있다.
국립고궁박물관(國立故宮博物館) 좌측 야외 전시장의 안내문
*.야외 전시장에는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국보 제101호).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광화문 철거 건물 잔해(기념적인 것) 등이 젓시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전경
國立故宮博物館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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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國立故宮博物館)내부 입구 전면 중앙 전경
국립고궁박물관(國立故宮博物館)내부 입구 전면 우측 전경
국립고궁박물관(國立故宮博物館)내부 입구 전면 좌측 전경
*,안내석(해설사 대기)
순종탄생(조선 제27대 마지막 임금) 탄생 축하 잔치 그림
(王世子誕降陳賀圖:1874.고종11)
태조(이성계)임금 옥책(玉册)
옥책(玉册)이란? 국왕 ·왕비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옥(玉)에 새겨 놓은 간책(簡冊)을 말한다. 세자 ·세자빈을 책봉하는 글은 대쪽에 새기고 죽책(竹冊)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83년(성종 2) 태조의 황후 황보씨(皇甫氏)를 신정대왕태후(神靜大王太后)로 추존하면서 작성한 책문이 최초의 것이고, 이후 여러 편의 옥책문이<고려사>등에 기록되어 있으나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조선시대에는<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옥책의 서식이 규정되었고, 많은 종류의 옥책이 실물로 남아 있다. 옥책문은 존호를 받는 사람의 덕을 기리는 것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는 크지 않다고 한다.
영조 임금 옥인(玉印)
정조대왕 어진(正祖大王 御眞)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는 조선의 제 22대 임금으로서 휘는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20자)(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조선제 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8살에 왕세손에 임명되었으며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소론을 지지하여, 노론을 지지하는 영조에게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10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조선 진종의 양아들로 입적되고 1775년에는 손자의 권력 기반을 마련해 주려는 할아버지 영조의 배려로 그를 대신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승하하자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제 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고.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주로 대거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할 수 있는 친위 세력을 키웠으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의 원수이자 여당인 노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어, 봉건적 특권을 약화시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높여 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치와 경제 등에 대한 개혁을 진행시켰다.“우문지치(右文之治:학문중심의 정치)”와 “작성지화(作成之化:만들어 냄으로서 발전을 꽤함)”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동시에 붕당의 비대화를 방지하고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으며.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고.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루었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다.또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를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격상시켰으며,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정기적으로 참배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고,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인 수원성을 성곽을 새로이 축조하여 화성(華城)이라 하는 등의 치적이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그 또한 어렵게 노론의 공세라는 역경을 헤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음력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가 추진해 온 개혁은 대부분 무산되고 말았다. 능은 건릉(健陵)으로 아버지 장조가 묻혀 있는 융릉의 옆이다. 처음에 받은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대한제국 때인 189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고 난 후에, 정종에서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다.한편, 정조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아직 없다.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조대왕은 효성이 지극하여 1761년 5월 21일 아버지 조선제 21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사도세자"인 아버지의 능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의 산에 있는 능에 자주 참배하였는데 그때 당시의 능행도 이다.
정조대왕 어필
정조대왕필국화도(正祖大王筆菊花圖) (보물 제744호)
*. 서울 중구 필동3가 26 동국대학교도서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대왕이(재위 1776∼1800)그린 국화그림이다. 정조는 시와 글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가로 51.3㎝, 세로 86.5㎝ 크기의 이 그림은 화면 왼쪽에 치우쳐 그린 바위와 풀위에 세 방향으로 나 있는 세송이의 들국화를 그렸다. 돌과 꽃잎을 묽은 먹으로, 국화잎은 짙은 먹으로 표현하여 구별하였는데, 이러한 농담 및 강약의 조화를 통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꾸밈이나 과장없이 화면을 처리한 점은 다른 화가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으로 파초도(보물 제 743호)와 함께 몇 점 남지 않은 정조의 그림으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좌,세종왕비금보(世宗妃金寶) 우, 세종대왕 금보(世宗金寶)금보
좌측의 세종왕비금보(世宗妃金寶)는 조선(朝鮮)1446년 (세종28년)에 세종대왕이 먼저 돌아가신 세종비(昭憲王后)에게"소헌(昭憲)"이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제작한 금보(金寶)이고 우측의 금보는 조선(朝鮮)1450년 (문종 즉위년)에 돌아가신 세종 임금에게 시호(諡號)를 올리면서 제작한 금보(金寶)이다.
금보(金寶)란? 선왕(先王)이나,왕비(王妃),선비(先妃)에게 올리는 추상존호(追上尊號)를 새긴 도장을 말하며 추상존호(追上尊號)란,선왕(先王), 선비(先妃), 선철(先哲)에게 존호(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올리던 칭호)를 나중에 올리던 일을 말한다.
시호(諡號)란? 죽은 인물에게 국가에서 내려주는 특별한 이름으로, 동양의 봉건 왕조 국가에서 시행된것으로서 시호(諡號)를 받는 대상은 황제, 제후, 임금 등의 군주와 그 조상 및 부인, 공신, 고급 관료, 기타 국가적으로 명망을 쌓은 저명한 인물들이였다.중국 주나라 시절에 시호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신라 지증왕이 514년에 죽자 시호로서 “지증”을 준 일이 최초이며, 그 뒤로도 이어져 고려와 조선에서도 적극 시행되었다고 한다.
시호법(諡號法) 이란? 시호를 정하는 방법은 시호법(諡號法[1])에 따르며, 각각의 글자마다 그 글자에 해당하는 뜻을 4글자 내외의 한자로 설정해 놓은 것이다.
문(文) : 경천위지(經天緯地,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리다.
*.예: 초문왕, 진문공, 연문공, 제문공 등.
충(忠) : 위신봉상(危身奉上,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다.
무(武) : 절충어모(折衝禦侮,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다.
*예: 초무왕, 진무공 등--.
약 300여 자의 글자에 이러한 뜻이 글자마다 1개 이상씩 설명되어 있으며, 국가에서 이 시호법에 따라 죽은 인물의 행적과 공업, 자취 등을 살펴 적절한 뜻의 글자를 결정한 후 시행했다.그외, 민: 노민공, 제민왕,진민후등 영:진영공,초영왕,제영공,진영공,제영공,위영공,진영공 등--.
신하에게 준 시호(諡號)는 통상 2글자로 정하며, 그 뒤에 공(公)이나 후(侯) 자를 붙여 통칭했다.
충무공(忠武公) : 조선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문순공(文純公) : 조선 이황(李滉, 1501~1570)
충무후(忠武侯) : 촉한 제갈량(諸葛亮, 181~234)
황제나 제후인 경우에는 시호 글자가 2자 이상으로 조선에서는 임금에게 통상 8자의 시호(諡號)를 올렸으며, 여기에 중국에서 준 시호 2글자를 붙여 통칭하였다.
세종 대왕의 시호(諡號)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호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며 세종은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1450)으로 이름은 도(祹)이고. 자는 원정(元正)이며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소생으로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인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군, 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4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왕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뒤 정치·경제·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앞의 '세종(世宗)' 2글자가 중국 조정에서 준 시호이고 뒤에 "장헌영문예무인성명호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12자가 조선 조정에서 올린 시호이다. 이에 따라 세종을 '세종대왕(世宗大王)'이라 한다. 세종(世宗)'은 묘호(廟號: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이다.
*.조선 제21대 영조대왕 묘호(廟號) :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윤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영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70자)
英祖莊順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명성황후추존시올린 금보
명성황후 추존시 올린 금책(明成皇后金冊)
대한제국(大韓帝國,1897년,광무1)
명성황후를 추존하면서 금보와 함께 올린 금책이다.종래의 옥으로 제작했던 것을 황제국 권위에 합당하게 금으로 제작하였다.
금책(金冊)이란? 왕실에서 왕비, 세자, 세자빈, 세손, 세손빈 등을 책봉하면서 만든 글을 책문이라고 하는데 왕실의 책문은 대개 간책(簡冊)형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간책이란 대나무를 비롯한 나무, 돌, 금속을 직사각형 형태로 만들어 그 위에 글씨를 쓴 책(冊)을 말한다. 간책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부터 동아시아에 있었던 오래된 책의 형식이며, 종이가 발명된 후에도 동아시아 왕실에서 의례를 거행하는 과정에서 계속 제작되었다고 한다. 왕실에서 만든 책문은 신분에 따라 재질과 명칭을 달리하며, 존호, 시호, 책봉에 관한 글을 새겼다. 대개 금으로 만든 금책(金冊)에는 황제나 황후, 옥으로 만든 옥책(玉冊)에는 왕과 왕비, 대나무로 만든 죽책(竹冊)에는 세자 및 세자빈을 포함한 빈(嬪)의 책문(冊文)을 새겼다. 고종 33년(1896) 조선 정부는 왕은 대군주, 왕비는 황후, 왕대비는 왕태후, 세자는 태자, 세자빈은 태자빈으로 호칭을 바꾸었는데. 이는 조선을 제후국가(諸侯 國家)에서 장차 황제국가(皇帝國家)로 바꾸려는 과정에서 임시로 정한 호칭이였으며 이후 고종 34년(1897) 조선(朝鮮)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었고, 대군주는 황제, 왕후는 황후, 태자는 황태자로 고쳐 불렀으며 황실의 권위와 격식을 새롭게 정하였다.이에따라 황제, 황후, 황태자에게 새로 존호나 시호를 올리게 될 경우에 금책(金冊)을 만들게 된것이다.
마패 [馬牌]
대소 관원이 공사(公事)로 지방에 나갈 때 역마(驛馬)를 징발할 수 있는 증빙(證憑)으로 사용하던 패로서 고려시대 역참제(驛站制)와 파발제(擺撥制)에 의한 통신의 중요한 수단으로 말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 규제를 위하여 마패제(馬牌制)가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1435년(세종 17)에는 새로 마패를 만들어 왕족·관찰사·절제사·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개성유수 등에게 발급하고 구패는 회수하였다. 이 신패는 조선 후기까지 똑같은 형태로 유지되고 주조(鑄造)만 거듭되었다.지름이 10 cm 정도되는 구리쇠로 만든 둥근 패에 연호·연월일과 ‘상서원인(尙瑞院印)’이라 새기고, 한 쪽 면에는 말을 새겼는데, 말의 수가 1마리부터 10마리까지 여러 종류가 있어 급마규정(給馬規定)에 따라 지급하였다. 또한 암행어사에게 지급된 마패는 어사가 인장 대용으로 사용하였고 어사출두 때는 역졸이 손에 들고 ‘암행어사 출두’라고 크게 외쳤다.조선 후기 상하이[上海]에서 김옥균(金玉均)을 살해하고 돌아온 자객(刺客) 홍종우(洪鍾宇)가 전북 순창에서 의병장 최익현(崔益鉉)의 마패를 훔쳐 서울까지 도망쳤던 일은 마패에 얽힌 최후의 사건이다.
마패의 종류에는 대전마패 [大殿馬牌:나라에서 임금이 사용할 말을 불러 모으기 위하여 발급하던, 유자(柚子)로 만든 둥근 패(牌). 각 역에서는 말을 열 필까지 지급하였다] 동궁마패 [東宮馬牌:나라에서, 동궁이 사용하는 마필(馬匹)을 조달하기 위하여 발급하던, 유자(柚子)로 만든 둥근 패. 각 역(驛)에서 한 필에서 다섯 필까지 지급하였다] 빈궁마패 [嬪宮馬牌:국가에서 세자빈이 쓰는 마필(馬匹)을 조달하기 위하여 발급하던, 유자(柚子)로 만든 둥근 패. 각 역(驛)에서는 말을 한 필에서 다섯 필까지 지급하였다]중전마패 [中殿馬牌:나라에서 왕비가 사용하는 말을 조발하기 위하여 발급하던, 유자(柚子)로 만든 둥근 패(牌). 각 역에서는 말을 한 필에서 다섯 필까지 지급하였다]등이 있었다.
제상(祭床)
소,양,돼지의 피를 담는 제기,물기 있는 음식을 담는 제기,생과일과 마른 제수를 담는 제기.등잔,조미료를 넣지 않는 국을 담는 제기 등이다.
존소상(尊所床)
봄,여름용 닭 그림 술동이,촛대,비단 담는 바구니,울창주 대접 등이다.
기타제기
손씻는 물을 담는 제기.용무늬 술항아리,삶은 소내장을 담는 제기등이다.
의정부에 걸렸던 묘당(廟堂)현판
묘당(廟堂)이란? ‘의정부’를 달리 이르던 말이다.
의정부(議政府)는 백관과 온갖 정사(정치·행정에 관한 일)을 모두 관리하는 동반(문관)의 최고 관부로서 영의정과 좌·우의정의 삼정승이 수반(首班 : 행정부의 우두머리)이 되고, 그 밑에 좌찬성(左贊成)·우찬성(右贊成)·좌참찬(左參贊)·우참찬(右參贊)이 보좌하며, 그들의 합의로 중요한 국사를 의결하였다.
상방현판
상방 즉 상의원은 조선시대 임금과 왕비의 옷을 만들고,대궐 안의 재물과 보물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내의원현판(內醫院懸板)
내의원에 걸었던 현판으로 내의원 궁중의 의약을 담당했던 관청이다."조화어약(調和御藥)"은 왕의 약을 조제하는 것을 뜻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
허준(1546~1615)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중국과 우리나라 의학 서적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임금의 칼(御刀)
삼인검(參寅劒)과 사인검(四寅劒)
삼인검(鐵製金銀入絲參寅劒:철제금은입사삼인검)
벽사용 검으로 인년(寅年),인월(寅月),인일(寅日),인시(寅時) 가운데 새 가지 인(寅)의 조건을 갖추어 남든 것을 삼인검(參寅劒)이라 한다.
사인 참사검(鐵製金銀入絲四寅斬邪劒:철제금은입사사인참사검)
도검은 사악한 기운을 끊고 재앙을 막는 도구로 인식되어 왔는데 특히 인년(寅年),인월(寅月),인일(寅日),인시(寅時)(새벽 3시~5시)의 네가지 인(寅)을 갖추어 만들어진 것을 사인검(四寅劒)이라 하였다.호랑이를 뜻하는"인(寅)자는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구의
대삼작노리개
주머니삼작노리개'와 '동자삼작노리개
여자의 옷에 다는 장신구의 하나로서 밀화(蜜花), 산호, 옥, 금, 은 따위로 만든 세 개의 노리개를 황색, 적색, 남색의 세 가닥 진사(眞絲) 끈에 맞추어 단 것으로 옷고름, 안 고름, 허리띠 따위에 매단다. 꾸밈과 크기에 따라 대삼작(大三作), 중삼작(中三作), 소삼작(小三作)으로 나눈다.
적의 차림에 사용되는 비녀의 종류
난초장식과 봉황장식 비녀
적의차림대수머리에 사용되는 비녀
떨비녀
위 비녀들은 20세기 초반때인 1922년 영친왕 내외가 순종임금을 배알할 때 영친왕비(이방자)의 대수머리를 장식한 비녀들로서. 대수머리는 대례복인 적의(翟衣)를 입을 때 갖추는 가체의 일종이라고하며. 머리를 어깨까지 내리고 양끝에는 봉황 장식 비녀, 윗부분에는 떨비녀와 봉황 장식 비녀를 꽂았다고 하며 머리에는 옥으로 장식된 금댕기를 둘러 위 그림과 같이 화려한 왕실의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다.
청화백자수복무늬항아리(靑華白磁壽福文壺)
굽둘레에는 '병인가례시큰뎐고간대듕쇼이십�'이라고 새겼다.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 때 궁궐 대전 곳간에서 사용했던 항아리다.
청화백자모란무늬항아리(靑畵白磁牡丹文壺)
위 항아리는 19세기 후반의 조선시대 항아리로서 운현(雲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는데 "운현"은 조선 재 26대 왕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곳이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인 이하응(李昰應)의 집인 운현궁(雲峴宮)을 말한다.
청화백자 박쥐구름무늬 침그릇
푸른 무늬가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 도자기의 이름은 19세기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박쥐구름무늬 침그릇'이다. 길이는 15cm정도로 아담하고 아름답다.
청화백자모란당초무늬항아리(靑華白磁牡丹唐草文壺)
청화백자란? 백토로 기형(器型)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靑畵沙器)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 10)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다.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燔造)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 중국에서 회청(回靑)이 수입된 뒤부터이며,《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세조 11)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청화백자는 경기 광주군(廣州郡)을중심으로 번조되었으며 이 일대에는 수많은 관요(官窯)가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듭 변천하였다.그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 ·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球形)에 가까워져 양감(量感)이 있으며,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角甁)의 형식이 나타난다.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 각색의 그림이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 ·동물 ·산수(山水) ·십장생 ·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하하였다.
백자용무늬항아리
백자주전자
황(黃)자 새긴 백자 사발(白磁陰刻'黃'名鉢:조선전기)
경기도 광주군 일대에 설치된 분원에서 제작된'黃'자가 새겨진 백자 사발이다.
귀달린 옥잔(玉製雙耳盞)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항아리(燕山君 元子 金乭伊 胎缸:1501 연산군 7년)
연산군의 원자(아들)인 금돌이의 태를 안장하던 항아리이다.몇점의 태항아리가 전시되고 있었으나 불운의 왕이 였던 연산군의 원자 금돌이의 태 항아리가 유독 관심이 더했다.
2008년 10월 28일[화요일]
♧진주성지킴이회 회장 염우섭♧
문화재청 진주성 지킴이회 "홈페이지 바로가기"아래 ▽ C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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