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우도9 - 반본환원(返本還源:근원으로 돌아가다)
석존께서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통해 늙음·병듦·죽음을 보셨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 누구 나가 다 그러하다면 삶 전체가 속절없음을,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없 음을 깨닫고는 유성출가(踰城出家)를, 즉 소를 찾아 떠난 것이다. 소를 찾는 것은 죽음이 없 는 참된 삶을 찾는 것이다. 삶은 그것이 영원할 때 참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꿈 과 삶 사이에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불생불멸하는 생명의 실상을 깨치고 체득하는 과정을 우리는 그 동안 심우도를 보면서 함 께 해왔다. 이번 호에는 심우도의 마지막으로 반본환원과 입전수수 벽화를 게송과 함께 해 설을 통해 그 의미를 마음에 계합시켜 보도록 하자.
반본환원(返本還源:근원으로 돌아가다). 설악산 신흥사 벽화
9.반본환원(返本還源:근원으로 돌아가다)
근원으로 돌아오고자 무척이나 공을 들였구나/그러나 어찌 그냥 귀머거리 장님됨만 같으리/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의 사물 보지 않나니/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진정 근원으로 돌아와 보니,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네. 소 찾아 나선 이래 한 생각 한 생각 이 오히려 소의 모습 아니었던가? 보지 않으면 아팎을 함께 보지 않고, 보면 전체를 보나니, 기이할 것 아무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네. 반본환원은 있는 그대로의 수록산청(水綠山靑) 산수 정경을 그렸다. 즉 본심은 본래 청정하 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얻었 음을 비유한 것이다. 반본환원 벽화는 이렇게 순수한 공(空)일 때 있는 것은 무엇이나 진실 이 된다는 가르침을 구현시키고 있다. 나무와 꽃들, 흐르는 물과 산들은 이미 자신의 참된 집에서 살고 있다. 나무는 산을 흉내내지 않고 흐르는 물은 붉은 꽃을 질투하지 않는다. 인간이 참된 본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고자 하는 뿌리깊 은 욕망이 장애물이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오직 자신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반본환원 벽화는 있는 그대로의 산수를 그려서 그 내용과 형식을 전달해 주고 있다.
십우도10 - 입전수수(入纏垂手;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입전수수(入纏垂手;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밀양 표충사 관음전 벽화
10.입전수수(入纏垂手;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가슴을 풀어헤치고 맨발로 저자에 들어가니/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 가득 함박웃음/신 선의 비법 따윈 쓰진 않아도/그냥 저절로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우는구나.
저잣거리에 들어가 온몸을 드러내 세속의 중생과 함께 하니, 이는 바로 성인의 풍모이네 고 목에 꽃을 피우는 것만이 아니라 앉아 눕고 나아가는 하나하나가 참이네. 입전수수는 중생제도를 위해 자루를 들고 자비의 손을 내밀며 중생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렸다. 즉 이타행(利他行)의 경지에 들어 중생제도에 나선 것을 비유한 것이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면 원은 최초로 돌아 옴으로써 완결된다. 사람이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만이 완전해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출 발했다. 여행을 마친 후 성취하게 된다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입전수수에서 는 다시 마을로, 중생들 속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세상은 출발하는 곳임과 동시 에 끝맺는 곳이기도 하다. 그 동안 우리는 심우도를 보면서 내면으로의 여행, 자기 완성으로 가는 노정을 확인해 보았다. 심우도의 각 단계가 비단 초월적인 궁극적 경계에만 굳이 국한 시키지 않더라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완성해가는 단계와도 상통하고 있다. 따라서 위로 는 깨달음이라는 것에서부터 아래로는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의지력을 현실적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즉 주변에서 그 중심에 이르는 가르침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인욕과 정진력을 통해 성취했을 때 사찰 전각의 벽에만 갇혀 있던 소가 싱싱하게 살아 뛰어 활구(活句)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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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은산대로물은물대로~이타행~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