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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월 파르마 테아트로 파르네세 / 레퀴엠 95분 + 다큐 52분 / 한글자막>
=== 프로덕션 노트 ===
레퀴엠 + 다큐멘터리 <베르디의 뒤뜰>
디미트라 테오도슈(sop) / 소냐 가나시(alt) / 프란체스코 멜리(te) / 리카르도 자넬라토(bass)
유리 테미르카노프 지휘 / 테아트로 레조 디 파르마 오케스트라 & 합창단 연주
베르디 최고의 종교걸작과 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
베르디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C Major의 야심작인 "Tutto Verdi Series"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영상물.
2011년 10월 파르마의 테아트로 파르네세에서 있었던 <레퀴엠>의 실황과 함께, 베르디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을 담은 52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베르디의 뒤뜰>이 함께 수록되었다.
<레퀴엠>은 베르디를 대표하는 종교음악 걸작일 뿐만 아니라, 고금의 수많은 레퀴엠들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손꼽힌다. 본 공연에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마에스트로인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지휘 아래, 그리스 출신의 대형 소프라노 디미트라 테오도슈, 실력파 메조소프라노 소냐 가나시, 이탈리아의 젊은 기대주들인 프란체스코 멜리와 리카르도 자넬라토가 솔리스트로 참여하였다.
세르게이 그르구리치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베르디의 뒤뜰>은 베르디의 고향인 론콜레와 인근 도시들인 부세토와 파르마를 배경으로, 그의 성장기에 관한 에피소드들과 일상에 대한 정보들, 그리고 지역민들에게 있어서 베르디라는 이름이 갖는 소중한 의미 등을 흥미롭게 조망하고 있다.
=== 작품 해설 === <2013년 4월 15일 네이버캐스트 / 황장원 글>
클래식 명곡 명연주
베르디, 레퀴엠 Op.48
"다양한 색채와 차원, 통일성과 방백을 지닌 연극처럼 다루어진 이 [레퀴엠]은 ‘망자(亡者)의 오페라’처럼 보인다. 그것은 진한 감동을 주는 한 편의 멜로드라마로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최후의 심판’의 환영을 보는 듯한 힘과 함께 죽음의 신비와 맞닥뜨린 고통을 승화시킨다." - 알랭 뒤오
베르디가 예순 즈음에 작곡한 [레퀴엠]은 오페라 [돈 카를로], [아이다], [오텔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의 최고 걸작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소 특별한 작곡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베르디가 존경해마지 않았던 두 위인의 죽음이었다. 그는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선구자인 조아키노 로시니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곡 ‘리베라 메(Libera me)’를 썼고, 역시 이탈리아의 대문호인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서거 1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위해서 전곡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완성된 부분은 마지막 곡인 ‘리베라 메’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원래 베르디는 1868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난 선배 로시니를 위해서 특별한 ‘레퀴엠’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그 레퀴엠은 12명의 작곡가들의 협력작업으로 완성되어 로시니 서거 1주기에 초연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흥미로운 프로젝트는 마지막 단계에서 차질이 생겨 무산되었고, 베르디가 완성해놓은 ‘리베라 메’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책장 속에 잠들어 있던 ‘리베라 메’는 몇 년 뒤에 빛을 보게 되는데, 그 계기는 만초니의 죽음이었다. 만초니는 이탈리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작가로서 이탈리아 근대문학의 기틀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제 하에 신음하던 이탈리아 민중의 애국심과 독립심을 고취시키는 작품활동으로 모든 이탈리아인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만초니가 1873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그에 대해 존경을 넘어 경외심마저 품고 있었던 베르디는 큰 충격을 받았고, 로시니를 위해서 써두었던 ‘리베라 메’를 바탕으로 혼자서 만초니를 위한 ‘레퀴엠’을 작곡해서 그의 영전에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듬해 4월, 작품은 예정대로 완성되었고, 만초니의 서거 1주기인 5월 22일에 밀라노의 산 마르코 성당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 자신이 지휘봉을 잡았고, 소프라노 테레사 스톨츠, 테너 주제페 카포니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독창을 맡았다. 국내외에서 많은 인사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룬 초연은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고, 그 사흘 후에는 인근의 스칼라 극장으로 장소를 옮겨 재공연이 진행되었다.
원숙기의 기법이 집약된 대작
[레퀴엠]은 베르디가 남긴 종교음악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다. 연주에 네 명의 독창자, 혼성 4부 합창,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필요하며, 총 연주시간은 통상 80~90분에 달한다. 참고로, 초연 당시에는 무려 110명으로 구성된 관현악단과 120명의 합창단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작품은 외형상 가톨릭의 전통적인 라틴어 가사에 의한 ‘진혼 미사곡’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규모가 이례적으로 장대하고 내용적인 면에서도 극적 성격이 다분해서 성당보다는 공연장에서 연주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전곡의 구성과 각 곡의 연주형태는 아래와 같다
제1곡. Requiem et Kyrie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 합창, 4중창
제2곡. Sequenza (속송)
- 1. Dies irae (진노의 날) - 합창
- 2. Tuba mirum (이상한 나팔소리) - 합창, 베이스
- 3. Liber scriptus (기록한 문서는) - 메조소프라노, 합창
- 4. Quid sum miser (가련한 나) - 메조소프라노, 소프라노, 테너
- 5. Rex tremendae (지엄하신 대왕이시여) - 합창, 4중창
- 6. Recordare (헤아려주소서) -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 7. Ingemisco (저는 탄식하나이다) - 테너
- 8. Confutatis (저주받은 자들) - 베이스, 합창
- 9. Lacrymosa (눈물의 날) - 4중창, 합창
제3곡. Offertorio (봉헌송) - 4중창
제4곡. Sanctus (거룩하시다) - 합창
제5곡. Agnus Dei (천주의 어린 양) -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합창
제6곡. Lux aeterna (영원한 빛) - 메조소프라노, 베이스, 테너
제7곡. Libera me (저를 데려가소서) - 소프라노 독창, 합창
이 작품에서 베르디는 바야흐로 원숙기에 이른 작곡기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자신의 오페라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 그는 정력적인 리듬과 벨칸토 풍 선율을 적극적으로 구사했고, 각 곡들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도록 배치했다.무엇보다 세쿠엔차(Sequenza)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유명한 ‘디에스 이레(Dies irae)’의 음악을 전곡의 중간과 마지막에도 반복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마치 전편을 관류하는 사상과 정서의 구심점을 ‘심판의 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설정한 것처럼 보인다. 아울러 강력하고 절묘한 관현악법도 돋보이는데, 특히 ‘투바 미룸(Tuba mirum)’에서는 무대 바깥에 별도의 브라스 밴드를 배치함으로써 일종의 서라운드 효과를 내도록 했다. 이것 역시 ‘죽음과 심판’이라는 필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암시한다 하겠다. 이 밖에도 베르디는 카논, 푸가 등 오페라에서는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고난도 기법들을 한껏 투입하여 역사상 가장 강렬하고 장엄한 ‘레퀴엠’을 빚어냈다.
인간의 숙명에 관한 강렬한 드라마
그런데 처음에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종교음악이라기보다는 오페라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즉 지나칠 정도로 장대한 규모와 화려한 작풍, 강렬한 어조와 풍부한 노래들로 채워진 특유의 극적 흐름이 ‘레퀴엠’이라는 장르 고유의 차분하고 경건한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TV, 라디오, 영화 등에도 자주 차용되는 ‘디에스 이레(Dies irae)’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격렬하고 무시무시하다. 그런가 하면 테너에 의한 ‘인제미스코(Ingemisco)’ 등 몇몇 독창곡과 중창곡은 오페라 아리아로 전용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고, 소프라노 독창이 리드하는 ‘리베라 메(Libera me)’는 실로 비극적 오페라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하지만 이런 면들을 그저 단점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작품만의 고유한 특징이자 매력으로 간주하는 편이 한결 타당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독창-중창-합창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이 작품에 포함된 여러 노래들이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섭리와 마주한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절박한 호소를 너무도 생생하고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면은 더없이 인간적이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수성을 자극하고 호소하는 베르디의 오페라들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어쩌면 이 [레퀴엠]이야말로 베르디의 심오한 내면세계가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된 작품으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일찍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그 결과 젊은 시절부터 가슴 깊숙이 자리한 ‘인간의 숙명’이라는 명제를 두고 평생 동안 고민했고,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들을 자신의 오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풀어냈다. 그리고 바로 죽음이라는 숙명 그 자체에 관한 음악인 [레퀴엠]의 작곡에 즈음해서는, 존경했던 위인들의 죽음을 목도하며 다시금 깊은 비탄과 치열한 고뇌에서 우러난 질문들을 신 앞에 던졌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그 인간의 삶에 대한, 나아가 신의 존재와 섭리에 대한 질문들을. 그에게 있어서 그러한 의문들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그 어떤 오페라보다도 강렬한 극적 모멘트들로 넘쳐나는 한 편의 드라마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추천음반 및 DVD
[음반]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크리스타 루트비히, 니콜라이 게다, 니콜라이 갸우로프/필하모니아 합창단 & 오케스트라/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지휘) <EMI>
[음반]올가 보로디나, 바르바라 프리톨리, 마리오 체피리, 일다르 아브드라자코프/시카고 심포니 합창단 & 오케스트라/리카르도 무티(지휘) <CSO Resound>
[음반] 루바 오르고나소바, 안네 소피 폰 오터, 루카 카노니치, 앨라스태어 마일즈/몬테베르디 합창단,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존 엘리어트 가디너(지휘) <Philips> *시대악기 연주
[DVD]레온타인 프라이스, 피오렌차 코소토, 루치아노 파바로티, 니콜라이 갸우로프/밀라노 스칼라 극장 합창단 & 오케스트라/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 <DG>
[DVD]안젤라 게오르규, 다니엘라 바르첼로나, 로베르토 알라냐, 율리안 콘스탄티노프/스웨덴 라디오 합창단, 에릭 에릭손 실내 합창단, 오르페옹 도노스티아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클라우디오 아바도(지휘) <EMI>
[네이버 지식백과] 베르디, 레퀴엠 [G. Verdi, Messa da Requiem Op.48] (클래식 명곡 명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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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다음 클래식 백과 / 이진경 글>
레퀴엠
주세페 베르디
실패한 계획
1868년 11월 13일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 조아키노 로시니가 세상을 떠났다. 베르디는 로시니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당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이 협력하여 레퀴엠을 작곡하자고 제안하였다. 베르디는 리코르디와 함께 로시니의 음악적 고향 볼로냐의 시의회의 아카데미아 필하모니아에 협력을 요청하였다. 곧 위원회가 꾸려졌으며, 당시 이탈리아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작곡가 13명이 선정되었다. 베르디는 전체 〈레퀴엠〉 중 ‘저를 구원하소서(Libera me)’를 담당하였다. 로시니 서거 1주기로 계획되었던 초연은 안타깝게도 무산되었다. 위원회의 멤버였던 안젤로 마리아니의 의견에 따라 성 페트로니오 대성당에서의 연주에 대한 반대가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11월 4일 베르디는 이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13명 작곡가들의 작품은 연주되지 못하였고 베르디가 담당한 ‘저를 구원하소서’ 역시 베르디가 다시 찾기까지 책장에 잠들게 되었다.
만초니 레퀴엠
1873년 5월 22일 베르디는 이탈리아 시인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온건하면서도 애국정신이 뛰어났던 만초니를 베르디는 오래전부터 존경하였다. 클라라 마페이를 통해 만초니를 소개받은 베르디는 만초니에게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우리 조국의 진정한 영예를 구현하는 인물로서 존경하는 바입니다”라고 사진 뒤에 써서 보낸 적이 있다. 글귀 그 이상으로 존경했던 만초니의 죽음은 베르디에게 큰 충격이었다. 베르디는 만초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홀로 만초니의 무덤을 방문하여 조의를 표했다. 그리고 베르디는 만초니 서거 1주기에 그를 위한 미사곡을 헌정하려고 하는 마음을 리코르디에게 내비친다. 그렇게 베르디는 ‘저를 구원하소서’를 다시 꺼내들게 된다. 만초니를 위한 레퀴엠은 로시니 때와 달리 베르디 혼자 레퀴엠의 전체를 작곡하였다. 밀라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작곡은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성 마르코 성당에서 밀라노 시장 줄리오 벨린차이의 사회로 만초니 서거 1주기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베르디의 지휘 아래 그의 〈레퀴엠〉이 고인의 영전에 바쳐졌다. 독창은 소프라노 테레사 스톨츠, 테너 주제페 카포니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맡았다. 이 날의 연주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고 사흘 후에는 스칼라 극장에서 재공연이 진행될 정도의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만초니 레퀴엠〉으로 기억되며 불려졌다.
종교 옷을 입은 레퀴엠
〈레퀴엠〉은 베르디의 종교음악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다. 작품은 베르디의 원숙기의 작곡기법이 유감없이 녹아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종교적인 주제를 가진 작품치고는 너무나 오페라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군둘라 크루체(Gundula Kreuzer)는 많은 비평이 종교적인 가사와 베르디의 음악 세팅간의 분열을 인식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확실히 작품은 정력적인 리듬, 숭고한 선율과 가사가 전달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극적 대조로 가득하다. 음악은 가톨릭 전통 라틴어 가사를 가진 레퀴엠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지나칠 정도의 장대한 규모와 화려함, 강렬하고 풍부한 노래로 극적 성격이 강하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이 한스 폰 뷜로우가 작품의 성격을 빗대어 말한 “종교 옷을 입은 오페라(Oper im Kirchengewande)”일 것이다.
극적인 요소는 작품 곳곳에서 보인다. 유명한 ‘진노의 날’은 전곡의 중간과 마지막에 반복하고 있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 곡인 ‘저를 구원하소서’는 그 다음에 ‘진노의 날’을 다시 넣어 신의 구원을 청하는 인간 욕망에 대한 안타까움과 인간의 두려움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2곡 ‘진노의 날’의 한 파트인 ‘눈물의 날’은 베르디가 〈돈 카를로〉 파리 리허설에서 버렸던 부분을 재활용하였다. 즉, 오페라를 구상했던 요소가 〈레퀴엠〉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더욱 오페라적인 요소는 성격으로 부릴 수 있는 독창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저를 구원하소서’의 소프라노이다. 소프라노는 합창과 오케스트라와 대화를 하는 것 같다. 소프라노는 심판의 날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구원을 청한다.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긴 휴지 후 ‘진노의 날’이 울린다. 마치 비극 오페라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적 극 요소 안에도 풍부한 대위의 사용 등으로 오페라와는 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제1곡. 레퀴엠과 키리에(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자비를 베푸소서)(Requiem et Kyrie) - 합창, 4중창
제2곡. 진노의 날[Dies irae, 부속가(Sequentia)]
(1) 진노의 날(Dies irae) - 합창
(2) 이상한 나팔 소리(Tuba mirum) – 합창, 베이스
(3) 기록한 문서는(Liber scriptus) – 메조소프라노, 합창
(4) 불쌍한 나(Quid sum miser) –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테너
(5) 전능하신 대왕이여(Rex tremendae) – 합창, 4중창
(6) 헤아려 주소서(Recordare) –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7) 슬퍼하나이다(Ingemisco) - 테너
(8) 저주받은 자(Confutatis) – 베이스, 합창
(9) 눈물의 날(Lacrymosa) – 4중창, 합창
제3곡. 봉헌송(Offertory) - 4중창
(1) 주 예수 그리스도여(Domine Jesu Christe)
(2) 주께 바칩니다(Hostias)
제4곡. 거룩하시다(Sanctus) - 합창
제5곡. 천주의 어린양(Agnus Dei) –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합창
제6곡. 영원한 빛(Lux aeterna) – 메조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제7곡. 나를 구원하소서(Libera me) – 소프라노, 합창
(1) 나를 구원하소서(Libera me)
(2) 진노의 날(Dies irae)
(3) 영원한 죽음(Requiem aeternam)
(4) 저를 구원하소서(Libera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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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디 <레퀴엠> 해설 === <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음악세계> 212 ~ 215쪽
작곡 1873 ~ 1874년. <리베라 메>는 1868~1869년
초연 1874년 5월 22일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베르디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 1874년 밀라노 리코르디 사
시간 약 1시간 37분
1868년 11월 13일 이탈리아 오페라의 선구자였던 로시니가 파리에서 객사했다. 고향 마을 부세토에서 이 슬픈 소식을 접한 베르디는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그의 서거 1주기에 <레퀴엠>을 헌정하고 싶다는 편지를 11월 17일에 밀라노에 있는 출판사 티토 리코르디 앞으로 보냈다.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작곡가였던 사베리오 메르카단테(Saverio Mercadante)를 비롯한 몇몇 작곡가의 연작으로, 작곡과 연주는 모두 무료로 하여, 로시니의 음악적 고향인 볼로냐의 성 페드로니오 성당에서 1회만 초연한 후, 그 악보는 밀봉하여 묘지에 바치고 나서 음악원의 기록 보관소에 넣어 두었다가, 로시니의 기일에 연주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리코르디와 베르디는 즉시 볼로냐 시의회와 아카데미아 필하모니라는 볼로냐의 음악 단체에 협력을 부탁함과 동시에, 밀라노 음악원의 라우로 로시, 알베르토 마츠카토, 스테파노 론케티 몬테비티 교수 등 지식인을 망라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티토 리코르디가 사무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위원회는 이 <레퀴엠>의 작곡자로 베르디 외에 11명의 작곡자를 선정하여, 작곡상의 통일을 기하도록 요구하였고, 베르디는 마지막 악장인 <리베라 메>를 작곡하기로 하였다. 또한 초연의 지휘는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지휘자로 정평이 나 있었던 안젤로 마리아니가 맡기로 하였는데, 그는 1871년 볼로냐에서 바그너 오페라의 첫 이탈리아 공연인 <로엔그린>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작곡가의 선정을 서둘렀던 위원회는 당시 이탈리아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부졸라, 파치니, 페도로티, 카노니, 페데리코 리치, 니니, 코치아, 가스파리, 플라타냐, 페토렐라, 마벨리니, 여기에 베르디를 포함한 12명의 연작으로 결정, 완성 기한을 1869년 9월 15일로 정하였다.
리코르디는 이 초연에 대해 당시 스칼라 극장의 운영 위원장이었던 밀라노 시장과 상의하였는데, 소프라노는 테레사 스톨츠, 테너는 당시 인기 절정의 마리오 티벨리니로 정하여 전 이탈리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런데 예정되어 있던 볼로냐의 테아트로 코무날레 합창단이 극장 일정 때문에 출연할 수 없게 되고, 테아트로 코무날레의 관현악단도 출연을 거부하여 이 계획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 통고를 받은 베르디는 "그건 어린애의 변명에 불과하다. 조국이 낳은 대작곡가를 추모하는 이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이기심이 낳은 부패 때문이며 조국에 대한 애정결핍이다"라고 하였으나, 이미 완성해 놓았던 <리베라 메>의 악보는 결국 그의 책장 속에서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렸다.
1873년 4월 9일 <아이다>의 재공연 때문에 나폴리에 머물고 있었던 베르디는 나폴리를 떠나 부세토로 향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가장 존경했던 이탈리아의 시인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사망 소식이었다.
1785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만초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1819년에 사극 <칼마뇨라 백작>을 썼으며, 종래의 삼위일체 법칙을 타파하여 낭만주의 문학을 확립한 괴테도 만초니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 후 만초니는 나폴레옹의 죽음을 추모하는 송시 <5월 5일>, 사랑과 신앙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사람들과 순수한 종교 정신을 그린 <약혼자> 등의 작품으로 단테와 비견되는데, 1872년에는 로마의 명예 시민이 되어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온건하면서도 불타는 애국정신이 작품과 생활에 일관되어 있는 만초니를 오래 전부터 깊이 존경하던 베르디는 늘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다. 1868년 6월 30일 그 소원을 이루었을 때에는, "그 위대한 분 앞에 섰을 때 느꼈던 외경심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신 앞에 나아갔을 때처럼 엎드려 절을 올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라고 그 감격을 클라라 마페이에게 편지로 적어 보냈다.
만초니는 베르디가 나폴리를 떠나던 날인 4월 9일, 밀라노의 갈레리아 뒤편에 있는 성 페데레 성당에 갔다가 입구의 돌계단에서 미끄러졌는데, 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택으로 옮겼으나 5월 22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세토의 산타가타 집에서 만초니의 부고를 접한 베르디의 슬픔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줄리오 리코르디에게 보낸 5월 23일자 편지에서도 "위대한 분의 죽음으로 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밀라노에서 있을 장례식에는 도저히 참석할 기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찾아가서 애도의 뜻을 바치려고 합니다"라고 계획을 적어 보냈다. 이 계획은 이전에 로시니를 추도하기 위해 작곡했던 <리베라 메>의 쌓인 먼지를 털어버리고 이번에는 혼자서 전곡을 완성하겠다는 것이었다.
베르디는 이 계획을 실행하면서 아주 신중을 기했는데, 런던과 파리에서는 어떤 미사곡을 작곡해야 하는지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여러 미사곡의 악보를 대조해 보기도 하였다.
6월 2일 밀라노로 간 베르디는 우선 기념 묘지의 성당에 모셔놓은 만초니의 묘소를 찾아간 후, 밀라노 시장인 줄리오 벨린차이를 만나 만초니의 1주기에 고인에게 헌정할 <레퀴엠> 초연에 대한 배려를 요청하여 약속을 받았다. 같은 달인 6월 13일 '지휘의 왕자'라고까지 불렸던 마리아니가 제노바에서 그 화려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죽음에 상심하였기에 <레퀴엠> 작업도 늦어졌고, 6월 25일 파리로 간 베르디는 6월 28일부터 본격적으로 <레퀴엠>의 작곡에 착수했다. 그 해 가을에는 부세토에서 작곡을 하면서 스칼라 극장 지배인과 초연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겨울이 다가오자 베르디는 브루타라고 하는 한파를 피해 매년 그랬듯이 따듯한 지중해 연안의 제노바에서 지냈다. 이듬해 2월, 작곡은 거의 완성되었다. 해변 언덕 위의 산 자코모 사우라에 있는 파라비치니 집에서 살고 있던 베르디는 리코르디를 제노바로 불러 공연 준비를 마무리하는 한편, 독창 예정자를 밀라노에서 불러들여 직접 연습을 시키면서 초연에 대비하였다.
4월 10일 곡 전체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완성되어, 5월 2일부터 스칼라 극장에서 연습에 들어갔다. 그 동안에 공연 준비도 지체없이 진행되었고, 단지 공연 장소의 선정만 고민거리로 남았다. 결국 장소는 당시 롬바르디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고 일컫던 성 마르코 대성당으로 정해졌다. 성 마르코 대성당은 스칼라 극장에서도 가까웠고, 1770년 모차르트가 처음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 숙박했던 곳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1254년 베아토 란프랑코 세타라에 의해 건축된 고딕풍의 유서깊은 성당으로, 이후 바로크풍을 가미한 개보수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871년에는 정면 윗부분이 카를로 마치아키니에 의해 아름답게 완성되었다.
[초연] 만초니의 서거 1주기인 1874년 5월 22일, 밀라노 시장 줄리오 벨린차이의 사회로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초연되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단원 중에서 선발된 110명의 관현악단과 120명의 합창단에 의해 연주되었는데, 독창은 1872년 2월 8일 스칼라 극장에서의 <아이다>의 이탈리아 초연 때 타이틀 롤을 맡았으며 당시 스칼라 극장의 프리마 돈나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테레사 스톨츠, 같은 <아이다>에서 암네리스 역을 맡았던 알토 마리아 월드만, 테너 주세페 카포니, 베이스 오르몬도 마이니 등 당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성악가로 구성되었다.
초연은 베르디가 직접 지휘를 하여 고인의 영전에 연주를 바쳤다. 성당에는 이탈리아는 물론 해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성대한 식전 행사가 펼쳐져 연주와 함께 절찬을 받았다.
성 마르코 대성당의 초연에 이어 5월 25일부터 스칼라 극장에서 3회 공연되었는데, 이때는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의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스톨츠도 상복 대신에 흰색 벨벳에 테두리가 달린 청색과 은색의 드레스를 입었고, 월드만도 분홍색 의상을 입는 등 완전히 보통 연주회의 스타일이었다. 앙코르도 세 곡이나 불렀다는 사실에서도 이 작품의 성공을 짐작할 수 있는데, 연주회가 끝난 후 밀라노 시는 베르디에게 은관을 수여하였다.
5월 25일 스칼라 극장에서의 1회 공연을 끝낸 베르디가 미리 계약되어 있던 6월 9일의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 공연의 리허설을 위하여 5월 26일 밀라노를 떠나게 되어, 나머지 2회 공연은 프랑코 파초가 지휘하였는데 그 칭찬의 소리는 전 유럽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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