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11,25-26)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푸릅니다." 소토메는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의 배경지가 된
천주교인들의 마을.
(지난번에 이어서...)
-무력한 예수
“예수의 내면에서는 유다 광야에서 겪었던 것 이상으로 내적 투쟁이
계속되었을 것이다.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예수
의 마음은 우리 인간들로서는 간파하기 힘든 심오한 신비에 차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방랑의 여정 중에서도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예수
의 신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그는 이때 자신
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하느님에게 털어놓으며 사랑이신 그분의 존재
를 어떻게 증거해야 할지를 물었을 것이다.”(본문113-114쪽)
“예수는 호숫가의 여러 마을에서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사는 이들을
수없이 마주했다.‘이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
야 할까?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들을 고독과 체념으
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어야 한다.’예수는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가난이나 병 자체에서 오는 고독과 절망임을 알고 있었다.
예수는 군중이 요구하는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그는 호숫가의 여러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버려진 열병 환자 옆에 다가가 땀을 닦아주고,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손을 쥐고 밤새 함께했다.하지만 기
적을 행할 수 없었다.군중이 그를 ‘무력한 사람’이라고 부르며,호숫
가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본문 114쪽)
“‘사람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방랑하는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친 발걸음을 옮기던 예수는 가슴속
에 이런 질문을 품었을 것이다.그리고 이때부터 그는‘사랑의 하느님’
이 자신에게 답하는 음성을 조금씩 들었는지도 모른다.이 힘든 여정
에는 또한 예기치 못한 위험이 따랐다.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감시
원들이 헤로데 안티파스의 지지자와 상의하여 예수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신변의 위험을 느낀 예수와 제자들은 헤로데 안티파스
의 영지에서 피해야 했다.그때 예수는”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본문 115쪽)
-유다,가련한 남자
“다른 제자들이 아직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때,유다 이스카리옷만이 스승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하지
만 그는 예수의 본심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그는 비로소 이때 예
수에게 반발한 것이다.“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
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이 말에는 현실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심리가
드러나 있다.즉,“스승이시여,당신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사랑은
현실적으로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당신은 비참한 이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고자 하지만,비참한 사람은 당장 삼백 데나리온의 돈
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아,예루살렘아
“파스카 즈음에 예루살렘은 한낮의 무더위가 수그러들면 급격히
기온이 떨어진다.그리고 싸늘한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빛난다.
순례자들과 그들이 끌고 온 가축도 잠들어 모두가 정적에 휩싸인
가운데 키드론 골짜기 맞은편에는 거무스름한 성벽이 달빛을 받
으며 우뚝 서있다.예수만이 깨어 임박한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제자들은 이때도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다.그들
은 최후의 밤조차도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사랑의 하느님을 드
러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가?이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잠들고 있다.스승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유다 이스카리옷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본문 157쪽)
-체포의 밤
“수개월 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 온 예수였지만,때가 다가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사랑을 위한 그의 죽음은 그 어떤 죽음보다도 비
참하고 초라할 것이다.자신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죽는 것이 어려
운 일이 아니지만,자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반대로 오해하고 있는 이
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것은 고통스러운 행위이다.또한 영웅적이
고 멋진 최후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오해 속에 사람
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며 죽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행위이다.
예수는 자신에게 곧 닥칠 죽음이 영웅적이지도,아름답지도 않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자신이 사람들의 오해와 비웃음,모욕 속에 떠돌이 개
보다도 훨씬 처참하게 죽어 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통스러웠
다. 루카 복음서는 이때의 고뇌에 찬 예수의 절규를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아버지,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
십시오.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덜어졌다.””(본문 176쪽)
-재판하는 사람들
“때는 한낮이었다.예수는 바라빠 일당으로 추정되는 죄수 두 명과 함
께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걸었다.십자가는 횡목 무게만도 40킬로그램
으로,전체 약70킬로그램이 된다.예수는 전날 밤,겟세마니 동산에서
붙잡힌 후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이 70킬로그램이나 되는 십
자가는 그의 야윈 어깨에 파고들었고, 그 가는 팔로는 오랫동안 버
티기 힘들었을 것이다.오늘날에도 그러하지만 예루살렘 시내의 도
로는 매우 좁다.그 좁은 길에 구경꾼들이 늘어서서 예수 일행을 바
라보고 있었다.4월 한낮의 햇살은 강렬했다.”(본문 201쪽)
-주님,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수난 사화 이전의 예수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줄
영광스러운 존재였다.병사들의 채찍질과 군중의 조소나 모욕을 받으면
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능력하다는 것에 오히려 참다운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더불어 곧 언급
할 ‘부활’의 의미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무력한 것’을 빼고는 생
각할 수 없다는 사실,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
에서 ‘무력한 것’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본문 207쪽)
“현실적으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 예수에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직 예수의 부활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모순된 이 문제를 어떻게 해
결해야 할지 몰랐다.그들은 사랑을 이야기했지만,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스승을 이해하지 못했다.그리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자신들의 스승을 왜 내버려 두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그럼에도 그들은
스승을 저버렸다는 심적 고통에 시달렸다.아무리 그런 자신을 변명하려
해도,고통에 젖은 예수의 얼굴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그러기에 예수의
무력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본문 220쪽)
-수수께끼
“부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은 복음서가 아닌 바오로 서간에 전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의 내용이 바오로 서간의 내용보다 사실성이 떨어진
다고 말할 수는 없다.우리는 바오로 서간이나 복음서에 쓰여 있는 예수
부활에 대한 확신에 압도당한다.복음서를 보면 기적 이야기는 부활 이야기
보다 약하게 기술되어 있는데,그것은 성경저자들이 당시 각지에 퍼져 있던
예수의 기적 이야기를 모아서 성경저자들이 당시 각지에 퍼져 있던 예수의
기적 이야기를 모아서 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그런데 부활에 대
해서는 다르다.가장 오래된 마르코 복음사가의 필치는 수난을 생생하게 기
술하고 있으며,다른 복음서들도 확신에 차서 예수의 수난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
하는데,여러분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하느님께
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1코린15,12-15)
“바오로 서간에 나타나는 이 절대적인 확신,움직일 수 없는 확신은
우리를 압도해 버린다.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확신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예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수수께끼를 불가사의하게 생각한다.제자들은 어떻게
일어섰던 것일까?어째서 제자들은 황당무계한,당시 사람들도 비웃고
조롱한 부활을 사실이라고 주장했던 것일까?그들의 신비적 환각자든
가,집단적 최면에 걸렸다고 치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다.그러
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다.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은 채 남
아 있다.”(본문 247-248쪽)
“이미 언급한 수수께끼를 생각할 때, 텅 빈 무덤 사건이 설사 창작이
라 하더라도 제자들이 이 사건에 못지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점을 인
정하지 않을 수 없다.적어도 제자들에게 ‘무력한 예수’를 ‘능력 있는
예수’로 생각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으며, 그 사건 때
문에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본문 249쪽)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오늘날의 많은 성경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것이 사실이 아니지만 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인간의 조건은 사실
이나 실제만으로는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중요한 것은 인간의 혼이
추구하는 것이 진실의 세계인 이상,지금의 나는 베들레헴을 진실로
인정한다.”(본문251쪽)-끝-
(예수의 생애/엔도 슈사쿠 著)
“물론 나는 이 ‘예수의 생애’를 통해 예수 자신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투사시켜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데,예수의 생애에는 우리들의 인생을 투사시켜도 파악하기 힘
든 신비로움과 수수께끼가 있다.나도 또한 언젠가 나 자신의 삶을 축척
하여 다시 ‘예수의 생애’를 쓰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쓴후에도 다시
‘예수의 생애’를 쓰고자 할 것이다.”(본문 251쪽)
들을 걸으며
무심코 지나치는 들꽃처럼
삼삼히 살아갈 수는 없을까
너와 내가 서로같이 사랑하는 것들도
미워하던 것들도
작게 피어난 들꽃처럼
지나치는 바람에 산들산들
삼삼히 흔들릴 수는 없을까
눈에 보이는 거,지나가면 그뿐
정들었던 사람아,헤어짐을 아파하지 말자
들꽃처럼,들꽃처럼,실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삼삼히,그저 삼삼히
(들꽃처럼/조병화)
행복한 날만 돠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