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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후에(Hue)여행, 그리고 월남
드디어 후에(Hue)여행, 나라이름 월남(베트남)의 유래는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 월남중부에 있는 이 후에의 왕궁은 1802년부터 1945년간 13대 143년에 걸쳐 이어진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완(阮 응우옌, 응엔, 웽)왕조의 궁궐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후에의 왕궁은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다. 남쪽 정문인 오문(午門)과 태화전(太和殿),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현임각(顯臨閣), 깃발탑 등의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앞서 말한 대로 미군 군수기지 총집합이라 할 다낭 근처로서 위치상 북위17도선 DMZ아래 큰 도시인 까닭에 월남전 최악의 전투가 이곳에서 발생하여 건축물 대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최근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할 것이다. 정말 전쟁이 무섭다.
현임각에는 역대 왕들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가장 중앙에 위패가 모셔진 완 왕조를 세운 초대황제인 가륭제(嘉隆帝 쟈롱) 완복영(阮福映 응우옌 푹 아인)을 만났다. 그로부터 응우옌이라 하는 왕조는 시작하는데 중국이 겁 안 났는지 그는 황제라 칭했다. 그는 깡다구가 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1802년 나라를 세우고 왕으로 즉위하고서는 이듬해인 1803년 중국 청(淸)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으로 책봉해줄 것과 나라이름을 ‘남월(南越 남 비엣)’으로 하겠다고 요청을 했다. 이를 좋아 할리 없는 청나라다. 서기 938년 장수 오권이 중국군을 박당강에서 전멸시키고 천년 중국의 굴레를 벗어나 최초로 독립한 나라이름이 ‘남월’ 이다. 당연 ‘남월은 절대 안 된다. 차라리 글자만 바꾸어 월남으로 해라.' 그래서 월남(越南 비엣 남-> 베트남)이란 국명이 생겨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아무튼 이는 리 왕조 하에서 송이 일방적으로 국호를 정하고 리 왕조가 이를 조건 없이 수용하였던 예와 비교해볼 때 양국 간 관계가 상당히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던 국제 질서를 감안하여 추인을 요청하는 형식을 빌렸지만, 응우옌 왕조는 국가의 철학이 담겨있는 국호를 스스로 결정하고 이를 추인 요청함으로써 베트남의 대 중국 위상이 과거와는 달라졌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처음부터 후에가 응우옌왕조의 수도는 아니었다. 1804년 청의 가경제(嘉慶帝)는 완복영을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임명한다는 칙서를 내려 보냈고 1806년 완복영은 자신을 가륭제라 칭하며 응우옌 왕조를 창건하고 그때 수도를 탄롱(현 하노이)에서 중부지방의 후에로 옮겼다. 그는 아름답고 유서 깊은 하노이에서 후텁지근하기 이를 데 없는 척박한 중부의 도시 후에로 왜 옮겼을까. 하노이는 이씨왕조, 려씨 왕조, 진씨 왕조의 오랜 수도였다. 당연 이씨, 려씨, 진씨들의 세력이 아주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그는 후에에서 대대로 살아온 광남 완씨(廣南 阮氏)다. 그로서는 후에로 옮기는 것은 당연하다.
잠시 응우엔 이전 왕조를 살펴보자. 완(응우옌)왕조 이전에는 려(黎 레)왕조가 있었지만 말기에 힘 있는 장군들이 나라를 양분하여 2백년이나 통치했다. 북부월남은 정씨(鄭氏 찐)들이, 중부와 남부는 완(阮 응우옌)씨들이 통치했다. 나라전체가 크게 혼란스러워 곳곳에서 민란과 반란이 그칠 새가 없었던 때다. 그 무렵 나라를 결정적으로 뒤흔든 반란이 있었다. 1771년 월남중부 서산(西山 떠이썬)지방에서 완씨 3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세력이 너무 커져 결국 중부의 완씨 정권과 북부의 정씨정권을 몰아내고 나라를 통일시켰다. 중부에도 완씨 정권, 서산의 반란군도 완씨. 이미 말했지만 베트남에 가장 많은 성씨가 바로 완(응우옌)씨다. 하지만 중부의 완씨는 왕족가문인 광남완씨(廣南阮氏)이고, 서산의 완씨는 고산지대 화전민출신인 서산완씨(西山阮氏)로 촌티 나는 무지렁이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지렁이 3형제가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데 있다. 완씨 3형제는 당시 사회의 모순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고통 받는 대다수 농민들을 구제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농민들의 대대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었다. 서산(떠이선)반란은 월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반란이었다. 농민반란군은 1777년 남부 사이공지방을 공격하여 당시 월남중부와 남부를 통치하던 완씨 군벌정권을 멸망시키고 왕족을 대부분 살해했다. 왕족 중 유일하게 완복영(阮福映 응우옌 푹 아인)만 살아남아 배를 타고 멀리 도망치게 되었다.
앞선 글 26.새벽을 여는 베트남 여성들이라는 글에서 <응우엔 왕조의 개국 무렵인 1775년 14살의 왕자 응우옌푹아인이 메콩의 한 지류에서 벌어진 떠이썬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방콕으로 달아나던 길에 풍랑을 만나 배의 돛이 찢어져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 때 두 자매가 모는 조그만 배가 나타나 실려 있던 직물로 돛을 만들어 왕자 일행이 무사히 탈출했다고 한다. 바로 이 자매는 직물장수였다.> 그가 도망가는 내용을 밝힌 바 있다. 그런 그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도망쳐 시암(태국), 캄보디아, 프랑스 등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는데 결국 프랑스가 월남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구실을 만들어주는 상항이 발생하고 그로 그는 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에게 처음 도움을 준 프랑스인은 프랑스 아드랑의 주교 피뇨 드 베엔느이다. 그는 완씨 형제의 반란을 피해 다니다가 하띠엔 (하띠엔은 베트남 최서단에 위치하고 캄보디아로 가는 국경선이 있는 작은 읍 정도의 도시로 역사적인 유적이 많은 곳이다. )의 지배자 막천사(莫天賜 막 티엔 뜨)의 저택에서 아드랑의 주교를 만난다. 그는 선교를 위해 1767년 월남에 도착했는데 그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그의 장남 완경(阮景 응우옌 까인)을 데리고 월남을 떠나 1787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루이 16세를 알현하고 베르사유에서 월남(당시 국명 대월)과 프랑스 간에 공수동맹조약을 맺는다.
조약의 내용은
1. 프랑스국왕은 보병 1200명, 포병 200명, 아프리카군인 25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전함 네척에 승선시켜 신속하게 대월국으로 파견한다.
2. 군대는 군수품 일체, 특히 야전포를 갖춘다. 이에 대한 대가로 대월국왕은 필요에 따라 다낭과 꼰도르섬의 영유권과 주권을 할양한다.
3. 대월국 전역에서 프랑스인이 상업권을 독점한다.
정권, 식민지배, 천주교 전파가 엿보이는 내용들이다. 그로 그에 대한 평가는 통일을 이루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월남에 외세(프랑스)를 끌어들였다는 부정적인 비판도 있다. 이후 응우옌 왕조는 143년이란 짧은 존재 기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그것은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중부 후에 중심의 왕조, 지금의 영토 형태로 전국을 통합한 최초의 왕조, 쇄국 정책을 추구하였던 왕조, 프랑스 제국주의에 주권을 빼앗겼던 왕조, 대중으로부터 가장
비판받는 왕조 등이다. 아무튼 쟈롱황제의 통치기에 월남전역에 천주교가 활발하게 전파되었지만 그의 아들인 2대 명명제(明命帝 민망 1820~1840년)때부터 천주교인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크게 탄압을 받는다. 조선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천주교인들이 엄청난 탄압과 죽음을 당했었다. 이미 민망에 대해서는 인삼을 좋아하는 중흥군주로 앞서 소개를 한 바 있다.
그의 통치기에 완 왕조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한 왕조가 창건되면 대개 초대 왕 때는 내전이나 반란의 후유증을 치유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기 마련이고 창건자의 아들이나 손자 때에 내치를 이루면서 번영을 맛보는 게 역사적인 통례이기도 하다. 그런데 민망은 쟈롱의 장자가 아니다. 그의 장자는 프랑스에 건너갔다고 말을 하지 않았던가. 완복영의 장남 완경(阮景)은 프랑스에 가 루이 16세를 알현하고 프랑스와 군사동맹을 맺었고 프랑스군대와 함께 귀국했고 아버지를 도와 완 왕조를 창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맞다. 그렇다면 당연 그가 2대 황제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맏형 완경은 프랑스에서 몇 년간 있으면서 서양식 교육을 받고 교회에서 영세까지 받아 천주교인이 되어 돌아왔다.
전혀 사람이 변해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병자호란 때 끌려간 우리의 소현 세자가 떠오른다. 그는 북경에 까지 가 천주교 공부를 하고 서양인들을 두루 만났다. 돌아온 소현 세자는 어처구니없게 죽고 말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말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로 봉림 대군인 효종이 왕위에 오른다.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우리의 쇄국정치는 바뀌고 많은 세상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완경은 조상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는 말까지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 완경은 내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전투 중에 죽어 큰 후유증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민망은 완복영의 네 번째 아들이었지만 후궁에서 태어난 서자출신이었다.
사실 응우엔 왕조가 통일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전 영토를 직접 지배하기는 벅찼다. 그래서 조정은 나라를 북, 중, 남으로 나누었다. 중앙은 황제가 직접 지배하는 직할령이고 북부(북성 총진)와 남부(가정성 총진)는 황제의 왼팔과 오른 팔에 해당하는 개국 공신 무장이 다스렸다. 남부는 완복영의 제국을 건설할 때 적극 나서 도와준 주체로서 남부인 기질답게 똘똘 뭉쳐 거의 독립국처럼 행세를 하였다. 남부인의 신망이 두터웠던 그래서 바로 제 2대 민망이 견제한 인물이 레반주엣이라는 인물이다. 환관 출신인 레반주엣은 그가 남부를 지배할 때는 도둑이 사라지고 쌀 생산과 세수가 증대되어 물자가 차고 넘쳤으며 외국의 교역선이 사이공 강에 북적거리고 기독교들 활동도 자유로웠다. 18123년 캄보디아에서 내전이 일어나 그 나라의 왕이 사이공으로 도망쳐 와 구원을 요청했을 때 캄보디아로 들어가 왕권을 회복시켜준 인물도 바로 레반주엣이었다.
그러니까 민망황제는 그가 두려웠다. 1832년 그가 사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총진을 해체하고 그의 죄상을 조작하여 부관참시 까지 운운하다 형을 낮추어 묘를 밀어 평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남부인의 구심점이 되어왔던 레반주엣의 그림자를 거두어내고 남부인을 황의 아들 딸로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양자인 레반코이의 반란이 발생했고 수만의 남부인을 죽이고서야 남부직할지화의 공식적인 작업을 완성했다. 민망의 이름은 완복교(阮福晈 응우옌 푹 떤). 당시 월남에 나와 있던 서양선교사의 편지를 보면 그의 강한 의지력의 강직한 성품을 알 수 있다.
<민망제는 월남의 조정관리들에게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월남 주변 해역을 돌아다니며 노략질하는 해적들도 모두 그를 두려워합니다. 전에는 만약 잡히더라도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쳐 빠져 나갈 수 있었지만, 민망제에게는 뇌물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중앙집권에 집착하였으며 유학에 소양이 깊었고 레반코이 반란 후 메콩델타지역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환으로 교육기관을 확대하고 과거시험을 통해 남부 지식층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역사서 편찬도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에 밀착되었던 부친에 비해 민망은 외세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월남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선교사의 편지가 이를 말한다.
<민망제는 유럽인과의 모든 교역을 혐오하며, 자기 아버지(가륭제)가 한 일을 전부 파괴하려 한다. 유교 신봉자인 민망제는 틈만 나면 우리를 모두 내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민망제가 서양을 받아들인 유일한 사례는 왕궁에 천연두가 돌자 서양 의술을 이용한 대책을 인정한 정도이다.>
민망은 프랑스인들이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드는 게 주 목표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철저히 탄압하였다. 1833년 1월에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을 금한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자는 단호히 신앙을 버려야 하며, 그러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지금 있는 교회는 모두 파괴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한때 프랑스 총독이 술의 세금을 더 걷기위해 술을 개인이 몰래 못 만들게 하자고 왕조에 건의를 할 때 황제들은 대대로 내려온 조상들에게 받치는 제사에 술을 안 내놓을 수는 없다고 반대했다는데 그 또한 농경사회인 월남에서 제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유교에 신봉이 큰 그로서는 그리스도교는 조상숭배와 제사를 금지하여 우리의 오랜 전통과 문화를 파괴하는 종교로 선진문물을 가진 그들에게서 배워야하겠지만 오랜 전통과 영혼까지 그들에게 팔수는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쇄국정책을 쓴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서양세력은 동양을 침략하려고 온갖 짓을 다 했다. 통치기에 월남에서 반란이 자주 발생했는데 모두 서양세력이 뒤를 도와주고 있었다. 시암(태국)이 반란군을 계속 지원하고 있었는데 영국이 그 배후에 있었다. 그들의 검은 의도를 그는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민망은 추악한 꼴을 보지 않고 죽었다. 응우옌 왕조 3대 왕인 띠에우 찌 황제(1841~1847), 그는 늦게 왕이 되었는데 갑자기 죽는 바람에 무덤을 만들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뜨 득 황제의 명에 의해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1848년에 완공되었다 한다. 재위기간이 짧은 만큼 그이 행적도 뚜렷한 것은 없고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그보다는 황후가 더 유명하다. 띠에우 찌 제의정실이자 뜨득 제(4대 황제)의 생모인 뜨주 황태후, 지금까지 뜨주 황태후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중에 한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녀 이야기를 하기 전 응우옌 왕조의 왕위계승에 대해서 말을 할 필요가 있다. 응우옌왕조 시조 자롱제는 슬하에 15황자와 18공주를 두었는데 황태자였던 까인이 1801년에 일찍 죽자 넷째아들인 담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알다시피 까인이 가톨릭에 심취하고 까인의 아들 또한 가톨릭을 믿는 터라 조정대신들의 까인의 아들을 후계로 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자롱제는 담이 황태자로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장자 직계가 아닌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결국 응우옌왕조 사상 가장 영민한 왕 민망을 간택한 것이지만 왕위를 계승하던 원칙을 깨트린 것이 되고 이는 후대에 이르러 무질서와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바로 그 혼란의 한복판에 뜨주 황태후가 자리하게 되고 그녀는 정치 불안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뜨득제의 선왕인 티에우찌 제 역시 황장자 홍바오를 놔두고 차남 홍념을 왕으로 삼았으니 이가 4대왕인 사덕제(嗣德帝 뜨득 재위 1847~1883년)로 그 역시 왕조 책봉 문제에 불씨를 남겼다. 티에우찌는 일찍이 황장자로 삼은 홍바오 대신 뜨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홍념을 마지막 순간에 후계자로 지목함으로써 1851년과 1853년에 홍바오의 반란을 초래하였고 1864년에는 그의 나머지 아들들과 추종세력들이 모반을 일으키는 정치적 혼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는 유서에서 홍바오는 학업을 열심히 하지 않고 놀기를 좋아해서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홍념이 홍바오를 제치고 왕이 된 데에는 당시 황후였던 뜨주와 조정 내 최고 대신이었던 쯔엉당꿰(1793~1865)의 관련이 깊다고 전해진다. 사실 의심스러운 것은 티에우찌가 순시를 갈 때도 대동하였고 식견이 탁월하여 유서에 적힌 내용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그런데 뜨주 황태후 그녀가 어떠하기에 베트남 역사상 솝꼽는 인물이라 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진다.
47. 응우옌왕조의 왕들
뜨주 황태후는 1810년 남부 고꽁에서 예조판서였던 팜당흥의 장녀로 태어났다. 우리가 잘 아는 바오다이의 부인 남풍황후 역시 바로 고공 출신임은 우연이 아니다. 시어머니들은 당연 자신 동네 여인들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그녀는 자롱제의 황후였던 투언티엔까오 황허우 쩐티담에게 간택되어 처음에는 티에우찌 제의 비었다가 흥념이 뜨득제로 즉위한 2년 후에는 황후가 되었고 이후 1902년 서거할 때까지 응우옌왕조 6명의 왕 뒤에서 섭정을 하였다. 정사나 사료 등에 박식하고 성품이 단아한 것으로 나오는 뜨주 황후는 왕실에 들어오는 과정에서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뜨주는 본명이 팜티항으로 팜담홍의 딸이자 팜담롱의 손녀였다.
그녀가 입궁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고꽁에 살던 친척 딘티하인이 티에우찌 젭의 첩으로 입궐하면서 그녀를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녀 집안은 명문가로 학문이 뛰어난 대신 팜담홍의 딸이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응우옌 시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장원급제자나 재상을 경계하라는 말을 누누이 해왔었다. 실제 팜담홍은 1800년에 죽었으나 그 제자인 쯔엉당꿰나 뜨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뜨주는 입궐할 당시 궁녀의 9단계 편제에 따라 비, 궁전, 차비, 귀비, 황귀비를 모두 거쳤다. 그러나 자신보다 먼저 입궐하여 비록 육직에 머무르긴 햇으나 자신의 고모로서 자신을 입궐할 수 잇도록 소개해준 딘티하인이 티에우찌 제 사이에 난 홍바오를 제치고 자신이 낳은 홍념을 왕위에 오르게 한 사건은 그녀가 황후를 두지 말라는 자롱제 시조의 명령을 어기지는 않았어도 이때부터 이미 궁중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으며 정치적 야욕이 대단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튼 왕위에 오른 4대왕인 사덕제(嗣德帝 뜨득 재위 1847~1883년), 그 무렵 프랑스는 다낭에서 함포사격을 가한 이래 본격적으로 침략하여 수많은 전쟁과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1847년 2월 26일. 프랑스 극동함대 소속 군함이, 월남에서 선교하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은 프랑스인 선교사 5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다낭항구로 들이닥쳤다. 당시 월남을 통치하던 후에의 완씨정권은 프랑스의 요구를 수용하여 선교사를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두달후인 4월 15일 프랑스의 군함 두척이 다시 다낭항구로 들어와 항구에 정박해 있던 월남 함대에 포격을 가하여 5척을 격침시켰다.
프랑스 군함의 무차별 포격으로 월남은 사망자 40여명, 부상자 90여명, 행방불명 1000여명의 피해가 있었지만 프랑스측의 피해는 사망자 1명, 부상자 1명뿐이었다. 1847년 제위에 오른 뜨득제( Tu Duc 嗣德帝 사덕제 재위 1847~1883년)는 서양열강의 통상요구를 모두 거절하고 그리스도교를 크게 탄압했다. 뜨득제는 1848년과 1851년에 칙령을 내려 프랑스 선교사 2명을 처형하고,1857년에는 스페인 선교사 2명도 참수했다. 황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1858년 7월에 칙령을 공포해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자도 극형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1848년부터 1860년 사이에 월남에서 그리스도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사람은 유럽인 선교사 25명, 월남인 사제 300여명, 일반 평신도 3만 여명에 달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군함 12척에 3000명의 군사를 싣고 다낭으로 쳐들어왔다. 1858년 8월 31일.마침내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무차별 포격을 가하며 월남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다낭을 점령했다. 다낭은 수도 후에에서 걸어 삼일거리였다. 월남 식민지화의 포성이 울려 퍼진 것이다. 프랑스의 침략으로 완왕조는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베트남 민중들은 격렬한 반프랑스 투쟁을 이어갔다. 베트남의 저항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면 프랑스군은 함포사격으로 저항세력의 기지를 파괴하고, 가까이 접근한 후에는 야포로 맹렬히 포격했다. 이에 대항하는 베트남 저항세력이 가진 무기는 칼과 빈약한 소총뿐이었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완충직(阮忠直 응우옌쭝쯕)의 에스페란스호 습격사건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특수부대와 해병대를 태우고 메콩강을 침공하자 완충직은 ‘칼로 전투함에 맞서는’ 과감한 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었다.두나라 병사들 사이에 백병전이 벌어졌다. 많은 수의 프랑스 병사를 쓰러뜨린 완충직과 그 부하들은 엄청난 무기를 탈취한 뒤 에스페란스호에 폭탄을 장치하고 도주했다. 에스페란스호는 폭발하여 화염에 휩싸였다. 프랑스 정찰함이 급히 구원하러 왔지만 베트남 병사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격분한 프랑스군은 인근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주민 3백명을 학살하고 집을 모두 불태웠다. 에스페란스호 습격사건으로 완충직의 이름이 베트남 전역에 알려졌다. 후에의 왕궁에서 이 승전보를 받은 뜨득제는 완충직을 캄보디아 국경에 있는 중요 전략거점인 하띠엔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한 배신자가 완충직의 모친을 납치하여 항복하지 않으면 모친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완충직은 모친을 살리기 위해 프랑스군에 항복했고 결국 1868년10월 처형되었다. 완충직은 아직도 베트남 민중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인물이다. 완유훈(응우옌흐우후언,1830~1875) 이란 인물도 있다. 그는 민망황제가 노력을 경주한 일체화정책의 산물이다. 그는 남부 쩌가오 출신으로 과거시험 수석합격자 출신이다. 그는 프랑스 군이 들어왔을 때 세 번 군대를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잡혀서 7년 유배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또 다시 군사를 일으켜 규합한 병력이 3천명이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의 고향에서 참수되고 마는데 그는 후에의 궁궐을 향해 큰 절을 하고 칼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절한 대상은 뜨득황제였다. 그렇다면 그가 유배를 갔던 곳은 어디일까.
그 무렵 조정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시끄러웠다. 이 세상 조직에는 통상적으로 주전파와 주화파와 중도파가 이합집산적인 형태로 각기 세력의 크기를 달리하며 공존하지 않던가. 중국 남송 초기의 주전파와 주화파. 남송이 어렵게 금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을 무렵, 북송이 멸망할 때 금에 대해 강경한 저항을 주장하다 포로로 잡혔던 진회가 돌아왔다. 그는 귀환 이후 입장을 바꾸어 금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주화파가 되었으며, 황제의 신임을 얻어 재상이 되었고 우리가 잘 아는 그들이 이순신과 비유하는 악비가 동시대 인물이다. 우리도 그런 역사가 있다. 정묘호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은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1623년에 물러나게 되면서 그 전에 행해졌던 명과 후금 사이의 실리외교를 사실상 배제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피게 되면서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1636년 만주를 기반으로 하는 후금이 세력을 넓혀 전 중국을 사실상 통일하게 되면서 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게 되는 데 맞서 싸우자는 주전파가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 보다는 세력이 강했었다.
1883년 7월 16일. 프랑스를 혐오하던 뜨득제(嗣德帝)가 아들없이 병으로 죽자 베트남의 후에 조정은 왕위계승문제로 혼란에 빠졌다. 당시 조정은 똔 텃 투옛(Ton That Thuyet, 尊室說)과 응우옌 반 뜨엉(Nguyen Van Tuong, 阮文祥) 두 사람이 모든 권한을 손에 쥐고 좌지우지 했다. 당시 조정은 나날이 약해지는 왕권에 비해 대신들은 탁월한 인재들로 학식과 경륜이 높은 실력가들이 있었다. 쯔엉당꿰도 과거 급제자로 자롱제 ,민망제, 티에우찌제, 뜨득제 까지 4대 군주를 모신 사람이고 응우옌반뜨엉(Nguyễn Văn Tường, 阮文祥, 1824년 ~ 1886년)은 건복 황제와 함의 황제와 동카인 황제의 섭정을 맡은 인물이다. 똔텃투옛 또한 문관출신이면서 무관을 능가하는 실력을 지닌 인물로 뜨득제부터 죽득제 히엡호아제 함응이 제 까지 40여년에 걸쳐 조정대사를 다룬 대신이다.
그런 그들의 세력은 날로 커졌다. 왕이나 황후들이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해결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의지함으로써 이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심지어 민망제는 임종을 앞두고 뜨득 제에게 쯔엉덩꿰의 말이면 무엇이든지 잘 듣고 반드시 따르라고 유훈까지 남겼었다. 이는 훗날 왕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되었다. 똔 텃 투옛( 尊室說)과 응우옌 반 뜨엉(阮文祥)은 전권을 휘두르는 근거가 되었고 그들의 덕을 입은 뜨주 황태후 역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들의 전횡을 말하기 전 우선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 그는 너무 이중적으로 처신을 해서 평가가 난해하다. 앞서 ‘10. 호치민 거리 이름은 의미가 다르다.’ 편에서 나는
<똔 탓 투엣의 강력한 군사정책 덕분에 황제는 내/외부의 반란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런 공으로 인해 그는 황실에 들어가자마자 빠른 승진을 한다. 그는 공들을 세움과 동시에 9명의 아들들을 두는데, 이 중 똔 탓 담 (Ton That Dam)과 똔 탓 띠엡 (Ton That Tiep) 이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데 반대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의 업적을 기려 응웬 후에(Nguyen Hue)와 함니(Ham Nghi)거리를 연결하는 거리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니까 똔 가문이 함응이 황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똔 탓 담과 똔 탓 띠엡의 이름을 딴 거리들은 그들의 지도자였던 함응이 거리에 인접해 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언뜻 들으면 대단한 충신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똔 텃 투옛( 존실설: 尊室說)은 베트남 역사 속에서 악명을 남긴 이름이기도 하다. 뜨득이 사망한 후 열달 동안 세 황제가 섰다가는 모두 죽었다. 자식이 없었던 뜨득은 세 양자를 두었다. 그 중 첫 째 양자가 육덕황제 (응우옌푹우응찬 (완복응진.1852~황제 1883)다. 그의 재위기간은 단 3일이었다. 존실설은 그가 탐탁지 않자 끌어내려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였다. 그 뒤를 이어 뜨득황제의 동생이자 타에우찌 황제의 아들인
협화(응우옌푹탕 (완복승.1846~황제 1883)) 가 승계했으나 존실설을 제거하려는 역모가 발각되어 4개월 만에 독살되고 말았다. 마지막 희생자는 건복황제( 응우옌푹하오 (완복호.1869~황제 1883~1884))였다. 그는 뜨득의 세 번째 양자인데 8개월 만에 병들어 사망했다. 일설로는 독살되었다는 말도 있다.
이 세 황제의 죽음 뒤에 궁정으로 불려온 또 한 왕자가 함의(응우옌푹마인 (완복명.1871~황제 1884~1885. 1943死))다. 1885년 7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루셀 드 쿠르시(Roussel de Courcy)는 오만한 식민주의자의 전형이었다. 그는 1천 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후에에 도착하자마자 함응이(Hàm Nghi) 황제와의 면회, 똔텃투옛(Tôn Thất Thuyết)의 면직, 그리고 기밀원의 개편을 강요했다. 궁지에 몰린 똔텃투옛은 7월 4일 밤 후에에 주둔한 프랑스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했으나, 이튿날 새벽 프랑스군의 반격을 견디지 못해 어린 황제를 데리고 수도를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꽝찌(Quang Tri) 지방의 산악지대에 게릴라 거점을 마련하고 황제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침략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는 조칙[일명 근왕령(勤王令)]을 전국에 반포했다.
베트남 각지에서는 황제의 호소에 부응하여 지방의 학자와 지주들이 농민을 이끌고 항불투쟁을 전개했다. 함응이 황제의 망명 궁정이 있던 하띤(Hà Tĩnh) 성 산간지대에는 많은 문신들이 모여들어 의군을 조직하고 공격해 오는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다. 프랑스군 사령관 드 쿠르시는 7월 4일의 봉기 직후부터 강력한 무력진압 방침을 굳히고, 15일에 하띤과 꽝빈(Quảng Bình)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병력을 상륙시키는 한편,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의 일부를 중부로 이동시켰다. 프랑스 정부는 강압적인 수단 대신 융화정책을 쓰기로 결정하고 자연과학자인 베르(Paul Bert)를 북부 · 중부 지역의 주차(駐箚) 총감(總監)으로 임명했다. 그가 항복한 문신들의 생명을 보장해 주자, 프랑스 군대의 우세한 무력 앞에 열세를 면치 못했던 저항운동의 지도자들 중에는 투항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함응이 황제는 1888년 11월 산지의 소수민족 지도자인 쯔엉 꽝 응옥(Trương Quang Ngọc)의 밀고로 결국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알제리로 유배되었다. 근왕운동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황제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이 운동에 참여하던 많은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이를 근왕운동이라 하는데 근왕운동이 여기에서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이 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판딘풍(Phan Đình Phùng)과 호앙호아탐(Hoàng Hoa Thám) 두 사람은 이후에도 장기간에 걸쳐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1895년 판딘풍의 죽음, 1913년 프랑스 측이 보낸 자객에 의한 호앙호아탐의 살해로 베트남인들의 저항, 특히 통킹(Tongking)에서의 저항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이어 등장한 인물이 동카인( 同慶동경, 1864년 ~ 1889년)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제9대 황제(재위 : 1885년 ~ 1889년)이다. 휘는 완복변(Nguyễn Phúc Biện, 阮福昪), 자는 완복응기( 阮福膺祺). 묘호는 경종(景宗). 그의 연호를 따서 동경제(同慶帝)라고 부른다. 프랑스는 그를 시켜 위무신호(慰撫紳豪)의 조서를 발표케 하여 함음이의 망명정부를 불법으로 명하고 동조자는 같이 처벌할 것임을 천명한다. 그는 1885년 22세에 즉위하였지만, 1889년 26세에 사망하였다. 동경제의 아들인 계정제 대신 동경제의 사촌 형제인 육덕제의 아들인 완복소( 阮福昭)가 성태제(成泰帝)로서 제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동카인 황제는 6명의 왕자와 3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육덕 제의 아들이 된 것은 원래 뜨득이 지명한 후계자가 육덕이었고 존실설이 그를 폐위시켰기에 존실설이 중국으로 도망간 후 조정을 지키던 관리들은 육적의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게 순리라고 여겼다.
그는 프랑스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0세에 즉위 했지만, 1907년 9월(28세)에 프랑스의 압력으로 퇴위하여 아들인 주이떤(유신) 황제에게 양위를 하였고 그동안 붕따우에 격리되었다가 아들 유신제( 응우옌푹호앙 (완복황.1900~황제 1907~1916. 1945死))가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와 함께 독립 운동으로 연좌되어, 아프리카 레위니옹 섬에 유배 갈 때 같이 아프리카로 가게 된다. 이후 성태제는 1950년 베트남으로 돌아와 1954년 사이공에서 죽는다. 그러니까 함의제는 알제리로 끌려가 현지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둘 낳았고 그곳에서 죽어 그곳에 아직까지 묻혀 있고 성태 황제와 유신황제도 모두 아프리카로 유배를 간 것인데 기기에 의병운동의 대가 완유훈도 곳을 다녀온 것이다. 알다시피 황제들이 끌려간 후 카이딘 황제(재위 1916~1925년)와 완왕조 최후의 통치자 바오다이 황제(재위 1926~1945년)가 허수아비 신세로 명목상 베트남을 통치하다 완왕조는 1945년 9월 그 막을 내렸다.
19세기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기에 베트남인들의 항불투쟁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일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학자들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첫째로 지도자의 자질이 문제였다. 항불투쟁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대부분 유학을 숭상하는 지식인계층이었다. 유학자들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전투에는 아무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들이 어떻게 막강한 프랑스군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둘째는 무력투쟁이 특정지역에 한정된 것이 문제였다. 주로 북부지방에 한정되어 있었고 다른 지역에 활동하는 세력과 연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셋째는 조직력보다 지도자 개인의 자질에 너무 의존했다. 그래서 지도자가 쓰러지면 그 지역의 투쟁자체가 와해되어버렸다. 넷째는 프랑스 식민정부의 가혹한 탄압방식이었다. 게릴라세력이 출몰하는 지역에 있는 모든 마을을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렸기 때문에 저항세력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기가 어려워져 결국 19세기말까지 항불투쟁은 거의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