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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의 파릇한 생명력을 받으며
병원문을 나서며 박련은 지나온 삶을 돌아봤다. 스스로에게 쉼을 주지 못하고 치열하게만 살아온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회사에서는 이제 후배들에게 자리를 터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순간에도 그는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폐암이란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하고 아내에게만 너무 지쳤다는 이야기로 퇴직을 상의했다. 일주일간의 숙고 기간을 가진 후, 박련은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내심 자유를 느끼면서도 그는 노후생활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그가 퇴직 후 맨 처음 결정한 일은, 무주를 떠나 덕유산 건너편 삼공리 쪽으로 이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까이에 산과 계곡을 두고 업무에 대한 강박에서 멀어져 숙면을 취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지척에 있는데도 평소 오르지 못했던 덕유산을 매일 같이 등반하며 햇볕과 산소를 공급받기로 결정했다. 가까운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등산은 몸을 움직여 산소 섭취를 늘리고, 체온을 상승시켜 암세포를 억제하며, 적당히 햇볕을 쐴 수 있어 항암효과에 탁월하다고 한다.
처음부터 무리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는 천천히 등산 거리를 조절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산을 벗 삼아 세속의 때를 지우고 건강을 다지고 있었다. 주말에는 도시에서 가족단위, 연인단위, 동호회단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박련은 여유를 가지고 산과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약간의 후회가 몰려왔다. 바쁘게만 달려온 지금까지 인생 속에서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면, 박련이 등산을 시작하면서 되찾은 것은 진정한 쉼과 그로부터 얻어지는 소소한 기쁨이었다.
그의 평소 등산 코스는 자연휴양림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천천히 느끼며 시작되었다. 서로 가지를 부대끼며 서 있는 올곧은 나무들은 더불어 숲을 이루며 살지 못한 자신에게 요긴한 충고를 주곤 했다. 월하탄과 제2인월교를 지나 인월담, 사자담을 내려다 본 후, 구천동 33경 중 하나인 안심대에 오르면 그는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다. 맑은 계곡 물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 달려왔느냐고 묻는 날에는, 이제는 연락처도 남겨져 있지 않은 옛 친구들과 그리운 얼굴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래서 일주문을 지나 백련사 안에 들어가 석조계단에 앉아 그리운 딸들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실제로 편지를 쓰지 않는 날에는 마음으로 썼다. 그런 날 박련은 향적봉까지 오르지 않고 백련사에 오래도록 머물다 내려오곤 했다.
" 백련사 높은 곳에서 들꽃이 기다리고 있는 건 자연에 이끌려 찾아오는 누군가다.
그 사람의 이야기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
덕유산이 맺어준 형님 아우님
그날도 박련은 딸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백련사 석조계단 중간에 자리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다가왔다.
"덕유산을 아주 좋아하시는 모양이지유. 늘 뵙네유. 인사나 하고 지내자구유."
박련은 아는 사람이 아니면서도,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도 아닌 상대에게 묘한 친근감과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말을 걸어온 사내가 백련사 인근에서 항상 마주친 등산객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박련과 같은 등반 코스로 거의 매일 등산을 하며 이곳 백련사에서 쉬었다 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날 그들은 산을 내려오며 진심으로 가까워졌다. 박련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인 양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그 역시 덕유산에 오르게 된 사연을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그 사내의 이름은 김구천이었다. 그는 서울 모 은행 지점에서 일을 하다 퇴직하고는 고향인 삼공리에 내려와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와는 3년 전에 사별했고, 외아들은 작년에 장가를 가서 경기도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김구천은 어렸을 적 멱을 감고 놀던 구천동 계곡에 가면 마음이 치유 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박련은 그의 말과 표정 속에 묻어 있는 외로움을 읽으며 마음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연민을 품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덕유산과 백련사가 맺어준 인연으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겨울로 접어드는 어느 날, 김구천이 박련에게 간혹 이야기한 바 있던 식당운영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그는 종종 덕유산과 금강 상류가 키운 나물들과 물고기들을 이야기하며, 그보다 더 좋은 식재료가 어디 있겠느냐는 이야기를 했었다.
"박형, 우리가 한번 힘을 모아보는 것이 어떻겠어? 내가 옛날부터 미식가여서 이곳저곳의 맛을 잘 아는데, 이쪽에서는 금강 상류에 사는 쏘가리, 메기, 자가미 등을 재료로 한 민물 매운탕을 하면 그만이지 않겠나? 그리고 덕유산이 키운 취나물, 고사리, 두릅, 참나물 등으로 산채 비빔밥도 메뉴로 곁들이면 좋을 거고 말여?"
박련은 연금으로도 그럭저럭 살 수 있고, 그간 모아둔 돈도 있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는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캄캄해지곤 했다. 그래서 김구천의 정식적인 제안은 해봄직한 일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렇지만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 직장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한 가지 업무에만 매달리는 동안 식당운영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이 걱정이기도 했다.
"형님, 정말루 같이 식당을 운영하면 좋겠구만유. 허지만 제가 식당운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두 없는 데다,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고 해서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네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서두 미안해서 그렇게는 못하겠네유."
김구천은 대답 대신 편안한 미소로 박련을 다독였다. 때마침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내렸고 덕유산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변해갔다. 그날, 그들은 눈 내리는 풍경에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하면서 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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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건강, 되돌아온 행복
이듬해 박련의 가족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얼었던 덕유산 계곡 물소리가 힘찬 달음박질 소리를 내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간절한 기다림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 딸은 너무 예뻐졌고, 아내는 훨씬 젊어져 있었다. 박련의 기쁨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왔다. 덕유산이 허락한 숙면과 햇볕, 산소 덕분에 그의 몸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박련이 오르내리던 백련사엔 사찰이 생긴 배경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신라 신문왕 때 덕유산에 은거하던 백련선사가 산 속에 아름다운 연꽃이 피자 그 자리에 백련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박련은 그 이야기가 자신으로부터 상관없는 먼 옛날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시들어가던 육체가 다시 꽃피는 기적이 백련사를 배경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큰 딸은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왔다. 그동안 어학연수를 한 작은 딸은 이제 영어에 능통해 있었다. 새로 이사한 집이 어색한 아내는 그 언젠가의 내조 잘 하는 여자로 돌아와 박련의 삶을 정돈시켜 주었다. 박련은 아내와 두 딸에게 이제 퇴직과 이사의 배경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실은 암에 걸렸었노라는 고백에 가족은 충격을 받았고 덕유산 자락에서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는 말에 안도했다. 박련은 이에 덧붙여 김구천을 만난 사연과 이제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고 싶다는 말도 꺼냈다. 아버지와 남편의 편이 되어 주는 가족들을 보면서 그제야 박련은 기러기 아빠 생활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꽃처럼 맑은 행복 차림상
그로부터 며칠 후, 박련은 이런저런 준비를 끝낸 후 가족과 함께 김구천을 찾아가 인사했다. 김구천은 박련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고자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김구천은 시장 조사도 하고, 식당 자리도 보고, 전국의 유명한 맛집들에서 노하우도 전수받으며 부지런히 이 날을 준비해왔다. 하얀 연꽃 같은 웃음이 김구천과 박련 사이에서 피었다.
식당 사업 초기에는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덕유산이 재배한 각종 나물들만 사용하고, 금강 상류의 맑은 물에 뛰놀던 민물고기만을 재료로 쓰려고 하니 개업일은 점차 늦춰지게 되었다. 홍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박련과 김구천은 각박한 도시의 삶에 지친 여행객들, 등산객들에게 선물 같은 식사를 제공하자는 각오를 잃지 않았다. 덕유산의 햇볕과 산소가 키운 재료들로 손님들을 대접해 드리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다.
철저한 준비 끝에 식당은 여름이 다 되어 '백련정'이란 이름으로 개시되었다. 백련사 일주문을 축소해놓은 듯한 식당 입구를 통과하면 작지만 깨끗한 식탁들이 오순도순 놓여있는 아담한 식당이었다. 박련, 김구천의 정직한 마음과 덕유산 자락 특유의 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식당 안은 점차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한 확장을 하지 않은 채 처음 시작할 때의 자세를 유지하며 식당을 운영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비좁은 식당 안마당에 연꽃을 띄운 작은 연못을 만든 것뿐이었다.
식당일이 바빠지면서 그들은 매일같이 오르던 백련사에 자주 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월요일 하루만큼은 시간을 내어 백련사에 오르는 그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연못을 식당 안에 만든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백련사가 맺어준 우정과 덕유산이 베푼 평화와 위로를 일상의 자리에서 되새기고 싶었던 것이다. 덕유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명소가 된 '백련정'에 가면, 지금도 구천동 맑은 물소리 같은 웃음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첫댓글 흐음 잘 보았고,,, 본관은 40년 넘게 피웠는데, 아직도 끊을 생각을 안하고 한갑씩피니, 어케 될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