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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五
離世間品 第三十八之三
四. 普賢菩薩의 二千答
4. 二十九門의 十廻向答
(4) 至一切處廻向
*菩薩의 十種發無量無邊廣大心*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發無量無邊廣大心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於一切諸佛所에 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觀一切衆生界하고 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觀一切刹一切世一切法界하고 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觀察一切法이 皆如虛空하고 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觀察一切菩薩廣大行하고 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正念三世一切諸佛하야 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觀不思議諸業果報하고 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嚴淨一切佛刹하야 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徧入一切諸佛大會하야 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觀察一切如來妙音하고 發無量無邊廣大心이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心하면 則得一切佛法無量無邊廣大智慧海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냄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일체 모든 부처님 계신 데서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며, 모든 중생계를 관찰하고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느니라.
모든 세계, 모든 세상, 모든 법계를 관찰하고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며, 모든 법이 다 허공과 같음을 관찰하고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며, 모든 보살의 광대한 행을 관찰하고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느니라. 세 세상의 일체 모든 부처님을 바르게 생각하고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며, 부사의한 모든 업과 과보를 관찰하고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며,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고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느니라. 일체 모든 부처님의 큰 회상에 두루 들어가서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며, 모든 여래의 미묘한 음성을 관찰하고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마음에 편안히 머물면 모든 불법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지혜 바다를 얻느니라.”
*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
*
보살(菩薩)의 십종발무량무변광대심(十種發無量無邊廣大心)
*
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은
유십종발무량무변광대심(有十種發無量無邊廣大心)하니 : 십종발무량무변광대심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냐. 이 광대심에 오기까지 앞에 무슨 마음이 있었는가. 십종지혜, 열 가지 지혜가 있었다.
페이지 맨 위에 ‘보살의 십종득지혜’라고 있지 않은가.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지일체처회향이라. 일체처에 간다는 것은 자비심을 의미한다. 자비롭지 못한 사람은 치우쳐서 친한 사람에게만 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모든 곳에 다 간다는 것은 광대심이 있기 때문이다.
‘아, 이래서 일체처회향이라 하고, 본문에는 광대심이라고 해놨구나’ 마음이 무량무변하게 광대하게 넓어져 버리니까 무불지라. 이르지 못할 데가 없다. 바깥의 경계가 무량무변하기 때문에 마음의 경계도 무량무변하다.
걸어가는 길이 원대하면 꿈과 이상이 원대하다. ‘한소식’이라고 하는 그것이 있어서 스님들은 꿈과 이상이 일반 사람들하고 굉장히 다르지 않은가. 마음이 이미 원대하다.
걸어가는 인생의 목적지가 원대한 사람은 마음이 원대하다.
꿈과 이상이 다르다.
불자야,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나니 무엇이 열 가지냐.
소위어일체제불소(所謂於一切諸佛所)에 : 소위 모든 부처님 계신 데서
발무량무변광대심(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낸다.
모든 부처님 처소에, 동서고금에, 늘 그 태양이 빛난다. 그 자리에 계신 부처님에 대한 절대 신심을 먼저 보인다. 흔히 상구보리, 그다음에 하화중생이 나온다.
관일체중생계(觀一切衆生界)하고 : 모든 중생계를 관찰하고
발무량무변광대심(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낸다.
관일체찰일체세일체법계(觀一切刹一切世一切法界)하고 : 일체중생계를 관찰한다. 세상 사정, 인정사정에 너무 힘든 꽃들이 많다. 중생 꽃인데 너무 버겁게 피는 꽃들, 힘든 인생이 너무 많다. 고난 중생의 인정사정을 잘 관찰한다는 것은 지혜롭다, 지혜롭게 살핀다는 것이다. 관일체찰일체세일체법계라. 모든 세계, 모든 세상, 모든 법계를 관찰한다. 일체찰, 해놓고 중생의 입장에서는 일체세라고 하고, 영원한 진리에 대해서는 일체법 이렇게 해놨다. 일체법계, 일체세계, 그렇게 해놨다.
발무량무변광대심(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 한량없고, 그지없고 광대한 마음을 내며
관찰일체법(觀察一切法)이 : 일체법을 관찰하는 것, 모든 법이 뭐와 같으냐?
개여허공(皆如虛空)하고 : 다 허공과 같음을 관찰하고
발무량무변광대심(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무량무변광대심을 낸다. 저 앞부분에 보면 이런 것이 나왔다. 부처님도 그림자와 같다. 중생도 메아리와 같다. 이런 식으로 쭉 표현해놓잖는가.
십인품에 가면 더 잘 표현해 놓았다. 부처님마저 뭘로 본다는 것인가? 그림자, 메아리로 본다. 하물며 부처님을 따라가는 우리도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관찰일체보살광대행(觀察一切菩薩廣大行)고 : 광대한 일체 보살행을 어떻게 하는가? 세상에 대들보는 너무나 많지만 그 대들보 자체도 인연 따라서 그냥 대들보 역할만 할 뿐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모든 보살행의 광대한, 보살행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하고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住聲香味觸法布施)라’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로 보살행을 한다. 그걸 갖다 우리는 ‘관삼륜청정(觀三輪淸淨)하여’ 이렇게 얘기하잖는가. 보살의 광대한 행을 관찰하고
발무량무변광대심(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느니라.
정념삼세일체제불(正念三世一切諸佛)하야 : 관찰을 한다고 관찰 관찰하다가 조금 심심하니까 뭐라고 써놨는가? 정념이라고 했다. 올바른 생각이 바로 관찰이다. 삼세에 모든 부처님을 바르게 생각하고 이게 바로 관찰이다. 바르게 정념하고, 정념이 관찰이다.
발무량무변광대심(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고
관부사의제업과보(觀不思議諸業果報)하고 : 우리가 말로도 생각으로도 논리로도 따질 수 없는 모든 업과 과보, 업을 짓는 것과 업에 대해서 따라오는 과보에 대해서 잘 관찰하고는
발무량무변광대심(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고
엄정일체불찰(嚴淨一切佛刹)하야 : 조금 전에는 정념이라 했지만 여기서는 또 엄정이라고 해놨다. 일체불찰을 엄정한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야 그림을 제대로 그려서 장엄을 할 수가 있다. 정(淨)이라고 하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집착이 없어야 청정한 마음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부처님 세계를 깨끗이 장엄하게 하고 청정하게 하여
발무량무변광대심(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낸다.
엄정이라고 하는 것을 더 꼬치꼬치 따지고 들어간다면 어떤 사람이 장엄하고 청정한 사람이냐? 일반적으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예의 있는 사람, 예의를 갖추는 것을 엄정이라고 한다. 그 예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쉽게 이야기하면 삼강오륜이고 불교에서는 오계 십계 이백오십계 이런 것들이다.
계율의 엄정. 계율로 장엄하고 자기 인생을 향기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향화청(香華請) 향화청 하지 않는가.
꽃과 향기로써 부처님을 맞이하고 부처님을 청하옵나이다.
묘보리좌(妙菩提座)승장엄(勝莊嚴)
제불좌이(諸佛坐已)성정각(成正覺)
내 제자 중에는 아무리 ‘묘보리좌, 승장엄’이렇게 하라는데도 계속 ‘묘보리, 좌승장엄’이라고 하는 분이 있다.
묘보리좌 승장엄, 제불좌이 성정각이다.
엄정, 관찰, 정념 다 똑같은 말씀인데 단어의 반복을 피하느라 이렇게 표현했다. 옛날 분들이 참 자비롭다. 이런 데서 글 보는 재미가 있다. 하나씩 탁탁 이렇게 언밸런스의 밸런스다.
변입일체제불대회(徧入一切諸佛大會)하야: 변입,변입이라는 말도 뭐와 똑같은가? 엄정, 변입, 관찰, 정념 다 똑같은 말이다. 두루 들어갈 수 있으려면 사람이 아주 자비로와야 된다.
자비는 무엇의 근본이 되는가? 삼매다. 대자비심이 삼매의 근본이 된다. 자비가 없으면, 삼악 삼독이 드글드글 끓는다. 그런 사람은 삼매에 들 수가 없다. 삼매에 못 들어가면 인생의 가피가 오지 않는다. 지난 복도 엎어져서 지지난 복인데도 이 삼매가 없으면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못 된다.
화엄경에는 무조건 능입삼매(能入三昧)가 나온다.
어떻게 나오는가?
제1회차에서는 보현보살이 능입비로자나일체제불여래장신삼매에 들어가셨다.
2회차는 어떻게 되는가? 문수보살이 삼매에 안 들어가시고 3회차는 법혜보살이 능입무량방편삼매에 들어가시고 4회차 야마천궁에서는 공덕림보살이 능입선사유삼매에 들어가시고 5회차에서는 금강당보살이 능입보살지광삼매에 들어가셨다.
그것도 종경록에 나오는 말씀인데, 의상스님께서는 법성게를 해석하시면서 ‘화엄경을 요약해서 중심되는 품이 무슨 품이냐? 39편이 십지품 하나로 요결된다’ 이렇게 해놨다. 십지품.
저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집을 세우려면 서까래도 중요하고 대들보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화엄경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운다면 세주묘엄품, 십지품, 이세간품, 입법계품이다. 그것이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결론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
신(信)에서는 세주묘엄품, 해(解)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십지품, 보살십지수행 있잖은가. 그것이 딱 박혀야 된다. 행(行)으로 가서는 이세간품이 박혀야 된다. 증(證) 깨달음에 가서는 선재동자가 일생취판(一生取辦)이라. 한 생에서 깨닫는 걸 보여주기 때문에 입법계품이 딱 서게 된다.
그래서 화엄경의 네 기둥을 따지라면 세주묘엄품 십지품 이세간품 입법계품이다.
의상스님께서는 ‘화엄경의 수행은 다른 것 다 안 봐도 된다. 십지품 수행을 따라가라’ 하셨다. 대화엄종장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십지품 수행은 무엇인가? 십바라밀 수행이다.
초지에서 환희지, 환희지(歡喜地)에서는 보시(布施), 이구지(離垢地)에서는 지계(持戒), 발광지(發光地)에서는 인욕(忍辱), 염혜지(焰慧地)에서는 정진(精進), 난승지(難勝地)에서는 선정(禪定), 현전지(現前地)에서는 반야(般若), 원행지(遠行地)에서는 방편(方便), 부동지(不動地)에서는 원(願), 제9지 무애변재가 통달되는 선혜지(善慧地)에서는 역(力)바라밀, 마지막에 십지인 법운지(法雲地)에서는 지(智) 일체종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서 겸수해서는 초지인 환희지에서는 보시섭과 애어섭 사섭법 중에 그렇게 겸수해서 보시바라밀을 닦는다.
그러면서 십지품에 나오는 대목에는 ‘한 바라밀 중에서 십바라밀이 구족되어 있다’ 이렇게 되어 있다.
바라밀을 스텝 스텝해서 열 스텝으로 하나씩 맞춰놨지만, 1바라밀 중에 10바라밀이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10 곱하기 10은 100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열 개인 10바라밀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110이다.
입법계품 같은 데 미륵보살이 선재동자가 올 때 “여러분들 보십시오. 복성의 부잣집 아들 선재동자가 수행을 해서 110선지식을 친견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미륵보살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문수보살이 팔을 뻗어서 마선재정(摩善財頂)이라. 선재동자에게 마정수기를 줬다.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 있느냐? 일백일십성(一百一十城) 그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데도 팔을 뻗어 마정수기를 했다.
지금도 우리가 수행하는 데 천년 전의 사람이 마정수기를 줄 수 있다. 앞으로 만 년후의 사람들에게도 마정수기를 줄 수가 있다. 영산불멸이라.
화엄경에서는 그런 영원과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의 세계를 문수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마정수기 하는 대목에서 보여준다. 그 시간은 문제되지 않는다. 서로 진실하다면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이긴 하나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잖는가?
그때 문수보살이 팔을 어디까지 뻗었나? 과일백일십성(過一百一十城), 서장(書狀)할 때 늘 나오지 않는가? 과일백일십성(過一百一十城)하야 마선재정(摩善財頂) 선재동자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래서 그 앞부분에 나오는 얘기, 육천 비구가 공부를 못해서 재수를 하잖는가. 육천 비구가 낙방을 해서 근본법회에서 법문을 못 듣고 문수보살하고 사리불을 따라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남행을 해서 걸어가다가 문수보살이 대승에 대해 열 가지 설법을 한다.
대승은 이런 것이다. 종경은 이런 것이다. 일심은 이런 것이다. 인생을 잘 사는 것 성인의 길은 부처님의 길은 이런 것이다, 하고 설법하니까 그 옹졸한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발심을 하면서 깨달았다.
깨달으면서 그 대목은 ‘불리문수사리족하(不離文殊師利足下)하고 모두 문수사리 보살의 발 밑을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일체 시방 제불을 6천 비구가 다 친견해 버렸다’라고 해놨다. 그 비구 있잖은가. 어린 햇중들 이름이 누구인가?
여러분들 확실히 맹인 맞다. 그만큼 보고 그만큼 들었는데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반야심경을 하도 하셔서 아마 깨달으셨을 것이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절대 아는 척을 안 한다.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냐? 말하지 않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종경록에 그대로 나온다.
제가 어릴 때 강당에 있을 때 경반 때 우리 강주스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언자(言者)는 부지(不知)라 떠드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지자(知者)는 불언(不言)이라 아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
제가 제자들한테 물어보면 “스님 많이 읽었습니다. 그거 다 봤습니다.” 이런 놈이 있다. 여기도 와서 앉아 있는데 누구라고 얘기 안 하는데 기가 찬다. 아무리 보더라도 그건 본 것이 아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이래서 통도사 보광전의 선방에 가면 이렇게 해놨다.
능견(能見) 능히 본다. 무엇을? 난사문(難思門)이라. 불가사의한 것을 본다.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허공을 어떻게 보는가?
“허공 많이 봤습니다.” 이런 놈은 미친놈이 아닌가.
책을 읽든지 뭘 보든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허공처럼 봐라, 해놓고 허공을 봤다고 우기고 이러면 두들겨 맞아 죽어야 된다.
자, 그다음에 대충 넘어가자.
저는 지금 하다보니까 재미있다. 여러분들은 재미없으신가? 저혼자 재미있다. 내 입에 맞으면 되지 남 입까지 신경쓸 건 없다. 각자 간 맞춰 잡수시기 바란다.
옛날에는 반찬을 갖다 놓으면 꼭 간장 종지를 올려놓는다. 옛날 어르신들은 간장을 올려놓지 않으면 그 집에서 아무리 맛있는 밥을 해줘도 ‘입에 별로다’라고 한다. 간장만 올려놓으면 음식이 좀 시원찮아도 ‘맛있다’고 한다.
남의 집에 가면 자기집 반찬하고 다른데 입맛에 맞겠는가. 잘 안 맞는다. 그런데 간만 살짝 찍으면 어떤가? 엔간히 맞는다.
아무리 맛없는 것도 꿀에 찍든지 간장에 찍든지 아니면 식초를 찍으면 맛이 있어진다. 특히 콩팥 수술을 했든지, 소금 같은 것을 많이 못 자시는 분들은 새콤한 것을 추가하면 침이 고이기 때문에 소금 대신에 맛있게 건강을 자킬 수가 있다.
자 그다음에 모든 부처님 세상에
발무량무변광대심(發無量無邊廣大心)하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고
관찰일체여래묘음(觀察一切如來妙音)하고 : 일체여래의 미묘한 음성을 관찰하고
발무량무변광대심(發無量無邊廣大心)이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마음을 내나니
시위십(是爲十)이니: 이것이 열 가지다.
십지품에는 가릉빈가 이야기가 나온다. ‘창공을 나는 참새나 비둘기 떼가 아무리 떼거리로 날아다녀도 가릉빈가는 알 속에 있으면서도 그놈들을 이길 수 있다’라고 한다. 가릉빈가 금시조 이런 거 있잖은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것이다.
산삼도 떡잎을 보니까 두 개가 아니다. 산삼은 떡잎이 세 개다. 그래서 삼(蔘)은 풀 초(艹)자 밑에 석 삼(三)자를 쓰는 것 같다.
우리 사형이 산삼이라고 1년 되는 요만한 콩나물 같은 걸 가져와서 “이게 1년생이다.” 이러는데 진짜 산삼을 가져왔다. 이파리를 보니까 세 개더라. 나중에 산삼이 이파리가 다 크면 다섯 개다.
코메디언들이 제일 힘든 게 웃지 않는 관객들일 것이다. 이 강의를 명강의로 만들 수 있는 건 여러분들한테 달려있다. 아주 악독하다. 모르는 사람이 거품을 물고 강의하는 데 ‘해봐라, 크응’ 하신다. 깨달아서 우짜겠다는 것인가. 아까 뭐라고 말씀드렸는가? 부처님이 깨달았다 하더라도 당신이 열반에 드시면 아무 가치가 없다.
감자 있잖은가. 감자를 자르면 눈이 있는데 그 감자 눈 하나를 사람이 그냥 먹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다. 감자 눈 하나가 땅에 다시 심어져서 다른 감자를 올망졸망 달았을 때 감자의 가치가 있다.
부처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렇게 배포되어야 한다.
어른스님 아까 나눠드린 그 법보장 USB 받으셨잖은가?
여러분들 분명히 안 볼 거 알면서 나눠드렸다.
그런데 어른스님 원력이 어떠시냐?
원래 만 개를 하시려다가 어제 백만 개로 더 커버렸다.
그런데 아까 잠시 들으니까 십만 개로 줄이셨다는데 다시 해야 된다. ‘백만 개’ 했으면 다시 ‘백만 개’로 가야 된다.
우리 어른스님 같은 경우 저는 이렇게 표현했다.
둑이 있어서 막아놔서 넘치지 않는 것은 댐인데, 댐이나 강이나 이런 것은 별로 장한 일이 아니다. 바다는 둑이 없지만 넘치지 않는 것이다. 툭 터져 버려야 된다.
허공이 바깥만 무량변이 아니라 무앙(無央)이라. 허공은 중심도 없고 바깥도 없어야 제대로 된 허공이다. 본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00만 개는 금방 할 수가 있다.
스님은 만 개 하신다 했잖은가? 그 만 명이 100개씩 하면 100만 개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그 USB를 가져가셔서 분명히 제가 볼 때는 그걸 가지고 공부를 안 하시고 묵혀 놓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하셔야 되느냐? 어떻게 해서 업장 소멸이 되느냐? 한 개를 받으신 분들은 절대 야매로 복사하지 마시고 어디에? 삼영음반의 정식 제품으로 출판하셔야 된다.
삼영음반에 연락하셔서 ‘그래도 1년에 내가 한두 번은 본다’ 싶은 분들은 10개를 복사해서 사시기 바란다.
그래서 열 분에게 나눠드리기 바란다. 그럼 100개가 된다.
‘나는 영 한 10년까지 안 볼거다’ 하시는 분들은 100개를 복사해서 나눠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불리면 만 곱하기 백 해서 100만 개가 가능하다.
엊그저께 회장스님이 대만에서 온 문자를 저한테 전달하셨다.
대만에서 200명이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와서 해외 공양은 문수선원으로 최초로 오셨는데, 우리가 전에 공양받았지 않은가.
그분들 절이 원도선원이라고 문수선원보다도 더 작은 대만의 작은 절이었다. 그 비구니스님 견휘스님, 저기 비구스님하고 사진도 있잖은가.
그분들이 원력을 세우셔서 큰 절을 세우셨다고 한다.
회장스님께 중국말로 문장을 보냈는데 읽어보니까 자기들이 보엄선사 보배 보(寶)자 화엄경 엄(嚴)자 참선 선(禪)자 절 사(寺)자 보엄선사((寶嚴禪寺)라고 하는 절에 영구전장(永久典藏)이라. 영원히 보관할 수 있는 경전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왔다. 대장경 해인사 같으면 장경각 있잖은가. 그것을 만들 참인데 ‘무비대법사님의 화엄경 주해를 소장하고 싶으니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써서 우리 회장님 입승스님한테 보냈다. 입승스님이 제가 볼 때 조금 한문이 딸리는 것 같다. 원문 내용을 잘 숙지못하시고 저에게 토스를 했는데 친하다고 일러주지 마시기 바란다.
그런데 세상에 어떤 것이 비밀이냐? 비밀은 어느 것이 비밀인가? 두 사람이 아는 것도 비밀이 아니다. 자기만 아는 것도 비밀이 아니다. 자기도 몰라야 비밀이다. 사실 ‘이거 비밀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비밀이 되겠는가? 그냥 얘기하시기 바란다. 무조건 몰라야 그게 비밀이다. 두 사람이서 ‘니만 알아라’ 그게 비밀이 되겠는가. 절대 안된다.
저는 화엄경을 백 번이 아니라 한 번 딱 읽고 오면 이백만원짜리 염주를 드린다. 150만원에서 200만원 짜리 침향염주를 반드시 드린다. 스님이나 일반 재가 분이나 상관없다.
누구나 한 번씩 다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저는 인물 봐가면서 드린다. 그래도 무조건 드리는데 지금 몇 개 안 남았다. 제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 자기가 찾아가는 것이다.
그 절 원도선원에서는 어떤 원력이 있느냐?
그 절에 쪼맨한 아기들도 여기 와서 그날 보현행원품을 외우고 했잖은가. 외우는 것만 잘해서 사람들이 굴러다니는 화엄경이다. 그 절에는 전부 다 화엄경이다. 그 절에서는 화엄경을 하루에 한 권씩 읽어서 1년에 3개월 3개월 3개월 90일이잖은가. 한 번 읽고 80권 또 한 번 읽고 한 번 읽고 1년에 네 번 읽는다.
그렇게 25년을 읽으면 화엄경을 금생에 100번 읽고 꼴까닥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그 정도 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저도 알고 있는 스님 중에 아주 성격이 안 좋은 스님이 지금 화엄경을 100번 읽으셨다. 한 철에 네 번 읽는다.
한 철에 한 번이 아니고 네 번씩 읽으니까 대만 분들보다 많이 읽는다.
아무튼 원도선원 스님들이 또 다른 원력을 뭘 세웠느냐? 그분들은 제일 첫 번째로 우리 강당에 대만에서 ‘대장경을 화물로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해서 화엄경을 머리 다 이고 가지고 와서 여기에 제일 먼저 회향을 했다.
그다음에 대륙으로, 중국 대륙 본토로 진출해서 ‘백만 질 화엄경을 회향하겠다’ 원을 세우고 백만 질을 회향하고 나니까 그 쬐만한 절이 어떻게 돼버렸느냐?
지금 잠시 청심환 하나 잡숫고 들으시기 바란다.
이제 그분들은 불광사만한 절을 짓는다는 것이다.
화엄신장이 어디에 계신가 싶었더니 화엄경을 수지하는 사람한테 항상 도움을 주시는 것 같다.
제가 이 어른스님 USB를 만들 때 스님한테 부담이 되는 것 같아서 “완성본 될 때까지는 제가 비용 다 하겠습니다.” 완성본 될 때까지 그러니까 삼영의 사장님하고 제가 연결해서 2천 개 3천 개 하면서 “나중에 완성도 있게 해나갑시다.”하고 이야기가 됐다. 쪼잔하게 많이 해봤자, 3천 개 5천 개 정도를 예상했다. 저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삼영음반 우리 학무거사님께서도 “스님, 한 3천개만 해서 전국 선방에 돌리면 안 좋겠습니까? 야, 너무 좋은 겁니다.”
이러셨는데 갑자기 3천 개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어른 스님께서 만 개 발언하셨다가, 원도선원에 백만질 화엄경을 보시하고 난 뒤에 더 불사가 왕성해졌다고 하니까 스님이 갑자기 “나도 100만개 할까” 그러셨다.
“예, 스님 100만 개 하십시오”
제가 전에 도표 찍어서 10만 개를 인쇄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한 3700장 찍었잖은가. 계속 찍기는 찍어야지만 저도 10만장 찍는다 했으니 10만장을 찍어야 된다.
3700장 찍고 잠시 뜸들이는 입장인데 “제가 10만 개 하면 스님은 100만 개 하셔야 됩니다.” 하고 어른스님께 말씀드렸다.
그래서 여러분들 혹시나 USB 받아 공부 안 하실 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삼영에, 반드시 삼영이다. 혼자 야매로 해서 찍지 말고 우리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먹고 살아야 된다.
대선스님은 몇 개 찍으실 것인가?
“백 개요.”
책 들고 나가시기 바란다. 금방 이야기했는데 100개가 뭔가, 한 만 개 이래야지.
백천만겁난조우 우리는 여기서 공부하는 이 자체가, 알고 모르고는 상관없다. 화엄하고 같이 이렇게 인생이 굴러간다는 것이 거룩하다고 생각하셔야 된다.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에 보살이
안주차심(安住此心)하면 : 마음이 편안한 데 머물면
즉득일체불법무량무변대지혜해(則得一切佛法無量無邊廣大智慧海)니라 : 모든 불법에 한량없고 그지없는 광대한 바다를 얻느니라. 그러니까 소양강댐 같은 댐이나 강물에는 뭐가 하나도 없는가? 소금이 하나도 없다. 아무리 물이 많아도 항하강이고 장강에 가도 소금이 한 방울도 안 난다. 날 수 있는가 모르겠지만.
(5) 無盡功德藏廻向
* 菩薩의 十種伏藏 *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伏藏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知一切法이 是起功德行藏이며 知一切法이 是正思惟藏이며 知一切法이 是陀羅尼照明藏이며 知一切法이 是辯才開演藏이며 知一切法이 是不可說善覺眞實藏이며 知一切佛自在神通이 是觀察示現藏이며 知一切法이 是善巧出生平等藏이며 知一切法이 是常見一切諸佛藏이며 知一切不思議劫이 是善了皆如幻住藏이며 知一切諸佛菩薩이 是發生歡喜淨信藏이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一切諸佛의 無上智慧法藏하야 悉能調伏一切衆生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묻힌 갈무리[伏藏]가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공덕의 행을 일으키는 갈무리임을 알며, 모든 법이 바르게 생각하는 갈무리임을 알며, 모든 법이 다라니로 밝게 비치는 갈무리임을 아느니라.
모든 법이 변재로 연설하는 갈무리임을 알며, 모든 법이 말할 수 없는 잘 깨닫는 진실한 갈무리임을 알며, 모든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신통이 관찰하여 나타내 보이는 갈무리임을 알며, 모든 법이 교묘하게 평등함을 내는 갈무리임을 아느니라.
모든 법이 온갖 부처님을 항상 뵈옵는 갈무리임을 알며, 모든 부사의한 겁이 모두 환술과 같이 머무름임을 잘 이해하는 갈무리임을 알며,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환희한 깨끗한 신심을 내는 갈무리임을 아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일체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지혜의 법의 갈무리를 얻어 일체 중생을 조복시키느니라.”
*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
*
그다음에 무진공덕장 회향이라 좀 빨리 읽겠다.
*
보살(菩薩)의 십종복장(十種伏藏)
*
마음이 넓어지다가 보니까 뭐가 있는가? 복장이 있다.
‘무진공덕장회향’ 이렇게 제목을 꼭꼭 찍는 것은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무진공덕장회향 해놓으니까 본문에 뭐라고 써놨는가? 영득복장(令得伏藏)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의 잘 묻혀져있는 보배 창고가 있다. 무진장이다 이 말이다.
보현행원품에 가면 그렇게 해놨다
‘어빈궁자(於貧窮者) 영득복장(令得伏藏) 빈궁한 사람들은 영원히 자기한테 갈무리 되어 있는 법보 창고를 얻기를 원한다’ 이렇게 해놨다.
자기한테 보배의 법보장이 다 있는데 왜 못보느냐? 뭐가 없어서? 자비가 없고 지혜가 없으면 등하불명이라. 자기 발밑에 있는 보배도 줍지 못한다. 심지어 저 앞부분에 보면 화엄경에 이렇게 나온다. 손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보배섬에 살아도 보배를 하나도 못 줍는다. 손이 없어서라고 했는데 손이 무엇인가? 손이 신심이다.
화엄경에 보면 주옥같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육조스님의 금강경 서문에 이 대목이 자세하게 나온다.
선지식, 지혜가 있는 사람은 저 산을 뚫으면 금맥이 있다. 착파인아산(鑿破人我山)하고, 인아의 산을 깨어 뚫어보면 인아산 속에 광석이 있고 거기 금강이 있고 내 불성을 견성하리라. 불성을 보리라 그렇게 나온다.
좀 빨리 읽겠다.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복장(有十種伏藏)하니: 유십종복장하니
하등(何等)이: 하등이
위십(爲十)고 : 위십고
소위지일체법(所謂知一切法)이 : 이른바 모든 법이
시기공덕행장(是起功德行藏)이며 : 공덕을 일으키는 모든 법이, 일체법이 어디 가든지 신심이 공덕행이잖은가. 갈무리임을 알고
지일체법(知一切法)이: 일체법이 뭐다?
시정사유장(是正思惟藏)이며: 정사유장이라. 바르게 사유하는 갈무리임을 안다.
지일체법(知一切法)이 :또 모든 일체법이 지일체법, 지일체법, 지일체법이 어디까지 연결되는가? 승혜보살(勝慧菩薩), 제가 승혜보살이라고 했다. 승혜보살은 저 수미정상게찬품에서 이 게송을 이야기했다.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 즉견노사나(則見盧舍那)’ 승혜보살을 입력시켜 놓고, 또 여래현상품에 승자 돌림 보살이 한 분 더 계신다. 승음보살(勝音菩薩) 수승한 음성의 보살이다. 누구에게나 법문을 다 설해주는 승음보살이 게송을 했다. 무슨 게송을 했는가?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이라고 했다.
시다라니조명장(是陀羅尼照明藏)이며: 모든 법이 다라니로 밝게 비추는 갈무리임을 안다. 모든 법이 다라니로 밝게 비춘다. 일체법이 일자(一字)법문이다. 한 글자뿐이다. 그 한 글자는 어떤 글자인가? 무(無)자다. 없다. 어디에 나오는가? 선지중예동자 편에 보면 ‘아라바자나’ 이렇게 나온다.
80권 화엄경에는 ‘아(阿)다(多)파(波)자(者)나(那)’로 나온다.
선지중예동자가 42자 법문을 한다. 앞의 글자 다섯 개는 근본 글자이고 뒤의 37자는 거기에 따라다니는 쪼가리 글자들이다.
앞에 다섯 글자를 우리는 흔히 뭐라고 하냐면 불교에 있어서 문수보살 근본자모라고 한다.
그 문수보살 진언을 할 때는 ‘아라바자나 디디디 아라바자나 디디디 아라바자나 디디디 아라바자나 디디디’ 아다파자나 아(阿)자는 뭐다? 무(無)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할 때의 아(阿) 있잖은가.
42자 끝날 때 제일 마지막 글자가 타(陀)자다.
아미타(阿彌陀)이렇게 끝난다.
선지중예동자.
지일체법(知一切法)이 : 일체법이
시변재개연장(是辯才開演藏)이며: 변재로 연설하는 갈무리임을 알며, 일체법이 삼세제불은 그 어떤 법에도 한마디도 보태지도 않는다, 라고 한다.
지일체법(知一切法)이 : 일체법은
시불가설선각진실장(是不可說善覺眞實藏)이며 : 말할 수 없는 일체법이 불가설의 잘 깨달은 진실한 장임을 알며 공멸의 장이다.
지일체불자재신통(知一切佛自在神通)이 : 일체법이 모든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신통임을
시관찰시현장(是觀察示現藏)이며: 관찰하여 나타내는 갈무리인 줄을 알며, 상근기는 다른 방법이 필요 없다. 덜익은 중생들 중근기 하근기들을 위해서 입에 침이 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미 쉐프가 되어버린 사람한테는 옆에서 한 번만 보여줘도 그 사람이 눈치껏 다 알아서 한다. 보여줄 필요도 없이 그 사람은 지 요리 지가 다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초짜들은 ‘핸들 잡아라 넣어라 고개 숙여라 브레이크 잡아라 깜빡이 넣어라’ 옆에서 얼마나 힘이 드는가.
그것이 우리 지금 화엄경 강의하는 것이잖은가.
지일체법(知一切法)이 : 일체법이
시선교출생평등장(是善巧出生平等藏)이며: 교묘하게 평등을 내는 갈무리임을 알며 덜 익은 중생들은 방편이 필요하다.
지일체법(知一切法)이 : 모든 일체법이
시상견일체제불장(是常見一切諸佛藏)이며: 부처님을 항상 뵈옵는 갈무리임을 안다.
모든 법이 부처님을 항상 뵈옵는 갈무리다.
모든 법이, 일체법이 반야부에서는 오직 무(無)이다.
둘이 없다. 무상(無相)만을 가르치잖는가.
법화경에서는 오직 일승만 가르친다. 유마경에서는 뭔가? 무비도량(無非道場)이다. 온천지가 도량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까 입 꽉 다무는 것이다.
여기도 허공이요 저기도 허공이다. 허공은 무의처라고 한다.
허공은 다른 데를 기대지 않는다.
다른 것은 허공에 기댈지 모르지만 허공은 기댈 데가 없는 것을 우리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화엄에서는 무의처다.
진짜 마음은 기댈 데가 없기 때문에 다른 말로는 진공(眞空)이라고 한다. 진여(眞如)라 한다. 무의(無依)라 한다.
열반경에서는 전부 다 어디에 돌아가는가? 불성으로 돌아간다. 불성이다 무이다. 무상이다. 전체 통째다. 다 똑같은 말이다.
지일체부사의겁(知一切不思議劫)이: 아홉 번째 일체부사의 겁이 전부다
시선요개여환주장(是善了皆如幻住藏)이며 : 환술과 같이 머무름을 잘 이해하는 갈무리 일체부사의한 겁이 일체 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겁이 환술과 같이 머무름을 환주장임을 잘 알아야 한다.
환주법문은 입법계품에서 누가 성취했는가?
환주해탈은 덕생동자 유덕동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덕생동자 유덕동녀 그게 환주법문이다. 등각법문에 제일 마지막에 나온다. 그러면 입법계품 선지식중에 등각법문에 제일 처음에 나오는 분은 누구인가? 마야부인이다. 마야부인이 증득한 법문은 무슨 법문인가? 환생이다.
부처님은 어떻게 태어나느냐? 부처님은 환생으로 태어났다. 등각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하고 깨달음이 같다고 하는 것이다. 십지보살까지는 자비가 자란다. 계속 자라지만 등각에서는 더 안 자란다. 사과가 자라다 자라다 끝까지 자라면 더 안 자란다. 등각이다. 그만큼 자라면 끝이다. 그런데 등각에는 뭐가 배기느냐 억지로 부르지 않아도 맛이 배기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자꾸 수행할 때는 자꾸 자비를 자라게 하고 자비를 키우게 한다고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더 키울 자비가 없다. 허공이 더 크지 않는다. 허공은 그냥 허공이다.
허공을 키우려는 것이 이상하다.
쪼잔한 사람에게는 자꾸 지혜가 돋아나고, 그 자비가 지극하면 지혜로워지고 그 본체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등각에 갔으니까 환생이라고 해야 된다, 환생.
부처님은 생멸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들에게 보여주려고 태어나신 것이라서 환생이다. 마야부인이 환생해서 쭉 환생하면 집착이 없어지고 쭉쭉 나올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 등각으로 마무리되면서 미륵보살을 만나기 전에 덕생동자 유덕동녀가 환주(幻住) 환으로 머무는 것이다. 그럼 미륵보살로 넘어가면 무엇인가?
환의 극치를 우리가 뭐라고 부르는가? 유식이다. 몽환법문(夢幻法門) 있잖은가. 꿈이다 환이다 몽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미륵 아니겠는가. 미륵 유식(唯識).
그래서 덕생동자 유덕동녀 환주법문이 끝나고 그다음에 미륵을 만난다. 미륵을 만나서 일체유위법(一體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을 환하게 깨쳐야 본래 근본 지혜로 다시 돌아가서 누가 나타나는가? 문수보살이다.
문수보살이 와서 근본을 알아보고 내 근본이 부처에 이르면 나중에 행이 무엇이 나와야 되는가? 보현행원이다.
부처님은 청정한 집착없는 법에 태어나기 때문에 환생이라 한다.
삿된 번뇌 좁은 애착을 아주 벗어나 버린, 생멸을 벗어나 버린 불생불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환생이라고 그런다.
불생불멸을 환생이라 한다.
지일체제불보살(知一切諸佛菩薩)이 :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시발생환희정신장(是發生歡喜淨信藏)이: 환희한 신심을 내서 발생환희 왜 환희한 신심을 내는가?
자기가 고향집에 돌아오니까 안 기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기 집에 왔는데 네비게이션 켜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집에 도착해버렸다. 더이상 찾아갈 길이 없다. 끝나버렸다. 환희심을 내는 갈무리를 아나니
시위십(是爲十)이니: 이것이 열 가지니라.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 모든 보살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즉득일체제불(則得一切諸佛)의: 모든 부처님의
무상지혜법장(無上智慧法藏)하야: 위없는 지혜의 법 갈무리를 얻어서
실능조복일체중생(悉能調伏一切衆生)이니라 :일체중생을 잘 조복시키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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