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6. 주일예배설교
누가복음 9장 57~62절
주님의 거절을 만난 당신, 어떻게 할 것인가?
■ 누군가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데 그만 거절당합니다. 어떨까요? 민망하죠. 아마도 부탁의 크기에 따라 민망함의 정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넘어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절이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애정을 담은 거절이라면 어떨까요? 민망한 감정은 들겠지만, 죽고 싶은 마음까지야 들까요? 물론 성격 여하에 따라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정을 담은 거절은, 부탁한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고, 잘 되게 하고자 함입니다. 죽고 싶은 마음 들라고 하는 거절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의 거절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그런데 악인과 불의한 자들에게 거절하신 것은 백번 지당하신 것인데, 선인과 의인에게도 거절하신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의 주님이신데. 최고의 공감력을 갖고 계신 분인데. 이에 오늘 본문도 이해가 쉽지 않은 주님의 거절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거절은 살리고자 하시는 거절이고, 잘 되게 하시려는 거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절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 오늘 본문에는 본문의 배경이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같은 내용을 담은 마태복음 8장에는 짧은 설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는 것을 본 사람들과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번잡함을 피하고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곳을 서둘러 떠나자고 하셨습니다.
1. 이때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왔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든지 주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와우~ 예수님께 푹 빠진 사람의 고백이죠? 누가 봐도 그렇습니다. ‘어디든지 목사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 기절할 것 같습니다. 저를 기절시켜 주실 분?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고백을 거절하셨습니다. 5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무슨 뜻인가요?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너도 알다시피, 내가 묵는 곳은 일류 호텔이 아니다. 거처가 일정하지 않다. 노숙일 때도 많다. 그래도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
이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거절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감당할 준비가 안 된 사람 같으니 아예 겁을 줘서 돌려보내려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이 사람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과연 이 사람은 집으로 갔을까요? 이런 말씀에도 고백한 대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여러분이 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 그런데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콜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앞 사람하고는 전혀 다른 양상입니다. 앞 사람은 부르시지도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따르겠다고 했지만, 거절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적극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에 대한 이 사람의 반응을 볼까요? 59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 사람의 반응은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며칠 말미를 주십시오. 아버지 장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버지 장례 준비하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대답이니, 그리 나쁘지 않은 대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대답을 거절하셨습니다. 60절입니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상식적으로 듣자면, 예수님의 거절은 참으로 야박해 보입니다. 아버지 장례 준비를 하겠다는데 이렇게까지 거절하실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무엇을 거절하셨는지를 알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절은 이 사람의 태도에 대한 거절이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의 부친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장례를 치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장례 준비를 하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핑계 삼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거절은 우선순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중요한 일이 먼저다. 네 본분은 삶이지 죽음이 아니다. 삶은 긴박하다. 하나님 나라를 알려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 긴박한 일이니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이라는 것은, 우선순위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3. 이를 지켜보던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61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 사람은 바로 앞 사람의 대답이 거절당한 것을 보면서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내놓은 것입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따라갈 준비가 잘 되어 있다면서 내놓은 대답이, 가족과의 작별 인사 요청이었습니다.
이렇게 준비가 잘 된 사람이 내놓은 요청이니 별문제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6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거절은 앞 사람에게 하셨던 거절보다도 강도가 높습니다. 사실 이 사람은 자발적 헌신으로 준비가 잘 된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거절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십니다. ‘준비가 잘 된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뒤를 돌아봐서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를 내일로 미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그 누군가의 생명이 마지막 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머뭇거리지도, 뒤돌아보지도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거절의 이유는 ‘생명’ 때문이었습니다. 살리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십니다. “머뭇거리지 마라. 뒤돌아보지도 마라. 하나님 나라를 내일로 미룰 수 없다. 오늘 기회를 잡아라.(Seize the day.)”
■ 우리는 세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거절의 이유가 막무가내가 아닌 분명한 이유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것은 ‘시급한 생명 구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각오를 요청하셨고 확인하셨습니다. “진정 나를 따를 준비가 되었는가?”
이 세 사람 모두, 공통의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관심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의 능력에 반했습니다. 이런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모든 것이 호화롭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간파하신 예수님이 이 판단을 거절하신 것 아닙니까?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너도 알다시피, 내가 묵는 곳은 일류 호텔이 아니다. 거처가 일정하지 않다. 노숙일 때도 많다. 그래도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의 적극적인 부르심에 부친 장례 준비 후 곧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 당장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핑계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우선순위를 놓친 태도였습니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간파하신 예수님이 그의 청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일이 먼저다. 네 본분은 삶이지 죽음이 아니다. 삶은 긴박하다. 하나님 나라를 알려라. 그러니 당장 나를 따르라.”
세 번째 사람은, 앞의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거절을 지켜보면서 나름 준비를 하였습니다.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바로 와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머뭇거리는 태도였고, 뒤를 돌아보는 망설임이었습니다. 이 또한 자신에 집중한 태도였습니다. 이를 간파하신 예수님이 이러한 태도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머뭇거리지 마라. 뒤돌아보지도 마라. 하나님 나라를 내일로 미룰 수 없다. 오늘 기회를 잡아라. 당장 나를 따르라.”
■ 이 세 사람의 태도에 거절하신 이유를 종합해 보면, 이렇게 질문하신 것입니다. “너의 관심사에만 집중할래? 아니면 나의 관심사에 우선 집중할래?”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거절하셨지만, 질문하신 것입니다. 무엇에 집중하고 있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나의 관심사냐, 주님의 관심사냐를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나의 관심사는 무시하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하시나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나의 관심사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필요한 것이면 그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한 것이면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필요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면, 그것을 거절하십니다. 우선순위를 잘못 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우선순위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관심사를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심사에 우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알아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믿음이고, 건강한 믿음입니다.
■ 예수님은 내가 당신의 진정한 제자인지를 알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거절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본문에서 소개한 세 사람의 태도가 아니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넓은 길의 삶으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우선순위를 바르게 세우기를 바랍니다. 우선순위가 주님의 관심사임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이 주님의 우선순위이십니다.
이에, 머뭇거리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기를 바랍니다. “너는 나를 따를 준비가 됐느냐?”는 질문에,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고 있느냐?”는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네!”라고 자신있게 대답하는 여러분을 보고 싶습니다. 나의 관심사 보다 주님의 관심사에 우선 집중하는 여러분을 보고 싶습니다. 아멘.